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1-2)

제3권 제3부 (2)

by Andy강성

[제3부]

21


러시아군은 새벽 2시부터 오후 2시에 걸쳐 마지막 피란민과 부상자들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통과했다. 군대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가장 혼잡했던 곳은 카멘니, 모스크보레츠키와 야우즈스키 다리들이었다. 크렘린 주변에서 둘로 갈라진 군대가 모스크보레츠키 다리와 카멘니 다리에서 합류한 순간,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방향을 틀어 성 바실리 교회를 지나 보로비츠키 대문을 빠져나간 뒤 붉은 광장으로 몰래 조용히 달음질쳤다.


상인들과 점원들은 (그들의 수는 적었다) 길 잃은 것처럼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자기네들 상점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일꾼들과 함께 어딘가로 상품을 운반했다. 고스티니 드보르 시장 옆 광장에는 고수들이 서서 북을 치며 소집을 알렸다. 그러나 북소리는 약탈자 병사들을 예전처럼 소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북소리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가게 만들었다.


장교 둘이 일리인카 거리 모퉁이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장교는 비쩍 마른 짙은 회색 말을 타고 있었고, 외투를 입은 다른 한 명은 도로 위에 서 있었다. 말을 탄 또 한 명의 장교가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장군님께서 어떻게든 당장 모두를 여기서 내쫓으라고 명령하셨다. 병사의 절반이 사방으로 흩어졌어.”

“그래, 저들을 한번 직접 집합시켜 보시지요!” 다른 장교가 대답했다. “절대 못합니다. 나머지 병사들까지 흩어지지 않게 어서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입니다.”


코 주변 뺨에 붉은 뾰루지들이 난 상인이 투실투실한 얼굴에 침착하고 흔들림 없는 계산적인 표정을 띤 채 두 손을 흔들며 서둘러, 그러면서도 멋 부리는 걸음으로 그 장교에게 다가갔다.

"장교님." 그가 말했다.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보호해 주십쇼. 저희는 손해 보더라도 기꺼이 모시겠습니다. 어서 오십쇼, 지금 당장 모직 천을 내오겠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난리 입니까? 이리 오십쇼. 보초병이든 뭐든 좀 세워서 상점 문을 닫게라도 해 주시면……."


몇몇 상인들이 장교 주위에 모여들었다.

"에라! 쓸데없는 소리 하면 뭐 하나!" 그들 중 좀 야위고 근엄한 얼굴을 한 상인이 말했 다. "머리통이 날아갔는데 머리카락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마음대로 다 가져가라고 해!" 그러고는 포기한 듯 힘차게 한쪽 손을 내리치곤 장교한테서 돌아섰다.


장교는 당황스러워하며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망설임의 기색이 보였다.

"그게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그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빠른 걸음으로 통로를 따라 나아갔다. 자물쇠가 풀린 한 상점에서 때리고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교가 그곳을 지나갈 때쯤 머리를 빡빡 밀고 회색 외투를 입은 남자가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남자는 몸을 숙이고 상인들과 장교 옆을 부리나케 달아났다.


그때 모스크보레츠키 다리에서 수많은 군중의 무시무시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장교는 광장으로 뛰어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하지만 그의 동료는 이미 고함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장교는 말을 타고 그를 쫓아갔다. 거기에는 포차와 분리된 대포와 그 옆에 말 두 마리에 매인 짐마차 한 대가 있었다. 짐마차에는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맨 위에는 한 아낙네가 뒤집힌 유아용 의자 옆에 앉아 고음을 내며 필사적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동료들이 장교에게 군중이 고함을 치고 아낙네가 비명을 지른 이유를 말해 줬다. 이들 군중과 맞닥뜨린 예르몰로프 장군이 병사들은 상점가로 뿔뿔이 흩어지고 주민들은 떼로 다리를 막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대포를 포차에서 내려 다리를 포격할 것처럼 시늉을 내라고 명령한 것이다. 군중은 짐마차들을 뒤엎고 서로를 밀치면서 필사적으로 고함을 지르며 다리를 비웠다. 그 덕분에 비로소 군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22


재산을 전부 두고 떠난 로스토프가의 저택에 남은 사람 중 두 명은 큰 응접실에 있었다. 문지기 이그나트와 카자크 복장의 사환 아이 미시카였다. 바실리이치의 손자인 미시카는 할아버지와 함께 모스크바에 남았다. 미시카는 클라비코드 뚜껑을 열고 한 손가락으로 건반을 치고 있었다. 문지기는 옆구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삐딱하게 서서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큰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뻔뻔한 인간들 같으니! 정말 뻔뻔하네!” 뒤에서 조용히 응접실에 들어온 마브라 쿠즈미니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봐라, 넙데데한 얼굴로 히죽거리는 꼴이라니! 이런 짓이나 하라고 너희를 붙잡아 둔 줄 알아! 저기는 하나도 정리가 안 되어서 바실리이치가 지쳐 녹초가 됐는데. 두고 봐라!” 마브라 쿠즈미니시나는 먼지를 털고 클라비코드 뚜껑을 닫더니 깊은 한숨을 쉬고는 응접실에서 나가 문을 잠갔다.


고요한 거리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리더니 발걸음이 쪽문 앞에서 멈췄다. 빗장은 발걸음을 멈춘 사람이 그것을 풀려고 애써서인지 달그락거렸다. 마브라 쿠즈미니시나가 쪽문으로 다가갔다.

“누구를 찾으세요?”

“백작님을 찾고 있습니다. 일리야 안드레이치 로스토프 백작님이오.”

“당신은 누구신데요?”

“전 장교입니다. 그분을 꼭 만나야 합니다.”

"다들 떠나셨어요, 도련님. 어제저녁 기도 때쯤 떠나셨습니다.” 마브라 쿠즈미니시나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게 말이죠…….”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전 백작님의 친척이고, 그분은 항상 저에게 잘해 주셨죠. 그런데 보다시피 (그는 선량하고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망토와 군화를 쳐다보았다) 옷은 누더기가 되고 돈도 한 푼 없답니다. 그래서 백작님께 부탁을 하려고…….”

마브라 쿠즈미니시나는 끝까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도련님. 잠깐만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장교가 쪽문에서 손을 내리자 마브라 쿠즈미니시나는 돌아서서 노파 특유의 걸음으로 뒷마당의, 자신이 묵고 있는 바깥채로 서둘러 갔다.


그녀는 손수건을 펼치며 그 안에 들어 있는 25루블짜리 하얀 지폐 한 장을 꺼내 장교에게 황급히 건넸다.

“백작님이 집에 계셨더라면 분명히 친척이니까…… 혹시 이걸로…… 지금은…….” 마브라 쿠즈미니시나는 머뭇거리며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장교는 거절하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그 지폐를 받은 뒤 마브라 쿠즈미니시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연대를 따라잡기 위해 야우즈스키 다리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그녀는 수심에 잠겨 고개를 저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젊은 장교에게 갑자기 모정과 연민을 느꼈다.


23


아래층이 술집이었던 바르바르카 거리의 아직 완공되지 않은 한 건물에서 취객들의 고함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렸다. 작고 더러운 방 안의 테이블들 앞에 놓인 긴 의자에 열 명가량 되는 공장 노동자들이 앉아 있었다. 술에 취하고 땀에 흠뻑 젖은 그들은 모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입을 한껏 벌리고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억지로 노래를 불렀다.


깨끗한 파란 외투 차림의 키가 큰 금발 청년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콧날이 날렵하고 곧은 그의 얼굴은 잘생긴 편이었는데 꽉 다물었는데도 끊임없이 실룩이는 얇은 입술과 시선을 고정한 채 찌푸린 몽롱한 그의 눈이 문제였다. 그는 노래하는 사람들 앞에 서서 하얀 팔을 사람들의 머리 위로 엄숙하고 어색하게 휘둘러 댔다.

그가 외쳤다. “그만! 어이, 친구들, 싸움이 났다!” 그러고는 연신 소매를 걷어 올리며 현관 계단으로 나갔다.


이날 아침 키 큰 청년의 주도 아래 술집에서 술을 마신 공장 노동자들은 술집 주인에게 공장에서 가져온 가죽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 포도주를 받았다. 술집에서 흥청거리는 소리를 들은 인근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이 술집이 망한 거라 생각하여 완력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던 것이다. 현관 계단에서 싸움이 붙었다. 술집 주인은 문간에서 한 대장장이와 주먹다짐을 하고 있었다.


술집 주인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된 대장장이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네놈은 사람들을 갈취하고 벌거벗게 만든 걸로는 모자랐구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술집 주인을 향해 말했다. “이제 사람까지 죽이니? 날강도 같으니라고!” "친구들, 저놈을 묶어라!”

“어디 한번 묶어 보시지!” 술집 주인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뿌리치며 외치고 모자를 벗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봐, 법이라면 내가 아주 잘 알지. 난 경찰서에 가겠어. 자네는 내가 못 갈 거라고 생각하나? 요즘은 누구든 강도질을 못하게 되어 있어!” 술집 주인이 모자를 집어 들며 소리쳤다.

“그래, 가 보지 뭐!” “그래, 가 보자, 이 자식아!” 술집 주인과 키 큰 청년은 잇달아 똑같은 소리를 하면서 함께 거리로 나섰다. 피투성이가 된 대장장이 그리고 공장 노동자들과 구경꾼들도 그들을 뒤따랐다.


“그래, 질서를 보여 줘야 해요, 법을 보여 줘야 해요, 그러라고 관청이 있는 거니까! 형제들이여, 내 말이 맞지요?” 키 큰 청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자는 관청이 없다고 생각하나 봐요? 설마 관청이 없을 리가 있나요? 그렇다면 우리를 착취하는 놈들이 엄청 많을 텐데.”


키타이고로드의 벽 옆에는 또 다른 작은 무리가 두 손으로 종이를 움켜쥔 싸구려 모직 코트 차림의 남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칙령, 칙령을 읽는다! 칙령을 읽는다!” 이런 말이 들리자 사람들이 낭독자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싸구려 모직 코트를 입은 남자가 8월 31일 자 전단을 읽고 있었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대공작 각하께 갈 것이다. 각하와 상의하고 협력하여 우리 군이 악당들을 전멸시키도록 돕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들의 숨통을 끊어 놓고 그 불청객들을 지옥으로 보내 버릴 것이다. 나는 점심 식사 때쯤 돌아올 것이다. 우리 다 함께 과업에 착수하여 그것을 모두 끝내고 악당들을 물리칠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완전한 침묵 속에 낭독되었다. 키 큰 청년은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분명 그 마지막 구절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낭독자도 청중도 특히 ‘나는 점심 식사 때쯤 돌아올 것이다’라는 구절에 낙담한 듯했다. 민중은 숭고한 내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 말은 너무 단순하고 쓸데없이 명쾌했다.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 최고 권력으로부터 나온 칙령에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갑자기 군중 뒤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모든 이들의 관심이 기마 용기병 두 명을 대동하고 광장으로 향하던 경찰서장의 마차에 쏠렸다.

"누구냐?” 그는 마차를 향해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누구냐니까? 내가 자네들에게 묻고 있잖나?” 대답을 얻지 못한 경찰서장이 계속해서 외쳤다.

"백작님은 떠나지 않았고, 아직 여기에 계시다. 너희에게 지시가 있을 것이다.” 경찰서장이 말했다. “출발해!” 그는 마부에게 지시했다.


“친구들, 이건 속임수야! 백작님께 직접 데려가라고 하자!” 키 큰 청년이 소리쳤다. “저놈을 붙잡아라, 친구들! 해명을 하게 하자! 잡아라!” 여러 목소리들이 이렇게 외쳤고 사람들은 마차를 잡으러 달려갔다.

군중은 왁자지껄 떠들며 경찰서장을 뒤따라 루뱐카로 향했다.

“뭐야, 귀족들과 상인들은 다 떠나고 우리만 죽어 나가는 건가? 뭐야, 우리가 개야?” 하는 소리가 군중 사이에서 점점 빈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24~25 [라스톱친]


9월 1일 저녁, 쿠투조프와 회견한 라스톱친 백작은 군사 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것, 쿠투조프가 모스크바 방어에 참가하겠다는 자신의 제안을 묵살한 것에 낙심하고 모욕감을 느끼면서, 또한 숙영지에서 보게 된 새로운 시각, 즉 수도의 치안과 그 애국적 기운에 대한 문제를 이차적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불필요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시각에 놀랐다. 그렇게 이 모든 것에 낙심하고 모욕감을 받고 놀라면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자정이 지난 무렵 쿠투조프의 서한을 가져온 특사 때문에 잠에서 깼다. 편지에는 러시아군이 모스크바를 넘어 랴잔 가도로 퇴각할 예정인데 군대가 시내를 통과하도록 안내할 경찰관들을 보내 줄 수 없느냐고 적혀 있었다. 라스톱친 백작은 군대가 모스크바를 포기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밤에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단순한 쪽지 형태로 전달된 쿠투조프의 명령은 백작을 놀라고 짜증 나게 만들었다.


훗날 라스톱친 백작은 회상록*에서 이 시기에 자기가 한 행동을 해명하며 그때 자신에게는 두 가지 목표만 있었다고 한다. 그는 모스크바의 치안 유지와 주민 대피가 그것이었다고 주장한다. 1812년 모스크바 시민의 안정에 대한 라스톱친 백작의 걱정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가? 도시에서 폭동의 조짐을 짐작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주민들은 도시를 떠나고 있었고, 모스크바는 퇴각하는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 이유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늘 행정 기관의 최고위층 사람들과 교제하던 열정적이고 다혈질적인 라스톱친은 비록 애국심을 지니긴 했으나 자신이 통치하려 했던 민중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적군이 스몰렌스크에 침입할 때부터 라스톱친은 마음속으로 민심의 지도자, 즉 러시아의 심장을 자신의 역할로 삼았다. 그래서 이제 그 역할을 그만둬야 하고, 그 어떤 영웅적인 인상도 주지 못하고 모스크바를 버려야 되는 상황에 처하자 갑자기 발아래의 땅이 꺼지는 듯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전혀 모르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가 버려지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진심으로 믿지 않았기에 별다른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의 바람과 달리 모스크바를 떠나고 있었다. 관청 물건들을 반출했다면 그것은 단지 백작이 마지못해 동의한 관료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 스스로는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에만 몰두했다.


그날 밤새 라스톱친 백작은 모스크바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측근들은 이토록 침울하고 화가 난 백작의 모습을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백작은 밤새 끊임없이 보고를 받았다.

이 모든 질문에 백작은 역정을 내며 짧게 답변했다. 그 답변들은 이제 그의 지시가 필요 없으며, 그가 애써 준비한 모든 것이 누군가 때문에 허사가 되었고, 그 누군가가 지금 벌어지는 모든 사태에 책임을 지게 되리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군대가 이미 모스크바를 통과하던 오전 9시가 되었을 때 더 이상 아무도 백작에게 지시를 받으러 오지 않았다.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아서 떠났고, 도시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알아서 무엇을 할지 결정했다. 백작은 소콜니키로 가기 위해 말들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뒤 팔짱을 끼고 누렇게 뜬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의 집무실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일단 폭풍이 일고 바다가 거칠어지고 선박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선박은 거대하고 독립적인 경로로 나아가고 삿대는 움직이는 선박에 닿지 않는다. 그리고 통치자는 별안간 힘의 근원인 권력자의 자리에서 별것 없고 무익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변한다. 라스톱친은 이를 알았기에 격분했다.


라스톱친은 이를 알았기에 격분했다. 군중에게 저지당했던 경찰서장과, 말이 준비되었다고 보고하러 온 부관이 함께 백작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얼굴이 창백했다. 경찰서장은 임무 수행에 대해 보고한 뒤 엄청난 수의 군중이 백작 저택의 안마당에 모여 그를 뵙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그는 경찰서장에게 물었다.


“백작 각하, 저들은 각하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군에 맞서기 위해 모였다고 말하고, 또 배신에 대해서도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각하, 저들은 그냥 폭주한 무리일 뿐입니다. 저는 겨우 저들에게서 빠져나왔습니다. 각하, 감히 제안을 드리자면…….”

“나가시오. 당신이 없어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요.” 라스톱친은 화를 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재빨리 문을 열고 단호하게 발코니로 걸어 나갔다. 모든 시선이 백작에게 향했다.


“안녕하시오, 여러분!” 백작이 큰 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이렇게 와 줘서 고맙소. 제가 여러분이 있는 곳으로 나가겠소.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악당을 처치해야 하오. 우리는 모스크바를 파멸로 이끈 악당을 벌해야 하오. 잠깐 기다려 주시오!” 백작은 문을 쾅 닫고 조금 전과 똑같이 재빨리 방으로 돌아갔다.


"그 자는 어디 있나?" 백작이 물었다. 그 말을 끝낸 순간, 그는 저택 모퉁이로부터 두 명의 용기병 사이에 끼여 나오는 젊은 남자를 보았다. 목덜미가 길고 가늘었으며 머리통이 절반은 깎이고 절반은 덥수룩했다.

"그 자를 여기에 세워!" 청년은 족쇄를 절그럭거리며 백작이 가리킨 계단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여러분!” 라스톱친이 날카로우면서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작자가 바로 모스크바를 파멸로 이끈 그 비열한 베레샤긴입니다.” “저자는 차르와 조국을 배신하고 보나파르트에게 넘어갔소. 모든 러시아인 가운데 오직 저자만이 러시아의 이름을 더럽혔소. 저자 때문에 모스크바가 파멸한 것이오.”


라스톱친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단조롭게 말했다. “저자를 베라! 명령이다!”

“검을 뽑아라!” 한 장교가 직접 검을 뽑아 들며 용기병들에게 외쳤다. 민중 사이에서 한층 더 거센 파도가 일었다. 앞줄까지 밀려온 그 파도는 앞에 있던 사람들을 움직여 너울너울 흔들며 현관 앞의 바로 그 계단으로 싣고 갔다. 키 큰 청년은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한 손을 옾이 치켜든 채 베레샤긴가 나란히 섰다.

“베라!” 장교는 용기병들에게 거의 속삭이다시피 말했다. 그러자 병사들 중 하나가 갑자기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날이 무딘 양날 검으로 베레샤긴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 베레샤긴이 짧고 놀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베레샤긴이 놀라움에 찬 비명에 이어 고통으로 애처롭게 소리를 지른 것이 그의 파멸을 불러왔다. 아직은 군중을 억제하고 있던 인간적 감정이라는 장벽, 최고조로 긴장되어 있던 그 장벽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범죄가 이미 시작된 이상 끝까지 완수되어야만 했다.


베레샤긴을 내리친 용기병은 한번 더 검을 휘두르려 했다. 베레샤긴은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자기 몸을 가리고 민중을 향해 돌진했다. 그와 부딪친 키 큰 청년이 베레샤긴의 가는 목을 두손으로 움켜쥐고 짐승처럼 고함을 지르면서, 그들에게 달려들며 울부짖는 사람들의 발밑에 함께 깔렸다. 군중은 이 둘을 한가운데 놓고 사방에서 짓누르며 마치 한 덩어리처럼 이리저리 요동쳤다.


희생물이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고 비명 소리가 길게 늘어진 규칙적인 헐떡임으로 바뀐 뒤에야 비로소 군중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시체 주위에서 다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베레샤긴이 쓰러지고 군중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서로를 밀치고 그 위에서 요동치는 동안 라스톱친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는 말들이 대기하는 뒷문으로 가는 대신 고개를 숙인 채 아래층 방으로 이어진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마차가 먀스니츠카야 도로를 빠져나오고 더 이상 군중의 고함 소리가 들리지 않자 백작은 후회가 들었다. 그제야 부하들 앞에서 자신이 보인 불안함과 두려움이 불만스럽게 떠올랐다.

‘민중의 무리는 무섭구나. 혐오스러워.’ 그는 프랑스어로 생각했다. ‘그자들은 고기를 줘야만 만족하는 늑대들과도 같아.’


30분 후 백작은 빠른 말들을 맨 마차를 타고 소콜니키 들판을 달렸다. 그는 지금 쿠투조프가 있다는 야우즈스키 다리로 가고 있었다. 라스톱친 백작은 머릿속으로 쿠투조프의 기만에 대해 퍼부을 분노에 찬 신랄한 비난을 준비했다. 이 늙은 궁정 여우로 하여금 깨닫게 할 것이다. 수도가 버려지면서 생긴 모든 불행과 러시아의 파멸에 대한 책임이 오직 그의 늙고 분별력이 떨어진 머리통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라스톱친은 그렇게 생각했다.)


야우즈스키 다리 부근은 여전히 부대들로 붐볐다. 장군 제복을 입고 모자에 깃털 장식을 단 한 남자가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찬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쿠투조프에게 다가와 프랑스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바로 라스톱친 백작이었다.“대공작 각하께서 저에게 전투를 더 치르지 않고서는 모스크바를 내주지 않겠다고 말하셨다면 일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쿠투조프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나서 라스톱친의 얼굴에 날카로운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말했다.

“그렇소, 난 전투도 치르지 않고 모스크바를 넘기지는 않아요.”

라스톱친 백작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황급히 쿠투조프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모스크바 총사령관인 오만한 라스톱친 백작이 짧은 채찍을 들고 다리로 다가가 고함을 지르면서 북적대는 짐마차들을 옆으로 물러서게 쫓아 대기 시작했다.


26


뮈라의 부대는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 모스크바에 진입했다. 앞에는 뷔르템베르크 경기병 분견대가 갔고, 뒤에는 많은 수행원을 거느린 나폴리 왕이 직접 말을 몰고 갔다. 아르바트 거리 한가운데 위치한 니콜라 야블렌니 교회 근처에서 뮈라는 말을 세우고 도시 요새인 크렘린의 상황에 대한 선두 부대의 보고를 기다렸다.


뮈라 주변으로 모스크바에 남아 있던 주민 일부가 무리 지어 모여들었다. 모두들 두려움과 의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깃털과 황금으로 긴 머리칼을 장식한 낯선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 사람이 저쪽의 차르인가? 나쁘진 않군!” 조용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뮈라가 통역자에게 다가가 러시아군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명령했다. 맨 앞의 분견대에 있던 말 탄 프랑스 장교가 뮈라에게 다가와 요새의 문이 닫혔고, 그곳에 복병이 매복해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뮈라는 한 수행원을 돌아보며 네 문의 경포를 끌고 가서 요새의 문을 포격하라고 지시했다. 크렘린에서 저녁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프랑스 병사들은 그 소리에 당황했다. 그것이 전투를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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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 포병 장교가 명령을 반복했다. 그와 동시에 한 발의 총소리와 두 발의 대포 소리가 울렸다. 연기가 다시 성문을 가렸다. 방어벽 뒤에서는 더 이상 아무 움직임도 없었고, 문을 향해 프랑스 보병들과 장교들이 다가갔다. 문에는 부상자 세 명과 전사자 네 명이 쓰러져 있었다. 카프탄을 입은 두 남자가 몸을 낮추고 벽을 따라 즈나멘카 거리로 달아났다.


뮈라는 길이 깨끗이 치워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프랑스군이 문으로 들어가 원로원 광장에 막사를 세웠고, 병사들은 원로원 창밖으로 의자들을 내던져 모닥불을 지폈다. 다른 분견대는 크렘린을 지나 마로세이카, 루뱐카, 포크롭카 거리를 따라 막사를 세웠다. 또 다른 분견대는 브즈드비젠카, 즈나멘카, 니콜스카야, 트베르스카야 거리를 따라 막사를 지었다. 그 어디에서도 집주인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내의 민가가 아니라 시내에 배치된 야영지에 진영을 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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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병사들은 옷이 다 해지고 굶주리고 피로로 기진맥진했으며 병력 또한 예전의 3분의 1까지 줄었지만 정연한 질서를 유지하며 모스크바로 들어왔다. 비록 피로하고 지친 상태였지만 여전히 전투적이고 위협적인 군대였다. 그러나 부대의 병사들이 숙소로 흩어지기 전까지만 그랬다.


5주 후 모스크바를 떠날 때 그들은 더 이상 군대가 아니라 약탈자 무리에 불과했다. 저마다 비싸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을 산더미처럼 가져와 마차에 싣거나 직접 들고 갔다. 모스크바를 떠날 때 이들의 목적은 예전처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손에 넣은 물건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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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프랑스 지휘관들은 군대가 시내로 흩어지는 것을 금지하고 주민들에 대한 폭력과 약탈을 엄격히 금지하며 이날 밤 전체 점호를 실시한다는 명령을 계속해서 내렸지만, 이제까지 군대를 이루던 사람들은 이를 무시하고 편의 시설과 물건이 넘쳐 나는 부유하고 텅 빈 시내로 흩어졌다.


모스크바에 주민들이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모래 위의 물처럼 도시에 흡수되어 가장 먼저 발을 들여놨던 크렘린으로부터 별 모양을 이루며 걷잡을 수 없이 흩어졌다. 프랑스인들은 모스크바 화재를 라스톱친의 야만적인 애국심 탓으로 돌렸고, 러시아인들은 프랑스인들의 잔인함 탓으로 돌렸다. 본질을 말하자면 모스크바의 화재를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만한 이유는 없고, 또 있을 수도 없었다.


평화로운 시절에도 어떤 지역의 마을 민가에 군대가 진을 치면 곧바로 그 지역의 화재 발생 건수가 증가한다. 하물며 텅 빈 목조 도시에 외국 군대가 주둔할 경우 화재의 확률이 얼마나 증가하겠는가? 이때의 원인은 라스톱친의 야만적인 애국심도, 프랑스군의 잔인함도 아니다. 모스크바 화재는 담배 파이프, 부엌, 모닥불, 적군 병사들, 즉 집주인이 아닌 거주민들의 부주의 때문이며, 어느 마을, 어느 공장, 어느 집이든 주인이 떠나고 남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며 죽을 끓이다 보면 불탈 수밖에 없듯이 모스크바도 불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7


별 모양으로 퍼져 나가며 프랑스군이 모스크바에 흡수되는 과정은 9월 2일 저녁쯤 피에르가 머무는 구역까지 다다랐다. 평소와 다른 상황에서 이오시프 알렉세예비치의 집에서 고독하게 이틀을 보낸 피에르는 광기에 가까운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의 서재에서 팔을 괴고 앉아 있다 보니 지난 며칠 동안의 기억들이 상상 속에서 고요하고 의미심장하게 연달아 떠올랐다.


다음 날 그는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어떤 것에서든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민중과 함께 트리 고리 관문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지킬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며 집에 돌아왔을 때 불현듯 그는 자신에게 이전까지는 가능한 것으로만 보이던 것이 이젠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이 되었음을 느꼈다.


그는 이름을 숨기고 모스크바에 남았다가 나폴레옹을 만나 그를 죽여야 했다. 자신이 죽든가, 혹은 그가 생각하기에 나폴레옹 한 사람에게서 비롯된 온 유럽의 불행을 종식시키든가 둘 중 하나였다. 피에르는 1809년 빈에서 독일의 한 대학생이 보나파르트를 암살하려고 했던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고, 그 대학생이 총살당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계획을 실행할 경우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된다는 위험에 더더욱 흥분했다.


피에르의 육체 상태는 언제나처럼 그의 정신 상태와 일치했다. 익숙지 않은 투박한 음식, 요 며칠 동안 마신 보드카, 포도주와 시가의 결핍, 갈아입지 않은 더러운 속옷, 침대 없이 짧은 소파에서 거의 뜬눈으로 보낸 이틀 밤, 이 모든 것이 피에르를 광기에 가까운 흥분 상태에 빠뜨렸다.


벌써 오후 1시가 지났다. 프랑스군은 이미 모스크바에 들어왔다. 피에르는 이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행동을 개시하는 대신 앞으로 할 일을 아주 작은 것까지 세세히 점검하며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래, 난 다가가서…… 갑자기…… 피스톨로 할까, 단검으로 할까?’ 피에르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너를 처형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신의 손이다, 라고 말해야지. (피에르는 나폴레옹을 죽일 때 할 말을 생각했다.) 자, 뭐 하고들 있느냐, 나를 잡아 처형하라.’피에르는 고개를 숙인 채 슬프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계속 혼잣말을 했다.


피에르가 방 한가운데 서서 그렇게 자신과 논쟁하고 있는 중에 서재 문이 열렸다. 예전에는 늘 머뭇거리던 마카르 알렉세예비치가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문가에 나타났다. 할라트를 활짝 풀어 젖힌 채였다. 얼굴은 벌겋고 추악했다. 술에 취한 게 분명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가 테이블에 놓인 피스톨을 보고는 잽싸게 그것을 움켜잡고 복도로 달려 나갔다.


갑자기 현관 계단에서 여자의 새된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식모가 현관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자들이에요! 세상에! 정말 그자들이에요. 네 명이 말을 타고…….” 그녀가 외쳤다.

게라심과 문지기는 마카르 알렉세예비치를 놓아주었고, 몇 사람의 손이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28


피에르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전까지는 신분도, 프랑스어를 안다는 사실도 숨겨야 한다고 결심한 후, 프랑스인들이 들어오면 바로 몸을 숨길 생각으로 복도의 반쯤 열린 문가에 서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이 들어왔어도 피에르는 문에서 떠나지 않았다.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프랑스인은 둘이었다. 한 명은 장교로 키가 크고 씩씩하고 잘생겼고, 병사나 종졸로 보이는 또 다른 하나는 키가 작고 야위고 햇볕에 그을린 피부의 남자로 뺨은 푹 꺼져 있었고,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장교는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앞장서서 들어왔다.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피에르가 문에서 비키려는 순간, 열린 부엌문에서 피스톨을 두 손에 쥐고 몸을 내민 마카르 알렉세이치를 발견했다. 마카르 알렉세이치가 미치광이 특유의 교활한 눈빛으로 프랑스인을 흘낏 보고는 피스톨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공격하라!” 취한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며 소리쳤다. 프랑스 장교가 고함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피에르가 취한에게 달려들었다. 피에르가 피스톨을 잡아 치켜드는 것과 동시에 마카르 알렉세이치가 방아쇠를 당겼고 귀를 멀게 만드는 듯한 총소리가 울리면서 화약 연기가 모든 사람을 뒤덮었다. 프랑스인은 창백해져서 문 쪽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프랑스어를 안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던 계획을 잊고 피에르는 피스톨을 빼앗아 내던지곤 장교에게 달려가 프랑스어로 말을 걸었다.

“다치지 않았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마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장교가 자기 몸을 만지며 대답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장교는 피에르를 엄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 이런 일이 생겨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피에르는 자신의 역할을 잊고 서둘러 말했다. “이 사람은 불쌍한 미치광이입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피에르는 술 취한 미치광이를 처벌하지 말아 달라고 프랑스어로 계속해서 장교를 설득했다. 프랑스인은 음울한 표정을 바꾸지 않고 조용히 듣다가 갑자기 미소 지으며 피에르를 돌아보았다. 그는 몇 초 동안 아무 말 없이 피에르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습니다! 당신은 프랑스인이군요.” 그가 말했다. 그 프랑스인에게 이러한 결론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는 것이었다. 오직 프랑스인만이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고, 그를, 경기병 제13연대의 대위인 무슈 랑발을 구한 것은 분명히 매우 위대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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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러시아인입니다.” 피에르가 재빨리 말했다.

“당신은 내 목숨을 구했습니다. 당신은 프랑스인입니다. 당신은 내가 그를 용서하기를 원하나요? 알겠습니다, 그를 용서하겠습니다. 이자를 데리고 나가.” 장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기 때문에 프랑스인이 된 피에르의 팔을 잡고 정열적으로 빠르게 말한 후 그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29


피에르와 함께 프랑스 장교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피에르는 자신이 프랑스인이 아님을 대위에게 다시금 단언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 생각했고, 떠나고 싶었지만, 프랑스 장교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피에르가 주장하자 대위는 어떻게 그런 영광스러운 호칭을 거부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굳이 러시아인으로 알려지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지만 자신은 목숨을 구해 준 감사의 마음으로 그와 영원히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인이거나 신분을 감춘 러시아 공작이겠군요.” 프랑스인은 더러워지긴 했으나 부드러운 피에르의 속옷과 손가락의 반지를 주시하며 말했다. “당신에게 목숨을 빚졌으니 저와의 우정을 제안합니다. 프랑스인은 모욕도 도움도 결코 잊지 않습니다. 저와의 우정을 제안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게 전부입니다.”


“나는 9월 7일 전투*로 영예로운 레지옹 훈장을 받은 경기병 제13연대의 랑발 대위입니다.” 그는 콧수염 아래쪽 입술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미소를 지으며 자기를 소개했다. “그러니 이제는 모쪼록 알려 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저 미치광이의 총에 맞아 야전 응급 치료소에 있는 대신 누군가와 이토록 즐겁게 대화할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참, 모든 여성들이 모스크바를 떠났다는 게 사실입니까? 정말 이상한 생각이네요, 무엇이 무서웠던 거죠?”

“러시아군이 파리에 들어서면 프랑스 귀부인들도 파리를 떠나지 않을까요?” 피에르가 말했다.

“하, 하, 하!” 프랑스인이 피에르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유쾌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농담도 하시네요.” 그가 말했다. “파리라고요? 하지만 파리는…… 파리는…….”

“파리는 세계의 수도죠.” 피에르가 그의 말을 매듭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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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네 농민들이 그러는 거야 이해하지만 당신들 교양인들은 그들보다는 우리를 더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빈, 베를린, 마드리드, 나폴리, 로마, 바르샤바 등 세계의 모든 수도를 정복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우리를 두려워하지만 좋아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좀 더 잘 아는 건 위험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황제 폐하도…….” 그는 말을 시작했지만 피에르가 가로막았다.

“그가 모스크바에 있습니까?” 피에르는 우물쭈물하며 죄지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프랑스인이 죄지은 듯한 피에르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뇨, 내일 입성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계속 자기 이야기를 해 나갔다.


대위가 나가고 혼자 남았을 때 피에르는 문득 정신을 차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했다. 모스크바가 점령되었다는 것도, 이 행복한 승리자들이 모스크바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도 괴로웠지만 이 순간 그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자각이었다. 술 몇 잔과 이 선량한 남자와의 대화는 피에르가 지난 며칠간 빠져 있던, 계획 실행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긴장 상태의 우울한 기분을 무너뜨렸다.


피스톨과 단검과 농민용 외투는 준비되었고, 나폴레옹도 내일 도착한다. 피에르는 여전히 악인을 죽이는 것이 유익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자신은 그 일을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계획을 실행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미 꽤 깊은 밤에 두 사람은 함께 거리로 나갔다. 따뜻하고 밝은 밤이었다. 저택 왼쪽으로는 모스크바의 페트롭카 거리에서 시작된 맨 처음 화재의 밝은 불빛이 보였다. 오른쪽에는 초승달이 높이 떠 있었고, 그 반대편에 피에르가 마음속에서 자신의 사랑과 결부시키던 빛나는 혜성이 있었다. 대문 가에는 게라심과 식모, 두 명의 프랑스인이 서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서로 통하지 않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시내에서 발생한 화재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도시에서 일어난 먼 곳의 작은 화재는 전혀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피에르는 새 친구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대문 가에서 멀어져 자기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눕자마자 이내 잠들어 버렸다.


30


도보나 마차로 피란을 가던 주민들과 퇴각하던 부대들은 9월 2일에 처음 발생한 화재의 불빛을 곳곳에서 갖가지 감정을 갖고 바라보았다. 그들은 9월 1일, 너무 늦게 출발한 데다 짐마차와 군대 때문에 도로가 꽉 막혀 있는 상황에서 잊고 온 물건이 많아 그것들을 가져오도록 사람들을 보내고 하다가 결국 모스크바에서 5베르스타 떨어진 곳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다음 날에는 늦게 출발했고, 도중에 길이 막혀 자주 멈춰야 해서 겨우 간 곳이 볼쇼이 미티시였다.


이웃 농가에는 팔뼈가 부러진 라옙스키의 부관이 누워 있었는데 그는 끔찍한 통증 때문에 계속해서 애처로운 신음 소리를 냈고, 그 신음 소리는 가을밤의 어둠 속으로 무섭게 울려 퍼졌다. 첫날 밤 그 부관은 로스토프가와 같은 안마당에서 묵었는데 백작 부인이 신음 소리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고 툴툴거리는 바람에 미티시에 도착했을 때 그 부상병과 좀 더 멀리 떨어지기 위해 로스토프 일가는 초라한 농가로 거처를 옮겼다.


한 하인이 밤의 어둠 속에서 승강장에 서 있는 승용 마차의 높다란 차체 뒤로 또 다른 화재의 작은 불꽃을 발견했다. 한 화재의 불빛은 이미 예전부터 보던 것으로, 마모노프 부대의 카자크들이 말리예 미티시에 지른 불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보게들, 또 다른 화재가 났어.” 종졸이 말했다.

“봐, 활활 타고 있어.” 한 명이 말했다. “여러분, 저건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화재예요. 수솁스카야 아니면 로고즈스카야의 화재일 거예요.”

“봐 봐, 번지고 있어. 아, 주여! 아, 까마귀들도 보이네. 주여, 우리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당연히 꺼지겠지.”

“저걸 누가 끄겠어?” 그때까지 침묵하던 다닐로 테렌티이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침착하고 느렸다. “이보게, 저것은 모스크바야.” 그가 말했다. “우리의 어머니 모스크바, 하얀 석벽의…….” 그의 목소리가 끊기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늙은이처럼 흐느꼈다.


31


늙은 시종이 백작에게 돌아와서 모스크바가 불타고 있다고 보고하자 백작은 할라트를 걸치고 보러 나갔다. 아직 옷을 벗지 않고 있던 소냐와 마담 쇼스가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남은 사람은 나타샤와 백작 부인뿐이었다. (페탸는 이제 더 이상 가족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는 트로이차로 향하는 자신의 연대 앞에서 가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화재 소식을 들은 백작 부인은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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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가 다 불타고 있는 거 같아. 무서운 불빛이야! 나타샤, 좀 봐 봐. 여기 창으로도 보여.” 소냐가 사촌 동생의 기분을 바꾸고 싶어 하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타샤는 소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페치카 한구석으로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타샤가 이날 아침부터 이런 상태가 된 것은 백작 부인이 놀라고 화를 낼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소냐가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나타샤에게 안드레이 공작이 부상을 당했고 그가 자신들의 피란 행렬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걸 말하고 나서부터였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백작 부인이 소냐에게 화를 냈다. 소냐는 울면서 용서를 구했고 자신의 죄를 씻으려는 듯 내내 사촌 동생을 돌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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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아침 안드레이 공작이 중상을 입고 자신들과 함께 이동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타샤는 처음 한순간만 그가 어디로 가고 부상 상태는 심각한지, 그를 만날 수 있는지 등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를 만날 수 없고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을 들은 후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묻든 똑같은 답만 해 줄 거라고 확신했기에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더 이상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나타샤는 가는 내내 백 작 부인이 익히 알고 두려워하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승용 마차 한구석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고 지금 역시 그때와 똑같이 처음 앉은 긴 의자에 계속 앉아 있었다. 백작 부인은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고 마음속으로 지금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거나 이미 결정을 내렸음을 알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래서 더 두렵고 괴로웠다.


"나타샤, 아가야, 옷을 벗고 내 침대에 누우렴" (백작 부인의 침대 위에만 이부자리가 깔렸다. 마담 쇼스와 두 아가씨는 마룻바닥의 건초 위에서 자야 했다.)

"아뇨, 엄마, 전 여기 바닥에서 잘게요." 나타샤가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러고는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다들 주무세요. 그녀는 불쾌하다는 듯 덧붙이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후 나타샤는 어머니의 고른 숨소리를 들었다. 담요 밖으로 나온 작은 맨발이 마룻 바닥에서 얼어 가고 있음에도 나타샤는 꼼짝하지 않았다. “소냐, 자? 엄마?” 그녀가 속삭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타샤는 천천히 일어나 성호를 긋고는 가늘고 유연한 맨발로 더럽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조심스럽게 섰다. 널빤지가 삐걱거렸다. 그녀는 새끼 고양이처럼 빠르게 발을 놀려 몇 걸음 만에 차가운 손잡이를 잡았다.


그녀는 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 현관방의 축축하고 차가운 바닥을 디뎠다. 한기가 그녀의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맨발에 잠든 사람이 느껴지자 그녀는 그를 타 넘어 안드레이 공작이 누워 있는 통나무집 문을 열었다. 안드레이 공작이 부상을 입었고, 자신들과 함께 있다고 사람들이 말했던 그날 아침부터 나타샤는 그를 만나야 한다고 결심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몰랐지만 그 만남이 괴로우리라는 것은 알았고, 그래서 더더욱 만날 필요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고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짐이 가득 쌓인 통나무집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통나무집의 이콘 아래 있는 긴 의자에 남자 하나가 (티모힌이었다) 누워 있고, 마룻바닥에는 남자 둘이 (의사와 시종이었다)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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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이 몸을 조금 일으키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티모힌은 부상당한 다리의 통증 때문에 잠을 설치다가 하얀 루바시카에 덧옷을 걸치고 나이트캡을 쓴 아가씨의 기이한 출현에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고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녀는 시종 옆을 지나쳤다. 다 타서 버섯처럼 된 양초가 쓰러졌고, 그녀는 담요 위에 두 손을 내놓고 누워 있는 안드레이 공작을, 항상 보아 왔던 그 모습을 보았다.


그는 여느 때와 똑같았다. 하지만 부어서 빨갛게 된 얼굴색, 그녀를 향해 고정된 환희에 차 반짝이는 눈동자, 특히 루바시카의 열린 옷깃 사이로 삐져나온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목은 지금까지 그녀가 안드레이 공작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순진한 소년 같은 외양을 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민첩하고 유연하고 젊은이다운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32


안드레이 공작이 보로디노 평원의 야전 응급 치료소에서 의식을 회복한 이후 7일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부상자와 동행한 의사는 고열과 손상된 창자의 염증이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7일째 되는 날 그는 빵 한 조각과 차 한 잔을 만족스럽게 먹었고, 의사도 전반적으로 열이 내린 것을 확인했다. 안드레이 공작은 이른 아침에 의식이 돌아왔다. 하지만 의사는 자신의 경험상 그가 비록 지금 죽지 않는다 해도 얼마 후에는 더욱 괴로와하며 죽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안드레이 공작과 같은 연대에 속한 빨간 코의 티모힌 소령, 보로디노 전투에서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그 역시 이송 중이었다. 의사, 공작의 시종과 마부, 두 종졸이 그들과 함께 가고 있었다.

"티모힌이 이곳에 있나?" 그가 물었다. 티모힌이 긴 의자 위에서 그가 있는 쪽으로 기어 왔다.

"상처는 어떤가?"

"제 상처요? 괜찮습니다. 공작님은요?" 안드레이 공작은 마치 무언가를 상기하려는 듯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세 번째로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완전히 고요해진 한밤중이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현관방 너머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고, 거리에서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바퀴벌레들이 탁자와 이콘 위를 기어 다니고, 살진 가을 파리가 그의 머리 맡과 그 옆의 다 타서 커다란 버섯 모양이 된 수지 양초 주위를 날아다녔다.


그의 정신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의 정신력은 어느 때보다 활발하고 명료했지만 그의 의지 밖에서 활동했다. 온갖 생각과 관념들이 동시에 그를 사로잡았다. 때로 그의 생각은 갑자기 건강한 상태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힘차고 명확하고 깊이 있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갑자기 그 생각은 활동을 멈추거나, 전혀 예기치 않은 다른 관념으로 바뀌어 다시 돌아갈 힘을 잃어버렸다.


'그래, 인간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새로운 행복이 내 앞에 열린 거야.' 어둡고 적막한 통나무집에 누워 열이 오른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주시하면서 그는 생각에 잠겼다. '물질적인 힘 바깥에, 인간에게 작용하는 물질적이고 외적인 힘 바깥에 존재하는 행복, 영혼만의 행복, 사랑의 행복! 누구나 그 행복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행복을 인식하고 지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밖에 없어. 그런데 하느님은 도대체 어떻게 그 법칙을 지시한 것일까? 왜 하느님의 아들은…….'


갑자기 사유의 흐름이 끊어졌고 안드레이 공작은 조용히 소곤거리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 목소리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 속삭이는 듯한 음악 소리에 맞춰 안드레이 공작은 자신의 얼굴 위에, 얼굴 중앙 위에서 가느다란 침엽수 잎과 나뭇조각으로 된 기이한 공중 건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열심히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비록 그로서는 힘든 일이지만) 생각했지만 결국 건물은 무너졌고, 규칙적으로 속삭이는 음악 소리와 함께 다시 천천히 솟아올랐다.


'그래, 사랑이야. (다시 그는 또렷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언가를 얻기 위한 사랑,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랑, 혹은 이유가 있는 사랑이 아니야. 죽어 가던 내가 나의 원수를 보고, 그럼에도 그에게 사랑을 품은 순간 내가 처음으로 경험했던 그런 사랑이지. 영혼의 본질 자체이고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런 사랑의 감정을 경험한 것이지. 나는 지금도 그 행복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어. 가까운 이들을 사랑하는 것, 자신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 즉 모든 현상들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야. 소중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적인 사랑으로도 충분히 가능해.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느꼈을 때, 그러한 기쁨을 경험했던 거야.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 있을까, 아니면…….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할 때는 사랑에서 증오로 옮겨 갈 수 있어.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변할 수 없어. 그 무엇도, 죽음도, 그 무엇도 그것을 파괴할 수 없어. 그 사랑은 영혼의 본질이니까. 그런데 난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미워했지. 그리고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녀보다 더 내가 사랑한 사람도 없었고, 그녀처럼 미워하지 않은 사람도 없었어." 그리고 그는 나타샤를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러나 예전처럼 그에게 기쁨을 안겨 주던 그녀의 아름다움만으로 그녀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영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감정, 그녀의 고통과 수치와 후회를 이해했다. 이제야 처음으로 자신의 거절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이해했고, 그녀와의 파혼이 잔혹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한 번만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할 수 있다면…….'


그러자 갑자기 그의 주의가 무언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비몽사몽과 현실의 다른 세계로 옮겨 갔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들이 여전히 계속해서 솟아오르고, 촛불이 붉은 원을 이루며 여전히 타오르고, 스핑크스가 여전히 문가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외에도 무언가가 삐걱하는 소리를 냈고, 상쾌한 바람 향과 함께 새로운 하얀 스핑크스가 나타나 문 앞에 섰다. 그런데 그 스핑크스의 머리통에는 그가 지금 생각했던 바로 그 나타샤의 창백한 얼굴과 반짝이는 눈동자가 있었다.


그가 깨어났을 때 나타샤, 살아 있는 바로 그 나타샤가, (이제 그의 앞에 열린) 새롭고 순수한, 또 하느님의 사랑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가장 사랑하고 싶어 한 나타샤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이 사람이 살아 있는 실제 나타샤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놀라지 않았고, 조용히 기뻐했다. 나타샤는 무릎을 꿇은 채 흐느낌을 참으며 놀란 표정으로, 그러나 꼼짝하지 않고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 했고, 움직이지 않았다.


안드레이 공작은 한결 편안하게 숨을 내쉬고,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당신인가요?" 그가 말했다. "정말 행복합니다!" 나타샤가 재빠르면서도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나서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붙잡고 그 위로 얼굴을 숙이더니 입술이 살짝 닿도록 그 손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용서하세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 속삭이며 말했다. “날 용서하세요!”

“무얼 용서하란 말인가요?” 안드레이 공작이 물었다.

“내가 저, 저지른 짓을 용서하세요.” 나타샤는 겨우 들릴 듯한, 이따금씩 끊어지는 속삭임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살짝 그 손에 대고 더 빈번하게 입 맞추기 시작했다.

“나는 예전보다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안드레이 공작은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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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동자는 행복한 눈물로 글썽이고 있었고, 조심스럽게, 연민과 기쁨과 사랑이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은 입술을 한 나타샤의 야위고 창백한 얼굴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나 안드레이 공작은 그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는 빛나는 눈동자를 보았다. 그 눈은 아름다웠다. 그때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갑자기 딸이 없어진 것을 눈치챈 백작 부인이 보낸 하녀였다. 잠자던 중간에 사람들이 깨운 몽유병자처럼 나타샤는 방에서 나갔다. 자신의 통나무집 거처로 돌아온 그녀는 흐느끼며 잠자리 위에 쓰러졌다.


그날 이후 쉬어 가는 곳에서든 숙박하는 곳에서든 로스토프가의 계속되는 여정 중에 나타샤는 부상당한 볼콘스키 옆을 떠나지 않았다. 백작 부인은 안드레이 공작이 길 가는 도중에 딸아이의 팔에 안겨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생각에 두려웠지만 나타샤에게 반대할 수 없었다. 그가 건강을 회복할 경우 예전의 관계가 회복되라라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기는 했지만, 볼콘스키뿐 아니라 러시아 전체에 걸려 있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삶이냐 죽음이냐의 문제가 다른 모든 가정들을 가로막았다.


33


9월 3일, 피에르는 11시에 느지막이 잠에서 깼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입은 채 잠들어 버린 옷이 몸을 조였고, 전날 저지른 어떤 수치스러운 짓에 대한 의식이 어렴풋이 마음에 남았다. 그 수치스러운 짓이란 랑발 대위와의 대화였다. 피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비볐다. 그는 게라심이 어제 다시 책상에 가져다 둔, 총신에 조각이 새겨진 피스톨을 보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오늘 어떤 일을 앞두고 있는지 기억해 냈다


'내가 벌써 늦은 것은 아니겠지?' 피에르는 생각했다. '아니야, 그자는 아마 12시 전에는 모스크바에 들어오지 않을 거야? 피에르는 자신이 앞두고 있는 일을 자세히 생각해 보려 하지 않고 한시바삐 실행하기 위해 서둘렀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 피에르는 피스톨을 손에 들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이 무기를 손에 들지 않고 그것을 지닌 채 거리를 돌아다니려면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품이 넉넉한 카프탄 속에도 큰 피스톨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피스톨은 장전되어 있지 않았고, 피에르는 미처 장전해 두지 못했다. '아무래도 마찬가지야, 단검이 있잖아' 피에르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숙고하면서 1809년의 사건에서 대학생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나폴레옹을 단검으로 죽이려 한 것이라고 수차례 스스로 결론을 내렸으면서도,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날이 뭉툭하게 망가진 단검을 녹색 칼집에 꽂은 채로 조끼 안에 감추고 복도를 지나 거리로 나섰다.


그가 전날 저녁에 그토록 무심하게 바라보던 화재는 밤사이 큰불로 번졌다. 이미 모스크바가 사방에서 불타고 있었다. 피에르의 경로는 골목을 통과해 포바르스카야 거리로, 그곳에서 아르바트 거리의 니콜라 야블렌니 교회로 이어졌다. 그곳에는 그가 오래전부터 머릿속으로 자신의 과업을 실행할 곳으로 정해 둔 장소가 있었다.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자기 주위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자신의 계획이 무시무시하고 자기에게 낯선 무엇인 것처럼, 그것을 마음에 품고서, 왠지 그것을 잃어버릴 것 같다고 두려워하며 (전날 밤에 경험으로 배운 사람처럼) 두렵고도 서두르는 마음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도중에 그를 지체시키는 것이 전혀 없었다 해도 그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네 시간보다 훨씬 전에 도로고밀로보 근교를 출발하여 아르바트 거리를 지나 크렘린에 입성한 후, 이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우울한 기분으로 크렘린 궁전의 차르 집무실에 앉아 화재 진압과 약탈 방지와 주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체 없이 취해야 할 조치에 관하여 자세하고 세밀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에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나약 해져서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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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바르스카야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연기가 점점 더 심해지고, 화재의 불길로 공기가 후끈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피에르는 주위에서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화재 현장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은 의식하지 못했다. 한쪽은 포바르스카야 거리와 맞닿고 다른 쪽은 그루진스키 공작의 정원과 맞닿는 큰 공터의 샛길을 지나칠 때, 피에르는 문득 자기 바로 옆에서 한 여자가 절망적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샛길 옆에 먼지로 뒤덮인 마른 풀 위에 가재도구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궤짝 옆 땅바닥에 긴 뻐드렁니에 야윈 중년 여자가 몸을 흔들고 뭐라 중얼거리면서 목 놓아 울부짖었다. 여자아이 둘이 창백하고 놀란 얼굴에 망설이는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았고, 일곱 살가량의 어린 사내아이는 늙은 보모의 손에서 훌쩍였다. 맨발의 지저분한 하녀는 불에 그슬린 머리칼을 냄새를 맡으며 쥐어뜯었다. 바퀴 모양의 볼수염을 기르고 반듯하게 쓴 모자 밑으로 귀밑머리를 매끈하게 빗어 붙인 등 굽은 남편은 변화 없는 얼굴로 차곡차곡 쌓인 궤짝들을 헤치며 그 밑에서 옷가지 같은 것을 꺼냈다.


여자는 피에르를 보자 그의 발치에 몸을 던지다시피 했다.

“혈육의 여러분, 정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분들, 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 누구든 좀 도와주세요.” 그녀가 흐느끼며 말했다. “딸아이를! 내 막내딸을 두고 왔어요! 불에 다 탔을 거예요! 오, 오, 오! 이런 꼴을 보자고 내가 너를 그토록 애지중지했단 말이냐……. 오, 오오!”

“그만해,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남편이 조용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틀림없이 그 애 언니가 데려갔을 거야. 아니면 그 애가 더 이상 어디에 있겠어?” 그가 덧붙였다.


"멍청이! 사악한 인간!" 여자가 울음을 뚝 그치더니 매섭게 소리 질렀다. "당신에게는 마음이 없어. 자기 자식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아. 다른 사람이라면 불에서 구해 냈을 텐데……. 이 남자는 멍청이예요.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에요. 당신은 고결한 분이지요." 여자는 흐느끼며 피에르를 향해 빠르게 말했다.

"옆집에서 불이 났는데, 그 불이 우리 집까지 덮쳤어요. 아이들을 찾았는데 카테치카가 없어요. 오, 하느님! 오, 오, 오!" 그녀는 다시 흐느꼈다. "내 사랑하는 자식, 그 애가 불에 타 버렸어요! 불에 타 버렸다고요."


"그 아이는 어디에, 도대체 어디에 있었습니까?" 피에르가 물었다. 여자는 그의 활기찬 표정에서 이 사람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고 이해했다.

"어르신! 아버지!" 그녀가 그의 다리를 잡고 외쳤다. "은인이시군요. 아니스카, 어서 가, 이 불결한 것아, 이 어른을 모시고 어서 가." 그녀가 하녀에게 호통을 쳤다.

"안내해, 안내해 줘 내가……. 내가. 내가 하겠다." 피에르가 헐떡이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지저분한 하녀가 짝 뒤에서 나와 땋은 머리를 정돈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는 뭉툭한 맨발로 앞장서서 샛길을 걸었다. 피에르는 고통스러운 혼수상태에서 갑자기 삶에 눈을 뜬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눈은 생명의 광채로 반짝였다. 그는 하녀를 뒤따라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그녀를 앞질러 포바르스카야 거리로 나갔다.



"이쪽이에요, 아저씨" 하녀가 소리쳤다. "우리는 골목으로 들어가서 니쿨린가(붉)의 저택을 지나면 돼요."

피에르는 뒤돌아서 계속 걸어갔고,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가끔씩 뛰기도 했다. 하녀는 길을 건너 왼쪽 골목으로 돌더니, 집 세 채를 지나 오른쪽 대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로 여기예요." 하녀는 이렇게 말하고, 안마당을 가로질러 뛰어가 나무로 지은 작은 결채를 가리켜 보였다. 그 곁채는 환하게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한쪽은 무너졌고, 다른 쪽은 불타고 있었다.


피에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이 저택 창문에서 어떤 금속성 물건으로 가득 찬 장롱 서랍을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아래 서 있던 프랑스 병사들이 서랍으로 다가갔다.

"이 자식은 또 뭘 찾는 거야?" 프랑스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피에르에게 소리쳤다.

"이 집에 있던 아이요. 혹시 어린아이를 보지 못했습니까?" 피에르가 말했다.

병사들 가운데 한 명이 피에르가 장롱 서랍에 든 은제품과 청동 세공품을 그들한테서 빼앗을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듯 피에르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어린아이?” 한 프랑스인이 위에서 외쳤다. “정원에서 무언가가 빽빽 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마 이자의 아이일 수도 있지. 뭐, 모름지기 인간다워야 하지. 우리 모두 사람이잖아…….”

“그 아이가 어디 있습니까? 그 아이가 어디 있어요?” 피에르가 물었다.

“이쪽이에요. 이쪽!” 프랑스인이 창문에서 저택 뒤 정원을 가리키며 그를 향해 외쳤다.

"잠깐 기다려요. 당장 내려갈 테니."


그리고 실제로 1분 후 한쪽 뺨에 점이 있는 검은 눈의 프랑스 청년이 루바시카만 걸친 채 아래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더니 피에르의 어깨를 툭 치고 그와 함께 정원으로 달려갔다. 프랑스인이 피에르의 팔을 잡아끌며 둥그런 장소를 가리켰다. 긴 의자 밑에 장밋빛 원피스를 입은 세 살짜리 여자아이가 누워 있었다.

“저기 당신 아이가 있네요. 아, 여자애네. 그편이 더 낫지.”

프랑스인이 말했다. "잘 가요. 뚱보 씨. 모름지기 인간다워야 하지. 우리 모두 사람이잖소."



피에르는 여자아이를 붙잡아 번쩍 들어 손에 안았다. 여자아이는 필사적으로 악을 쓰는 목소리로 날카롭게 비명으 지르고, 자그만 손으로 피에르의 손을 뿌리치면서 침을 줄줄 흐르는 입으로 그의 손을 물어댔다. 피에르는 아이를 동정과 혐오가 뒤섞인 감정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꼭 끌어안고, 다른 출구를 찾기 위해 정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34


짐을 안은 채 안마당들과 골목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포바르스카야 길모퉁이에 있는 그루진스키가(家)의 정원으로 되돌아왔을 때, 피에르는 처음엔 자신이 아이를 찾으러 나섰던 그 장소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곳은 사람들과 집에서 끌어낸 세간들로 가득 쌓여 있었다. 게다가 화재를 피해 이곳에 있는 러시아 가족들 외에도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프랑스 병사들이 몇 명 있었다.


“누굴 잃어버렸어요? 당신은 귀족이지요, 그렇죠? 누구의 아이예요?”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피에르는 어린애가 검은 외투 차림으로 이 자리에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던 여자의 아이라고 말하면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있는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분명 안페로프 일가일 겁니다.” 늙은 부사제가 곰보 아낙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여, 은혜를 베푸소서, 주여, 은혜를 베푸소서!” 그는 습관이 된 굵은 저음으로 덧붙였다.


“저쪽 길로 가세요. 그 사람들은 거기에 있어요. 그 여자가 맞아요. 계속해서 애통해하며 울었어요.” 아낙이 다시 말했다. “그 여자예요. 바로 이쪽으로 오세요.”

그러나 피에르는 아낙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조금 전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시하여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루지야인 또는 아르메니아인 가족과 그들에게 다가가는 두 명의 프랑스 병사를 쳐다보았다.



부츠 없이 파란 외투를 걸친 조그마한 프랑스인은 그 가족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하더니 난데없이 노인의 다리를 붙잡았다. 노인은 급히 서둘러 부츠를 벗기 시작했다. 군용 외투를 걸친 또 다른 프랑스인은 젊은 여인 앞에 서서,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꼼짝 않고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받아요, 이 아이를 받으라고요.” 피에르가 아이를 건네며 명령조로 다급하게 아낙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이 아이를 그 사람들에게 데려다줘요. 꼭 데려다줘요!”

그사이 그 프랑스인은 느릿느릿 몸을 흔들며 젊은 여인에게 다가가더니 호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고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젊은 미인은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꼼짝하지 않고 계속 앉아 있었다. 마치 병사가 자신에게 하는 짓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피에르가 자신과 프랑스인들을 떼어 놓고 있는 그 몇 걸음 거리를 뛰어가는 동안, 군용 외투를 입은 길쭉한 약탈자가 젊은 여인의 목덜미에서 그녀가 차고 있던 목걸이를 잡아챘다. 그러자 젊은 여인은 두 손으로 목을 잡고 날카로운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 여자를 놔줘!” 피에르는 길쭉하고 등이 굽은 병사의 어깨를 붙잡아 내동댕이치며 격분한 목소리로 거칠게 말했다.


병사는 넘어졌다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그의 동료는 부츠를 내던지고는, 단검을 빼 들고 피에르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어이, 어리석은 짓 하지 마!” 그가 외쳤다. 피에르는 광기에 찬 희열에 빠져 있었다. 그는 그 상태에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그의 힘은 열 배로 강해졌다. 그는 맨발의 프랑스인에게 달려들었고, 병사가 미처 단검을 뽑기도 전에 때려눕히고 주먹을 퍼부었다. 주위를 둘러싼 군중의 호응하는 환호 소리가 들렸다.


그때 길모퉁이에서 말을 탄 프랑스 창기병들이 나타났다. 창기병들은 피에르와 프랑스 병사들 쪽으로 빠르게 다가와 그들을 포위했다. 피에르는 그 후에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때리기도 했고, 자신이 맞기도 했으며, 마침내 두 손이 묶였음을 느꼈으며, 프랑스 병사들의 무리가 둘러서서 몸수색한 것을 기억할 뿐이었다.


“중위님, 이자에게 단검이 있습니다.” 이것이 피에르가 처음으로 알아들은 말이었다.

“넌 누구냐?” 통역관이 물었다. “넌 상관에게 대답해야 한다.” 그가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당신에게 말하지 않겠소. 날 잡아가시오.” 피에르가 갑자기 프랑스어로 말했다.

“아! 아!” 장교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앞으로 가!”



이 프랑스인들 부대는 뒤로넬의 명령으로 약탈을 저지하기 위해, 특히 방화범들을 체포하기 위해 모스크바 거리 곳곳에 파견된 기병 순찰대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날 프랑스 고위급 관리들이 제시한 대체적인 견해로는 방화범들이 화재의 원인이었다. 기병 순찰대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의심스러운 러시아인 다섯 명, 즉 작은 상점 주인 한 명, 신학생 두 명, 농부 한 명, 하인 한 명과 약탈병 몇 명을 더 체포했다. 그러나 모든 용의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가장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 피에르였다. 그들 모두가 숙박하기 위해 영창이 설치된 주봅스키 성루의 대저택으로 끌려갔을 때, 피에르는 엄격한 감시 아래 따로 격리되었다.



<제3권 제3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