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지평선의 확대
제6장 지평선의 확대
카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우리는 세계의 파국을 예언하는 소리들이 퍼져 있고, 그 소리들이 모든 이를 무겁게 억누르고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예언이 확실하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들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것이며 또한 역사는 계속될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계속해서 논의해야 한다."
20세기 중반의 변화
20세기 중반의 세계는, 15, 16세기에 중세 세계가 몰락하고 근대 세계의 기초가 놓인 이래, 세계를 덮쳐왔던 모든 변화과정 중에서 가장 심원하고 광범위한 변화과정을 겪는다. 그 변화는 과학적인 발전과 발명의 산물이며, 그것들의 훨씬 더 광범위한 응용의 산물,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그것들이 낳은 발전의 산물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 변화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측면은 사회혁명의 측면인데, 그 혁명은 금융과 상업, 그리고 공업에 기반을 둔 15, 16세기의 사회혁명에 버금갈 만한 것이며, 그 변화에는 '깊이에서의 변화'와 '지리적 범위에서의 변화'의 두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시간의 경과를 자연적 과정이 아닌 ‘인간이 의식적으로 연루되고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정 사건들의 연속’이라 생각할 때, 역사가 시작된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란 ‘의식의 각성에서 비롯된 자연과의 결별’이라고 말한다(《Reflection on History》).
이제 인간은 환경뿐만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이해하고 그 자신에게까지 작용을 가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이성'에 새로운 차원이, 그리고 '역사'에도 새로운 차원이 덧붙여진 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모든 시대 중에서 가장 역사의식이 강한 시대이다.
근대 세계의 이성과 자기의식의 태동
'인간의 자기의식의 발전'이 보여준 근대 세계에서의 그 변화는 데카르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확립했고, 그 결과 인간은 사유와 관찰의 주체이자 동시에 객체가 되었다.
이후 18세기 후반 루소(Jean Jacques Rousseau)가 인간의 자기이해와 자기의식의 새로운 심연을 열어젖혔는데,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프랑스혁명은 ‘당시의 사회질서를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인 관습 전체를 인간의 이성의 발휘에서 유래하고 자연법에서 유래하는 단순한 기본 규칙들로 대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에 의해서 고무되었다고 말했다(《De l’Ancien Régime》).
또한 프랑스혁명과 미국 혁명은 연결되어 있었다. 미국 혁명은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자신들을 하나의 국가로 조직했고 그리고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 국가의 틀에 끼워넣기 시작했던 역사상 최초의 사례였다.
87년 전 우리의 조상은 이 대륙에 자유로 표현되는, 그리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명제에 바쳐진 하나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 중)
18세기로부터 근대 세계로의 이행 - 헤겔과 마르크스
18세기로부터 근대 세계로의 이행은 장구하고도 점진적이었다. 그 이행기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헤겔과 마르크스였는데, 이들 모두 모순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헤겔은 이성의 법칙으로 전환되기도 하는 신의 섭리의 법칙이라는 관념에 깊이 젖어 있었다. 헤겔의 ‘세계정신’은 한 손으로는 신의 섭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이성을 꽉 잡고 있었다.
세계정신의 합리적인 목적에 관해서 헤겔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때, 세계정신의 합리적인 목적과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바로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그 같은 목적을 실현한다.”고 말한다(헤겔의 《법철학》).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해당하는 것이 그 유명한 헤겔의 ‘이성의 간계’이다.
그러나 1815년 이후 프랑스혁명의 감격은 복고왕정의 암울함 속에서 소멸되어 갔고, 헤겔은 정치적으로 너무 소심해서 그의 형이상학적 명제들에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이를 놓고 알렉산드르 게르첸(1812~1870 러시아의 작가)이 헤겔의 이론을 ‘혁명의 대수학(the algebar of revolution)’이라고 표현한 것은 대단히 적절했다. 헤겔의 대수방정식에 숫자를 써넣는 일은 마르크스에게 맡겨졌다.
애덤 스미스와 헤겔 모두의 제자인 마르크스는 '합리적인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하여, '법칙의 지배는 받으나 인간의 혁명적인 창의력에 조응한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발전하는 세계'라는 개념으로 이행했다. 그의 이행은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를 띠었다.
그는 역사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일괄된 합리적인 전체를 구성하는 세 가지의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객관적이고 주로 경제적인 법칙에 일치하는 사건의 운동';
'이에 조응하면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유의 발전'; 그리고
'그것에 조응하면서 혁명의 이론과 실천을 일치시키고 결합시키는 계급투쟁 형태의 행동'.
이는 객관적인 법칙과 그 법칙을 실천으로 전환시키는 의식적 행동의 종합이다. 즉 때때로 ‘결정론’이라고 불리는 것과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 의지라는 정신적 작용이 세계의 근본적인 원리이며 이것으로 세계가 만들어지고 온갖 것이 나타난다는 견해)라고 불리는 것의 종합이다.
그 유명한 《포이어바흐 테제》(Thesen über Feuerbach, 포이어바흐에 관한 마르크스의 친필 메모)에서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르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정치적 지배권을 이용하여 부르주아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로 빼앗을 것이며,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킬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1848년의 혁명들의 실패는 마르크스가 활동하기 시작했을 무렵만 해도 곧 이루어질 것 같았던 발전에 대해 심각하고도 극적인 좌절을 안겨주었다. 번영과 안정이 여전히 우세한 분위기 속에서 19세기 후반이 지나가고 현대사 시대로의 이행은 20세기로 넘어와서야 비로소 완결되었다.
현대의 위대한 사상가 프로이트
이성에 새로운 차원을 덧붙여준 우리 시대의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사상가는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년~1939년)이다. 그는 교육과 경력의 측면에서 볼 때는 19세기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자였고, 또한 잘못된 가정(假定)인 '개인과 사회의 근본적인 대립'이라는 전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그가 한 일은 '의식과 합리적인 탐구'에 대해서 '인간행위의 무의식적인 근원을 폭로'함으로써 우리의 이해와 지식의 범위를 확장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이성의 영역의 확장이었고, 인간 자신을 따라 인간의 환경을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증대였다.
프로이트는 마르크스의 의견을 보완하며, 인간 행위의 근원을 보다 깊이 이해함으로써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인간의 행위를 의식적으로 교정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했다는 의미에서 현대 세계에 속하는 인물이다.
역사가에게 프로이트는 두 가지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첫째, 사람들의 행동은 본인들이 주장하거나 믿고 있는 행위의 동기를 통해 사실상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오랜 환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것은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중요한 작업이다.
둘째, 역사가에게, 자기 자신과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주제나 시대에 대한 선택을 이끌고 사실에 대한 선별과 해석을 이끈 동기를, 그의 시각을 결정한 민족적 배경과 사회적 배경을, 그리고 과거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형성시키고 있는 미래에 대한 관념을 심문해 보라고 촉구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저작이 나온 이래, 역사가는 자기 자신을 사회의 외부에 있거나 역사의 외부에 있는 초연한 개인으로 생각해야 할 어떠한 구실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역사가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 수 있고 또한 알아야만 한다.
현대 세계의 진보 혁명 양상
현대 세계로의 그 이행-이성의 기능과 힘이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것은 20세기의 세계가 여전히 통과하고 있는 혁명적 변화의 일부이다. 그 이행의 몇 가지 징후들을 검토해 본다.
'경제학'부터 시작해 보자. 대공황이 시작된 1930년까지 인간과 국가의 경제활동을 지배했던, 그리고 손해를 감수해야만 무시할 수 있었던 객관적인 경제법칙에 대한 신념은 지배적인 견해였고, 경기순환, 가격변동, 실업 등은 이러한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후 사태는 급변했고 사람들은 ‘경제인(economic man, 경제법칙에 따라 자신의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는 인간)의 종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소수의 ’립 밴 윙클(Rip Van Winkle, 미국 작가 워싱턴 워빙의 ’스케치 북‘에 나오는, 술 한잔을 마셨더니 20년이 지났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을 의미함)‘ 부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러한 의미에서의 경제법칙을 믿지 않고 있다.
오늘날의 경제학은 일련의 수학방정식이 되었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밀어내는가를 연구하는 실용적인 학문이 되었다. 이 변화는 주로 개인적인 자본주의에서 대규모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산물이다.
자유방임경제에서 관리경제(사적인 대자본가의 이해관계 아니면 국가에 의해서 수행되는 관리)로의 이행과 함께 '일정한 사람들이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일정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결정이 우리 경제의 방향을 지정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사회정책은 경제정책과 나란히 추진되었다 ; 게다가 경제정책은 사회정책에 통합되었다. 어느 필자(S. Leathes)가 1910년에 출간된 <케임브리지 근대사> 마지막 권에 제시했던 통찰력 있는 설명을 인용해 보자.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사회개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은 유럽 정신의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그것은 단 하나의 만병통치약으로 생각되었던 자유에 대한 신념을 폐기시켰다. (…) 오늘날 그것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은 프랑스혁명 시기의 인권에 대한 신념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며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신념은 이제 평범한 것이 되었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었던 객관적인 경제법칙에 대한 복종으로부터,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운명을 지배할 수 있는 인간 능력에 대한 신념으로의 이행'은, 인간사에 대한 이성의 적용에서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기꺼이 진보라 부를만하다.
과학조차도 지금에 와서는 자연의 객관적인 법칙을 탐구하고 확립하는 일보다는 인간이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자연을 이용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해 줄 실용적인 가설을 만드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의식적인 발휘를 통해 자신의 환경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18세기말 맬서스(T. R. Malthus)가 ‘아무도 그 과정을 의식하지 않아도 작동하는 객관적인 인구법칙’을 확립하려 하였으나, 오늘날 이러한 법칙을 믿는 이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과 사회 모두는 의식적인 인간의 노력에 의해 변화하였는데, 이러한 변화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설득과 교육'의 근대적인 방법의 발전과 사용으로 이루어진 변화이다.
오늘날 모든 분야의 교육자들은 특정 형태의 사회를 형성하는 데에 기여하는 일과 그러한 형태의 사회에 적합한 태도, 충성심, 견해를 가르치는 일에 더욱더 의식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다.
이성이 사회 속의 인간에게 적용될 때, 이제 그것의 주요한 기능은 단순히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 된다; 인간은 합리적인 과정을 적용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을 더 잘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식이 고양된 것은 20세기 혁명의 주요한 측면이다.
이성에게 맡겨진 역할의 위험
현대 세계에서 교육은 개인의 능력과 기회의 확장을 촉진시키고 따라서 개별화를 증대시키는 필수적이고도 강력한 하나의 도구이지만, 동시에 이익집단의 손아귀 안에서는 사회적인 획일성을 촉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바람직한 풍조와 의견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캠페인은, 방송, 텔레비전과 언론을 이끄는 자들의 손아귀 안에서는, 사회의 개별 구성원들을 적합하게 변화시켜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만들어보려는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이 되어 간다.
이러한 위험에 관한 또 다른 두드러진 사례는 상업 광고주와 정치 선동가가 제공한다. 이 경우 이성은 단순한 조사를 위해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활용되며, 정적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적으로 활용된다.
그들은 소비자나 유권자가 지금 믿고 있는 것에 흥미를 가지거나 혹은 그런 믿음을 그들이 최종적으로 이끌어내고자 하는 결과로 전환시켜 줄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만, 즉 원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사건들에 대해서만 흥미를 가진다.
또한 그들은 대중심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자신들의 견해를 안전하게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가장 신속한 방법이, 소비자나 유권자의 기질 속에 있는 비이성적인 요소에 호소하는 것임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호소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아일랜드 작가)가 말한 ‘지성의 아래쪽을 때리는(그의 저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중 I can stand brute force(난폭한 힘이나 폭력), but brute reason is quite unbearable. There is something unfair about its use. 'It is hitting below the intellect.')' 방법으로 진행된다.
어떤 사회에서건 지배집단은 여론을 조직하고 통제하기 위해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하고, 이 방법이 어떤 방법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그것이 이성의 악용을 낳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발에 대해 카는 두 가지 주장으로 답변한다. 첫 번째 주장은, 역사 과정에서 눈에 띄는 모든 발명, 혁신, 새로운 기술에는 그 긍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부정적 측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는 희생을 당하는 법이며, 이런 식의 반대는 새로운 별견과 발명의 진전을 멈추게 하는 데에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 고발에 대한 진짜 답변은 앞에서 말한 폐해들이 그 나름대로의 교정책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치료방법은, 비합리주의를 숭배하거나 이성의 확대된 역할을 부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점점 더 철두철미하게 의식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카는 어떤 회의주의자나 냉소주의자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대 세계의 발전을 서슴없이 역사의 진보를 가리키는 하나의 사례로 간주한다. 그 발전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혁명적인 현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진보 혁명의 두 번째 측면 - 지리적 범위에서의 변화
근대 세계의 기초가 마련된 15세기와 16세기, 신대륙의 발견,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서 대서양 연안으로의 세계 중심이 이동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성의 확대와 더불어 20세기 혁명의 측면이며, 이것은 세계 중심이 서유럽에서 계속 머무를지에 대해 확실하지 않게 하였다.
카는 오늘날 세계의 문제를 조율하는 것은 동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까지 뻗어 있는 거대한 땅덩어리라고 한다. ‘변하지 않는 동방’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낡아빠진 상투어가 돼버렸다.
1789년과 1848년의 프랑스혁명, 1905년의 제1차 러시아 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그 모방자들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시아에서는 모방자들이 나와 페르시아, 터키, 중국에서 혁명이 발생했고, 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공업 발전과 중국의 반외세 감정과 인도의 민족주의가 촉진되고 아랍 민족주의가 탄생했다.
결국 ‘변하지 않는’ 곳이 된 쪽은 유럽이었고 움직이고 있던 쪽은 아시아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수백만 명의 주민들에게로 근대적인 기술적, 산업적 방식들이 확산됨에 따라서, 초보적인 교육과 정치의식이 확산됨에 따라서 이 대륙들의 면모는 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유럽의 지배집단은 이를 못 본 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초리를 보내거나, 불신에 가득 찬 채 경멸하거나 몸을 돌려 과거의 무기력한 향수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세기 혁명에서의 이성의 확대는 지금까지 역사의 외부에 있던 집단과 계급, 인민과 대륙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래서 민중은 역사가의 관심대상이 되었고, 그 민중으로 구성되는 전체 체계를 처음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우리의 역사개념에서 하나의 혁명이나 다를 바 없다.
엘리트의 역사였던 18세기, 머뭇거리면서도 국민공동체 전체의 역사관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19세기(J. R. 그린이 《영국 민중의 역사(History of the English People)》로 명성을 얻음), 그리고 오늘날 20세기에 와서 역사의 지평선이 영국을 넘어서서 서유럽 바깥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지평선의 확대로 인해 지리적인 측면과 관련하여 역사적인 동향에 문제점이 생긴다. 지난 400년 동안 영어 사용권 세계의 역사가 역사상 위대한 세계였다는 이유로 그 역사를 세계사의 중심으로 취급하고 그 밖의 모든 역사를 주변적인 것으로 취급하면서 부당한 왜곡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액턴이 진보를 이야기할 때, 그는 널리 알려진 영국적 개념인 ‘점진주의’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이념의 지배란 자유주의를 의미하며, 자유주의는 혁명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 잔재들은 모든 곳에서 사회의 보수적 요소로 변했다. 지나친 자신감과 낙관주의에 압도되어 그들의 신념이 의지했던 구조의 불안정한 성격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는, ‘역사 진보의 요인으로서의 변화에 대한 감각’과 ‘변화의 복잡성을 이해하게 해주는 지침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신념’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가졌던 시대이다.
그래도 그것은 움직인다
이상을 이론화하는 일보다 실제적인 행동을 우위에 두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보수주의의 고유한 특징이다. ‘급진주의들이 분명히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외쳐대는 바로 그 순간, 현명한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의 콧잔등을 후려갈긴다’고 한 트레버-로퍼 교수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카는, 포퍼가 주장하는 ‘점진적 사회공학(piecemeal social engineering)’의 방식으로 이성이 기존질서의 전제들에 종속되는 것은 결국에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카는 “학문에서든 역사에서든 사회에서든, 인간사에서의 진보는 기존 질서의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하는 일에 스스로를 제한시키지 않고, 현존질서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의지하고 있는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전제들에 대해, 이성의 이름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인간들의 그 대담한 자발성을 통해서 주로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변화가 더 이상 성취로, 기회로, 진보로 생각되지 않고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된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카는, 격동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고 나서 진부하기조차 한 어느 위대한 과학자(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책을 마무리한다.
“그래도 - 그것은 움직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