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제1부
제1부
1
그즈음 페테르부르크의 상류 사회에서는 루먄체프파, 프랑스인파, 마리야 페오도로브나파, 황태자파 등 여러 무리가 얽힌 복잡한 싸움이 언제나처럼 윙윙거리는 궁정 수벌의 소음에 파묻혀 그 어느 때보다 격앙되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삶의 허상과 그림자에만 신경 쓰는 조용하고 화려한 페테르부르크의 삶은 예전처럼 지속되었다. 삶이 이렇게 흘러 갔기 때문에 러시아 민중이 처한 곤궁한 상황과 위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이 노력해야 했다. 오직 최상류층에서만 현재 상황의 어려움을 경고하려고 애썼다.
보로디노 전투가 있던 8월 26일 바로 그날에 안나 파블로브나의 집에서 야회가 열렸다. 이 야회에서는 중요한 행사로 성 세르기이의 이콘을 군주에게 보낼 때 대주교가 쓴 서한을 낭독해야 했다. 이 서한은 애국적이고 종교적인 달변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낭독을 잘 하기로 유명한 바실리 공작이 서한을 읽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황후 앞에서도 낭독하곤 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낭독의 기술이란 필사적으로 울부짖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가운데 그 의미와 전혀 무관한 말들을 노래하듯 쏟아 내는 것이었고, 따라서 어떤 단어를 울부짖듯 말하고 다른 단어를 속삭이듯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한 것이었다. 안나 파블로브나의 모든 야회가 그러하듯 낭독은 정치적 의미를 띠었다. 이 야회에 꼭 참석할 예정이었던 몇몇 고위층 인사들은 프랑스 극장에 드나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애국적인 분위기에 고무되어야만 하는 이들이었다.
그날 페테르부르크에 퍼진 새 소식은 베주호바 백작 부인의 병에 관한 것이었다. 며칠 전 백작 부인은 갑자기 병에 걸려 그녀가 참석하여 자리를 빛낼 몇몇 모임에 불참했고, 어느 누구도 맞이하지 않으면서 평소 그녀를 치료했던 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의사들 대신 새롭고 특이한 방법으로 그녀를 치료하는 이탈리아 의사에 의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매력적인 백작 부인의 병이 두 남자와 동시에 결혼하지 못해 생긴 것이고, 이탈리아 의사의 치료라는 것이 이 불편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야회에서 사람들은 감히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백작 부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나 파블로브나가 다가오며 말했다.
"백작 부인의 건강 상태를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어요. 그 사람이 말하길, 백작 부인의 병세가 조금 호전되었다네요. 오, 틀림없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죠. 제가 괜찮은 출처를 통해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 의사는 매우 박학다식하고 노련한 사람이에요. 그는 스페인 왕비의 시의랍니다."
그녀는 바실리 공작을 테이블로 초대하여 그에게 낭독을 시작하길 요청했다. 다들 조용해졌다."지극히 자비로우신 황제 폐하!" 바실리 공작은 엄숙하게 선언하고 이에 누군가 반대의 말을 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듯이 청중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군주가 거주하는 도시 모스크바, 새 예루살렘이 열성적인 아들들을 껴안은 어머니처럼 자신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피어 오르는 안개를 통해 당신의 주권의 빛나는 영광을 예견하며 환희에 차 노래합니다. '호산나, 곧 오실 복되신 이여!'"
"건방지고 불손한 골리앗이 프랑스 국경으로부터 러시아 영토에 살인적인 공포를 몰고 오게 내버려 두십시오. 온화한 신앙, 즉 러시아 다윗의 돌팔매가 피에 굶주린 오만한 자의 머리를 순식간에 맞혀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 옛날 우리 조국의 안녕을 열망하던 성 세르기이의 이콘이 황제 폐하께 도달할 것입니다. 제 약해진 기력이 지극히 자애로우신 폐하의 얼굴을 뵙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니, 그저 비통할 따름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정의로운 족속을 크게 칭찬하시고 선한 자들 안에서 폐하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기를 하늘에 대고 열심히 기도하는 바입니다."
이 연설에 고무된 안나 파블로브나의 손님들은 조국의 상황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조만간 벌어질 전투의 결과에 대해 다양한 예측을 제시했다. "두고 보세요." 안나 파블로브나가 말했다."내일, 폐하의 탄신일에 우리는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될 거예요. 예감이 좋아요."
2
안나 파블로브나의 예감은 실제로 들어맞았다. 이튿날 군주 탄생일을 기념하는 궁정 내 기도회 때 볼콘스키 공작은 교회 밖으로 불려 나가 쿠투조프 공작의 봉서를 받았다. 전투가 있던 날, 쿠투조프 공작이 타타리노보에서 작성해 올린 보고였다. 쿠투조프는 러시아 군이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반면, 프랑스군은 러시아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잃었고, 자신은 최신 정보를 미처 수집할 수 없어 전장에서 급히 보고를 올린다고 썼다. 즉 이것은 승리를 의미했다.
이때 궁정 사람들은 러시아가 승리했다는 사실보다는 바로 군주의 탄생일에 승전보가 도착했다는 것에 크게 기뻐했다. 이는 마치 성공적인 깜짝 선물 같은 것이었다. 쿠투조프가 보낸 소식에는 러시아군의 손실에 관한 언급도 있었고, 그중에는 투치코프, 바그라티온, 쿠타이소프의 이름이 있었다.
여기 페테르부르크라는 세계에서는 사건의 슬픈 측면 역시 자동적으로 쿠타이소프의 죽음이라는 한 가지 사건 주변으로 집중되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고, 군주도 좋아했던 그는 젊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쿠투조프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바실리 공작은 예언자처럼 거만하게 말했다. "그 사람만이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다고 제가 늘 말했었죠."
그러나 다음 날 군대로부터 소식이 오지 않자, 사람들은 걱정에 휩싸였다. 궁정 신하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데에서 오는, 군주가 처한 고통에 괴로워했다.
"폐하의 사정은 어떨까!" 궁정 신하들은 이렇게 말들 하면서 이미 전전날 그랬듯이 쿠투조프를 극찬하지 않았고, 이제는 군주를 불안하게 만든다 하여 비난했다. 이날 바실리 공작은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쿠투조프를 더 이상 자랑하지 않았고, 이야기가 총사령관에까지 미치면 침묵을 지켰다.
무서운 소식이 하나 더 보태졌는데, 바로 옐레나 베주호바 백작 부인이 사람들이 그렇게도 즐겨 입에 올리던 그 끔찍한 병으로 급사했던 것이다. 큰 모임에서는 공식적으로 협심증 발작으로 죽었다고 말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내밀한 모임에서는 '스페인 왕비의 시의'가 일정한 효과를 내기 위해 엘렌에게 어떤 약을 소량 처방했는데, 노백작의 의심을 사고 남편(그 불행하고 방탕한 피에르)으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해 괴로워하던 엘렌이 갑자기 처방 약을 대량으로 복용하여 고통 속에서 죽었다고 상세히 이야기했다.
쿠투조프의 보고가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한 지주가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왔고, 그래서 모스크바가 프랑스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도시 전체에 퍼졌다.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폐하의 상황은 어땠을까! 쿠투조프는 배신자였다. 바실리 공작은 딸이 죽어 조문을 받는 동안 자신이 예전에 찬미했던 쿠투조프에 대한 말을 꺼냈는데, 그는 눈먼 방탕한 노인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러시아의 운명을 맡길 수 있었는지 저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다음 날 라스톱친 백작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도착했다.
쿠투조프 공작의 부관이 저에게 편지를 가져왔는데, 그 편지에서 공작은 랴잔 가도까지 군대를 호위해 줄 경찰관들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유감스럽지만 모스크바를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폐하! 쿠투조프의 행동에 폐하의 제국과 수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러시아의 위대함이 집중되고, 폐하의 선조들이 묻힌 도시가 적에 의해 함락된 사실을 알면 러시아는 몸서리를 칠 것입니다.
저는 군대를 따라가겠습니다. 저는 모스크바 밖으로 모든 것을 실어 냈고, 제게 남은 거라곤 내 조국의 운명을 슬퍼하며 우는 것입니다.
보고를 받고 나서, 군주는 다음과 같은 칙서와 함께 볼콘스키 공작을 쿠투조프에게 보냈 다.
미하일 일라리오노비치 공작!
나는 8월 29일부터 당신으로부터 어떤 보고도 받지 못했소. 그런데 9월 1일, 나는 야로슬라블을 거쳐 모스크바 총사령관으로부터 당신이 군대와 함께 모스크바를 버리기로 결정했다는 비참한 보고를 받았소.
당신은 그 소식이 나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고, 또 당신의 침묵이 나를 더욱 놀라게 하고 있소. 군대의 상황과, 그대가 그처럼 비참한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를 당신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기에 이 칙서와 함께 시종 무관장인 볼콘스키 공작을 보내는 바요.
3
모스크바를 포기한 지 9일째 되는 날, 쿠투조프가 보낸 전령이 모스크바 포기에 관한 공식 소식을 가지고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전령은 러시아어를 모르는 프랑스인 미쇼였는데, 스스로는 자신에 대해서, 비록 외국인이지만 영혼 깊숙한 곳에서는 진짜 러시아인이라고 말했다. 군주는 곧바로 카멘니 오스트로프 궁전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전령을 맞이했다.
"어떤 소식을 가져왔소? 좋지 않은 소식이오, 대령?"
"매우 안 좋은 소식입니다, 폐하." 미쇼가 눈을 내리고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모스크바를 버렸습니다."
미쇼는 쿠투조프가 전하라고 명령한 것을 그대로 공손히 보고했다. 모스크바 근처에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고, 모스크바와 군대를 잃거나 혹은 모스크바 하나만 잃거나, 한 가지 선택만 남았기 때문에 원수는 후자를 선택해야만 했다는 것이었다.
군주는 자신의 나약함을 책망하듯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의연하게 말했다."대령,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으로 미루어 보건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희생을 요구하시고 있소……. 나는 그분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소. 그러나 말해 주시오, 미쇼. 당신이 떠날 때 전투도 치르지 않고 나의 고도를 버린 군대는 어떠했소? 당신이 봤을 때 군대의 사기가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았소?"
"폐하! 제가 군대를 떠날 때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들 극도의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군주는 그 말에 눈을 찌푸렸다. 미쇼는 말을 이었다.
"폐하! 그들이 오직 두려워하는 것은 폐하께서 그 선한 영혼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하려고 결심하시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싸우기를, 그리고 그들이 폐하께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보여 주기를 열화와 같이, 초조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아!" 군주는 안심이 되어 다정하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미쇼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대령, 그대가 나를 안심시켜 주었소. 자, 그럼 군대로 돌아가시오."그는 온화하면서 위풍당당한 몸짓으로 미쇼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용사들에게 전하시오. 당신이 지나가는 곳에 있는 나의 모든 국민들에게 전하시오. 내게 더 이상 단 한 명의 병사들도 남지 않게 되면 그때는 내가 직접 나의 사랑하는 귀족들과 선량한 농민들의 선두에 서서 국가의 마지막 수단까지 다 소모할 것이라고, 그 수단은 적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다고 전해 주시오. 그러나 만약 신의 예언이 우리 왕조가 더 이상 선조들의 옥좌에서 통치하지 못하도록 예정되었다면…… 내 손에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쓰고 나면, 그때 나의 조국과 나의 선량한 국민들이 (나는 그들의 희생을 잘 알고 있다오) 치욕을 받는 것에 서명하기로 결정하느니 차라리 수염을 여기까지 기르고 (그는 손으로 가슴 중간 부분을 가리켰다) 나의 농민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은 자와 함께 감자 한 개를 먹으러 가겠소!"
군주의 말을 듣고 그 눈에서 굳은 결의의 표정을 읽은 미쇼는 비록 외국인이지만 영혼 깊숙한 곳에서는 러시아인으로서 이 엄숙한 순간에 자신이 들은 모든 것에 환희를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뿐 아니라 자기가 그들의 전권 대표라고 생각한 러시아 민중의 감정까지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묘사했다
“폐하께서는 이 순간 국민의 영광과 유럽의 구원에 서명하셨습니다!"
군주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미쇼를 놓아주었다.
4 [니콜라이 로스토프]
러시아 영토의 절반이 침략당하고 모스크바 주민들이 저 멀리 떨어진 현들로 피란을 가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의용군들이 연이어 일어서던 시절에 관한 모든 이야기와 기록은 러시아인들의 자기희생, 애국심, 비탄, 슬픔, 영웅적 행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다만 과거에서 그 시대 공통의 역사적 관심만 보느라 그 시절 사람들 각각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관심들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개인적 관심에 가려 공통의 관심이 전혀 감지되지 않을 (심지어 전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현재의 개인적 관심이 공통의 관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태의 전반적인 흐름에 전혀 주목하지 않은 채 그저 눈앞의 개인적인 관심을 따랐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 시대에 가장 이익이 되는 일꾼이었다. 사태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려고 애쓰거나 자기희생과 영웅심의 발로에서 그 흐름에 참여하길 원했던 사람들은 사회의 가장 무익한 구성원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정반대로 보았고, 그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한 모든 행동은 귀부인들이 손수 만들었으나 결코 부상병들에게 사용된 적 없는 붕대용 거즈처럼 쓸모없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페테르부르크와 여러 도시에서는 귀부인들과 민병대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러시아와 수도의 운명에 대해 비통해하며 자기희생 등을 운운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너머로 퇴각한 군대 안에서 모스크바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모스크바가 불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군에 복수하겠다고 맹세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다음 분기 봉급, 다음 숙영지, 종군 여자 상인 마트료시카 등이었다.
니콜라이 로스토프는 복무 중 우연히 전쟁이 일어나 자기를 희생하겠다는 목표 없이 조국을 지키는 일에 계속 깊이 참여하게 되었고, 따라서 당시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절망도 암울한 추측도 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사태를 보았기에 자신이 사단을 정비하기 위해 보로네시로 출장 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마지막 전투에 참가할 기회를 잃는 것에 낙담하지 않았고 동료들도 그를 이해해 주었다.
보로디노 전투가 벌어지기 며칠 전, 니콜라이는 대금과 서류를 받았고, 경기병들을 먼저 출발시킨 후에 자신은 역마차를 타고 보로네시로 떠났다. 매우 즐거운 기분으로 그날 밤 니콜라이는 보로네시의 호텔에 도착하여 오랫동안 군대에서 누리지 못한 것들을 전부 주문했고, 그다음 날에는 아주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오랫동안 입지 않은 정복을 차려입은 뒤 마차를 타고 현 지사를 만나러 관청으로 출두했다.
"당신은 일리야 안드레예비치 백작의 아들이시죠? 제 아내가 당신 어머님과 매우 친했습니다. 목요일마다 우리 집에서 모임이 열립니다. 마침 오늘이 목요일이니 격식 차리지 말고 편하게 방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를 보내며 현 지사는 말했다.
니콜라이는 옷을 갈아입고 향수를 뿌리고 머리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뒤,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늦더라도 하는 것이 낫다'는 경구에 따라 약간 늦었지만 현 지사의 집에 나타났다. 그것은 무도회가 아니었고, 그래서 춤 순서가 있을 거라는 말도 없었다. 그러나 카테리나 페트로브나가 클라비코드로 왈츠와 스코틀랜드 무곡을 연주할 것이고 또한 춤을 추게 될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무도회 차림으로 모였다.
1812년의 현 지방의 삶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현 지사의 집에 모인 사람들의 모임은 보로네시 최고의 상류층 모임이었다. 귀부인들이 매우 많았고, 그중에는 니콜라이가 아는 모스크바의 귀부인들도 몇 명 있었다. 그러나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기병이자 군마 조달 담당 장교이며 선하고 예의 바른 로스토프 백작과 조금이라도 필적할 수 있는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귀부인과 아가씨들은 그에게 교태를 부렸고, 노파들은 첫날부터 어떻게 이 젊은 난봉꾼 경기병을 결혼시켜 길들일 것인가를 생각하느라 바빴다. 후자들 가운데에는 현 지사의 아내도 있었는데, 그녀는 로스토프를 가까운 친척처럼 받아들이면서 그를 니콜라''너'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카테리나 페트로브나가 정말로 왈츠와 스코틀랜드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춤도 시작되었다. 니콜라이는 능란한 춤 솜씨로 현의 사교계를 더욱더 사로잡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독특하고 개방적인 방식으로 춤을 춰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야회 내내 니콜라이는 어느 현 관리의 아내에게, 하늘색 눈동자와 풍만한 몸매와 금발 머리를 지닌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가장 관심을 쏟았다.
5
니콜라이는 잇따라 미소를 지으면서 금발 여인의 얼굴 쪽으로 바싹 고개를 숙이고 신화에 나오는 찬사를 바치며 안락의자에 약간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자신의 귀부인과 팽팽한 사슴 가죽에 싸인 자신의 멋진 다리 형태에 감탄하며 니콜라이는 금발 여인에게 이곳 보로네시에서 한 귀부인을 납치하고 싶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떤 귀부인을요?"
"아주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부인입니다. 그녀의 눈은 하늘색이고 (니콜라이는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입은 산호와 같고 살결은 하얗고……." 그는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몸매는 디아나 같고…"
선량한 현 지사 부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안나 이그나티예브나 말빈체바가 널 만나고 싶어한다, 니콜라." 그녀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로스토프는 즉각 그 여자가 지체 높은 귀부인임을 알았다.
"그 분이 조카딸로부터 네가 그녀의 조카딸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구나……. 그 말을 한 조카딸은 볼콘스카야 공작 영애란다. 그녀는 여기 보로네시의 친척 아주머니 댁에 머물고 있어."
"정말 반가워요." 말빈체바가 그에게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 집에 부디 와 줘요." 거만한 노파는 마리야 공작 영애와, 그녀 자신이 좋아하지 않았음에 분명한, 고인이 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 역시 그녀로부터 호의를 얻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안드레이 공작에 대해 니콜라이가 아는 바를 이것저것 물은 후에야 자기 집을 방문해 달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고는 그를 놓아주었다.
"얘야, 알겠니?" 현 지사 부인은 선한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바로 너의 천생배필이야. 네가 원한다면 내가 중매를 설까?"
"누구 말인가요. 아주머니?" 니콜라이가 물었다.
"영애에게 내가 중매를 설게. 카테리나 페트로브나는 릴리를 꼽지만 난 공작 영애 쪽이야. 난 네 엄마도 고마워할 거라고 확신해. 정말 좋은 아가씨이고 매력적이야! 게다가 그리 못생긴 편도 아니야."
니콜라이는 작별 인사를 나누려고 할 때 그녀를 옆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아주머니, 솔직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아주머니도 아실 거예요.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절 부유한 아가씨와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지만, 저는 돈 때문에 결혼한다는 생각만 해도 혐오스럽습니다."
"아, 그래, 이해한다." 현 지사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볼콘스카야 공작 영애는 다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무엇보다도 전 그녀가 무척 맘에 들어요. 제 마음이 그녀에게 강하게 끌립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 이상하게도 이건 운명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그런데 그 후 모든 일이……. 저는 이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아주머니에게만 말하는 거예요." 현 지사 부인은 고마움의 표시로 그의 팔꿈치를 힘주어 잡았다.
"제 사촌 동생 소피를 아세요? 전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와 약속했기 때문에 그녀와 결혼할 겁니다. 따라서 아주머니도 아시겠죠, 이게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걸요." 니콜라이는 얼굴을 붉히며 조리 없이 말했다.
"얘야, 얘야, 어떻게 그런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니? 소피에게는 아무것도 없잖아. 그리고 너도 말했듯이 네 아버지는 재정 상태가 아주 나빠. 게다가 네 어머니는? 그건 네 어머니를 죽이는 행위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소피도, 만약 그 아가씨에게 마음이라는 게 있다면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니?"
니콜라이는 침묵했다. 그는 그런 결론을 듣게 되어 기뻤다.
"아주머니, 어차피 그건 불가능해요."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게다가 공작 영애가 저와 결혼할까요? 그녀는 지금 상중이잖아요.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나 있겠어요?"
"내가 널 당장 결혼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모든 일에는 법도라는 게 있단다." 현 지사 부인이 말했다.
"훌륭한 중매쟁이시군요, 아주머니……." 니콜라는 그녀의 통통한 손에 입 맞추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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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야 공작 영애는 로스토프와 만난 후 모스크바로 왔고, 그곳에서 가정 교사와 함께 있는 조카와, 안드레이 공작의 편지를 조우했다. 편지에서 안드레이 공작은 그들에게 보로네시에 있는 말빈체바 아주머니에게 가라고 지시했다. 이주에 대한 고민, 오빠에 대한 걱정, 새집에 정착하는 문제, 새로운 사람들, 조카 양육, 이 모든 것들이 마리야 공작 영애의 마음속에 있는, 그녀를 계속 괴롭히던 유혹과도 같은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러시아의 파멸과 결부된 아버지를 잃었다는 느낌으로 슬펐고,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인 오빠가 위험에 처했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항상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느꼈던 조카의 양육도 그녀를 근심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에 대한 긍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로스토프의 출현과 함께 그녀 내면에 생긴 개인적인 꿈과 희망을 억눌렀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긍정이었다.
야회 다음 날 현 지사 부인이 말빈체바를 찾아가 자신의 계획에 대해 의논하고 (비록 지금 상황에서 모든 형식을 제대로 갖춰 결혼하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어쨌든 젊은 사람들을 이어 주고 서로를 알아 가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냐는 단서를 달았다) 말빈체바의 허락을 얻은 후, 공작 영애 앞에서 로스토프를 화제에 올리고 칭찬하면서 그가 마리야 공작 영애의 이름을 듣자 얼굴을 붉히더라고 이야기했을 때 마리야 공작 영애는 기쁨이 아닌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이틀 동안 로스토프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녀는 한편으론 상중인 자신이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부적절하므로 그가 아주머니를 찾아오면 응접실에 나가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자기를 위해 해 준 일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 될 거라고도 생각했다. 아주머니와 현 지사 부인이 자신과 로스토프에 대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요일 오전 예배 후 로스토프 백작이 찾아와 응접실에 들어오자 공작 영애는 마치 손님에게 아주머니와 인사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잠시 고개를 숙였고, 니콜라이가 그녀를 돌아보는 바로 그 순간 고개를 들어 빛나는 눈으로 그의 시선을 맞았다. 그녀는 품위와 우아함이 넘치는 동작으로 미소를 띠며 몸을 살짝 일으켰고, 그에게 가늘고 부드러운 손을 내밀며 처음으로 가슴에서 울리는 새로운 여성적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그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본 순간부터 어떤 새로운 생명력이 그녀를 사로잡아 그녀로 하여금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말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로스토프가 들어온 후 갑자기 변했다. 채색하고 조각을 새긴 등의 안쪽 불을 켜면 등의 옆면에 예전에는 조잡하고 어둡고 무의미하게 보이던 그 복잡하고 정교한 예술 작품이 생각지도 않게 놀라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듯 그녀의 얼굴도 그렇게 변했다.
대화는 매우 소박하고 사소한 일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한 자신의 슬픔을 과장하며 이야기했고, 지난번 만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니콜라이는 다른 주제로 대화를 옮기려고 애쓰며 선량한 현 지사 부인에 관해, 니콜라이와 마리야 공작 영애의 친척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아주머니가 안드레이에 대해 말을 꺼내자마자 화제를 바꾸려 애쓰며 오빠에 관한 이야기를 피했다.
아이들이 있는 집을 방문할 때 항상 그랬듯이 니콜라이는 짧은 방문 동안에도 침묵의 순간이 올 때면 안드레이 공작의 어린 아들에게로 달려가 다정하게 아이를 쓰다듬으며 경기병이 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이의 두 팔을 잡고 빙글빙글 돌며 마리야 공작 영애를 힐끔거렸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상중이라 외출하지 않았고, 니콜라이도 그 집을 방문하는 것이 예의 바른 행동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현 지사 부인은 계속 혼담을 진행했고, 로스토프가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도록 강요했다. 현 지사 부인은 이 고백을 위해 오전 예배 전에 주임 신부의 집에서 두 젊은이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마리야 공작 영애를 만난 후 비록 외부로 나타나는 그의 생활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이제까지 만족을 주던 모든 것이 그 매력을 잃었고, 그는 종종 마리야 공작 영애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사교계에서 만났던 모든 귀족 아가씨들에 대해 늘 생각하던 방식대로 그녀에 대해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언젠가 오랫동안 소냐를 열광적으로 생각하던 것처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래의 아내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상상 속에서 부부 생활의 모든 상황을 아가씨들에게 적용해 보곤 했다. 하얀 실내복, 사모바르 앞에 앉은 아내, 아내의 카레타, 아이들, 엄마와 아빠, 그와 그녀의 관계 등등 미래에 대한 그 그림들은 그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와 혼담이 오가는 마리야 공작 영애를 생각할 때 그는 미래의 부부 생활로부터 그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상상을 해 보려 노력하면 모든 것이 앞뒤가 맞지 않고 거짓이 되어 버렸다. 왠지 기분만 나빠질 뿐이었다.
7
9월 중순 무렵 보로디노 전투와 아군 사상자에 대한 끔찍한 소식, 그리고 모스크바를 잃었다는 더 끔찍한 소식이 보로네시에 도착했다. 니콜라이가 들은 것은 (그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신문에서 오빠가 부상당한 사실만 알 뿐 그에 관해 어떤 결정적인 정보도 얻지 못한 마리야 공작 영애가 안드레이 공작을 찾으러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스토프는 보로디노 전투와 모스크바를 포기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절망이나 분노 혹은 복수심과 같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보로네시에 있는 모든 것들이 갑자기 따분하고 지겹게 느껴졌으며, 모든 것이 부끄럽고 불편하게 여겨졌다. 그에게는 자신이 들은 모든 대화가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랐고, 연대에 가야 모든 것이 다시 명확해질 것 같았다.
로스토프가 떠나기 며칠 전, 교회에서 러시아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회가 열리기로 정해졌고, 니콜라이도 예배에 참석했다. 기도회가 끝 나자 현 지사 부인이 그를 불렀다
"공작 영애를 봤니?"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찬양대석 뒤에 서 있는 귀부인을 고개로 가리키며 말했다.
니콜라이는 자신을 사로잡은 조심스러움과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으로 인해 그녀를 즉시 알아보았다.
이 전에 마리야 공작 영애 앞에서 늘 그랬듯 니콜라이는 그녀에게 가 보라는 현 지사 부인의 조언을 기다리지 않고, 또 여기 교회에서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이 예의 바른 행동인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이 그녀의 슬픔에 대해 들었고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노라고 말했다.
"공작 영애, 당신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로스토프가 말했다. "만약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공작이 살아 있지 않다면 그분은 연대장이기 때문에 그 죽음이 신문에 발표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파편으로 인한 부상은 (신문에 유탄의 파편이라고 발표되었다) 그 즉시 치명적이거나 그와 반대로 아주 경미합니다."
"오, 그건 너무도 끔찍……." 그녀는 입을 열었으나 흥분 때문에 말을 맺지 못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고마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본 후 아주머니를 뒤따라갔다.
니콜라이는 이번에 그녀의 내면에서 파악한 그녀의 특별한 정신적인 아름다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떠날 채비를 하면서, 보로네시를 떠나면 공작 영애를 볼 기회를 잃기 때문에 아쉬울 거라는 생각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교회에서 가진 마리야 공작 영애와의 만남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그의 마음속에 더 깊이, 그가 자신의 평온을 위해 바란 것보다 더 깊이 새겨 졌다.
'굉장한 아가씨임에 틀림없어! 천사나 다름없어!'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난 자유로운 몸이 아니란 말인가, 어째서 난 소냐와 결혼하기로 서둘렀을까?'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두 여자를 비교했다. 니콜라이에겐 없는, 그래서 그가 매우 높이 평가하는 정신적 재능이 한 사람은 빈약한 반면 한 사람은 풍부했다. 그는 만일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라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나에게 뭐가 필요하지? 자유, 소냐와의 결별. 그녀는 진실을 말했어.' 그는 현 지사 부인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소냐와 결혼하면 불행 말고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어. 혼란, 어머니의 슬픔…… 재정 상태…… 혼란, 무서운 혼란! 그래, 난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아. 그래, 난 마땅히 주어야 할 그런 사랑을 주고 있지 않아. 하느님! 저를 끔찍한 출구 없는 상황에서 구해 주소서!' 그는 갑자기 기도하기 시작했다.
라브루시카가 종이 같은 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눈물이 그의 눈과 목에 고여 있는 상태였다.
니콜라이는 편지 두 통을 받아 들었다.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다른 하나는 소냐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는 필체로 편지를 알아보았고, 먼저 소냐의 편지부터 뜯었다. 그리고 몇 줄을 읽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놀라움과 기쁨으로 눈이 커졌다. "아냐, 이럴 리 없어!" 그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로스토프의 자유를 속박했던,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았던 매듭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야기되지 않은 예상치 못한 (니콜라이에게는 그렇게 여겨졌다) 소냐의 편지로 인해 풀리게 되었다.
"나에게 은혜를 베푼 가정에 내가 슬픔이나 불화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겐 너무 힘듭니다. 나의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만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니콜라, 스스로를 자유로운 몸으로 여기고, 무슨 일이 있든 그 누구도 당신의 소냐만큼 당신을 강렬하게 사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간청합니다."
다른 하나는 백작 부인의 편지였다. 그 편지에서 백작 부인은 다른 소식들과 함께 안드레이 공작이 부상병들 중에 있고 자신들과 함께 떠났다고 썼다. 그의 상태가 매우 안 좋았으나 이제 의사가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소냐와 나타샤가 간호사처럼 그를 보살피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니콜라이는 편지를 들고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갔다. 이 편지 덕분에 니콜라이는 갑자기 공작 영애와 거의 친척만큼이나 가까워졌다. 그다음날 로스토프는 마리야 공작 영애를 야로슬라블까지 데려가주었고 며칠 후 연대로 떠났다.
8
기도를 이루어 준 소냐의 편지는 트로이차에서 작성된 것이었다. 편지는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 쓰였다. 니콜라이를 부잣집 아가씨와 결혼시키려는 생각은 노백작 부인을 점점 더 사로잡았다. 그녀는 소냐가 이 일에서 가장 큰 방해물임을 알았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떠나기 며칠 전, 당시 일어난 사건에 감동하고 흥분한 백작 부인이 소냐를 불러 질책하거나 요구하는 대신 그동안 자기 집안이 베푼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소냐가 자신을 희생하여 니콜라이와의 관계를 끊어 달라고 간청하며 눈물로 그녀에게 호소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녀를 더 아프게 괴롭히려고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서 쓰디쓴 비애를 느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일을 한 번도 겪은 적이 없고 희생해야 했던 적도 없는,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나타샤에게 질투가 났다. 또한 소냐는 니콜라를 향한 자신의 고요하고 순수한 사랑으 로부터 갑자기 법과 미덕과 종교보다 더 위에 있는 강렬한 감정이 자라기 시작한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로스토프가 사람들이 모스크바에 머문 마지막 며칠 동안의 분주함과 두려움은 소냐가 억누르고 있던 우울한 생각을 삼켜 버렸다. 그녀는 실제적인 활동에서 그런 생각으로부터의 구원을 발견하게 되어 기뻤다. 하지만 그녀가 안드레이 공작이 그들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안드레이 공작과 나타샤에게 진실한 연민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서 자신과 니콜라의 이별을 원하지 않는다는 기쁘고도 미신적인 감정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여행을 시작한 후 로스토프가 사람들은 트로이차 대수도원에서 처음으로 하루 동안 휴식을 취했다. 대수도원의 숙박소에서 로스토프가 사람들은 큰 방 세 개를 배정받았고, 그중 하나를 안드레이 공작이 차지했다. 부상자는 그날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나타샤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옆방에서는 백작과 백작 부인이 오랜 지인이자 기부자인 이들을 방문한 수도원장과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냐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안드레이 공작과 나누는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문 너머로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안드레이 공작의 방문이 열렸다. 나타샤가 흥분한 얼굴로 방에서 나오더니 그녀를 맞이하고자 몸을 일으키며 오른팔의 넓은 소맷자락을 감아쥔 수도원장을 보지 못한 채 소냐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나타샤, 무엇 때문에 그러니? 이리 오렴." 백작 부인이 말했다.
나타샤가 축복을 받으러 다가가자 수도원장은 하느님과 성자에게 도움을 구하라고 조언했다.
수도원장이 떠나자마자 나타샤는 친구의 손을 잡고 빈방으로 갔다.
"소냐, 그렇지? 그는 살 수 있겠지?" 그녀가 말했다. "소냐,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또 얼마나 불행한지! 사랑하는 소냐, 모든 게 예전 그대로야. 그가 살아만 준다면! 그는 그렇게 될 리 없어. 왜냐하면……." 나타샤는 울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난 알아! 그는 꼭 살게 될 거야!" 소냐가 말했다.
소냐는 친구 못지않게 흥분해 있었는데 자신의 두려움과 슬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개인적인 생각 때문에 그랬다. 그녀는 흐느끼며 나타샤에게 입을 맞추고 위로했다. '그가 살아만 준다면!' 그녀는 생각했다. 몇 분 후 안드레이 공작이 벨을 울렸고, 나타샤가 방으로 들어갔다. 한편 소냐는 여태껏 경험한 적이 없는 흥분과 부드러운 감정을 느끼며, 이제까지 일어난 사건들의 온갖 기이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창가에 남았다.
이날 군대에 편지를 보낼 기회가 생겨 백작 부인은 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소냐, 너도 니콜렌카에게 편지를 쓰지 않겠니?" 백작 부인이 조용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안경 너머로 쳐다보는 피로한 시선에서 소냐는 백작 부인이 전하려는 바를 전부 읽어 냈다.
소냐는 백작 부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쓸게요, 어머니" 그녀가 말했다
소냐는 나타샤와 안드레이 공작의 관계가 회복될 경우 니콜라이가 마리야 공작 영애와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그녀는 자신이 좋아했고 그 안에 사는 데 익숙했던 자기희생의 기분이 부활한 것을 기쁘게 느꼈다. 그래서 소냐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니콜라이가 받은, 그를 그토록 놀라게 한 감동적인 편지를 썼다
9~10 [피예르]
피에르가 수감된 영창에서 그를 체포한 장교와 병사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그러나 한편으론 정중하게 대했다. 피에르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서는 이 남자가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는 (신분이 매우 높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혹과 아직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은 그와의 개인적인 싸움으로 인한 적대감이 여전히 느껴졌다.
피에르와 함께 수감된 러시아인들은 전부 최하층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피에르가 귀족임을 알아보고 그를 멀리했는데 피에르가 프랑스어를 말했기에 더 그랬다. 피에르는 자신을 조롱하는 소리를 서글픈 심정으로 들었다. 그날 저녁 피에르는 수감자들 모두가 (그중에는 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방화죄로 재판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흘째 되는 날, 피에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떤 집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는 흰 콧수염을 기른 프랑스 장군과 대령 두 명, 팔에 완장을 두른 프랑스인들이 앉아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끌려간 다른 사람들에게 한 똑같은 질문들, 누구이고 어디에 있었고,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 등등의 질문들을 대개 피고들을 대할 때 그러듯 인간의 나약함을 초월한 척 엄격하고 정확하게 물었다.
체포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피에르는 불 속에서 구한 아이를 부모에게 데려가고 있었다고 약간은 비통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왜 약탈병들과 싸웠습니까? 피에르는 대답했다. 나는 여성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모욕받는 여성을 보호하는 것은 모든 남자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이 그의 말을 멈추게 했다. 그 말은 사건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불타는 집 마당에 있었습니까? 그곳에서 당신을 본 목격자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피에르가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이미 말했던 그 질문이 반복되었다. 다시 피에르는 말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기록해 두시오, 그런 것은 좋지 않소. 아주 좋지 않아요.” 흰 콧수염을 기르고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의 장군이 그에게 엄격히 말했다.
크림스키 브로트에 위치한 어느 저택의 카레타 창고에서 피에르는 나흘을 머물렀고, 그동안 프랑스 병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여기에 수감된 사람들이 매일같이 원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원수가 누구인지는 병사들로부터 알아낼 수 없었다. 병사들에게 있어 원수는 가장 높은, 얼마쯤은 신비한 권력의 고리인 듯했다.
그 처음 며칠, 포로들이 두 번째 심문에 끌려간 9월 8일까지의 며칠은 피에르에게 가장 괴로운 시간이었다.
9월 8일, 포로들이 있는 헛간에 한 장교가 들어왔고 위병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꽤 중요한 인물 같았다. 참모부 소속으로 보이는 그 장교는 손에 명부를 들고 러시아인들을 점호하면서 피에르에 대해서는 '이름을 말하지 않은 자'라고 불렀다.
한 시간 후, 1개 중대의 병사들이 와서 피에르와 열세 명의 다른 사람들을 데비치예 폴레로 데려갔다. 비가 그친 후 날은 맑았고, 햇빛이 들고, 대기는 평소와 달리 깨끗했다. 피에르가 주봅스키 성루의 영창에서 끌려 나오던 날처럼 연기는 낮게 깔리지 않았다. 깨끗한 대기 속에 기둥처럼 연기가 솟아올라 있었다. 화재의 불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연기 기둥이 사방에서 올라왔고, 모스크바 전체가, 피에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 병사들은 피에르와 다른 죄인들을 데비치예 폴레 오른쪽에 있는,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하얀 대저택으로 끌고 갔다. 이 저택은 피에르가 예전에 자주 방문하곤 했던 셰르바토프 공작의 집이었고, 피에르는 병사들의 대화를 통해 지금 그 집에 원수인 '에크뮐 공작(1809년 바이에른의 '에크뮐 전투' 승리 후 나폴레옹이 다부에게 수여함)'이 묵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원수 다부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방 끝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피에르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부는 눈을 들지도 않고 앞에 놓인 서류를 처리하는 듯했다. 그가 눈을 들지 않은 채로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피에르는 말할 수 없었기에 침묵했다. 피에르에게 다부는 잔혹하기로 유명한 인간이었다.
피에르가 무언가를 결심하기도 전에 다부가 고개를 들어 이마 위로 안경을 올리더니 눈을 찡그리며 피에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난 이 남자를 알지.” 피에르를 놀라게 하려고 분명 의도한 듯 그는 침착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피에르의 등을 타고 흐른 한기가 압착기처럼 그의 머리를 죄었다.
“이자는 러시아의 스파이요.”
“아닙니다. 당신은 나를 알 리 없습니다. 난 민병대 장교이고, 모스크바 밖으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다부가 다시 물었다.
“베주호프입니다.”
“당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나에게 무엇으로 증명하겠소?” 다부가 냉정하게 물었다.
피에르는 랑발을 기억해 내고 그의 연대와 성, 집이 있는 거리를 지명했다.
“당신은 당신이 말한 사람이 아니오.” 다부가 다시 말했다.
피에르는 분절되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진술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대기 시작했다.
그때 바로 부관이 들어와 다부에게 무언가를 보고했다. 다부는 부관이 전달한 소식에 갑자기 얼굴이 밝아지더니 군복의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피에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듯 보였다. 부관이 포로에 대해 상기시키자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피에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데려가라고 말했다.
피에르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어디로 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이 시간 동안 피에르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누가, 도대체 누가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했는가. 위원회에서 그를 심문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그러기를 원치 않았고, 그 누구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를 그토록 인간적으로 바라보던 다부도 아니었다.
도대체 누가 그를 사형에 처하고 죽이려고, 모든 기억과 열망, 희망과 생각을 가진 피에르의 생명을 앗아 가려고 했던가? 피에르는 누구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질서, 즉 상황들이 모여 누적된 결과였다. 어떤 질서가 그를, 피에르를 죽이고, 그의 생명을, 그의 모든 것을 뺏어 가고 그를 소멸시키고 있었다.
11
병사들은 포로들을 셰르바토프 공작의 저택에서 데리고 나와 데비치예 폴레를 따라 곧장 아래로 내려가 데비치예 수도원 왼쪽으로, 말뚝이 박혀 있는 채소밭으로 끌고 갔다. 말뚝 뒤에는 막 파낸 신선한 흙을 그 옆에 쌓아 놓은 커다란 구덩이가 있었고, 구덩이와 말뚝 주위에 사람들 무리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병사들은 죄수들을 명부에 적힌 순서에 따라 (피에르는 여섯 번째였다) 줄을 세워 말뚝으로 끌고 갔다. 갑자기 양쪽에서 북을 쳐 댔고 피에르는 이 소리와 함께 마치 영혼의 일부가 찢겨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을 잃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보고 듣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바람은 단 하나, 실행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 무서운 무언가가 어서 끝났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피에르는 프랑스인들이 한 사람씩 쏠지 두 사람씩 쏠지 의논하는 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씩!” 상급 장교가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병사들의 대열이 이동했고, 다들 서두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모두가 불쾌하고 납득하기 힘든, 그러나 불가피한 일을 끝내기 위해 서두르는 듯했다. 장교 견장을 찬 프랑스 관리가 죄인들 대열의 오른쪽으로 다가가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로 판결을 낭독했다.
라이플총을 든 저격병 열두 명이 딱딱한 걸음으로 대열에서 나와 말뚝으로부터 여덟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피에르는 곧 일어날 일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요란한 굉음이 들렸고, 그 소리는 피에르에게 가장 무서운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기가 피어올랐고, 프랑스 병사들이 창백한 얼굴로 손을 덜덜 떨며 구덩이 옆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또 다른 두 죄수가 끌려갔다. 또다시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끔찍한 폭발음과 함께 그는 연기, 누군가의 피, 다시 말뚝 옆에서 떨리는 손으로 서로를 건드리며 무언가를 하고 있는 프랑스 병사들의 겁에 질린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피에르는 괴롭게 숨 쉬며 ‘도대체 이게 뭐지?’라고 물어보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에르의 시선과 마주치는 모든 시선에도 똑같은 질문이 떠올라 있었다.
“제86부대 저격수들, 앞으로!” 누군가가 호령했다. 피에르 옆에 서 있던 다섯 번째 한 사람만 끌려 나갔다. 피에르는 자신이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와 나머지 사람들은 단지 사형의 입회자로 이곳에 끌려왔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섯 번째 사람은 할라트를 입은 공장 노동자였다. 그 다섯 번째 처형에서 그와 군중의 호기심과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섯 번째 사람도 침착해 보였다.
분명 구령 소리가 들렸을 테고, 그 소리 이후 여덟 개의 라이플총에서 발사 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아무리 기억해 내려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피에르는 아주 작은 발사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은 다만 갑자기 줄에 묶인 공장 노동자의 몸이 축 처지고 두 군데에 피가 나고 완전히 늘어진 육체의 무게 때문에 줄이 풀리고 공장 노동자는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떨구고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콧수염을 기른 늙은 프랑스 병사는 새끼줄을 풀면서 아래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육체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병사들은 경직된 모습으로 그것을 말뚝 뒤로 서둘러 끌고 가 구덩이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신들이 최대한 빨리 범죄의 흔적을 감추어야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것 같았다.
“방화를 저지르면 어떻게 되는지 저자들도 배웠을 거야.” 프랑스인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피에르는 말한 사람을 돌아보았고, 그가 이 사건에서 무언가로 위안을 얻길 원하지만, 그러지 못한 병사임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끝맺지도 않고, 한 손으로 저으며 저쪽으로 가 버렸다.
12~13
처형 이후 피에르는 다른 피고들과 분리되어 작고 황폐하고 더러운 교회에 홀로 수감되었다. 저녁이 되기 전에 위병 부사관이 교회에 들어와 피에르에게 그가 사면되었으며, 전쟁 포로 막사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자신에게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피에르는 일어나 병사들과 함께 출발했다. 그들은 들판 위쪽에 불에 탄 판자와 통나무와 널빤지로 지은 막사들 쪽으로 피에르를 끌고 가 그중 한 곳에 집어넣었다.
그 무서운 처형 장면을 본 순간 이후, 피에르의 영혼 속에서는 모든 것을 지탱하며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던 용수철이 갑자기 뽑혀 나가 모든 것이 무의미한 먼지 더미로 무너져 내린 것만 같았다. 세계가 눈앞에서 붕괴하고 무의미한 폐허만 남은 것에 대한 원인이 자신의 죄 때문은 아니라고 지금은 느끼고 있었다. 삶에 대한 믿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자기 힘 밖의 일이라고 느꼈다.
피에르는 주위의 어둠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의 옆에는 등을 구부린 작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피에르는 남자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퍼져 나오는 진한 땀 냄새 때문에 처음부터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 남자는 어둠 속에서 발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는데, 피에르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그가 끊임없이 자기를 힐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리도 힘든 상황들을 많이 보셨죠, 그렇죠?” 작은 남자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남자의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에는 다정함과 소박함이 배어 있어 피에르는 그 목소리에 대답하고 싶었으나 턱이 떨리고 눈물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작은 남자는 그 순간 피에르가 당혹감을 드러낼 틈을 주지 않고 예의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 좀 잡숴 보세요, 나리.” 그는 다시 조금 전의 공손한 억양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하고는 헝겊을 펼쳐 구운 감자 몇 개를 건넸다. “점심에는 수프도 있었습죠. 하지만 감자도 훌륭해요!”
피에르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터라 감자 냄새가 매우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는 병사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자네는 누군가, 병사인가?”
“압셰론 연대의 병사입니다. 열병으로 죽어 가고 있었어요. 우리는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어요. 아군이 스무 명 정도 누워 있었지요. 생각지도 못했고, 짐작도 못했어요. 제 이름은 플라톤입니다. 성은 카라타예프고요."
플라톤 카라타예프는 나무를 구하러 남의 숲에 들어갔다가 파수꾼에게 잡힌 일, 사람들에게 채찍으로 맞고 재판을 받은 뒤 군대에 넘겨진 일에 대해 들려주었다.“그런데 말이지, 친구.” 그가 미소를 짓느라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그 일을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기쁜 일이었어요. 내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동생이 군에 가야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동생에게는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고, 제게는 아내 하나만 있었죠. 딸아이가 하나 있었지만 제가 입대하기 전에 하느님이 데려가셨어요. 예전에 휴가를 받아 집에 갔었는데, 아버지가 말했어요. ‘나에게는 어느 자식이나 다 마찬가지다. 어느 손가락을 깨물든 다 아픈 것이다. 그때 플라톤을 군대로 끌고 가지 않았다면 미하일로가 갔을 거다.’ 아버지는 모두를 불러 (믿어지세요?) 이콘 앞에 세웠어요. 아버지는 말했어요. ‘미하일로야, 이리 와서 네 형의 발 앞에 절해라. 그리고 너, 며늘아기도 절해라, 손주들아, 너희들도 절해라. 알겠느냐?’ 바로 그런 거죠, 나의 친우여, 운명이 머리를 찾아요. 하지만 우리는 이것은 좋지 않다느니, 이것은 이상하다느니 계속 판단을 하지요. 우리의 행복은, 친구, 그물 속의 물 같아요. 당기면 부풀지만 끌어내면 거기에 아무것도 없죠. 그런 거예요."
밖에서는 어딘가 멀리서 울음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리고 막사 틈새로 불빛이 보였다. 그러나 막사 안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피에르는 옆에 누운 플라톤의 규칙적인 코골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어둠 속 자기 자리에서 뜬눈으로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이전에 파괴된 세계가 이제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어떤 새롭고 확고한 토대 위에서 높이 솟아오르는 것을 그의 영혼 속에서 느꼈다.
피에르가 입소하여 4주를 보낸 막사 안에는 스물세 명의 포로병, 세 명의 장교, 두 명의 관리가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나중에 피에르의 기억 속에서 안개에 싸여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떠올랐지만, 그중에서 플라톤 카라타예프는 가장 강렬하고 소중한 추억이자 러시아적이고 선하고 둥근 모든 것의 체현으로 피에르의 영혼 속에 영원히 남았다.
그가 이야기를 할 때면 ‘그리스도교적’인 것, 즉 그가 말하듯 농민의 일상생활에 대한 오래된 추억, 자신에게 소중해 보이는 추억들에 대해 주로 말했다. 그의 이야기에 넘쳐 나는 관용구들은 대부분 병사들이 말할 때 나타나는 무례하고 대담한 표현들이 아니라,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시의적절할 때 나오면 갑자기 깊고 현명한 의미를 얻는 민중적인 격언이었다.
카라타예프는 피에르가 이해하는 집착, 우정, 사랑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삶이 그와 맺어 준 모든 것들, 특히 사람들을 (잘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과 함께 사랑하며 살아갔다. 그는 자신의 개를 사랑했고, 동료들과 프랑스인들을 사랑했으며, 막사 내 이웃이 된 피에르를 사랑했다. 하지만 피에르는 카라타예프가 자신에게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도 자신과의 이별을 단 한 순간도 애석해하지 않으리라고 느꼈다. 피에르 또한 카라타예프에게 똑같은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활동, 즉 그의 삶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 자신이 보는 바대로 개별적인 삶으로서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그 삶은 그가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만 의미를 띠었다. 꽃송이에서 향기가 떨어져 나오듯 그의 말과 행동은 그 자신으로부터 일정하게, 불가피하게, 직접적으로 흘러나왔다. 별개로 취한 행동이나 말의 가치도, 의미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14 (마리야 공작 영애)
니콜라이로부터 오빠가 로스토프가 사람들과 함께 야로슬라블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야 공작 영애는 아주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즉시 떠날 준비를 했는데, 혼자가 아니라 조카와 함께 가려고 했다. 그녀의 의무는 아마도 죽어 가고 있을 오빠 옆에 직접 있는 것뿐 아니라 그에게 아들을 데려가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떠날 준비를 했다.
보로네시에서 머물던 마지막 시기에 마리야 공작 영애는 자기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을 경험했다. 로스토프를 향한 사랑은 이제 그녀를 괴롭히거나 동요시키지 않았다. 최근 마리야 공작 영애는 비록 스스로에게 말로써 분명히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이 사랑받고 또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녀는 이를 최근에, 그녀의 오빠가 로스토프가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찾아온 니콜라이와의 만남에서 확인했다.
하지만 야로슬라블에 가까워지면서 마리야 공작 영애의 흥분은 극도에 다다랐다. 로스토프가 사람들이 어디에 있고 안드레이 공작의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라고 앞서 보낸 심부름꾼이 관문 옆에서 사륜마차를 만났을 때 그는 창문 밖으로 내민, 무서울 정도로 창백한 공작 영애의 얼굴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전부 알아보았습니다, 공작 영애님. 로스토프가 사람들은 광장의 브론니코프 상인 집에 계십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볼가 강변입니다.” 심부름꾼이 말했다.
“공작님은 어떠신가?” 그녀가 물었다.
“공작 각하는 그분들과 같은 집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빠는 살아 있겠구나.’ 공작 영애는 이렇게 생각하고 안드레이 공작이 어떤지 조용히 물었다.
“여전히 똑같은 상태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어느덧 현관 대기실까지 들어온 공작 영애는 자기 앞에 동양적인 유형의 얼굴을 가진, 감동받은 표정으로 공작 영애를 맞으러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늙은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백작 부인이었다.그녀는 마리야 공작 영애를 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나의 아기!” 그녀가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죠.”
백작 부인은 공작 영애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소냐는 마드무아젤 부리엔과 대화했다. 백작 부인은 소년을 쓰다듬었다. 노백작이 공작 영애에게 인사하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노백작은 공작 영애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많이 변해 있었다. 그때는 원기 있고 쾌활하고 자신만만한 노인이었는데 지금은 불쌍하고 내버려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흥분 상태, 최대한 빨리 오빠를 보고 싶은 단 하나의 바람, 오빠를 만나는 것만을 유일하게 원하는 이 순간에 그녀를 계속 붙잡아 두고 조카에게 겉치레로 칭찬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공작 영애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아차렸고, 자신이 진입한 이 새로운 질서에 잠시 복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녀는 모든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고, 힘들었지만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빠는 어디 있나요?” 사람들을 향해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분은 아래층에 계세요. 나타샤와 함께요.” 소냐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상태를 알아보라고 하인을 보냈어요. 제 생각엔 공작 영애님께서 피곤하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공작 영애의 눈에 분노의 눈물이 차올랐다. 그 순간 안으로 막 뛰어 들어오려는 나타샤를 보았다.
예민한 마리야 공작 영애는 나타샤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그녀의 슬픔이 깃든 기쁨과 함께 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그래서 나타샤의 어깨에 대고 울었던 것이다.
“같이 가요, 그분께 같이 가요, 마리.” 공작 영애를 다른 방으로 이끌며 나타샤가 말했다.
“어떤가요……?” 그녀는 질문을 꺼냈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말로는 물을 수도 대답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타샤는 처음 얼마 동안은 고열과 통증으로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트로이차에서 그런 증상은 사라졌고, 의사는 오직 괴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위험도 지나갔다. 그리고 상처가 곪기 시작했지만 의사가 화농으로 인한 열도 위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틀 전에…….” 그녀는 말문을 열었다. “갑자기 그 일이 일어났어요.” 그녀는 흐느낌을 억눌렀다.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요, 당신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게 될 거예요. 아, 마리, 마리, 그분은 너무 좋은 분이에요, 하지만 그분은 살 수 없어요, 살 수 없어요…… 왜냐하면……."
15 (안드레이 공작)
나타샤가 익숙한 동작으로 그의 방문을 열어 공작 영애를 먼저 들어가게 할 때부터 이미 마리야 공작 영애는 준비된 흐느낌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아무리 미리 준비하고 침착하려 애쓸지라도 눈물 없이는 그를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틀 전 그에게 그 일이 일어났다'는 말로 나타샤가 무엇을 얘기하고자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습관에 따라 서로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안녕, 마리,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그가 자신의 시선만큼이나 차분하고 낯선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가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면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는 이 비명이 그 목소리보다 덜 무서웠을 것이다.
“니콜루시카도 데려왔니?” 그는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면서 마찬가지로 차분하게 느릿느릿 말했다.
그의 말과 어조, 특히 적대적이다시피 한 차가운 시선에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모든 세상으로부터의 소외감이 있었다. 그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운명이 우리를 이렇게 기이하게 이끌었구나!” 그는 침묵을 깨고 나타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가 내내 옆에서 나를 간호해 주고 있어.”
마리야 공작 영애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가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몰랐다면 어떻게 그녀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그녀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그에게는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는 것, 다른 무언가가,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이 그에게 모습을 드러냈기에 그에게는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마리, 니콜라이 백작은 만났어?” 그들을 기쁘게 해 주길 원하는 듯 안드레이 공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가 이곳으로 편지를 보내왔어. 네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말이야.” 자신의 말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온갖 복잡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그는 단순하고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그를 사랑하게 되면 정말 좋을 텐데…… 두 사람이 결혼하면.”
자신이 오랫동안 찾다가 마침내 발견한 말에 기뻐하는 듯 보이는 그가 서둘러 덧붙였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그의 말을 들었지만 그녀에게 그 말은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나 심하게 멀어져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띠지 않았다.
"앙드레…… 니콜루시카를 보고 싶지 않아? 그 아이는 계속 오빠만 생각했어.”
사람들이 안드레이 공작에게 니콜루시카를 데려왔다. 니콜루시카는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보았으나 아무도 울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 역시 울지는 않았다. 안드레이 공작은 아들에게 입을 맞추었지만 아들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니콜루시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마리야 공작 영애는 다시 오빠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니콜루시카가 아버지 없이 혼자 남게 되어서 그녀가 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삶으로 다시 돌아오려 온 힘을 다해 노력했고, 그들의 시각으로 옮겨 왔다.
‘그래, 이들에게는 이 일이 슬픈 것임에 틀림없어!’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단순한데! 아니,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감정,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는 우리의 모든, 이 모든 생각들, 그것들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그리고 그는 침묵에 잠겼다.
안드레이 공작의 어린 아들은 일곱 살이었다. 그는 간신히 글을 읽을 뿐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날 이후 지식과 관찰력과 경험을 얻어 가며 많은 일을 겪었다. 하지만 그가 나중에 획득할 이 모든 능력을 당시에 가졌을지라도, 자신이 아버지와 마리야 공작 영애와 나타샤 사이에서 본 장면의 의미를 그가 지금 이해하는 것보다 더 깊이 더 잘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안드레이 공작의 방에서 나오던 마리야 공작 영애는 나타샤의 얼굴이 그녀에게 말한 것을 전부 이해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나타샤에게 그의 목숨을 구할 희망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타샤와 교대로 그의 소파 옆을 지켰고 더 이상 울지도 않았지만, 죽어 가는 사람 위로 이제는 너무도 뚜렷하게 느껴지는 그 영원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게 호소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했다.
16
안드레이 공작은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지금 죽어 가고 있음을, 이미 절반은 죽은 사람임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지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존재의 기이한 가벼움을 자각했다. 그는 서두르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자신에게 닥칠 일을 기다렸다.
그는 이 감정을 그의 눈앞에서 유탄이 팽이처럼 빙그르르 돌고, 그가 밭의 그루터기와 떨기나무와 하늘을 보면서 죽음이 그의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처음 경험했다. 부상에서 깨어나 마치 자신을 억누르던 삶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기라도 한 듯 현생에 의존하지 않는 영원하고 자유로운 사랑의 꽃이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피어났을 때 그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반정신 착란 상태에 있는 그의 앞에 간절히 원하던 여인이 나타났던 그때, 그가 그녀의 손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기쁨에 찬 눈물을 흘렸던 미티시에서의 그날 밤 이후로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그 마음속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며들어 그를 삶과 다시 이어 주었다. 그러자 기쁘기도 하면서 불안하기도 한 상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병은 육체의 순리대로 진행되었지만 나타샤가 ‘그에게 그 일이 일어났다’라고 지칭한 사건은 마리야 공작 영애가 도착하기 이틀 전에 일어났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마지막 투쟁이었고 죽음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나타샤를 향한 사랑 속에서 그의 앞에 나타난 삶을 그가 아직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뜻밖의 자각이었고, 불가해함 앞에서 느낀 공포에 굴복한 마지막 발작이었다.
그는 꿈 속에서 문에 빗장을 질러 잠가 두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간다. 그 때 이미 무언가 끔찍한 것이 반대편에서 문을 밀어 억지로 열려고 한다. 그는 문을 막아 보기라도 하려고 문에 달려들어 마지막 힘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최후의 초자연적인 노력은 무용지물이 되고 두 개의 문짝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것이 들어왔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 안드레이 공작은 온 힘을 다해 눈을 떴다.
'그래 난 죽었어. 그리고 깨어났지. 그래, 죽음은 깨어남이야!' 갑자기 그의 마음속이 환해졌다.
그날 이후 안드레이 공작은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삶에서도 깨어났다. 그리고 그가 느끼기에 삶의 길이와 비교했을 때 삶에서의 깨어남이 꿈의 길이와 비교했을 때 꿈에서의 깨어남보다 느린 것 같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느린 이 깨어남 속에는 무섭고 격렬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의 마지막 나날과 시간들은 평범하고 단순하게 흘러갔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마리야 공작 영애와 나타샤 모두 그것을 느꼈다.
그는 참회를 하고 성찬을 받았다. 모든 이들이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그는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고개를 돌렸는데, 괴로움이나 동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리야 공작 영애와 나타샤는 그것을 알았다) 단지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아들을 축복해 주라고 말하자 그는 요구받은 대로 하고는 마치 무언가 아직 더 해야 할 것이 남았느냐고 묻기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혼이 남긴 몸의 마지막 경련이 일어나는 동안 마리야 공작 영애와 나타샤는 그곳에 있었다.
“끝났어요?” 그의 몸이 그들 앞에서 차갑게 식어 가며 꼼짝 않고 누워 있은 지 몇 분이 지난 뒤에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말했다. 나타샤는 다가가 죽은 눈을 들여다보고 서둘러 눈을 감겨 주었다. 그녀는 눈을 감기면서 그 눈이 아닌 그에 대한 가장 가까운 기억에 입을 맞추었다.
니콜루시카는 마음을 찢는 고통스러운 의혹 때문에 울었다. 백작 부인과 소냐는 나타샤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울었다. 노백작은 곧 자신도 그와 똑같은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울었다. 나타샤와 마리야 공작 영애도 울었지만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라 그들 앞에서 일어난 죽음의 단순하고 장엄한 신비를 지각했을 때 자신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경건한 감동 때문에 울었던 것이다.
<제4권 제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