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권 제3부 (1)
제3부
1
인간의 이성으로는 운동의 절대적인 연속성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운동이든 인간이 그 법칙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취한 그 운동의 단위들을 고찰할 때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연속적인 운동을 이처럼 임의로 나누어 불연속적인 단위로 만드는 데서 인간의 망상 대부분이 비롯된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보다 열 배나 더 빠른데도 불구하고 앞에서 걸어가는 거북이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이른바 고대인의 궤변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답의 부조리함은 오로지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운동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데 반해, 운동의 불연속적인 단위들은 임의로 허용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더 작은 운동 단위를 취하면 우리는 문제 해결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것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무한소와 그로부터 시작하여 10분의 1에 이르는 급수를 가정하고 그 기하급수의 합을 취할 때만 우리는 문제 해결에 도달한다.
역사의 운동 법칙을 탐구하는 경우에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인류의 운동은 인간들의 자의지(自意志)의 무한한 양에서 흘러나오면서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운동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역사의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자의지의 총합인 연속적 운동의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이성은 임의적이고 불연속적인 단위들을 가정한다. 역사학은 고찰을 위해 그 운동 속에서 언제나 더 작은 단위를 취하고, 그러한 방법으로 진리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역사가 취한 그 단위가 아무리 작아도, 다른 것과 분리된 단위를 가정하고 어떤 현상의 시작점을 가정하고 모든 사람의 의지가 한 역사 인물의 행위로 표현된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거짓임을 우리는 느끼고 있다. 관찰을 위해 무한소 단위(역사의 미분, 즉 인간들의 동질적인 욕구)를 가정하고 적분법(이 무한소의 총합을 취하는 것)을 달성할 때만 우리는 역사의 법칙에 대한 이해를 기대할 수 있다.
유럽에서 19세기 초반의 15년 동안 수백만 인간들의 평범하지 않은 움직임이 제시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버리고 유럽의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돌진하여 약탈하고 서로 죽이고 의기양양해하고 낙담한다. 몇 년 사이에 삶의 흐름 전체가 바뀌고 그것이 강화된 움직임을 나타낸다. 그 움직임은 처음에 강성해지다가 그다음에는 쇠약해진다.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떤 법칙에 따라 일어난 것일까? 하고 인간의 이성은 묻는다.
역사가들은 이 질문에 답하면서 파리 시내의 한 건물에 모인 수십 명의 행동과 말을 우리에게 서술하고, 그 행동과 말을 혁명이라 일컫는다. 그다음에 나폴레옹과 그에게 찬성하거나 반대한 몇몇 인물들의 상세한 전기를 제공하고, 이들의 일부가 다른 인물들에게 미친 영향을 이야기한다. 그러고는 그것이야말로 이 움직임이 일어난 원인이라고, 그것이 바로 움직임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그러한 설명을 믿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그 설명 방법이 신뢰할 만하지 않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설명에서는 가장 미미한 현상이 가장 강력한 현상의 원인으로 채택되곤 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자의지의 총합이 혁명과 나폴레옹을 만들었으며, 오직 이 자의지의 총합만이 혁명과 나폴레옹을 용인하고 파멸시켰던 것이다.
‘정복이 일어났을 때는 언제나 정복자가 있었다. 그리고 국가에 격변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다.’ 역사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정복자들이 출현했을 때에는 언제나 전쟁이 있었다고 인간의 이성은 답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복자들이 전쟁의 원인이었으며, 한 사람의 개인적 행동에서 전쟁의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내가 시계를 보는데 시곗바늘이 10시에 가까워진 것을 보게 되면 매번 이웃한 교회에서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시곗바늘이 10시에 가까워질 때마다 교회 종이 울렸다고 해서 시곗바늘의 위치가 종의 운동의 원인이라고 결론지을 권리가 나에게는 없다.
역사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 우리는 관찰 대상을 완전히 바꾸어 황제들과 대신들과 장군들은 가만 내버려 두고, 대중을 다스리는 동질적인 무한소의 요소들을 연구해야 한다. 인간이 이러한 방법으로 어느 정도나 역사의 법칙들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지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직 이 방법에만 역사의 법칙을 포착할 가능성이 놓여져 있다는 점과, 이 방법에 인간의 이성이 들인 노력은 그동안 역사가들이 다른 방식에 들인 노력의 1백만분의 1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2
8월 26일 저녁에는 쿠투조프도, 러시아군 전체도 보로디노 전투의 승자가 자신들이라고 확신했다. 쿠투조프는 군주에게도 그렇게 편지를 썼다. 쿠투조프는 적을 완전히 격파하기 위해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과 그다음 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손실이며 군대의 절반에 달하는 손실에 관한 소식이 도착하면서 새로운 전투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쿠투조프는 다음 날 공격하고 싶어 했고, 군 전체도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나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실행하려는 의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을 실행할 가능성이 필요한데 그 가능성이 없었다. 마침내 9월 1일 군대가 모스크바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군의 여러 부대의 사기가 한껏 고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의 힘은 이 부대들이 모스크바 너머로 이동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군대는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행군하는 만큼 퇴각했고, 모스크바를 프랑스군에 내주고 말았다.
'왜 쿠투조프는 퇴각할 때 이런저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을까, 왜 모스크바를 버린 후 칼루가 가도로 곧장 퇴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모든 총사령관들의 활동이 항상 벌어지게 되는 그런 불가피한 상황을 잊어버렸거나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지휘관의 상황은 우리가 상상하는 편안하고 안정된 상황과 전혀 다르다.
게다가 러시아군이 모스크바로부터 5베르스타 떨어져 있던 상황에서 이러한 질문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언제 결정되었는가? 그것은 드리사 근교에서, 스몰렌스크 근교에서, 무엇보다 뚜렷하게는 24일의 셰바르디노 근교와 26일의 보로디노 근교에서, 그리고 보로디노에서 필리까지 퇴각하는 동안 매일, 매시, 매분 결정되고 있었다.
3
러시아 군대는 보로디노에서 퇴각해 필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쿠투조프는 도로고밀로보 관문으로부터 6베르스타 떨어진 포클론나야 언덕에서 승용 마차에서 내렸고, 길가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았다. 장군들의 큰 무리가 그의 주위에 모였다. 모스크바에서 온 라스톱친 백작도 그 무리에 있었다. 비록 그 때문에 소집된 것도 아니고 그 모임이 그렇게 불린 것도 아니었지만 모두들 그것이 군사 회의라고 느꼈다.
다들 총사령관 근처에 있으려고 애썼으며, 자신들의 말이 그에게 들리도록 이약했다. 군사회의에서 총사령관은 귀를 기울여 들었고, 가끔씩 그의 주변에서 한 말에 대해 되물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대화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어떤 의견도 표명하지 않았다.
쿠투조프는 이 모든 대화들 중에서 한 가지를 보았다. 말 그대로 모스크바 방어는 물리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 즉 어느 정신 나간 총사령관이 전투 명령을 내린들 혼란만 일어날 뿐 전투는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지휘관들이 스스로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전투에 어떻게 자기 부대를 끌고 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패배를 뻔히 알면서 사우러 나갈 수는 없었다.
그 진지를 선택한 베니히센은 자신의 러시아적인 애국심을 열렬히 내보이면서 (쿠투조프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은 채 그 말을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모스크바 방어를 고집했다. 쿠투조프는 베니히센의 목적을 대낮같이 훤히 알아보았다. 방어에 실패할 경우 쿠투조프에게 잘못을 덮어씌우고, 방어에 성공할 경우 자기 공으로 돌리고, 자신의 주장이 거부될 경우에는 모스크바를 버렸다는 죄를 씻으려는 것이었다.
지금 쿠투조프에게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과연 나폴레옹을 모스크바까지 오도록 허용한 것이 나란 말인가? 그리고 도대체 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그것이 언제 결정되었는가? 내가 플라토프에게 전령을 보내 퇴각 명령을 내린 어제인가, 아니면 내가 졸면서 베니히센에게 지휘하라고 명령한 그저께 저녁인가? 모스크바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군대는 퇴각해야만 하고, 이 명령을 내려야만 한다.'
그는 자기 혼자만이 이 어려운 조건에서 군의 수장을 맡을 수 있으며, 불패의 나폴레옹을 자신의 적으로 두려움 없이 인식할 수 있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이 내려야만 하는 명령을 생각하며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 무언가를 결정해야만 했고, 주변의 대화들을 중지시켜야만 했다.
그는 고위급 장군들을 자기 쪽으로 불러 이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내 머리가 좋든 나쁘든, 더 이상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겠소.”
4
농부 안드레이 사보스티야노프의 가장 좋은, 널찍한 통나무 집채에서 2시에 회의가 소집되었다. 대공작이 귀여워해서 차 마시는 시간에 설탕 한 조각을 준 안드레이의 손녀인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 말라샤만 큰 통나무 집채의 페치카 위에 남아서 연이어 들어와 성화가 놓여 있는 구석 쪽, 성화들 아래의 널찍한 긴 의자에 자리를 잡는 장군들의 얼굴과 군복과 십자 훈장을 수줍고도 즐거운 표정으로 구경했다.
베니히센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전투를 해 보지도 않고 러시아의 신성한 고대의 수도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방어할 것인가?”
갑자기 쿠투조프가 성난 목소리로 그 말의 위선적인 어조를 지적했다."백작 각하, 당신께 감히 말씀드리면, 그 질문은 러시아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소. '러시아의 구원은 군대에 있다. 군대와 모스크바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는 것이 이득인가, 아니면 전투 없이 모스크바를 내주는 것이 이득인가?’ 나는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 여러분의 의견을 알고 싶소.”
논쟁이 시작되었다. 베니히센은 아직 게임에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르몰로프와 도흐투로프와 라옙스키는 베니히센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들은 지금 회의가 전쟁의 필연적인 흐름을 바꿀 수 없으며, 모스크바는 지금 벌써 버려졌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여러분!” 쿠투조프가 말했다. “나는 백작의 계획에 찬성할 수 없소. 적과 근접한 거리에서 군대를 이동하는 것은 항상 위험한 법이오. 전쟁의 역사가 이 판단을 확증하오."
대화가 중단되던 어느 한순간에 쿠투조프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여러분, 내가 깨진 항아리값을 물어내야 할 것 같소.” 그가 말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테이블로 다가갔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의견을 들었소. 몇몇 분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그는 말을 멈췄다) 폐하와 조국이 내게 부여한 권한으로, 나는 퇴각을 명하는 바이오.”
이 말에 뒤이어 장군들은 장례식 후에 떠날 때처럼 엄숙하고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떠나기 시작했다.
5
전투 없이 군대를 퇴각시킨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건, 즉 모스크바를 버리고 방화한 사건에서 우리에게 이 사건의 주모자로 보이는 라스톱친은 바로 그 시각에 쿠투조프와 완전히 정반대로 행동했다. 이 사건, 즉 모스크바를 버리고 방화한 사건은 보로디노 전투 이후 싸움 없이 모스크바 너머로 퇴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스몰렌스크를 시작으로 러시아 대지의 모든 도시들과 농촌들에서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것과 똑같은 사건이 라스톱친 백작의 개입이나 그의 전단 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민중은 태평하게 적을 기다렸고,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적이 다가오자마자 주민들 가운데 부유한 부류는 자신들의 재산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가난한 부류는 그대로 남아 모스크바에 남은 것을 불태우고 파괴했다.
“위험을 피해 달아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겁쟁이들만 모스크바에서 달아난다.”7월 초와 8월 초에 미리 모스크바를 떠난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라스톱친은 전단을 통해 모스크바를 떠나는 것은 치욕이라는 생각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겁쟁이들이라는 칭호를 얻는 것이 부끄러웠고, 떠나는 것이 부끄러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떠났다.
맨 처음 떠난 사람들은 부유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프랑스인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버림받아 불태워질 게 분명한 이 거대하고 부유한 수도의 위대한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떠났다. 그 결과로 인해 러시아 국민의 가장 빛나는 영광으로 길이 남게 될 위대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편 라스톱친 백작은 피란 가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하고, 관청들을 이전하기도 하고, 술 취한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기를 지급하기도 하고,...... 모스크바에 불을 지를 것을 암시하기도 하고, 직접 자택을 불태웠으며 프랑스인들이 자신의 보육원을 파괴한 것에 대해 엄중히 비난하는 성명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는 모스크바 소각의 영예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것을 거부하기도 하고, 민중에게 첩자를 전부 붙잡아 끌고 오라 명령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했다며 민중을 비난하기도 했다......"
이 남자는 당시에 벌어지고 있던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다만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하고, 누군가를 놀라게 만들고, 애국적이고도 영웅적인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마치 소년처럼, 사람들이 모스크바를 버리고 불태운 그 위대하고 필연적인 사건에 장난질을 하면서, 그도 함께 휩쓸고 가려 하는 거대한 민중의 흐름을 조그마한 손으로 때로는 부추기기도 하고, 때로는 제지하려고도 애썼다.
6~7
궁정 사람들과 함께 빌나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엘렌은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엘렌은 국가에서 가장 높은 직위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어느 고관의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빌나에서 외국의 젊은 왕자와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녀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을 때, 왕자와 고관 모두 페테르부르크에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엘렌은 이런 난처한 상황에서도 자기 행동을 감추거나 교활한 술책을 부리지 않았고 반대로 마치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진정한 위인처럼, 즉시 자신을 정당한 입장에 놓고, 자신의 정당성을 진심으로 믿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잘못된 입장으로 몰아넣었다.
젊은 외국인이 처음으로 과감히 그녀를 비난했을 때 그녀는 아름다운 머리를 오만하게 치켜들고 몸을 반쯤 그를 향해 돌린 채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게 남성들의 이기주의와 잔인함이에요! 저도 더 나은 것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여성은 당신네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물로 바치고, 괴로움을 겪죠. 그런데 이런 것이 여성에게 주어지는 보상이군요. 전하, 전하께서는 무슨 권리로 저에게 애정과 우정의 감정을 해명하라고 요구하시나요? 그분은 저에게 아버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 분이셨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그럼 전 당신의 노예가 되겠어요.” 엘렌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저와 결혼할 만큼 스스로를 낮추려 하지 않는군요. 당신은…….” 엘렌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법률이, 종교가…….” 젊은 외국인은 이미 누그러든 채 말했다.
“법률이, 종교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것들을 만든 거죠!” 엘렌이 말했다.
중요 인사는 그런 단순한 생각이 자신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에 깜짝 놀랐다. 그리하여 그는 친한 예수회 신부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엘렌은 카멘니 오스트로프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베푼 매혹적인 축연에서 눈처럼 하얀 머리칼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지닌, 그다지 젊지 않지만 매력적인 무슈 드 조베르를 소개받았다.
어느 날 그는 백작 부인을 가톨릭 성당으로 데려갔고, 엘렌은 고해성사를 받고 자신이 진정한 가톨릭교에 입교했다는 것, 며칠 있으면 교황도 그녀를 알게 되어 어떤 서류를 보내리라는 것을 알고 만족스러워했다. 그녀는 이 모든 말과 보살핌의 목적이 무엇보다 그녀를 가톨릭교로 개종시켜 예수회 기관들을 위해 돈을 취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그녀는 그에 대한 암시를 받았다) 깨닫고는 돈을 주기에 앞서, 자신을 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여러 가지 수속들을 처리해 달라고 주장했다.
엘렌은 이 문제가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단순하고 쉽다는 것, 그러나 세속의 권력이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바라볼지 그녀의 지도자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엘렌은 상류 사회 안에서 이 문제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늙은 고관의 질투를 자극하며, 그에게도 첫 번째 구혼자에게 한 것처럼 똑같이 말했다. 즉 그녀에 대한 권리를 얻을 유일한 방법은 그녀와 결혼하는 것뿐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소문은 페테르부르크에 순식간에 퍼졌다. 소문의 내용은 엘렌이 남편과 이혼하려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만약 그런 소문이 퍼졌다면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 불법적인 계획에 반대하고 나섰을 것이다) 불행하고 매력적인 엘렌이 두 사람 가운데 누구와 결혼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인가가 아니라, 어느 파트너와 결혼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될 것인가, 궁정은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해 여름 페테르부르크에 온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아흐로시모바만이 세간의 여론에 반하는 자신의 의견을 직접 표명했다. 무도회에서 엘렌을 만난 그녀는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곳의 너희들은 살아 있는 남편을 버리고 결혼하기 시작했다지. 아마 넌 이런 새로운 것을 네가 생각해 낸 거라고 하겠지만, 얘야, 넌 선수를 뺏겼어.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에 생각해 냈던 거야. 어디에서나……”
엘렌은 빌리빈에게 조언을 구했다.
"만약 당신이 왕자와 (이 사람은 젊은 사람이었다) 결혼하면…….” 그는 한 손가락을 꼽았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가능성을 영원히 잃게 됩니다. 덧붙여서 궁정도 불만스러울 겁니다. 그런데 만약 노백작과 결혼하면, 당신은 그분의 여생을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왕자도 고관의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이 더 이상 굴욕적인 일은 아니겠죠.” 빌리빈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미간을 폈다.
8월 초 엘렌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그녀는 (그녀가 자신을 몹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그녀는 그에게 자신은 N. N.과 결혼할 것이며, 유일하고 참된 종교에 입교했으며, 이 편지의 전달인이 전할 이혼 절차를 전부 이행해 주기 바란다고 알렸다.
나의 친구, 당신이 하느님의 거룩하고 강하신 보호 아래 있기를 하느님께 기도하겠어요.
당신의 친구 엘렌
이 편지는 피에르가 보로디노 평원에 있을 때 피에르의 집에 전달되었다.
8~9
보로디노 전투가 끝날 무렵, 두 번째 라옙스키 포대에서 달려 내려온 피에르는 병사들 무리와 함께 야전 응급 치료소에 도착했다. 그는 부상자들의 피를 보고 비명과 신음 소리를 들으며 병사들 무리에 섞여 계속해서 서둘러 갔다. 피에르가 이제 온 마음을 다해 소원하는 한 가지는 이날 하루 동안 겪은 소름 끼치는 인상들로부터 좀 더 빨리 벗어나서 삶의 익숙한 조건으로 돌아가 자기 방 침대에서 평온히 잠드는 것뿐이었다.
피에르가 길에서 만난 병사들가 함께 모자이스크에 이르러 도시의 가파른 언덕을 오를 무렵에는 벌써 수탉이 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숙소가 언덕 아래 있으며, 그곳을 이미 지나쳐 버렸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병사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언덕 중턱에서 자신의 조마사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것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마사는 그를 찾아 시내를 뒤지다시피 돌아다니다가 허탕을 치고 여인숙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조마사가 어둠 속에서 하얗게 보이는 피에르의 모자로 그를 알아보았다.
“백작 각하. 우리는 벌써 포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걸어오십니까? 도대체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 그래.” 피에르가 말했다. 여인숙의 농가 방에는 자리가 없었다. 모든 방들이 꽉 차 있었다. 피에르는 안마당으로 나와 외투를 머리까지 푹 덮어쓰고 자신의 콜랴스카에 드러누웠다.
피에르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갑자기 현실처럼 쾅, 쾅, 쾅 하는 포성이 들리고, 신음 소리, 비명 소리,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피와 화약 냄새가 나고, 공포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외투 밖으로 머리를 들었다. 안마당은 조용했다.
‘그런 건 더 이상 없어, 정말 감사합니다, 하느님.’ 피에르는 다시 외투를 머리까지 덮어쓰며 생각했다.
‘병사가 되는 거야, 그냥 병사가!’ 피에르는 잠에 빠져들면서 생각했다. ‘나의 온 존재로 그 공동생활 속에 들어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으로 나를 흠뻑 적시자. 그러나 어떻게 이 잉여적이고 악마적인 모든 것들을, 이 겉 사람의 모든 짐들을 내던질 수 있을까? 한때 난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었지.'
‘전쟁이란 인간이 하느님의 법에 인간의 자유를 내맡기는 가장 힘든 순종이다.’ 꿈 속에서 목소리가 말했다. ‘너는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소박하다. 그들은 말하지 않지만 행동한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은이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은 금이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그 무엇도 다스릴 수 없다. 만약 고난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 한계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할 것이다.'
조마사, 마부, 문지기가 피에르를 깨우며 장교 하나가 프랑스군이 모자이스크 부근으로 진격해 오고 있으며, 아군은 후퇴하는 중이라는 소식을 갖고 찾아왔다 돌아갔다고 이야기했다. 피에르는 일어났다. 그리고 마차에 말을 매고 자기를 뒤쫓아 오라는 지시를 내린 후, 시내를 걸어서 통과했다. 군대는 1만 명가량의 부상자들을 남기고 떠나는 중이었다. 피에르는 자신을 따라잡은 콜랴스카를 친분이 있는 부상당한 장군에게 제공하고 그와 함께 모스크바로 향했다. 도중에 피에르는 처남과 안드레이 공작의 죽음을 알았다.
10
30일, 피에르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관문 근처에서 라스톱친 백작의 부관과 마주쳤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당신을 찾았습니다.” 부관이 말했다.“백작님이 당신을 꼭 보셔야 한다고 합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로 지금 즉시 찾아와 달라고 청하십니다.”
피에르는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삯마차를 잡아타고 총사령관에게 갔다.
라스톱친 백작은 이날 아침에야 소콜니키에 있는 자신의 교외 별장에서 시내로 돌아왔다. 백작 저택의 대기실과 응접실은 그의 요청으로 왔거나 지시를 받으러 온 관료들로 가득했다. 관료들과 여러 관청의 장(長)들은 모스크바가 적의 손에 넘어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책임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의 부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들고 총사령관을 찾아온 것이다.
피에르가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 군대에서 온 전령이 백작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전령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문들에 가망 없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홀을 지나갔다.
피에르는 관료들의 무리로 다가갔다. 피에르와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은 자신들의 대화를 계속했다.
"그게 뭡니까?” 피에르가 물었다.
“새로운 전단입니다.”
피에르는 그것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대공작 각하는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오는 군부대들과 좀 더 빨리 합류하기 위해 모자이스크를 지나 적이 불시에 덮치지 않을 견고한 장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대공작 각하께 48문의 대포와 포탄들을 보냈다. 대공작 각하는 마지막 피한 방울이 남아 있는 한 모스크바를 지킬 것이며, 시가전도 치를 각오라고 하신다. 형제들이여, 관청을 폐쇄한 것을 걱정하지 마라. 공무 정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심판으로 악당을 처리 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 이를 경우, 나에게는 도시와 농촌의 용감한 젊은이들이 필요하다. 그때는 대략 이틀 전에 미리 그대들에게 호소하겠다. 지금은 필요 없다. 그래서 난 묵묵히 있는 것이다. 도끼도 좋고, 창도 나쁘지 않다. 가장 좋은 것은 쇠스랑이다. 프랑스인은 호밀 다발보다 무겁지 않다. 내일 점심 식사 후, 나는 이베르스카야 성모 성화를 예카테리나 병원의 부상자들에게 받들고 가겠다. 우리는 그곳에서 성수식을 거행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곧 쾌유될 것이다. 나도 지금 건강하다. 나는 한 쪽 눈이 아팠지만, 이제 두 눈으로 잘 보고 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한쪽 눈이 아팠지만, 이제 두 눈으로 잘 보고 있다’라니요.” 피에르가 말했다.
“백작의 눈에 다래끼가 났었답니다.” 부관이 웃으면서 말했다.“민중이 백작께서 어떠신지 물으러 왔다고 제가 말씀드렸을 때, 백작께서 무척 걱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부관이 갑자기 미소를 띠고 피에르를 돌아보며 말했다.“당신 가정에 염려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마 백작 부인, 당신 부인이 뭔가를…….”
“난 아무것도 듣지 못했는데요.” 피에르가 무심하게 말했다.
백작 부인이, 당신 부인 말입니다, 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던데요. 십중팔구 헛소리이겠지만요…….”
“아마 그럴 겁니다.” 피에르는 정신 나간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11
이야기 중간에 피에르는 총사령관에게 불려 갔다. 라스톱친 백작의 집무실로 피에르가 들어갔을 때, 라스톱친은 얼굴을 찌푸린 채 한 손으로 이마와 눈을 문지르고 있었다.
“아! 안녕하시오, 위대한 전사.” 그 사람이 나가자마자 라스톱친이 말했다. “당신의 영광스러운 공훈에 대해 들었소.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여보시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당신은 프리메이슨이 아닙니까?”
“네, 나는 프리메이슨입니다.” 피에르가 대답했다.
라스톱친이 고함을 쳤다."당신에게 청하건대, 클류차료프와 같은 무리들과 관계를 끊고 여길 떠나십시오. 난 어리석은 생각을 없앨 것입니다. 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누구든 말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보시게, 친구로서 조언입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시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바입니다. 들을 수 있는 자는 복이 있소."
피에르는 집에 돌아와 여덟 명의 사람을 만나고 마침내 아내가 보낸 편지의 봉인을 뜯어서 다 읽었다.
‘포대의 병사들, 안드레이 공작은 죽고…… 노인은……. 단순함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다. 고난을 겪어야 한다…… 모든 것의 의미는…… 연결시켜야 한다…… 아내가 결혼을 한다……. 잊고 이해해야 한다…….’그는 침대로 다가가 옷도 벗지 않은 채 그 위에 푹 쓰러져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그가 잠에서 깨어나자 하인장이 와서 라스톱친 백작이 일부러 보낸 경찰관이 찾아와 베주호프 백작이 떠났는지, 혹은 떠날 것인지 알고자 한다고 보고했다. 피에르는 서둘러 옷을 차려입었다. 그러고는 후문 쪽으로 가서 대문을 나섰다. 그 후부터 모스크바가 파괴될 때까지 베주호프가의 사람들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찾았음에도 더 이상 피에르를 보지 못했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12
로스토프가 사람들은 9월 1일까지, 즉 적이 모스크바로 들어오기 전날까지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페탸가 오볼렌스키의 카자크 연대에 입대하여 그 연대를 편성하고 있던 벨라야체르코비로 떠난 후 백작 부인에게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녀는 니콜라이를 불러들이려고 애썼으며, 페탸를 자신이 직접 찾아가거나 페테르부르크 어딘가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었지만, 결국 이것도 저것도 모두 불가능했다.
백작이 많은 조언을 받고 상담을 한 끝에 마침내 백작 부인을 안심시킬 방안을 생각해 냈다. 그는 오볼렌스키 연대에 있던 페탸를 모스크바 근교에서 편성 중이던 베주호프 연대로 전속시켰다. 페탸는 여전히 군 복무를 하고 있었지만, 이 전속으로 백작 부인은 한 아들이라도 자기 날개 아래 두고 볼 수 있다는 위안을 얻었다.
‘저 사람들이 내게 무슨 상관이야, 나에게는 페탸 말곤 아무도 필요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이미 8월 20일부터 로스토프가 사람들이 알고 지내는 거의 모든 지인들이 모스크바를 빠져나갔고, 또 모두들 가능한 한 빨리 떠나야 한다고 백작 부인을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보물,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페탸가 돌아올 때까지 피란을 떠나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8월 28일에 페탸가 돌아왔다. 열여섯 살 장교에게는 자신을 맞는 어머니의 병적이고 열정적인 다정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모스크바 전체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부상당한 수천 명의 군인들이 매일 도로고밀로보 관문으로 실려 와 모스크바 전역으로 분산되었다. 그리고 주민들과 그들의 재산을 실은 수천 대의 짐마차가 다른 관문으로 모스크바를 빠져나갔다. 라스톱친의 전단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과는 별개로 서로 모순되는 이상한 소문들이 도시 전체에 퍼졌다.
모스크바가 점령되기 직전의 이 사흘 동안 로스토프가 일가족은 모두 일상의 온갖 일로 분주했다. 가장인 일리야 안드레이치 백작은 사방에서 떠도는 소문을 모으면서 끊임없이 마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으며, 집에 돌아오면 출발 준비에 대한 막연하고 피상적이면서 서두르는 지시들을 내렸다. 백작 부인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을 감독하면서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다. 소냐 혼자만 실무적인 면, 즉 짐 꾸리는 일을 처리했다.
13
8월 31일 토요일, 로스토프가의 저택에서는 모든 것이 온통 뒤죽박죽되어 있었다. 문들은 활짝 젖힌 채 열려 있었고, 모든 가구들은 밖으로 실어 내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거울과 그림들은 벽에서 떼어 냈다. 방에는 궤짝이 있고, 건초와 포장지와 끈들이 흩어져 있었다. 짐을 나르는 농부와 하인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세공 마루 위를 돌아다녔다.
이전 하녀장이었던 마브라 쿠즈미니시나 노파가 대문 가에 서 있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멍석으로 포장을 친 텔레가로 다가가더니 그 안에 누워 있는 창백한 얼굴의 젊은 장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타샤는 몇 걸음 앞으로 나가 주저하듯 멈춰 서서 손수건을 여전히 붙잡은 채 하녀장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를 어째요, 모스크바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에요?”
나타샤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부상당한 장교의 얼굴을 슬쩍 한 번 쳐다보고는 곧장 마주 오고 있는 지휘관이라고 하는 소령에게 갔다.
“부상자들을 우리 집에 머물게 해도 될까요?” 그녀가 물었다.
소령은 웃음을 지으며 한 손을 챙에 대고 경례를 했다.
“아, 그럼요, 왜 안 되겠어요, 그래도 됩니다.” 그가 말했다.
나쁜 소식들을 가지고 돌아온 백작이 화가 나서 말했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꾸물거리고 있었어! “클럽도 문을 닫았고, 경찰도 떠나고 있더구나.”
그리고 나타샤에게 말했다. "이렇게 부탁하마,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짐을 꾸리는 일이나 도와라. 출발한다, 내일은 출발하는 거다…….”
식사 시간에 집으로 돌아온 페탸도 자신이 들은 소식들을 이야기했다.
그가 말하기를, 오늘 민중이 크렘린에서 무기를 지급받았고, 비록 라스톱친의 전단에는 이틀 전에 미리 소집하겠다고 적혀 있지만, 그러나 이미 내일 모든 민중이 무기를 갖고 트리 고리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것이며, 그곳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백작 부인은 아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의 붉게 상기된 쾌활한 얼굴을 두려움으로 벌벌 떨면서 쳐다보았다. 그녀는 떠나면서, 페탸를 자신들의 경호인이자 보호자로 함께 데려갈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기를 바라면서, 페탸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식사 후에 백작을 불러 가능하다면 좀 더 서둘러서 오늘 밤에라도 자기를 데리고 떠나 달라며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여태까지 완벽한 대범함을 보여 주던 그녀는 여성스러운 무의식적인 사랑의 꾀를 써서 오늘 밤 떠나지 않으면 자신은 공포로 죽고 말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런 척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무서웠다.
14
식사 후 로스토프가의 모든 집안 식솔들이 기쁨에 차서 서둘러 짐 꾸리기와 출발 준비에 들어갔다. 갑자기 일에 착수한 노백작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고 그들을 재촉하며 식사 후부터 쉬지 않고 안마당에서 집 안으로 또 반대로 오갔다. 나타샤도 모든 일에 대한 그녀 특유의 열정으로 갑자기 일을 시작했다. 그래서 드디어는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굉장한 노력을 요하고, 그녀에게 권위를 부여한 첫 번째 공적은 양탄자를 꾸린 일이었다.
이미 그녀는 충분히 신뢰받고 있었다. 백작은 나탈리야 일리니시나가 자신의 지시를 취소했다는 말을 들어도 화를 내지 않았고, 하인들도 짐마차에 밧줄을 매야 할지 말지, 짐마차에 짐이 충분히 실렸는지 아닌지 물으러 나타샤에게 왔다. 나타샤의 지시 덕분에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불필요한 물건은 남겨 두고, 가장 귀중한 물건들을 최대한 밀착해서 꾸려 쌌다.
이날 밤 포바르스카야 거리를 지나 새로운 부상자 한 명이 더 실려 왔다. 대문 가에 서 있던 마브라 쿠즈미니시나가 그를 로스토프가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했다. 마브라 쿠즈미니시나가 판단하기에 그 부상자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그녀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마브라 쿠즈미니시나는 부상자를 집 안으로 옮기도록 권했다.
“주인들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는 것은 피해야 해서 사람들은 부상자를 곁채로 옮겨 마담 쇼스가 쓰던 방에 눕혔다. 그 부상자는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이었다.
15
모스크바에 최후의 날이 밝았다. 맑고 상쾌한 가을 날씨였다.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이면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교회에서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앞으로 어떤 일이 모스크바에서 벌어질지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두 개의 지표만 모스크바 사회의 현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하층민, 즉 빈민 계층과 물가가 그것이다. 이날 아침 일찍 공장 노동자, 하인과 농부들은 거대한 무리를 지어 트리 고리에 모였다. 부질없이 라스톱친을 기다리던 그 무리는 모스크바가 적의 손에 넘어갈 거라 확신하고 모스크바의 주점과 선술집으로 흩어졌다. 이날의 물가도 상황을 시사했다. 무기, 금, 말과 수레 가격이 점점 오르고 지폐와 도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가치는 점점 떨어져 정오 무렵에는 모직 같은 값비싼 천이 반값에 팔리고, 농부의 말이 5백 루블에 거래되었다.
견실하고 유서 깊은 로스토프가의 경우, 이전 생활상의 붕괴가 매우 미약하게 나타났다. 하인들에 대해 말하자면 많은 하인들 가운데 세 사람이 야반도주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도둑맞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물가에 대해 말하자면 시골에서 도착한 서른 대의 짐마차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 엄청난 재산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마차들을 얻기 위해 로스토프가에 막대한 돈을 제안했다.
1일 아침, 잠에서 깬 일리야 안드레이치 백작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침실에서 나와 현관 계단으로 갔다.
“어떤가, 바실리이치? 준비는 다 되었나? 백작 부인이 깨면 곧장 출발하자!”
"그런데 당신들은 여기에 무슨 일로?” 그는 옆에 있던 장교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집에 묵고 있습니까?” 장교가 가까이 다가섰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졌다.
“백작,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제발…… 당신의 짐마차 중 어디든 타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갖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수레라도…… 상관없습니다…….”
“아! 네, 네, 그러지요.” 백작이 황급히 말했다. “매우, 매우 기쁩니다. 바실리이치, 저기 수레 한두 대 비우라고 지시하게. 그리고 또, 뭐…… 필요한 것이라도…….” 백작은 말을 얼버무리면서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곧바로 나온 장교의 열렬한 감사 인사가 백작의 지시를 무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백작 부인은 9시에 깨어났다. 그녀는 예전 하녀으로부터 마담 쇼스가 자기 짐을 내린다고 화가 나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물건을 다시 내린다면서요?”
“그게 말이야, 여보,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여보, 백작 부인…… 어떤 장교가 나를 찾아와선 부상자들을 위해 짐마차 몇 대를 내어 달라고 부탁하는구려."
그녀는 특유의 순종적이고 울먹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들어 봐요, 백작, 당신은 우리 집을 거저 팔더니 이제는 아이들의 재산까지 송두리째 날리려 하는군요. 당신이 말했잖아요, 우리 집에 있는 동산들이 10만 루블은 된다고요. 여보, 나는 동의할 수 없어요. 그렇게는 못해요. 당신 마음대로 해요! 부상자들은 정부가 책임져야지요. 그들도 알아요."
백작은 두 손을 내젓고 아무 말 없이 방에서 나가 버렸다.
“아빠, 베르크가 왔어요.” 나타샤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16
로스토프가의 사위인 베르크는 블라디미르 훈장과 안나 훈장을 목에 건 대령이었고, 여전히 참모장의 보좌관, 즉 제2군단 참모부 소속 제1분과 보좌관이라는 편안한 직위를 맡고 있었다.
그는 9월 1일 군대에서 모스크바로 왔다. 사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용무가 없었다. 그는 안마당의 짐마차들을 유심히 보고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매듭을 지으면서 현관 계단을 올랐다.
백작이 다급히 말했다. “군대는 어떤가? 퇴각하는 중인가? 아니면 전투가 있을 것 같나?”
“태초부터 계신 하느님만이 조국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장인어른.” 베르크가 말했다.
“군대는 영웅적인 정신으로 불타오르고 있으며, 이른바 우리의 수령님들이 회의하기 위해 지금 모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릅니다." 그러고 나서 베르크는 요즘 들은 온갖 이야기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저, 장인어른, 큰 청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방금 유수포프가의 집을 지나왔습니다.” 베르크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는 관리인이 달려와서는 뭔가 사 주지 않겠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에 들렀다가 작은 옷장과 화장대를 발견했습니다. 장인어른도 아시잖아요, 베루시카가 그 물건들을 얼마나 갖고 싶어 했고, 우리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싸웠는지요. 장인어른 댁 안마당에 농부들이 많던데 저에게 한 명만 빌려 주십시오. 돈은 후하게 지불하겠습니다. 그리고…….”
“아, 다들 썩 꺼져, 꺼져 버리라고!” 노백작이 외쳤다. “머리가 돌 지경이야.” 그리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그때 나타샤가 분노에 일그러진 얼굴로 폭풍처럼 방에 뛰어들어 빠른 걸음으로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이건 추악해요! 혐오스럽다고요!” 그녀가 외쳤다. “엄마가 그런 짓을 지시했을 리 없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니? 저들이 누군데? 뭘 하고 싶다는 거야?” 백작 부인이 말했다.
“누구라뇨, 부상자들이죠! 이럴 수는 없어요, 엄마. 이러면 안 돼요……. 아니에요, 엄마, 이건 옳지 않아요, 죄송해요, 제발, 엄마……. 엄마, 우리가 물건을 가져가 봤자 무슨 소용이겠어요? 안마당을 좀 보세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엄마! 이럴 수는 없어요!”
“아, 좋을 대로 해요! 내가 언제 못하게 했다고요!” 그녀는 입장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 하면서 말했다.
“엄마, 절 용서하세요!”
그러나 백작 부인은 딸을 밀치고 백작에게 다가갔다.
“여보, 당신이 필요한 지시를 내려요……. 난 이런 걸 잘 모르잖아요.” 그녀가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달걀이…… 달걀이 암탉을 가르치는군…….” 백작이 행복한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고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부끄러운 얼굴을 그의 가슴에 숨길 수 있어 기뻤다.
“아빠, 엄마! 제가 지시를 내려도 돼요? 그래도 돼요?” 나타샤가 물었다. “그래도 꼭 필요한 것은 다 가져갈 거예요…….” 나타샤가 말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타샤는 술래잡기를 할 때처럼 재빨리 홀을 지나 대기실로, 그리고 계단을 내려간 뒤 안마당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나타샤 주위에 모여들었다. 온 집안 사람들이 좀 더 일찍 이 일을 하지 않았던 것에 대가를 치르듯 부상자들을 짐마차에 싣는 새로운 일에 분주히 매달렸다. 부상자들은 창백한 얼굴로 방 밖으로 기어 나와 기쁨에 겨워 짐마차들을 에워쌌다. 짐마차가 있다는 소문이 인근에도 퍼지자 다른 집에 있던 부상자들도 로스토프가의 안마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차는 사람들로 꽉 찼다. 표트르 일리이치가 앉을 자리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애는 마부석에 앉히면 돼. 페탸, 마부석에 앉을 거지?” 나타샤가 외쳤다.
소냐도 쉴 새 없이 분주했다. 하지만 그녀가 부산을 떠는 목적은 나타샤와 정반대였다. 그녀는 남겨 두어야 할 물건들을 치웠다. 소냐는 백작 부인의 지시대로 물건 목록을 작성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애썼다.
17
안드레이 공작이 탄 마차가 현관 계단을 지나치며 소냐의 관심을 끌었다. 마침 소냐는 마차 승강장에 대기한 백작 부인의 높고 큰 승용 마차 안에서 하녀와 함께 백작 부인이 앉을 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건 누구 마차니?” 소냐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물었다.
“정말 모르세요, 아가씨?” 하녀가 대답했다. “부상당한 볼콘스키 공작님이세요. 그분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셨고 우리와 함께 떠나는 거예요. 그분의 생명이 위태롭대요.”
소냐는 승용 마차에서 뛰쳐나와 백작 부인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부상을 당해 생명이 위태로운 안드레이 공작이 이곳에 있어요. 우리와 함께 떠난답니다.”
백작 부인은 깜짝 놀란 눈을 하고 소냐의 손을 붙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타샤는?” 그녀가 말했다.
“나타샤는 아직 몰라요. 하지만 그분은 우리와 함께 가요.” 소냐가 말했다.
“생명이 위태롭다고 했지?”
소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부인은 소냐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다 준비됐어요.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나타샤가 생기 넘치는 얼굴로 뛰어 들어오며 물었다.
“별 이야기 아니야.” 백작 부인이 말했다. “준비됐으면 출발하자.”
마차를 타거나 도보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던 나타샤는 수하레바 탑을 돌 때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어머! 엄마, 소냐, 저길 봐요, 그 사람이에요!”
“누구? 누구?”
“봐요, 베주호프예요!” 나타샤가 마차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마부의 카프탄을 입은 키가 크고 뚱뚱한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타샤를 알아본 순간, 피에르는 즉각적인 감정에 굴복하여 재빨리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피에르는 나타샤가 내민 손을 잡고 걸으면서 (마차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에) 서툴게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백작, 무슨 일이에요?” 백작 부인이 놀라움과 동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긴요. 저에게 묻지 말아 주십시오.” 피에르는 이렇게 말하고 나타샤를 바라보았다. 기쁨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길이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도 그것을 느꼈다) 특유의 매력으로 그를 감쌌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모스크바에 남을 건가요?” 피에르는 답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요?” 그가 미심쩍게 물었다. “네, 모스크바에 있을 겁니다. 잘 가요.”
“백작,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당신 같지 않아요…….” 나타샤가 말했다.
“아, 묻지 마십시오, 저에게 묻지 마세요. 저도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내일…… 아, 아닙니다. 가세요, 어서 가세요.” 그가 말했다. “끔찍한 시대입니다.” 그러고는 마차에서 뒤처져 인도로 물러섰다.
18
피에르는 자기 집에서 사라진 후 고인이 된 바즈데예프의 텅 빈 아파트에서 벌써 이틀째 지내고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난 내막은 다음과 같다.
모스크바로 돌아와 라스톱친 백작을 만난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피에르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이 자기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한참 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인장이 들어와 I. A. 바즈데예프의 미망인 집에서 누가 찾아와 그녀가 시골로 떠나니 그 집에 있는 서적들을 가져가 달라는 요청을 전했다고 보고했다.
하인장이 나가자마자 피에르는 테이블에 놓인 모자를 집어 들고 뒷문을 통해 서재를 빠져나갔다. 아무도 그가 빠져나간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마차를 세워 바즈데예프의 미망인이 사는 파트리아르시예 연못이 있는 동네로 가자고 했다.
피에르가 문을 두드리자 게라심이 나왔다. 피에르가 5년 전에 토르조크에서 이오시프 알렉세예비치를 만났을 때 그와 함께 있던, 얼굴이 누르스름하고 턱수염이 없는 자그마한 바로 그 노인이었다.
“집에 계신가?” 피에르가 물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소피야 다닐로브나 마님은 자녀들과 토르조크에 있는 마을로 떠나셨습니다.”
“어쨌든 들어가겠네. 서적을 정리해야 해.” 피에르가 말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천국에서 편히 쉬시길!) 고인의 형제 마카르 알렉세예비치가 남아 계십니다. 아시겠지만 그분은 몸이 쇠약해서요.” 늙은 하인이 말했다.
피에르가 알기로, 마카르 알렉세예비치는 이오시프 알렉세예비치의 동생으로 술주정뱅이에 반쯤 미친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코가 불그레한 대머리 노인이 가운을 걸치고 맨발에 덧신을 신은 채 대기실에 서 있었다.
피에르는 은혜를 입은 고인이 살아 있을 때 몹시 긴장하면서 들어가곤 했던 음울한 서재로 들어갔다. 이오시프 알렉세예비치가 죽은 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먼지투성이 서재가 더욱더 음울해 보였다. 그는 먼지 쌓인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펼쳤다 덮었다 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옆으로 치우고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생각에 잠겼다. 두 시간이 더 지났다.
"저기.” 갑자기 피에르는 게라심의 프록코트 단추를 잡고 감격에 겨운 듯 반짝이는 촉촉한 눈동자로 노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기, 내일 전투가 있다는 것을 아나?”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게라심이 대답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게. 그리고 내 부탁 좀 들어주게…….”
"농부의 옷과 피스톨이 필요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피에르가 말했다.
그는 왜 그런 것이 필요한지 의문조차 품지 않고 바로 그날 밤 피에르에게 카프탄과 모자를 구해 주고는, 부탁한 피스톨은 다음 날 구해 놓겠다고 약속했다. 피에르가 나타샤를 만난 것은 게라심이 구해 준 증기로 소독한 마부의 카프탄을 입고 피스톨을 사기 위해 게라심과 함께 수하레바 탑 근처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19
9월 1일 밤, 쿠투조프는 러시아군에 모스크바를 통과하여 랴잔 가도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밤이 되자 첫 번째 부대가 출발했다. 야간에 행군을 시작한 부대는 서두르지 않으면서 천천히, 품위를 지키면서 이동했다. 그러나 새벽에 출발한 부대는 도로고밀로보 다리로 접근할 때쯤 서로 밀치며 다급하게 강을 건너려는 군인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이유 없는 초조와 불안이 부대를 사로잡았다. 9월 2일 오전 10시 무렵 도로고밀로보 근교의 넓은 들판에는 후위 부대만 남아 있었다. 러시아군은 이미 모스크바 너머와 모스크바 외곽에 있었다.
같은 시간, 즉 9월 2일 오전 10시 나폴레옹은 포클론나야 언덕에 있는 부대들 사이에 서서 그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포클론나야 언덕에서 바라보는 모스크바가 강과 정원과 교회와 더불어 드넓게 펼쳐졌다. 교회의 둥근 지붕들이 햇살 아래 별처럼 아른거려 모스크바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무수한 교회를 품은 이 아시아적인 도시, 모스크바, 저들의 성스러운 모스크바! 드디어 그 명성 높은 도시가 내 앞에 있다! 때가 왔다!” 나폴레옹이 말했다. ‘적에게 점령당한 도시는 순결을 잃은 처녀와 같군.’ 그가 생각했다.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에서도 투치코프에게 같은 말을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이던 오랜 열망이 마침내 실현되었다는 사실이 그 자신에게도 기이하게 느껴졌다.
‘나의 말 한마디, 나의 손놀림 한 번에 차르들의 고도(古都)가 파멸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라도 정복당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관대하고 위대해야 한다. 아니야, 내가 모스크바에 있는 것이 사실일 리 없다.’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저기 모스크바가 둥근 황금빛 지붕과 십자가를 햇빛에 반짝이고 아른거리며 나의 발아래 누워 있다.'
그렇지만 난 모스크바에 자비를 베풀 것이다. 야만과 압제의 오래된 기념비들 위에 나는 정의와 자비의 위대한 말을 쓸 것이다……. 알렉산드르는 이것을 무엇보다도 쓰라리게 받아들일 것이다. 난 그를 잘 안다. (나폴레옹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의 가장 큰 이유가 자기 자신과 알렉산드르의 개인 대 개인의 싸움인 것처럼 느껴졌다.)
크렘린의 높은 곳에서 (그래, 저것이 크렘린일 거야, 맞아) 내가 저들에게 정의의 법을 줄 것이야. 내가 저들에게 진정한 문명의 의미를 보여 줄 것이야....... 난 보야르들에게 말할 것이다. “난 전쟁을 원하지 않소.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모든 백성들의 평화와 안녕이오.” 그러나 난 안다. 저들 앞에 서면 난 용기가 절로 치솟아 언제나 그렇듯이 분명하고, 장중하고, 위엄 있게 저들에게 연설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진정 모스크바에 와 있단 말인가? 그렇다, 모스크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야르들을 데려와라.” 그는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한 장군이 눈부신 수행원들과 함께 보야르들을 데려오기 위해 말을 타고 즉시 떠났다. 두 시간이 지났다. 나폴레옹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포클론나야 언덕의 똑같은 자리에 서서 대표단을 기다렸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사용할 자신의 관대한 말투에 스스로도 황홀해했다. 상상 속에서 그는 차르의 궁정에서 러시아의 고관들과 프랑스 황제의 고관들이 만나게 될 회합 날짜를 정하고 머릿속으로 주민들의 마음을 달래줄 총독을 임명하기도 했다.
한편 황제의 뒤에 모여 있는 수행원들 사이에선 장군들과 육군 원수들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며 목소리를 낮춰 의논하고 있었다. 대표단을 데려오기 위해 보냈던 사람들이 모스크바가 텅 비었고 모든 시민들이 떠났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들이 두려운 것은 프랑스인들이 우스꽝스럽다고 일컫는 끔찍한 상황에 황제가 빠지지 않게 하면서 어떤 식으로 보고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한편 헛된 기다림에 지친 황제는 장엄한 순간이 너무 오래 이어지면 그 장엄함이 사라진다는 것을 배우의 감각으로 감지하고 한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알리는 포성이 적막하게 울려 퍼졌고 여러 방향에서 모스크바를 포위하고 있던 부대들이 트베리 관문, 칼루가 관문, 도로고밀로보 관문을 통해 모스크바로 진입했다.
나폴레옹은 군대의 행군에 이끌려 도로고밀로보 관문까지 그들과 함께 갔으나 그곳에서 다시 멈추었다. 말에서 내린 그는 카메르콜레시스키 성벽 옆을 오랫동안 거닐며 대표단을 기다렸다.
20
모스크바는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 아직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예전에 살았던 인구의 50분의 1 정도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스크바는 여왕벌이 없어져 생명력을 잃어 가는 벌집처럼 비어 있었다. 벌집 입구에는 방어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엉덩이를 위로 치켜든 채 경보음을 울리는 보초병들이 더 이상 없다. 고르고 나직한 소리, 물 끓는 소리와 비슷한 노동의 움직임 소리도 더 이상 나지 않고 조화롭지 못하고 분산된 무질서의 소리만 들린다.
나폴레옹이 지치고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카메르콜레시스키 성벽 옆을 서성거리며 사절단을 기다릴 때 (그는 이것이 비록 겉치레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예의라고 생각했다) 모스크바는 그처럼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상황에 걸맞게 나폴레옹에게 모스크바가 비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보고하자, 그는 보고한 사람을 성난 눈길로 쳐다보고는 돌아서서 아무 말 없이 계속 거닐었다.
“마차를 준비해.” 그가 말했다. 그는 당직 부관과 나란히 대형 마차에 올라 타 근교로 떠났다.
“모스크바가 텅 비었다.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일이군!”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폴레옹은 시내로 가지 않고 도로고밀로보 근교의 여인숙에 묵었다.
연극의 대단원은 실패로 끝났다.
<제3권 제3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