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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5)

제5장 진보로서의 역사

by Andy강성
제5장 진보로서의 역사


‘과거에 대한 무엇인가 건설적인 견해’


카는, 포위크(Powicke 1879~1963 영국의 역사가) 교수가 옥스퍼드 대학교의 근대사 흠정강좌 담당교수로 취임하면서 행한 강연 중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장을 시작한다.


역사를 해석하려는 열망은 너무도 뿌리 깊은 것이어서, 만일 우리가 과거에 대해서 무엇인가 건설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신비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Modern Historians and the Study of History (1955)》
[포위크와 저서 출처 구글 이미지]

신비주의와 냉소주의


포위크 교수가 말한 ‘신비주의(mysticism)’란 베르다예프(러시아 신학자), 니부어(Reinhold Niebuhr 독일계 미국의 신학자), 토인비의 견해와 같이 ‘역사의 의미를 역사 밖의 어딘가에서, 즉 신학이나 내세론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견해로 생각된다(토인비는 《Civilization on Trial》 서문에서 의기양양하게 “역사는 신학이 되어버린다”고 주장했다).

[베르다예프, 니부어, 토인비 출처 위키백과]

'냉소주의(cynicism)'란 역사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혹은 유효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쓸모없기도 한 수많은 의미들이 있다는, 혹은 우리가 마음대로 골라잡아 부여한 의미만이 있다는 견해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제 ‘과거에 대한 무엇인가 건설적인 견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고전고대의 역사관


고전고대(Classical Antiquity,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까지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저술가들은 대체로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투기디데스는 자기가 서술한 사건들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중요한 일이라고는 없었다고 믿었으며, 또한 그 후에라도 중요한 일이라고는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믿었다.


또한 루크레티우스(로마의 철학자, 시인)도 De rerum natura》(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영원한 시간을 가진 저 과거의 시대들이 어째서 우리 시대의 관심사가 아니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이런 것이야말로 자연이 우리가 죽은 후 미래의 시간에 우리를 비치게 하는 거울이다.


[루크레티우스와 ‘사물의 본성’ 라틴어본과 영문본 출처 구글 이미지]

보다 밝은 미래에 대한 시적인 전망은 과거의 황금시대로의 복귀에 대한 전망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역사과정을 자연과정과 동일시했던 일종의 순환론적 사고였다.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년~19년 로마의 시인)도 ‘전원시’ 제4편에서 황금시대로의 복귀를 고전적으로 묘사했지만, 그래도 그만이 《아이네이스(Aeneis)》에서 잠시 용감하게 순환론적 관념을 극복했을 뿐이다.

[베르길리우스와 ‘아이네이스’ 출처 구글 이미지]

목적론적 역사관


역사과정이 지향하는 어떤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요소-목적론적 역사관-를 도입한 것은 유대인들이었고, 그다음으로는 기독교들이었다. 그리하여 역사는 의미와 목적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대신 세속적인 성격을 상실했다.


이에 의하면, 역사의 목적에 도달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역사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역사 그 자체가 일종의 신정설(theodicy)이 되었다. 이것이 중세의 역사관이었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세계와 이성의 우위라는 고전적인 견해를 복원시켰지만, 고전적인 비관적 미래관을 유대-기독교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낙관적 미래관으로 대체시켰다.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멸망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호라티우스(Horatius, 고대 로마의 시인)의 말과 ‘진리는 (권위의 딸이 아니라) 시간의 딸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을 비교해 보라. 근대 역사학의 창시자들인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유대-기독교적인 목적론적 견해를 견지했지만 그 목적은 세속화시켰다.


[호라티우스와 그의 시 ‘카르페디엠’ 출처 구글 이미지

진보하는 역사


공리주의자들에게 역사는 지상에서의 인간세계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향해 진보하는 것으로 변했다. 기번도 ‘세계의 모든 시대는 인류의 실질적인 부와 행복과 지식을, 그리고 어쩌면 덕성까지도 증대시켜 왔다’고 거리낌 없이 기록할 수 있었다.


진보의 신앙은 영국의 번역과 힘과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그 절정에 달했다. 액턴은 역사를 ‘진보적인 학문(a progressive science)’이라고 불렀다. 버트런드 러셀도 ’나는 빅토리아 시대(1837년 6월 20일부터 1901년 1월 22일까지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 시기)의 낙관주의가 넘쳐흐를 때 성장했으며, 그래서 나에게는 아직도 그 당시의 느긋했던 희망찬 기분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이후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고, 존 베리가 《진보의 이념(The idea of Progress)》을 쓴 1920년에는 서구에서는 이미 황폐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고, 러시아 11대 황제 니콜라이 1세(재위기간: 1825년~1855년)는 더 이상 ‘진보’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서구의 쇠퇴라는 말은 너무 낯익은 문구가 되어버렸다. 그 새로운 여론은 누구에 의해서 형성된 것일까?

[니콜라이 1세와 데카브리스트의 난 출처 구글 이미지]

역사에서의 진보의 개념과 전제


먼저 카는 진보(progress)와 진화(evolution)의 개념에 대해 정리해 보자고 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위치를 자연계 안에서 해명하려고 애썼다. 역사의 법칙도 자연의 법칙과 동일시되었고 그들은 진보를 믿었다.


그에 반해 헤겔은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고 자연은 진보하지 않는 것이라고 뚜렷이 구분하는 바람에 어려움에 봉착한 반면, 다윈의 혁명은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혼란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였다.

[헤겔과 다윈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이것은 진화의 원천인 생물학적인 유전(biological inheritance)을 역사에서의 진보의 원천인 사회적인 획득(social acquisition)과 혼동한 것이다. 둘은 분명히 구분이 된다.


생물학자들이 거부하고 있는 획득형질의 전승(*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이야말로 사회적 진보의 기초이다.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의 출발점과 종점


또한, 우리는 진보에 일정한 출발점이나 종점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문명의 탄생을 진보에 관한 우리의 가설의 출발점으로 삼으려고 할 수도 있으나, 문명은 결코 어떤 발명품이 아니라 아마도 때때로 발생했을 극적인 비약이 수반된 무한히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이었다.


또한 진보에 일정한 종점이 있다는 가설도 잘못된 것이다. 헤겔이 프로이센 군주국가에서 진보의 종점을 찾은 것 때문에 비난받아온 것은 정당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역사가 토마스 아널드가 1841년 옥스퍼드 대학교 흠정강사 취임강연에서 ‘근대사를 보면, 마치 그다음에는 미래의 역사가 없을 것처럼, 시간이 꽉 차 있는 듯이 보인다’고 이야기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토마스 아널드와 취임 강연 출처 구글 이미지]

역사가가 진보라는 가설을 지키려고 한다면, 진보를 계속되는 여러 시대의 요구사항과 조건에 의해서 각 시대만의 특정한 내용이 채워지는 과정으로 기꺼이 간주해야만 한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액턴이 역사는 ‘진보적인 학문’이라고 말한 명제의 의미이다.


‘변화는 빨랐으나 진보는 늦었던 400년간, 자유가 유지되고, 확보되고, 확대되어 마침내 이해된 것은 폭력의 지배와 항상 존재하는 악의 지배에 부득이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약자들의 결집된 노력 덕분이었다.’


액턴은 사건의 경과로서의 역사를 '자유를 향한' 진보로 인식했고, 사건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자유의 이해를 향한' 진보로 인식했다.


역사가의 경우에 진보의 목적은 이미 진화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여전히 한없이 먼 곳에 있는 어떤 것이다; 그곳으로 가게 하는 이정표들은 우리가 전진해야만 시야에 들어온다. 역사의 내용은 우리가 역사를 경험해야 현실화될 수 있다.


역전과 일탈의 진보관


그 누구도 역전과 일탈과 중단 없이 곧장 일직선으로 전진한 그런 종류의 진보를 믿지 않고, 따라서 가장 급격한 역전조차도 진보의 믿음에 반드시 치명타를 가하지 않는다. 진보의 시기가 있으니 퇴보의 시기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더불어 퇴보 이후의 전진이 똑같은 지점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가정하는 것은 경솔한 생각이다. 한 지역에서 문명을 전진시키는 데 필요한 노력이 퇴보, 즉 사라지게 되면 나중에 다른 지역에서 재개된다. (역사에서 관찰할 수 있는 진보는 그 어떤 것이든 시간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확실히 연속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카는, 자신이 역사의 법칙을 만든다면, ‘어느 한 시대의 문명을 전진시키는 일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집단- 그 집단을 계급, 문명, 대륙, 문명 등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은 다음 시대에도 그와 똑같은 역할을 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집단이 전 시대의 전통, 이해관계, 이데올로기 등에 너무 깊게 물든 나머지 다음 시대의 요구와 조건들에 부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한 집단에게는 쇠퇴의 시기로 간주되는 것이 다른 집단에게는 새로운 전진의 시작으로 생각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진보라는 가설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길은 중단되기도 한다는 조건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의 본질적인 내용


가령 시민적 권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시키기 위해서, 또는 형사소송 절차를 개혁하기 위해서, 또는 인종이나 부의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일들을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진보하려고’, 즉 어떤 역사적 ‘법칙’이나 진보라는 ‘가설’을 실현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행위에 진보라는 ‘가설’을 적용하여 그 행위를 진보로 해석하는 사람은 바로 역사가이다.


역사에서의 진보는 자연에서의 진화와는 달리 획득된 자산의 전승에 의존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 자산은 물질적인 재산과 자신의 환경을 정복하고 변형,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포함한다.


의문시되는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우리의 사회상태에서는, 그리고 국내의 또는 국제적인 사회환경에 대한 우리의 지배력에서는 과연 어떠한 진보가 있었는가, 분명한 퇴보는 정말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에는 수많은 전환점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어느 한 집단이나 세계의 어느 한 지역이 차지하고 있던 지도적 역할과 주도권은 다른 집단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런 시기에는 언제나 격렬한 동요와 권력투쟁의 시간이 존재한다. 예전의 권위는 약화되고 예전의 지표는 사라진다.


종점에 달하지 않은 진보의 내용은 자동적이거나 필연적인 과정에 대한 신념이 아닌 인간의 잠재력을 부단한 발전시키는 신념을 의미한다. 역사의 완전성과 종점이 불가능하지만 전진하고 획득하는 과정을 거쳐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만 진보를 할 수 있다.


역사에서의 객관성


이때 역사에서 객관성(objectivity)이라는 문제를 마주친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은 사실의 객관성일 수 없으며 오로지 관계의 객관성, 즉 사실과 해석 사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관계의 객관성일 수 있을 뿐이다.


버터필드 교수는 말한다. “역사가에게 유일하게 절대적인 것은 변화이다.” 역사에서의 절대적인 것이란 과거 속에 있는 출발점과 같은 것이 아니다; 모든 현재의 사유는 반드시 상대적이기 때문에 현재 속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The Whig Interpretation of History》)

[버터필드와 저서 출처 구글 이미지]

그것은 우리가 전진하는 미래 속의 어떤 것, 우리가 전진할 때에만 형성되기 시작하는 어떤 것, 그리고 전진함에 따라 우리가 점차 과거에 대한 해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빛을 밝혀주는 어떤 것이다.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변함없는 어떤 것이라는 정태적인 의미에서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라는 측면에서는 절대적이다. 이는 어떤 해석이든 훌륭하다는 등에 대한 상대주의적인 견해를 거부하는 동시에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궁극적으로 판가름해 줄 시금석을 제공한다.


이것이 역사의 방향감각이며, 이것만이 우리가 과거의 사건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며, 미래의 전망을 가지고 현재에 인간의 에너지를 분출시키고 조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우리의 방향감각, 즉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우리가 전진함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고 발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한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혹은 이 역사가는 저 역사가보다 객관적이라고 말할 때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그 역사가에게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로 인해 제한되어 있는 시야를 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완전한 객관성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얼마간 좌우된다.


둘째, 그 역사가에게는 자신의 시야를 미래에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런 만큼 그는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위치에 전적으로 속박된 사고방식을 가진 역사가들보다 과거를 더 심원하고 더 지속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일부 역사가들은 다른 역사가들보다 더 지속적이고 더 완전하며 더 객관적인 역사를 쓰는 역사가들이 있다; 과거에 대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진 역사가들이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의 이해에 다가설 때만 객관성에 접근가능하다.


과거와 미래의 대화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기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한다. 역사가의 과거에 대한 해석, 중요한 것과 적절한 것에 대한 선택은 새로운 목표들이 서서히 출현함에 따라 발전한다.


예를 들면, 입헌적인 자유와 정치적 권리의 제도화가 중심적인 목표라고 생각되던 동안, 역사가는 입헌적, 정치적 측면에서 과거를 해석했다. 경제적, 사회적 목적이 입헌적, 정치적 목적을 대체하기 시작했을 때, 역사가들은 과거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해석에 착수했다.


근대 역사학은 지난 두 세기동안 진보에 대한 이와 같은 이중적인 신념 속에서 성장해 왔고 또한 그 신념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역사학에 중요성의 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즉 진정한 것과 우연한 것을 구별하게 할 시금석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념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쇠퇴하고 있을 때, 모든 경향은 주관적이다 ; 그러나 반대로 여러 가지 일들이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 모든 경향은 객관적이다. 《후아징아, Men and Ideas (1959)》


누구나 역사의 미래나 사회의 미래를 믿어야 할 의무는 없다. 우리 사회는 파괴될 수도 있고 점차로 쇠퇴한 끝에 멸망할 수도 있으며, 또한 역사는 신학으로, 아니면 문학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지난 200년 동안 깨달아온 그런 의미의 역사일 수는 없을 것이다.


존재와 당위


역사가는 진보의 방향을 인식하고 인정하면서 자신이 도덕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도 ‘중요성의 기준’으로 삼아서 과거에 대한 연구에 적용하였다. 이는 존재(is)와 당위(ought) 사이의, 사실과 가치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시켰다.


존재와 당위 사이의 이분법은 절대적이고, 가치는 사실에서 도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반대세력을 과소평가하고 아슬아슬한 승리를 일반적인 승리로 표현한다.


그러나 패배자는 승리자 못지않게 결과에 크게 공헌해 왔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패배를 했든 승리를 하였든 무엇인가를 성취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역사에서는 ‘오직 국가를 형성하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주목을 끌 수 있다’는 헤겔의 유명한 말은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칼라일은 그의 책 《프랑스혁명》에서 루이 15세를 ‘세계 파격의 화신 그 자체(a very World Solecism incarnate)’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좀 더 긴 문장으로 그럴듯하게 치장했다.


모든 것을 빙빙 돌게 하는 이 새로운 움직임은 어떤 것인가 ; 원래는 한 덩어리였던 움직였던 제도, 사회조직, 개인정신이 이제는 미친 듯이 충돌하면서 요동치고 으깨어지고 이찌 않은가? 불가피한 일이다 ; 마침내 기진맥진해진 하나의 세계 파격에 종말이 온 것이다. (The French Revolution)


[토마스 칼라일과 저서 출처 구글 이미지]

여기에서의 기준도 역시 역사적이다. 한 시대에 적합했던 것이 다른 시대에는 파격이 되었고, 또한 그 때문에 비난받고 있다.


이사야 벌린 경조차 비스마르크를 그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천재’ 또는 ‘지난 세기에 최고의 정치적 판단을 지난 가장 모범적인 정치가’라고 찬양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로베스피에르, 레닌, 히틀러처럼 ‘자신의 적극적인 목적’을 실현시키지 못한 인물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역사에서의 판단 기준은 가장 효율적인 것


역사에서의 판단의 기준은 어떤 보편타당성(principle claiming universal validity)을 요구하는 원리가 아닌 가장 효율적인 것(that which works best)이다. 이는 과거를 분석할 때뿐만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서도 가능하다.


가장 효율적인 것을 위해 우리의 역사해석의 근원에는 타협이 존재하며, 바람직한 것이라는 추상적 기준으로 인해 과거를 비난하는 오류는 없다.


가장 효율적인 것이라는 판단 기준의 적용이 쉽거나 자명하지는 않다. 한 사람의 업적에 대해, 그리고 그 영향에 대해 객관적이고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어느 역사가라도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의미는 시간이 흐를수록 객관적인 판단에 더 근접해 가게 되는데, 이는 역사과정이 전진함에 따라 그 기준 역시 점점더 발전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역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만 의미와 객관성을 가지게 된다.


진보는 사실과 가치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 성취된다


‘가치는 사실에서 나올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진리이나 부분적으로는 오류이다. 얼마나 많은 가치들이 주변 환경과 연관된 사실들에 따라서 형성되었는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시대 혹은 나라의 지배적인 가치체계를 검토하기만 하면 된다.


원시 기독교의 가치와 중세 교황의 가치, 또는 중세 교황의 가치와 19세기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가치를 비교해 보라. 혹은 오늘날 스페인 기독교 교회가 선전하는 가치와 미국의 기독교 교회가 선전하는 가치를 비교하면, 이 가치에서의 차이가 역사적 사실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혹은 그 말을 뒤집어보자. ‘사실은 가치에서 나올 수 없다.‘ 이것도 부분적으로는 진리이지만 역시 판단을 그르치게 할 수 있으므로 수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실을 알고자 할 때, 우리가 제기하는 질문을, 따라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답변을 유발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이다. 주변 환경과 연관된 사실들에 대한 우리의 상은 우리의 가치에 의해서, 즉 우리가 사실에 접근할 때 이용하는 범주에 의해서 형성된다.


역사에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 성취된다. 객관적인 역사가란 이러한 상호과정을 가장 깊이 통찰하는 역사가가 될 것이다.


사실과 가치에 관한 문제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진리(truth)’라는 단어-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 양쪽에 걸쳐 있는, 그리고 그 양쪽의 요소들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단어-의 용법이다. 몰가치적인 사실들과 사실들로 전환하려고 애쓰는 가치판단들 사이의 어딘가에 역사적 진리의 영역이 놓여 있다.


역사가는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그는 그것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정적인 세계라면 사실과 가치의 구별을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나, 역사는 그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며, 혹은 진보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진보를 ‘역사서술의 근거가 될 과학적인 가설’이라고 본 액턴의 설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우리가 어딘가로부터 왔다는 믿음은 우리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믿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미래의 진보능력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의 진보에 대한 관심도 이내 포기할 것이다.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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