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김연경 옮김 민음사

by Andy강성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러시아어: 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브라티야 카라마조비, 1880년)은 러시아 최고의 문호 중 한 명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소설* 중 하나로, 그가 남긴 많은 명작들 중에서도 최고작으로 평가받는다. 참고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출간한 지 3개월 후에 사망했기 때문에 유작에 해당한다. * 《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1872), 《미성년》(1875)



이 소설은 주인공인 '알렉세이'라는 인물의 어린 시절을 동향인인 제삼자가 회상하는 형식으로 씌여졌는데, 본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3부 대장편으로 구상하였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출간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 장편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예프스키 생전에 탈고된 제1부는 미완성작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그 자체로서 훌륭한 완결성을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 스스로도 1부를 출간한 직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든 걸 쏟아냈다."라며 1부의 완결성을 자평했다고 한다.


어쨌든 1부 출간 이후 알렉세이가 주인공인 본편 2부를 쓰려고 했으나, 제대로 된 집필을 시작하기 전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사망함으로써 명목상 미완성작으로 남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남긴 2부의 초안 내용은 알렉세이가 혁명 세력에 가담하여 황제를 암살하고 처형당하는 줄거리였다고 한다. 참고로 주인공 알렉세이의 이름은 1878년 요절한 표도르 본인의 어린 아들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출판본 제목 페이지 출처 위키백과]


이 작품은 20세기 학계를 뒤흔든 유명인사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어니스트 헤밍웨이, 막심 고리키,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 등 서구권 유명 문호들 뿐 아니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쇼몽' 작가), 엔도 슈사쿠, 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 작가에게도 막강한 영향을 끼쳤으며,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철학자나 과학자에 영향을 줄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했다.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한 소설.
ㅡ 지그문트 프로이트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건 '종합 소설'이다. 이를 정의 내리기란 어렵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바로 그 예다.
ㅡ 무라카미 하루키

한 인간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창조해 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 이토록 경이로운 일은 일어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설명조차 필요치 않다.
ㅡ 헤르만 헤세

창작자의 내면에 이는 온갖 모순과 동요를 도스토예프스키보다 탁월하게 입증해 낸 작가도 없을뿐더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큼 이를 경이롭게 구현해 낸 작품 또한 없다.
ㅡ 조이스 캐럴 오츠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마린스키 자선 병원 의사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와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사이 7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나 15살 때까지 생가에서 지냈다. 아버지 쪽이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의사는 중인 계급이었으므로 넉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매우 거친 성격이었으므로, 자식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1846년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로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로부터 '제2의 고골'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였다. 데뷔 전에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직접 작품을 건네받아 읽었던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감동을 받은 나머지 밤 중에 그의 집을 찾아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어서 발표한 《백야》와 《분신》 등은 혹평을 면치 못했다. 이때부터 서구주의 사상에 끌리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미하일 페트라솁스키의 모임에 가담하였다.


젊은 시절 도스토예프스키는 페트라솁스키를 중심으로 작가 등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급진적 정치 모임에 참가하였다. 당시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첩자를 보내 정치 모임들을 감시하였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모임에서 절대 왕정의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불온문서로 간주되었던 벨린스키의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한 것이 원인이 되어 1849년 4월 23일 5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체포된 지식인들을 사형에 처할 생각은 없었으나, 당시 확산되고 있던 급진주의 정치 모임들에 대해 경고하고자 직전에 특별 사면할 계획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회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되고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백치》 등의 작품에 사형 집행 직전의 심정을 묘사하는 등 이 사건은 그의 작품 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시베리아 유형은 감옥 수형과 출소 후에 수도로 복귀하지 못하고 시베리아에서 복무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1854년까지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 수형 생활을 한다. 성서 이외에는 일절 출판물이 허용되지 않았던 환경에서 성서에 대한 깊은 독서와 감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혔던 죄수와 민중들의 생생한 삶이 그로 하여금 사회주의자에서 기독교적 인도주의자로의 사상적 변화를 겪게끔 하였다. 이 시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후일 《죽음의 집의 기록》을 펴냈다.


출소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세미팔라틴스크 수비대에서 4년 간 사병으로 근무하며 당시 남편이 있었던 여성 마리야 이사예바를 만난다. 마리야의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자 도스토예프스키는 1857년 당시 29세였던 그녀와 결혼한다. 그는 가까스로 1859년에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뒤 10년에 가까운 문학적 공백을 메꾸고자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재개하였다.


1880년 그의 최후의 걸작인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탈고하였다. 그즈음에는 이미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눈이 어두워져 있었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침대 누워 구술한 것을 아내 안나가 속기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81년 1월 28일에 폐동맥 파열로 인하여 가족의 간호를 뒤로 하고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 1872년]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는 1958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가 있다. 감독은 리처드 브룩스. 배급은 MGM. 주연은 율 브리너, 윌리엄 샤트너, 리 J. 콥, 조지 케네디 등으로 평은 극과 극이지만 그럭저럭 볼만하다는 평이다. 또한 키릴 라브로프 , 이반 피리예프 , 미하일 울랴노프가 감독한 1969년 소련 영화도 있다(여기서는 이 영화의 장면을 캡쳐하여 삽입하기로 한다).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고, 제6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어 피리예프 감독이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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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미국 영화, 우: 소련 영화 출처 구글 이미지]




제1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서 12 : 24)



제1장
어느 집안의 역사


1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는 우리 군(郡)의 지주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정확히 십삼 년 전 비극적이고 어두운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에(지금도 우리 도시에서는 회상하곤 할 만큼) 한때 대단한 유명세를 탔던바,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얘기를 하겠다.


지금 이 ‘지주’(비록 그가 자기 영지에서 살았던 적은 평생 동안 거의 없었지만 우리 도시에서는 이렇게 불렀다.)에 대해 말해 둘 것은 그저, 그가 상당히 자주 마주치긴 하더라도 이상한 유형, 그러니까 걸레같이 방탕할 뿐만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멍청한 인간 유형 ─ 하지만 멍청하긴 해도 자신의 재산과 관련된 일만은 능수능란하게 처리할 줄 아는, 다만 오직 이런 일 하나만을 할 줄 아는 그런 족속에 속하는 유형이라는 점뿐이다.


그는 두 번 결혼해서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첫 부인, 나머지 두 아들 이반과 알렉세이는 두 번째 부인의 소생이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첫 부인은, 역시나 우리 군의 지주였으며 상당히 부유하고 명망 있는 귀족이었던 미우소프 집안 출신이었다.


지참금이 딸려 있는 데다가 아름답고 더욱이 요즘 세대에는 제법 흔하지만 지난 세대에도 이미 더러 찾아볼 수 있었던 기민하고 영리한 부류에 속하는 아가씨가 어쩌다가, 그런 보잘것없는, 그 당시 그의 별명대로 ‘푼수’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을 늘어놓지 않겠다.


아마 그녀는 여성의 독립을 선언하고 사회적 제약 및 자신의 가문과 가족의 독재에 대항하고 싶었을 것이며, 그가 식객이라는 처지에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모든 최상의 것을 지향하는 과도기적 세기를 대변하는 극히 용감하면서도 극히 냉소적인 사람들 중 하나라고 비록 한순간이나마 확신했을 수도 있다. 더욱이 정말로 짜릿한 것은 보쌈 결혼을 치렀다는 사실인데, 바로 이것이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 미우소바를 아주 매혹시켰다.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는 보쌈 결혼이 있고 난 직후 자신이 남편을 그저 경멸하고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처가 측에서는 상당히 빨리 이 사건과 타협하여 도망간 딸에게 지참금을 떼 주었지만, 그럼에도 부부 사이에서는 가장 무질서한 생활과 영원한 소란이 시작되었다. 사람들 말로는 그래도 젊은 부인은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비교가 안 될 만큼 점잖고 고상하게 굴었다고 한다.


그는 그녀가 돈을 받기가 무섭게 즉각 2만 5000루블에 이르는 금액을 죄다 낚아채 버렸고, 그녀가 지참금으로 받게 된 시골 마을, 또 시내에 있는 상당히 훌륭한 집도 어떤 적절한 절차를 통해 자기 명의로 옮기려고 오랜 시간 동안 안간힘을 썼다. 그녀가 정신적으로 너무 지친 나머지 저 인간이 제발 그냥 떨어져 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한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결국 그녀는 세 살배기 미챠(드미트리의 애칭)를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품에 남겨 둔 채, 가난에 찌든 신학교 출신 교사와 함께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집을 내팽개치고 도망쳐 버렸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순식간에 집 안을 완전히 하렘으로 만들어서 몹시 방탕한 술판을 벌였다. 그 와중에도 거의 온 현(縣)을 돌면서 사람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가 자기를 버렸다며 눈물을 질질 짜면서 하소연을 하곤 했다.


결국 그는 도망간 부인의 행방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가엾은 여인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자신의 신학교 졸업생과 함께 그곳으로 간 뒤 가장 완벽한 해방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그 즉시 부산을 떨면서 페테르부르크로 떠날 채비를 했지만 ─ 무엇을 위해서 떠나는 것일까? ─ 그건 물론 그 자신도 몰랐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그의 처가 쪽은 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어쩌다가 갑자기 어디 다락방에서 죽었다는데, 어떤 소문에 따르면 장티푸스 때문이라고도 하고 ─ 또 다른 소문에 따르면 굶어 죽은 것 같다고도 했다.


자기 부인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됐을 때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술에 취한 상태였다. 어떤 말에 따르면 그가 그렇게 거리로 뛰어나가 기쁨에 겨워 두 팔을 하늘로 뻗으면서 “이제야 해방되었노라.”라고 외쳤다고 하고 ─ 또 다른 말에 따르면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엉엉 울었다고 하는데, 어찌나 심하게 울었으면, 비록 그를 엄청나게 혐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도 저도 충분히 그럴 법한 얘기다.


2 장남을 쫓아내다


물론 이런 인간이 어떤 양육자였으며 어떤 아버지였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아버지로서의 그에게는 응당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났다. 즉 그는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에게서 태어난 자기 아이를 아예, 완전히 내팽개쳤는데, 이는 아이에게 원한이 있어서도, 부부간에 무슨 모욕적인 감정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아이의 존재를 깡그리 잊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눈물을 찔찔 짜며 하소연을 늘어놓아 모든 사람을 질리게 해 놓고서 자기 집을 방탕의 소굴로 바꿔 놓는 동안, 세 살배기 소년 미챠를 거둔 것은 이 집의 충직한 하인 그리고리였으니, 그때 그가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아마 어린아이의 속옷을 갈아입힐 사람조차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쩌다 보니 어린아이의 외가에서도 아이에 대해선 처음부터 잊어버린 듯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파리에서 고(故)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의 사촌 오빠인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미우소프가 돌아온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만 해도 아직은 매우 젊었지만 미우소프 집안사람들 중에서는 특별하게도 수도(首都) 물과 외국물을 먹은 탓에, 계몽된 사람, 더욱이 평생 동안 유럽인이나 다름없었던 데다가 말년에는 40, 50년대의 자유주의자를 자처했다.


자신이 물론 기억을 하고 있었고 한때는 심지어 유심히 봐 두기도 했던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에 대한 얘기를 전부 듣고 또 미챠가 남겨졌다는 것을 알고 나자,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향한 젊은이다운 온갖 분노와 경멸이 끓어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일에 끼어들었다. 바로 그 참에 처음으로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안면을 튼 것이기도 했다. 그는 상대방에게 아이의 양육을 자기가 맡았으면 한다는 의사를 직설적으로 표명했다.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는 일을 열심히 진척시켜서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공동으로) 아이의 후견인이 되었고, 미챠는 외종숙 집으로 옮겨 갔다. 하지만 그는 영지 수입을 정리하여 기반이 잡히기가 무섭게 장기간의 일정으로 파리로 떠났기 때문에, 아이는 그의 숙모 중 하나인 모스크바의 어느 귀부인에게 맡겨졌다. 한편 그녀가 사망하자 미챠는 그녀의 결혼한 딸 중 하나의 집으로 옮겨 갔고, 이후에도 여러 번 보금자리를 바꾸었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세 아들 중 유일하게, 자기는 어쨌거나 얼마간의 재산이 있으니까 성년이 되면 독립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자라났다. 그의 소년, 청년 시절은 무질서하게 흘러갔다. 그는 김나지움의 공부를 채 다 끝내지 못했고, 그다음엔 어쩌다 어느 군사 학교에 들어갔고, 그다음엔 캅카스에 떨어져서 승진을 했고, 결투를 해서 강등되었다가 다시 복귀하여 방탕을 일삼다가 꽤 많은 돈을 탕진해 버렸다.


그가 성년이 된 뒤 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알게 되고 또 보게 된 것은 자기 재산에 대해 아버지와 해명을 하기 위해 일부러 우리의 고장으로 왔을 때였다. 그는 그때도 부친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아버지 집에서 그다지 오래 머물지도 않았고 아버지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받자마자, 또 앞으로 영지에서 나올 수입을 받는 문제로 아버지와 다소간 협상을 한 뒤에 서둘러 떠나 버렸는데, 그때 그는 표도르 파블로비치에게 그 영지의 수입도, 가격도 전혀 알아내지 못한 채였다.


바로 이 점을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이용해 먹기 시작했지만, 즉 자잘하게 간간이 송금을 해 줌으로써 일을 일단락 짓기 시작했지만 결국에 이미 사 년이나 지난 마당에 인내력을 상실한 미챠가 부친과의 일을 완전히 담판 짓기 위해서 다시 한번 우리 도시에 나타나는 일이 터져 버렸으니, 사정을 알고 나서 미챠는 정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즉, 자기 앞으론 이미 땡전 한 푼 남아 있지 않아 숫제 계산을 하는 것도 힘들 지경이다,


3 두 번째 결혼과 두 번째 아이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네 살배기 미챠를 자기 품에서 쫓아내 버리고 나서 그야말로 잽싸게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두 번째 결혼 생활은 팔 년 정도 지속되었다. 그는 두 번째 부인, 역시나 아주 젊었던 소피야 이바노브나라는 아가씨를 어떤 유대인과 함께 일행이 되어 무슨 자잘한 일을 처리하려고 들렀던 다른 현에서 데리고 왔다.


소피야 이바노브나는 일자무식의 무슨 보제(補祭)의 딸로서 어릴 때부터 부모 없는 ‘고아’나 다름없이 그녀의 은인이자 양육자이자 박해자인 장군 부인, 즉 명망 있는 보로호로프 장군의 늙은 미망인의 부유한 집에서 자라났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청혼을 했지만, 저쪽에서 그에 대한 뒷조사를 한 뒤 퇴짜를 놓자 그 즉시 첫 결혼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고아 처녀에게 보쌈 결혼을 제안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이때 한 푼도 가져가지 못했는데, 이는 장군 부인이 화가 나서 아무것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두 사람을 모두 저주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뭘 가져갈 속셈은 아예 손톱만큼도 없었고 그저 순결한 소녀의 뛰어난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을 뿐이니, 무엇보다도 그녀의 순결한 모습이 그를, 지금까지 오직 천박한 여자의 아름다움만을 죄스럽게 탐닉해 온 이 호색한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무뚝뚝하고 우직하고 이것저것 따지기 좋아하는 고집불통의 샌님인 하인 그리고리가 이전 마님인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는 싫어했지만, 이번엔 새 마님의 편이 되어서 하인 신분으로는 거의 용납될 수 없는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다툴 정도로 마님을 옹호했으며, 심지어 한 날은 개떼처럼 몰려들어 난잡한 술판을 벌이고 있는 추잡한 여자들을 완력을 써서 내쫓아 버리기도 했다.


이후, 어린 시절부터 늘 겁을 집어먹고 살아온 이 불행한 젊은 여인에게는 무슨 부인성 신경 질환과 비슷한 병이 생겼는데, 이것은 특히나 시골의 평민 아낙네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 병에 걸린 여자들은 클리쿠샤라고 불렸다. 이 병에 걸리면 끔찍한 히스테리 발작이 일어나고 이따금씩은 환자가 의식을 잃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표도르 파블로비치에게 두 아들 이반과 알렉세이를 낳아 주었으니, 첫아이는 결혼 첫해에, 둘째 아이는 삼 년 뒤에 태어났다. 그녀가 죽었을 때 소년 알렉세이는 고작 네 살이었기 때문에 제법 이상하긴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소년은 이후 평생 동안 어머니를 기억했다 ─ 물론 꿈속에서 본 듯한 모습으로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녀가 죽고 나자 두 소년에게는 장남인 미챠와 거의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아버지에 의해 깡그리 잊혔고 역시나 바로 그 그리고리의 손으로, 그의 오두막으로 떨어졌다.


소피야 이바노브나가 죽은 지 정확히 석 달 뒤에 장군 부인은 갑자기 친히 우리 도시에, 그것도 곧바로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집에 나타났는데, 이 도시에 머문 시간은 고작해야 삼십 분 정도였지만 많은 일을 해치웠다. 장군 부인은 그를 보자마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대뜸, 철썩철썩 소리가 날 만큼 매섭게 따귀를 두 번 후려갈기고 그의 머리털을 움켜쥐고 위아래로 세 번 잡아당긴 뒤 한마디 말도 덧붙이지 않고서 곧장 오두막의 두 소년에게로 향했다고 한다.


장군 부인도 그 일이 있고 나서 곧 죽고 말았지만, 그래도 유언장에다 두 어린애들에게 각각 1000루블씩을 주라고 썼고 ‘이 돈은 이들의 교육비이다, 전부 다 반드시 이들을 위해서 써야 되지만 다만 정확히 성년이 될 때까지만 돈이 모자라지 않도록 할 것, 이따위 아이들에겐 이만한 선심도 과분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누구든 내키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가 알아서 지갑을 풀든지 말든지.’ 등등의 말이 있었다.


노파의 주된 상속자는 바로 그 현의 귀족들 모임 회장인 예핌 페트로비치 폴레노프라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장군 부인이 어린애들 앞으로 남긴 1000루블을 손 하나 대지 않고 보존했으며 따라서 애들이 성년이 되었을 무렵에는 이자가 불어나서 각각의 1000루블이 2000루블에까지 이르렀다. 애들을 키우는 데는 자기 돈을 썼는데 물론 애들 각각에게 지출된 돈은 1000루블씩이 훨씬 넘었다.


형인 이반에 관해 알려 둘 것은 그저 다음과 같은 것뿐이다. 즉, 그는 어쩐지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듯한 음울한 소년으로 자라났으며 결코 겁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열 살 때부터 자기들이 어쨌거나 남의 집에서 남의 자비로 자라고 있다는 것, 자기 아버지는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 등을 간파한 듯했다. 이 소년은 아주 빨리, 거의 유아기 때부터(최소한 전해지는 말은 그렇다.) 학업에 어떤 비상하고도 탁월한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학 생활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무렵에는 그는 여러 전문적인 주제를 다룬 책들에 대한 극히 재치 있는 서평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덕택에 문단에서도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아주 최근에 와서는 우연한 기회에 갑자기 훨씬 더 폭넓은 독자층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함으로써 일시에 극히 많은 사람에게 주목을 받고 기억되게 되었다.


이미 대학을 나와 자신의 2000루블로 외국 여행을 준비하던 중 이반 표도로비치는 갑자기 어느 큰 신문에 이상한 논문 한 편을 발표해서 비전문가들마저도 그것에 주목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연과학을 전공했지만 이 논문에서는 아예 생소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니까 이 논문은 당시 곳곳에서 대두되었던 '교회 재판'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이 논문이 때마침 이제 막 대두된 교회 재판 문제에 대체로들 관심을 가지고 있던, 우리 도시 근교의 저명한 수도원에까지 흘러 들어와 커다란 의혹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필자의 이름을 알고 나서는 그가 우리 도시 출신이며 ‘바로 그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아들이라는 것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에 갑자기 필자가 몸소 우리 도시에 나타난 것이다.


나중에 가서야 밝혀졌지만, 이반 표도로비치는 일정 부분 자기 형인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의 부탁을 받고 그의 일로 온 것이었다. 그가 태어나서 형의 얼굴을 처음으로 직접 보고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무렵, 그것도 이번에 집에 와서였지만, 이리로 오기 전부터 드미트리와 더 많은 관련이 있는 어떤 중대한 일 때문에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터였다. 그 당시 이반 표도로비치는 아버지와 형, 즉 그때 아버지를 상대로 대판 싸움을, 숫제 정식 소송마저도 꾀하고 있던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사이에서 중재자 내지는 조정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 집안은, 반복하건대, 그때 생전 처음으로 다들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고 몇몇 구성원은 생전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본 것이기도 했다. 오직 막내아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만은 우리 도시에 와서 산 지 벌써 일 년 정도가 되었으니까, 그나마 형제들 중에서 제일 먼저였던 셈이다. 그는 그때 벌써 일 년째 우리 수도원에 살고 있었고 평생 동안 수도원에 묻혀 있을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 같았다.


4 셋째 아들 알료샤


그때 그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작은형 이반은 그때 스물네 살, 큰형 드미트리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러둘 것은 이 알료샤(알렉세이의 애칭)라는 청년이 절대 광신도가 아니며 내 생각으론 적어도 신비주의자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수도원이라는 길로 내달렸다면 그건 오직 그 무렵엔 그 길이 그의 영혼을 위한 이상적 출구로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하필 그 길이 그에게 충격적인 감동을 안겨 준 것은 그저 그때 그가 유달리 뛰어나다고 생각한 존재 ─ 즉 우리 수도원의 저명한 장로(長老) 조시마를 그곳에서 만났기 때문이었으니, 그에게 알료샤는 열렬한 첫사랑에 빠진 양 억누를 길 없는 마음을 송두리째 바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갓난아이 적부터 아주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겠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는 고작해야 네 살이었지만 이후 평생 동안 어머니를, 어머니의 얼굴과 애무를 ‘마치 어머니가 살아서 내 앞에 서 있는 양’ 기억했다. 방구석의 성상, 그 앞에 불이 밝혀진 램프, 성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히스테리 발작이라도 난 듯 째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흐느껴 우는 어머니, 그 어머니는 두 팔로 아이를 부여잡아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꼭 껴안은 채 아이를 위해 성모에게 기도를 드리고, 그러다가 아이를 자기 품에서 떼 내어 성모의 비호 아래 맡기듯 두 팔로 아이를 성상 쪽으로 내민다…….


유년기에도, 청소년기에도 그는 격정을 토로하는 일이 드물었고 말수도 적은 편이었는데, 이는 의구심이 많거나 소심하거나 혹은 사람을 기피하는 음울한 성벽 탓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뭔가 다른 것이 있어서, 즉 다른 사람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자기한테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버릴 만큼 중요한, 순전히 개인적이고도 내적인 어떤 고민이 있어서였다. 그래도 그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스무 살에 그야말로 더러운 방탕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아버지 집에 와서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때가 있으면, 순결하고도 깨끗한 그는 그저 말없이 물러났을 뿐, 누구를 경멸하거나 비난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한편, 한때 식객 생활을 했던 까닭에 남한테 모욕을 받을까 봐 늘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아버지는 처음에는 미심쩍다는 듯 무뚝뚝하게 그를 맞이했지만(‘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보니 속으론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겠지.’) 결국 두 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게 되었다.


사실 이 청년은 어디를 가나 모든 사람한테서 사랑을 받았고, 이건 아주 어릴 때부터도 그랬다. 자신의 은인이자 양육자인 예핌 페트로비치 폴레노프의 집에 들어갔을 때도 그는 이 집안의 모든 사람들의 애정을 독차지하여 완전히 친아들이나 다름없이 됐다. 그는 남에게 특별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재능이 있었던 것인데, 일부러 꾸민 것도 아니고 그저 본능적으로 그런 천성을 타고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다만 어떤 특성이 하나 있었다. 이 때문에 저학년에서 고학년에 이르기까지 김나지움의 모든 학급에서 학우들이 그를 골려 주고 싶은 마음에 아주 안달을 했지만, 이 역시 표독스러운 냉소가 발동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것이 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특성이란 바로 기이한 광증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한 수치심과 결벽증이었다. 그는 도무지 여자들에 대한 특정한 말들과 특정한 대화들을 가만히 듣고 있지 못했다.


예핌 페트로비치가 죽고 나서도 알료샤는 이 년 더 현립(縣立) 김나지움에 머물러 있었다. 예핌 페트로비치의 부인은 슬픔을 달랠 길이 없어 남편이 죽자마자 거의 곧장, 죄다 여자들밖에 없는 가족 모두와 함께 이탈리아로 장기 여행을 떠나 버렸고, 알료샤는 예핌 페트로비치의 먼 친척이라는 생면부지의 어떤 두 부인의 집으로 가게 됐지만, 어떤 조건으로 그렇게 됐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그의 성격 중 이것 못지않게, 아니 이보다 더 특이한 것은 자기가 누구의 돈으로 살고 있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그는 돈의 가치라는 걸 통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먼저 용돈을 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없었지만 행여 용돈을 받게 되더라도 그는 몇 주 내내 그걸로 뭘 해야 할지 몰라하거나 숫제 돈을 쥐고 있질 못해서 순식간에 마구 써 버리기 일쑤였다.


그는 김나지움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졸업까지는 꼬박 일 년은 더 남아 있었지만, 머릿속에 한 가지 일이 떠올랐기 때문에 아버지한테 간다고 갑자기 부인들에게 알린 것이다. 우리의 소도시에 도착하자 곧바로 “학교도 안 마치고서 도대체 뭐 하러 온 게냐?”라는 아버지의 질문 공세에 부딪쳤지만 딱히 이렇다 할 대답도 하지 않고 여느 때와 달리 깊은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곧이어 그가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가 귀향한 것이 이 때문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저, 그의 영혼 속에서 도대체 무엇이 갑자기 솟구쳐 올라서 그를 이미 피할 길 없는 어떤 새로운 미지의 길로 이끌었는지 그때는 그 자신도 몰랐으며 도무지 설명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편이 가장 그럴듯하겠다.


결국 이 ‘클리쿠샤’의 무덤을 알료샤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그리고리였다. 그는 알료샤를 우리 도시의 묘지로 데려가서 그곳의 멀리 구석진 곳에 있는, 그다지 비싸지는 않지만 단정한 주철 비석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거기에는 고인의 이름, 지위, 나이, 사망 연도가 새겨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심지어 평민층의 무덤에 흔히 사용되던 옛 묘지 시구로 된 4행시 같은 것도 적혀 있었다. 놀랍게도 이 비석을 세운 것은 그리고리였다.


알료샤는 어머니의 무덤에서 이렇다 할 특별한 감정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비석을 어떻게 세웠는가에 대해 그리고리가 근엄하게 차근차근 늘어놓는 얘기를 경청하면서 고개를 숙인 채 좀 서 있다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떠났을 뿐이다. 그때 이후, 꼬박 일 년 동안 묘지를 찾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작은 에피소드가 표도르 파블로비치에게 영향을, 그것도 아주 독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갑자기 1000루브을 집어 들고서 우리 수도원을 찾아가 그 돈을 자기 부인의 연도(憐悼)에 써 달라고 했는데, 단 둘째 부인이자 알료샤의 어머니인 '클리쿠샤'가 아니라 자기를 완전히 쥐고 흔들었던 첫 부인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날 저녁 무렵엔 술이 떡이 되도록 퍼마신 상태에서 알료샤에게 수도사들의 욕을 늘어놓았다. 이런 인간들일수록 돌발적인 감정과 돌발적인 생각이 이상스럽게 터져 나오는 일이 종종 있는 법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무덤을 방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느닷없이 알료샤는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다고, 수도사들은 그를 견습 수도사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노라고 아버지에게 알려 왔다. 그러면서 이것은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니 아버지에게 정식 허락을 구하노라고 설명했다. 노인은 수도원의 암자에서 구도 생활 중이던 조시마 장로가 그의 ‘얌전한 아이’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겼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는 터였다.


5 장로들


그 무렵 알료샤는 균형 잡힌 몸에 발그스름한 뺨과 해맑은 시선을 지녔으며 쇠도 녹일 만큼 건강한 열아홉 살의 미성년이었다. 그는 그 무렵엔 아주 잘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평균보다 큰 키에 늘씬했으며 짙은 아마빛 머리칼에 약간 갸름하긴 하지만 윤곽이 뚜렷한 계란형 얼굴, 반짝반짝 빛나는 짙은 잿빛의 커다란 두 눈을 지녔으며 몹시 사려 깊고 몹시 침착해 보였다.


내 생각으론 알료샤는 그 누구보다도 더 리얼리스트였던 것 같다. 오, 물론 수도원에 있으면서 그는 기적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믿었지만, 내 생각에 기적이 리얼리스트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같다. 리얼리스트를 믿음으로 이끄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진정한 리얼리스트는 만약 그가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라면 기적마저도 믿지 않을 힘과 능력을 언제라도 자기 내부에서 발견할 것이고, 반면 기적이 자기 앞에서 물리칠 수 없는 사실이 된다면 그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감각들을 믿지 않는 쪽을 택할 것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그는 일정 부분 이미 현대의 청년이었으니, 즉 자신의 본성상 진실을 요구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또 그것을 믿는 정직한 청년이었고, 또 믿음이 생긴 이후에는 자신의 영혼의 힘을 다 바쳐서 그 진실에 당장 뛰어들어 어서 빨리 위업을 달성하고 싶어 못 견디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심지어 인생이라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청년이었다.


갓난아기 시절의 기억들 속에는 아마도 그의 어머니가 미사를 보기 위해 그를 우리 교외 수도원에 데려갔던 일이 뭔가 보존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의 클리쿠샤 어머니가 성상 앞으로 그를 내밀었을 때 비스듬히 비치던 석양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서 수도원에서 이 조시마 장로를 만났던 것이다…….


우리나라 수도원의 ‘장로’라는 것에 대해 몇 마디 해 보고자 한다. 전문적이고 유능한 사람들은 장로와 장로제가 우리나라, 즉 우리 러시아의 수도원에 나타난 것은 아주 최근의 일로 심지어 100년도 되지 않았지만 모든 동방 정교 국가들, 특히 시나이산과 아토스산에서는 이미 천 년 전부터 존재해 왔노라고 주장한다.


한편, 아주 먼 옛날 우리 루시(러시아)에도 장로제가 존재했거나 응당 존재했어야 하지만 타타르 침공, 동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등의 러시아 국난 이후 동방과의 관계 단절로 인해 이 제도는 우리나라에서 잊혔고 장로들도 대가 끊겼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다가 위대한 고행자 중 하나인 파이시 벨리치코프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지난 세기말부터 우리나라에서 다시 부활했다. 하지만 거의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극소수의 수도원에만 존재하고 심지어 이따금씩은 러시아에 유례가 없는 제도로 취급받아 거의 박해를 당하기까지 했다. 우리 루시에서 장로 제도가 유달리 번성했던 곳은 어느 저명한 황야, 즉 코젤스카야 오프치나 수도원이었다.


[코젤스카야 오프치나 수도원 출처 구글 이미지]


언제 누구에 의해서 그것이 우리 도시 근교의 수도원에까지 보급되었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이미 세 번째 장로 승계가 있었으며 조시마 장로는 그들 중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그도 이미 노쇠하고 병들어 죽음이 코앞에 있었건만 누가 그를 승계할 것인지는 아예 미지수였다. 우리 수도원이 러시아 전역에 걸쳐 번성하고 명성을 누린 것은 다름 아니라 장로들 덕분이었으니, 그들을 보고 그들의 말을 듣기 위해 수천 베르스타나 떨어진 러시아 전역에서 신도들이 무리를 지어 우리 마을로 몰려들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장로란 도대체 무엇인가? 장로란 여러분의 영혼과 여러분의 의지를 자신의 영혼과 자신의 의지 속으로 가져가는 자이다. 일단 장로를 선출하고 나면, 여러분은 절대복종과 완전한 자기 방기의 자세로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그것을 그에게 바친다. 스스로 이런 짐을 진 자는 이 시험을, 이 끔찍한 인생의 학교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다.


장로제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로부터 이미 천 년의 역사를 지닌 동방에서 실행을 거쳐 나온 것이다. 장로에 대한 의무는 우리 수도원에도 늘 있어 왔던 통상적인 ‘복종’과는 다른 것이다. 이 경우 장로를 따르는 자들은 영원히 고해성사를 해야 하며 의무를 지운 자와 의무를 갖게 된 자 사이에는 파괴할 수 없는 관계가 맺어진다.


이런 식으로 장로 집단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불가사의할 만큼 무한한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많은 수도원에서 처음에 장로제가 거의 박해를 당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반면 민중들 사이에서는 곧 장로들이 대단히 존경받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우리 수도원의 장로들만 해도 평민이며 세도가며 할 것 없이 몰려들어서는 장로들 앞에 엎드려 그들에게 자신들의 의심, 자신들의 죄, 자신들의 고뇌를 고백하고 조언과 가르침을 구했다.


조시마 장로는 예순다섯 살쯤 되었으며 지주 출신이었는데 언젠가 아주 젊었을 때는 군인이었고 캅카스에서 위관(尉官)으로 복무했다. 그가 지닌 어떤 특별한 정신적 자질이 알료샤를 감동시킨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알료샤는 장로의 암자에서 살았는데, 장로가 그를 몹시 좋아하게 되어 자기 암자로 들인 까닭이었다. 하지만 알료샤는 그때 수도원에 살긴 했지만 어디에 얽매인 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꼬박 며칠씩이라도 마음 내키는 대로 어디든 나다닐 수 있었다.


어쩌면 알료샤의 젊은 상상력에 강한 영향을 미친 것은 그의 장로를 에워싸고 있는 이 권력과 영예였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조시마 장로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그는 자신의 영혼을 고백하기 위해 찾아와 그에게서 조언과 치유의 말을 갈구했던 모든 이들을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자기 암자로 들였고 또 워낙 많은 고백과 고뇌와 자백을 자기 영혼 속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는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대다수가 장로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열렬하게 좋아했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그에게 거의 광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이런 이들은 비록 대놓고 큰 소리로 외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장로는 성자이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고 대놓고 말하곤 했으며, 장로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견하면서 고인을 통해 아주 가까운 미래에 수도원으로선 큰 영광이 될 기적이 즉각 일어나리라고 기대했다.


알료샤도 장로의 기적적인 힘을 교회 밖으로 날아가 버린 관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믿고 있었다. 특히 장로를 만나서 그의 축복을 받고자 일부러 러시아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평민 신도들이 암자 대문 곁에 서서 장로를 기다리고 있고 장로가 그들 무리를 맞이하기 위해 나올 때면, 알료샤는 심장이 전율하는 듯했고 온몸이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최근에는 그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암자에서 나올 힘도 없을 만큼 쇠약해지는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신도들은 며칠씩이나 수도원에서 그가 나오길 기다리기 일쑤였다. 알료샤에게는 그들이 장로를 왜 그토록 좋아하는지, 왜 장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앞에 엎드려 감동에 젖어 우는지는 아예 의문거리도 되지 않았다.


알료샤가 그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던 두 형의 귀향은 그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준 것 같았다. 큰형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한배에서 난 작은형 이반 표도로비치보다 더 늦게 왔지만 큰형과 더 빨리, 더 많이 친해졌다. 그는 이반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형이 여기 산 지 벌써 두 달이나 됐고 서로 마주칠 일이 상당히 자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어째 좀처럼 친해지질 못했다.


알료샤는 줄곧 왠지 이반이 뭔가에, 내적이고 중대한 뭔가에 홀려 있고 어쩌면 아주 힘든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어서 자기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양, 오로지 이 때문에 자기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양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으론 형은 박식한 무신론자니까 자기 같은 멍청한 견습 수도사를 경멸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몰두하기도 했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형은 이반 형을 마음 깊숙이 존경하고 있어서 그에 대해 말할 때는 어떤 특별한 감동에 젖곤 했다. 실은 바로 큰형을 통해서 알료샤는 최근 두 형들을 훌륭하고 친밀한 관계로 엮어 준 중대한 일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런 때에 집안의 구성원이 모두 참석한 가족 회동이 장로의 암자에서 이루어졌으니, 이것은 알료샤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다.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먼저 농담 삼아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서 다 함께 모이면 어떨까 슬쩍 말을 던진 모양인데, 구태여 장로가 중재를 해 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장로의 위신과 얼굴을 봐서 아무래도 말이 좀 더 잘 먹히고 화해 분위기가 조성돼서 점잖게 합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을 것이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장로의 암자에 가 본 적도 한 번 없고 숫제 그를 본 적도 없었던 터라, 물론 장로를 동원해 자기를 겁주려는 속셈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도 최근 아버지와 싸우면서 유별나게 과격한 짓을 많이 했다며 속으로 자책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 무렵 우리 도시에 와서 살고 있던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미우소프가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이 생각을 특히나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엔 장로도 동의했고 모임 날짜도 정해졌다. “누구 때문에 내가 그들과 함께하기로 했을까?” 그는 그저 미소를 지으면서 알료샤에게 이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회합이 있으리란 것을 알고 나서 알료샤는 몹시 당황했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이 사람들 중 회합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드미트리 형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장로에게 모욕이 될 수도 있는 얄팍한 목적을 갖고 올 것이니 바로 이 점을 알료샤는 이해하고 있었다. 이반 형과 미우소프는 호기심, 그것도 어쩌면 가장 저열한 호기심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어쩌면 무슨 광대극이나 연극판을 벌이기 위해 올 것이다.


그가 집안의 이 모든 불화가 어떻게든 잘 끝났으면 하고 혼자서 마음속 깊이 몹시 애를 태운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제일 애를 태웠던 것은 역시 장로 때문이었다. 그는 장로를, 장로의 영예를 생각하며 마음을 졸였고, 장로가 받을지도 모를 모욕, 특히 미우소프의 세련되고도 점잖은 냉소와 학자인 이반의 사람을 깔보는 듯한 애매한 말들이 무서웠으니, 이 모든 것이 그에게 훤히 떠올랐던 것이다.


<제1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