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

김연경 옮김 민음사

by Andy강성
제2장
부적절한 모임


1 수도원에 도착하다


따뜻하고 청명한 아름다운 날이었다. 8월 말이었다. 장로와의 회동은 대략, 늦은 미사 직후인 11시 반으로 잡혀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수도원 방문객들은 미사엔 참석하지 않고 정확히 미사가 끝날 무렵에 도착했다. 그들은 두 대의 마차에 나눠 타고 왔다. 첫 번째 마차, 즉 값비싼 말 한 쌍을 맨 멋스러운 반개(半開) 마차를 타고 온 사람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미우소프였는데, 그는 자신의 먼 친척인 아주 젊은 스무 살가량의 청년 표트르 포미치 칼가노프와 함께였다.


칼가노프는 곧잘 생각에 잠겼고 더러 멍한 구석도 있었다. 좋은 인상을 주는 얼굴에 체격도 건장하고 키도 상당히 컸다. 그의 시선은 이상하게도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말수도 적고 다소간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지만 그래도 누구와든 단둘이 있게 되면 갑자기 엄청나게 수다스러워지고 격정적으로 변했으며 웃음까지 헤퍼져서는 왠지 통 알 수 없는 일로 웃음보를 터뜨리기 일쑤였다. 그에게는 이미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얼마간의 재산이 있었지만 아직 훨씬 더 많은 재산이 떨어질 상황이었다. 알료샤와는 친구 사이였다.


미우소프의 마차보다 훨씬 뒤처져서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그의 아들 이반 표도로비치도 흰 바탕에 적갈색 무늬가 있는 늙은 말 한 쌍이 끄는, 덜커덩거리고 몹시 낡아 빠진 대형 짐마차를 타고 도착했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전날 밤에 이미 날짜와 시간을 알려 주었건만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방문객들은 마차를 수도원의 텃밭 옆 여관에 세워 두고 걸어서 정문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대로 하자면 수도원 쪽에서 응당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고 더욱이 다소간의 존경마저 내비쳐야 했다. 한 사람은 최근에 1000루블이나 희사했고, 다른 사람은 아주 부유한 데다 교양마저 철철 넘치는 지주로서 소송의 추이에 따라 하천 어로권 문제와 관련하여 이곳 사람들 모두에게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가 아닌가. 자, 이런데도 공식적인 인물 중에서 그들을 마중하러 온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그들 쪽으로 나이가 제법 든, 헐렁한 여름 외투를 걸친 대머리 신사 한 명이 다가왔는데, 눈에는 아첨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린 뒤 그는 달착지근한 발음으로 자기는 그러니까 툴라의 지주 막시모프라고 모두에게 소개하고 일행을 조시마 장로가 계신 암자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는 금세 우리 일행을 위해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조시마 장로께서는 암자, 그것도 아주 외진 암자에 살고 계시는데 수도원에서 400보 이상 떨어진 데다가 숲을 지나고 또 숲을 지나서……. 자, 바로 이 문으로 들어가서 곧장 숲을 따라갑니다……”

"그분은 그야말로 완벽한 기사더군요!” 이렇게 말하면서 지주는 손가락을 허공에 탁 튕겼다.

“기사(chevalier)란 누굴 말하는 거요?” 미우소프가 물었다.

“장로님이시지요, 위대하신 장로님, 장로님……. 수도원의 명예와 영광이지요. 조시마 장로님 말입니다.”


그의 정신없는 일장 연설은 그들을 쫓아온 한 수도사 때문에 중단됐는데, 그는 수도복에 달린 두건을 쓰고 있었는데, 굉장히 정중하게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미우소프에게 거의 허리까지 숙여 가며 인사를 한 뒤 말했다.

“수도원장 신부님께서, 여러분이 암자를 방문하신 연후에 모두 당신의 암자에서 점심 식사를 드셨으면 좋겠답니다. 신부님의 암자에서 늦어도 1시까지입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막시모프를 바라보았다.


“아무렴, 꼭 가고말고요!”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초대를 받아 기뻐 죽겠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더욱이 우리는 모두 여기서 점잖게 굴겠다고 약속했거든요…….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당신은 갈 거요?”

“아니, 그럼 왜 안 간단 말이오? 내가 여기 온 게 바로, 여기 이들의 풍습을 전부 보기 위해서가 아니오. 내게 골치 아픈 건 오직 하나, 바로 내가 지금, 표도르 파블로비치,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이지……. 이봐요, 바로 이런 인간과 함께 점잖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군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수도사를 쳐다보았다.


수도사의 핏기 없는 창백한 입술에는 교활한 기색이 감도는, 미묘하고도 떨떠름한 미소가 번지긴 했지만 이렇다 할 대답은 전혀 없었는데, 이 침묵이 자신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점은 너무도 분명했다.

‘에잇,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죄다 수백 년 동안 외모만 그럴듯하게 갈고닦았지, 속으론 거들먹거리고 엉터리 수작뿐이라니까!’ 미우소프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 드디어 암자로군, 다 왔어!”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소리쳤다. 그러면서 그는 잽싸게 대문 위와 옆에 그려진 성자들 앞에서 큼직하게 성호를 긋기 시작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법이지." 그가 한 소리 했다.

"여기 암자에서 스물다섯 명의 성자들이 서로 도를 닦느라 서로서로를 바라보며 양배추를 먹는다죠. 이 문으론 단 한 명의 여자도 들어갈 수 없다니, 그런데 제가 들은 바론, 장로님께서는 부인들을 접견하신다면서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가 갑자기 수도사를 돌아보았다.


“평민층 여성분들은 지금도 여기와 있는데, 바로 저기 작은 회랑(回廊) 옆에 누워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류층 귀부인들을 위해서는 역시나 여기에, 다만 텃밭의 바깥에 있는 회랑에 작은 방 두 칸이 마련되어 있는데, 바로 여기 이 창문들이지요. 최근에는 조시마 장로님께서 건강이 너무 약해져서 사람들 앞에 나오시는 일이 거의 없으시지만, 그분들은 꼭 만나 보시겠다고 약속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어쨌거나 암자에서 마님들한테로 갈 수 있는 뒷구멍이 있다는 거로군요. 성스러운 신부님, 제가 무슨 속셈이 있어서 이런다고 생각지는 마십시오, 그저 그냥 그렇게 말해 본 것뿐이니까요. 그나저나 아토스산*에서는 말이죠, 신부님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여자의 방문은 물론이고 어떤 생물체건 여자 딱지, 암컷 딱지가 붙은 것은 전부 금지된다더군요, 암탉이고 암칠면조고 암송아지고 할 것 없이…….”

* 동방 정교(그리스 정교)의 성지로, 에게해와 면한 그리스의 반도에 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나는 당신을 여기 혼자 내팽개치고 그만 돌아가겠소. 그리고 미리 일러두자면, 내가 없으면 당신은 양팔을 붙들린 채 여기서 끌려 나가게 될 거요. 듣고 있소, 마지막으로 조건을 달아야겠소. 점잖게 행동하시오, 안 그랬다간 내 당신한테 톡톡히 갚아줄 테니.” 미우소프는 그사이에 용케 틈을 내어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방정을 떠는지 통 알 수가 없군요.”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냉소적으로 한 소리 했다. “아니, 지은 죄들이 두려운 거요? 아닌 게 아니라 장로는 상대방의 눈만 봐도 이 사람이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알아맞힌답디다. 어쨌거나 당신처럼 파리 시민입네 하는 진보적인 신사 양반이 저자들의 견해를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하다니, 이 몸은 놀라서 뒤로 자빠지겠소, 정말!”


하지만 미우소프가 이 빈정거림에 미처 대거리를 할 겨를도 없이, 다들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졌다. 그는 다소 골이 난 상태에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앞일이 훤히 보인다, 이렇게 골이 났으니 내가 먼저 시비를 걸게 될 거야……. 그러다 보면 혼자 열을 받아서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나의 사상에도 먹칠을 하게 되겠지.’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어른거렸다.


2 늙은 어릿광대


그들은 장로와 거의 동시에 방으로 들어섰는데, 장로는 그들이 도착하자 곧바로 침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방에서는 암자에 딸린, 두 명의 수도사제가 그들보다 먼저 와서 장로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명은 사서 신부였고, 다른 한 명은 늙지는 않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파이시 신부로 대단히 박식한 사람이라고들 했다.


그 밖에도, 겉보기에 스물두 살쯤 된 듯한 젊은 청년이 평범한 프록코트를 입은 채 구석에 서서(이후에도 줄곧 서 있었다.) 대기 중이었는데, 그는 무엇 때문인지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후원을 받는 신학생이자 미래의 신학자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온 손님들에게 몸을 숙여 인사하는 것조차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기를 그들과 동등한 자격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위에 종속된 아랫사람으로 간주한 탓인 듯싶었다.



조시마 장로는 견습 수도사와 알료샤를 동반하고 나왔다. 수도사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이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깊이 숙여 그를 맞이했고, 이어 장로의 축복을 받자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들을 축복한 뒤 장로는 조금 전의 그들 못지않게 손가락이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깊이 숙여 그들 각각에게 답례했으며 자기도 그들 각각에게 축복을 청했다.


미우소프에게는 다들 억지 감동을 주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과 함께 들어온 모든 일행들 중 맨 앞에 서 있었다. 속생각이야 어떻든 간에 단순히 예의 차원에서라도(여기에선 이런 관습이 있지 않은가.) 장로에게 다가가 그의 축복을 받는 것이, 손에 입을 맞추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축복 정도는 받아 주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속세에서 하는 식으로 진중하고 엄숙하게 몸을 깊이 숙인 뒤 의자 쪽으로 물러섰다.


표도르 파블로비치도 똑같이 행동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원숭이처럼 미우소프를 따라 했던 것이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몹시 진중하고 공손하긴 했지만 역시나 양손을 바지 솔기에 붙인 채 인사를 했고, 칼가노프는 너무 당혹스러웠기 때문에 아예 몸을 숙이지도 않았다. 장로는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고 그들에게 또 한 번 몸을 숙인 뒤 다들 앉으라고 권했다. 알료샤는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그의 불길한 예감이 슬슬 실현되고 있었다.


장로는 가죽을 씌운 아주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소파에 앉았고, 두 명의 수도사제를 제외한 네 명의 손님들을 모두 맞은편 벽 옆에 있는, 검은 가죽이 심하게 닳아 버린 마호가니 의자 네 개에 나란히 앉혔다. 수도사제들은 따로 떨어져 한 명은 문 곁에, 다른 한 명은 창문 곁에 앉았다. 신학생, 알료샤, 견습 수도사는 그대로 서 있었다. 방은 전체적으로 몹시 비좁고 왠지 시들시들한 모습이었다.


괘종시계가 12시 정각을 울린 덕분에 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

“정확히 시간이 됐군요.”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소리쳤다. “그런데도 제 아들 녀석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아직 보이질 않는군요. 그 애 때문에 심히 송구스럽습니다, 신성한 장로님!(알료샤는 ‘신성한 장로님’이라는 말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일분일초도 어기지 않고 언제나 시간을 엄수한답니다, 정확함은 왕이 갖춰야 할 예의임을 명심하고 있는 탓에…….”


“하지만 당신은 최소한 왕도 뭣도 아니잖소.” 그 즉시 미우소프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거참, 지당하신 말씀, 왕은 아니지요. 생각해 보시오,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그런 거라면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소, 여부가 있나요! 또 바로 그래서 나는 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는 거요! 존경하옵는 장로님!” 그는 일순간 어떤 고양된 감정을 담아서 소리쳤다. “장로님께서 지금 눈앞에 보고 계신 건 어릿광대, 진정한 어릿광대입니다! 이렇게 제 소개를 합지요. (……) 이따금씩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해 대는 건 사람들을 웃겨 볼 요량으로, 기분을 풀 요량으로 일부러 그러는 것입니다."


"제 농담이 영 효과가 없겠다는 것이 보이는 순간이면, 장로님, 저는 양쪽 뺨이 바싹 말라 아랫잇몸에 달라붙기 시작하고 거의 경련마저 인답니다. 젊은 시절부터, 귀족들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며 빌붙어 살면서 빵을 얻어먹던 그 시절부터 그랬지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뼛속까지 어릿광대란 말입니다, 장로님, 유로지브이(세상에서는 바보처럼 보이지만 신 앞에서는 가장 순수한 사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저는, 장로님, 철학자 디드로(프랑스의 유물론 철학자)와 같습니다. 성스러우신 신부님, 아시는지요, 철학자 디드로가 예카체리나 여제 치하에서 총주교 플라톤을 어떻게 알현했는지 말입니다. 들어와서는 대뜸 한다는 말이 ‘신은 없습니다.’라는 거였다죠. 이 말에 위대한 성직자는 손가락을 들고 ‘광인이 자기 마음속에 신이 없다고 말했도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디드로는 대번에 그의 발밑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믿습니다, 세례도 받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당장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슈코바 백작 부인이 대모가 되고 포춈킨이 대부였다죠…….”


“표도르 파블로비치, 이건 참을 수가 없군요! 당신 말이 거짓말이고 그 터무니없는 얘기가 실화가 아니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면서 왜 자꾸 수작을 부리는 거요?” 이젠 완전히 자제력을 잃어버린 미우소프가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화가 아닐 거라는 예감이 평생 동안 들었습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흠뻑 도취되어 소리쳤다. “여러분, 대신에 실제 사실을 죄다 말씀드리지요. 위대하신 장로님! 용서하십시오, 마지막 것, 디드로의 세례에 관한 얘기는 제가 지금, 그것도 이야기를 시작한 바로 이 순간에 지어낸 것인데, 이전에는 절대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던 생각입니다. 그냥 재미를 좀 보자고 지어낸 것이지요. 바로 이 때문에 수작을 부리는 거요"


미우소프가 자리에 일어났는데, 그는 인내력을 상실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미쳐서 펄펄 날뛸 상황이었건만 이래 봤자 자기만 웃기는 놈이 된다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정말로, 방 안에는 완전히 불가능한 어떤 일이 일어났다.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저지른 이런 돌발적인 어릿광대짓은 지금 이 장소에는 맞지 않는 불경스러운 것으로서, 동석한 사람들, 적어도 그들 중 몇몇에게는 의혹과 놀라움을 유발시켰다.


수도사제들은 그래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장로가 무슨 말을 할까 진지한 주의를 기울이며 예의 주시했지만, 그러면서도 여차하면 미우소프와 마찬가지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알료샤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고개를 떨어뜨린 채 서 있었다. 그가 무엇보다도 이상하게 여겼던 것은, 자기 형이, 즉 아버지를 말릴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고 기대했던 이반 표도로비치가 지금 눈을 내리깐 채 꼼짝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 앞에 나가게 되면 언제나 내가 다른 모든 놈들보다 야비하고 죄다 나를 어릿광대 취급한다는 느낌이 들고 그렇다 보니 ‘그래, 내 정말로 어릿광대 역을 맡아 주지, 네놈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무섭지도 않아, 네놈들은 하나에서 열까지 죄다 나보다 더 야비하니까!’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자, 바로 그리하여 저는 어릿광대가 된 것이올시다" 그러면서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영생을 얻으려면 저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과연 그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토록 감동에 휩싸여 있는 것일까?


장로는 그를 향해 눈을 돌리곤 미소를 띠며 말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당신 자신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현명하시니까요. 술을 마시지 말 것이며 말을 자제할 것이며 음탕에 빠지지 말 것이며 특히 돈을 지나치게 숭배하지 말 것이니, 우선 당신의 술집부터 닫으시지요, 다 닫을 수는 없다면 두서너 곳만이라도. 무엇보다도, 정말 무엇보다도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자, 일어나서 앉으시지요, 정말 부탁입니다, 실은 이것조차도 모두 거짓 시늉이 아닙니까…….”


“복되신 분이시여! 그 손에 입을 맞추게 해 주십시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펄쩍 뛰듯 다가가 재빨리 장로의 여윈 손에 입을 쪽쪽 맞추었다. “장로님께서 제가 전엔 들어 보지도 못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정말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바로, 바로 제가 말입니다, 평생 동안 기분이 통쾌해질 정도로 화를 내 왔고 또한 미학을 위해서 화를 내 왔으니, 남 때문에 화가 나서 모욕감에 젖는 것은 통쾌할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아름답기도 하거든요."


장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만, 여러분, 몇 분간 잠시 어디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그가 모든 방문객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보다 먼저 와서 저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어서요. 그나저나 당신은 어쨌거나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는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향해 즐거운 얼굴로 덧붙였다. 그가 방에서 나가자, 알료샤와 견습 수도사가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부축하기 위해 뛰어나갔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회랑 쪽으로 향하는 장로를 방의 문간에서 저지했다. “참으로 복되신 분이시여!” 그가 감정을 담아 외쳤다. “장로님의 손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도록 해 주십시오! 장로님께서는 제가 항상 이렇게 거짓말만 하고 어릿광대짓만 한다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알아주십시오, 이건 제가 줄곧 장로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연기를 했던 것임을. 그러면 이제부터 침묵하겠습니다, 의자에 앉아 잠자코 있겠습니다. 이제,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당신이 말할 차례요, 이제는 당신이 주역이 돼 버렸으니까…… 십 분 동안이긴 하지만.”


3 믿음 깊은 아낙네들


텃밭의 바깥쪽 담에 붙어 있는 목조 회랑 옆, 아래쪽에는 이 날따라 한결같이 여자들만 몰려와 있었는데, 그 아낙네들은 대략 스무 명쯤 됐다. 드디어 장로가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렇게들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회랑으로 나온 자들 중에는 여지주 호흘라코바 모녀도 있었는데, 그들도 장로를 기다린 건 맞지만 귀족 방문객을 위해 따로 마련된 거처에 있었다. 그들은 어머니와 딸, 단둘이었다.


그녀는 기껏해야 서른세 살 정도였는데 과부가 된 지는 벌써 약 오 년이나 되었다. 그녀의 열네 살짜리 딸은 소아마비로 다리를 앓고 있었다. 가엾은 소녀는 벌써 반 년째 걸어 다닐 수도 없어서 바퀴 달린 긴 안락의자를 타고 다녔다. 이 아이는 병 때문에 다소 여위긴 했지만 명랑하고 매력적인 존재였다. 그들이 벌써 일주일째 우리 도시에 와 있는 건, 벌써 사흘 전에 장로를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다시 찾아와서 한 번만 더 ‘위대한 치료자를 바라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해 주십사 집요하게 간청하고 또 애원했던 것이다.


회랑에 나타난 장로는 우선 곧장 민중들에게로 갔다. 군중들은 들판과 맞닿은 나지막한 회랑 입구의 삼단 층계 쪽으로 몰려들었다. 장로는 위쪽 계단에 서서 영대(領帶)를 두른 뒤 자기에게로 밀려든 여인들을 축복해 주기 시작했다. 그에게 한 클리쿠샤가 두 손을 잡힌 채 끌려왔다. 그 클리쿠샤는 장로를 보자마자 갑자기 경기라도 난 듯 어쩐지 터무니없는, 째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면서 온몸을 떨었다. 장로는 그녀의 머리에 영대를 얹고 그녀를 위해 짧은 기도문을 읽어 주었는데, 그러자 곧 그녀는 잠잠해지면서 진정했다.


그에게로 몰려든 여인들 중 많은 이들이 순간의 효과가 불러온 감동과 황홀의 눈물을 흘렸다. 또 다른 이들은 그의 옷자락에도 입을 맞추기 위해 버둥거렸고 또 다른 이들은 무엇이 그리 슬픈지 통곡을 했다. 그는 모두를 축복해 주었으며 어떤 이들과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어린 막내 아들을 잃은 여인


“아, 저기 먼 곳에서 오신 분이 있군!” 그는 아직 별로 늙지는 않았지만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바싹 여윈 한 여인을 가리켰는데, 볕에 그을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검게 타 버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왜 울고 있는 겐가?” 장로가 물었다.

“아들 녀석이 안 됐어요, 신부님, 석 달만 더 살았더라도 세 살이 되었을 거예요. 아들 녀석 때문에 마음이 아파요,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아들이었습죠, 나와 니키투쉬카 사이엔 아이가 넷이나 있었건만 우리 집에서는 아이들은 왠지 남아나질 않아요, 남아나질 않더라고요, 그렇게 원해도 도무지 남아나질 않는 거예요. 먼젓번 세 아이들을 묻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서럽진 않았는데 이 막내 녀석을 묻고 나니 잊을 수가 없어요."


“애어멈, 이보게.”라고 장로가 말했다.

“어느 날 고대의 위대한 성자가 사원에서 한 여인이 바로 자네처럼 자신의 갓난애, 그것도 유일한 아들이 역시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까닭에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네. ‘그대는 이걸 모르고 있는 것이냐.'라면서 성자가 그녀에게 말했지. '하느님의 왕좌 앞에서 이 갓난애들이 얼마나 대담하게 구는지를? 하늘의 왕국에서 그들보다 더 대담한 자는 아무도 없는 법일세. 주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선사하셨으나 우리가 그 생명을 보기가 무섭게 곧바로 그것을 우리에게서 다시 가져가시옵나이다, 하고 하느님께 말하지. 그러고 는 버르장머리 없을 만큼 대담하게 자기들에게 어서 빨리 천사의 지위를 내려 달라고 강청하고 부탁한다네. 자, 그러니'라면서 성자께서 말씀하셨다네. '기뻐하라, 여인이여, 울지 말지어다, 그대의 갓난아이는 지금 하느님 곁에, 하느님의 천사들 무리 속에 있으니.' 성자께서는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분께서 그 여인에게 거짓을 알려 주었을 리는 없지 않나. 그러니 애어멈, 자네의 갓난아이도 필경 이제 주님의 왕좌 앞에 임 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자네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 두게나. 그러니 울지 말고, 기뻐할 일이로다."


그녀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니키투쉬카도 똑같은 말을 하면서 저를 위로했어요, 신부님 말씀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요. '바보같이 울긴 왜 울어, 우리 아들 녀석은 지금 쯤 분명히 주님 곁에서 천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을 텐데.' 하지만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는 그이도 울어요, 보면 나와 똑같이 울더라고요."

그녀는 겨드랑이에서 자기 아이의 자그마한 장식용 허리띠를 꺼냈는데, 그것을 보기가 무섭게 곧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흐느껴 울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갑자기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나왔다.


"고대에 '라헬이 자기 아이들을 생각하며 울지만, 그래도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이니, 자네들, 어머니들은 이 지상에서 그와 같은 운명을 타고났도다. 그렇다면, 위로받으려 들지 말게, 위로받을 수도 없으니 위로받으려 들지 말고 울지도 말게나. 다만 울음이 나올 때마다 매번 꾸준하게 자네의 아들이 하느님의 천사 중 하나라는 것을 상기하게나. 그곳에서 자네를 지켜보면서 자네의 이런 모습을 보며 자네의 눈물을 기뻐하고 그 눈물을 하느님께 알려 주고 있다는 것을. 앞으로 오랫동안 자네는 어머니로서의 이 크나큰 눈물을 흘리게 될 테지만, 결국에 가서는 그것이 자네에게 조용한 기쁨으로 변할 것이며, 그때는 자네의 쓰라린 눈물들도 그저 조용한 감동의 눈물이자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참된 정화의 눈물이 될 걸세."


"자네 아이의 명복을 빌도록 하겠네. 이름이 뭐였나?"

"알렉세이였습니다, 신부님."

"거참, 이름도 사랑스럽구먼. 예언자 알렉세이의 이름을 딴 것인가?"

"그렇습니다, 신부님, 예언자, 예언자 알렉세이에서 따왔지요!"

"얼마나 위대한 성인이었던가! 명복을 빌겠네, 애어멈, 아이의 명복을 빌고 자네의 슬픔을 위해 기도하고 자네 바깥양반의 건강도 빌겠네. 다만, 바깥양반을 홀로 남겨 두는 건 죄스러운 일일세. 남편한테로 가서 그 사람을 정성껏 보살펴 주게."


남편을 저주한 여인


장로는 군중 속에서, 아직 젊은데도 결핵에라도 걸렸나 싶을 만큼 기진맥진해 있는 농부 여인이 자기에게 불타는 시선을 보내는 것을 인지했다. 그녀는 말없이 장로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두 눈은 뭔가를 부탁하고 있었으나 감히 다가가는 것이 두려운 듯했다.

“무슨 일로 왔나, 자네는?”

“제 영혼을 용서해 주십시오, 친아버지 같은 신부님.”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말한 뒤 무릎을 꿇은 채로 그의 발아래 엎드려 절을 했다.


“혼자된 지 삼 년째인데.”라고 마치 전율하듯 반쯤 속삭이며 그녀가 말을 시작했다. “시집살이가 힘겨웠습니다, 늙은 남편이었는데 저를 죽도록 마구 때렸지요. 그러다가 남편이 몸져눕자 그이를 바라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건강해지면 다시 시작될 텐데, 그때는 어떡하나?’ 하는. 바로 그때 제 머릿속에서 바로 그 생각이 떠올랐는데…….”

“고해성사 때 말한 적이 있던가?”

“그럼요,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무서워 말게나, 절대 무서워하지도 괴로워하지도 말게. 자네의 내부에서 뉘우치는 마음이 식지 않는 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실 것이네. 진실로 뉘우친다면 주님께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큰 죄는 이 세상에 없고 있을 수도 없다네. 고인을 마음속으로 늘 용서할 것이며 자네를 어떻게 학대했든 고인과 진실로 화해하게나. 자네가 뉘우치고 있다면 곧 사랑한다는 게 아니겠나. 사랑하고 있다면 자네는 이미 하느님의 사람이라네. 사랑으로 모든 것이 상쇄되고 모든 것이 구원된다네."

그는 그녀에게 세 번의 성호를 그었으며, 자기 목에서 성상을 풀어서 그녀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녀는 말없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그에게 절을 했다.


가난한 기부자 여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젖먹이를 품에 안고 있는 어느 건강한 아낙네를 즐겁게 바라보았다.

“브이셰고르예에서 왔습니다요, 사랑스러우신 장로님.”

“장로님을 보려고 왔어요. 전에도 왔는데, 잊으셨는지요? 저를 잊으셨다면 장로님의 기억력이 변변찮은 거예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장로님께서 편찮으시다고들 해서, 그럼 내 직접 가서 뵙고 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이렇게 장로님을 직접 뵈니, 편찮으시다니요? 아직 이십 년은 더 사실 겁니다, 정말로요,"


“기왕지사 여기 온 김에 조그만 부탁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여기 60코페이카가 있는데, 이것을 장로님, 저보다 더 가난한 여자에게 주세요. 여기 오면서 차라리 장로님을 통해서 내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주님께서 자네 둘을 축복하시길, 자네와 갓난애 리자베타를. 자네는 내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네, 애어멈. 잘들 가시게나,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상냥한 이들이여.”

그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해 주고 그들 모두에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4 믿음이 약한 귀부인


외지에서 온 귀부인, 즉 여지주는 장로가 민중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축복하는 장면을 모두 지켜보면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녀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많은 점에서 진실로 선량한 기질을 지닌 사교계 부인이었다. 장로가 드디어 그녀에게로 다가오자 그녀는 황홀감에 차서 그를 맞이했다.

“이 모든 감동적인 장면을 보면서 많이, 정말 많이 참았습니다…….”


“부인 따님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부인께서는 또 저와 담화를 나누고 싶으셨던가요?”

“오, 저는 집요하게 부탁하고 애원했습니다, 장로님께서 들여보내실 때까지 장로님의 창문 앞에서 사흘이라도 무릎을 꿇고 있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장로님을 찾아온 건, 위대한 치유자이신 장로님, 환희에 가득 찬 우리의 고마움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장로님께서는 저의 리자를 완전히 치유해 주셨지요"


“치유를 했다니요? 아니, 저 아이는 아직도 의자에 누워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바로 그 목요일부터 밤마다 딸아이를 괴롭히던 신열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벌써 이틀째지요.” 부인은 격앙된 어조로 서둘러 말했다. “그뿐인가요, 딸아이의 다리가 튼튼해졌답니다. 오늘 아침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건강했지요, 밤새 곤히 잤거든요, 이 아이의 홍조를, 빛나는 두 눈을 보십시오. 그때는 줄곧 울었지만 이제는 웃고 있어요. 리즈(Lise), 감사를 드려야지, 감사를!"


귀엽게 방실방실 웃고 있던 리즈의 얼굴이 갑자기 자못 진지해졌다. 그렇게 그녀는 최대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장로를 바라보면서 장로 앞에서 자신의 작은 두 손을 모았지만, 이내 참지를 못하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이건 저 사람 때문이에요, 저 사람을 보니까 웃겨서 그래요!” 그녀는 자기가 기어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 것에 대해 어린애다운 신경질을 내면서 알료샤를 가리켰다.


“이 아이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당신에게 용건이 있답니다……. 그래, 건강은 어떠신가요?” 애 엄마가 갑자기 알료샤를 보더니, 장갑을 낀 매력적인 손을 내밀며 말을 이어 갔다. 장로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알료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알료샤는 리즈 쪽으로 다가가서는 어쩐지 이상하고도 겸연쩍은 웃음을 띠면서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리즈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이걸 전해 주라고 하셨어요.” 그녀는 그에게 조그만 편지를 내밀었다. “자기 집에 좀 들러 달라고, 그것도 빨리 들러 달라고,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꼭 와 달라고 부탁하던데요.”

“그분이 저한테 들러 달라고 부탁한다고요? 그분이 저를……. 대체 왜?” 알료샤가 심히 놀라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엔 갑자기 수심이 가득해졌다.


“오, 이건 전부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때문에……. 그리고 최근의 모든 사건들 때문이에요.” 부인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이제 한 가지 결정을 한 모양인데……. 그것을 위해서 그분은 반드시 당신을 만나야 한답니다……. 도대체 왜일까요? 물론, 저야 모르지만 가능한 한 빨리 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니 당신은 그리하시겠지요, 분명히 그렇게 하실 테죠, 이건 심지어 기독교적 감정의 명령이 아닙니까.”


“좋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부디 와 달라는 강경한 부탁 말고는 그 어떤 설명도 없는 수수께끼 같은 짧은 편지를 훑어본 뒤 알료샤는 마음을 정했다.

“아, 그래 주시겠다니 정말 사랑스럽고 관대하세요.” 갑자기 정말로 생기를 띠면서 리즈가 소리쳤다. “사실, 저는 엄마에게 그는 구도 생활 중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가지 않을 거다, 하고 말했거든요. 정말 어찌나, 어찌나 멋진 분이신지! 저는 언제나 당신이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지금 이 말을 당신에게 하게 돼서 기분이 너무 좋아요.”


“당신은 우리를 잊으셨답니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우리 집에는 통 오고 싶지 않으신가 봐요. 그나저나 리즈는 오직 당신과 있을 때만 기분이 좋다고 저에게 두 번씩이나 말했답니다.” 이 말에 알료샤는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올렸는데, 갑자기 다시금 얼굴이 새빨개졌고 다시금 갑자기 자기도 왠지 모르면서 씩 웃었다. 하지만 장로는 이미 그를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리즈의 의자 곁에서 장로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외부에서 온 수도사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던 것이다.


“장로님께서는 감히 어떻게 이런 일들을 행하시는 겁니까?” 수도사는 질책을 하듯 엄숙하고 의기양양하게 리즈를 가리키면서 갑자기 물었다. 그녀의 ‘치료’를 암시하는 말이었다.

“병세가 좀 누그러졌다고는 해도 완전히 치료된 건 아니며, 또 다른 원인 탓일 수도 있으니까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제 암자를 방문해 주시지요, 신부님.” 그는 수도사에게 덧붙였다. “아무 때나 손님을 받을 수는 없는 처지지만 말입니다. 병을 앓고 있는지라, 제 수명이 다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오 아닙니다, 아니에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장로님을 앗아 가지 않으실 겁니다, 아직 오래 사실 겁니다, 오래.” 부인이 소리쳤다. “도대체 어디가 아프다는 겁니까? 이토록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데.”


“오늘은 제가 유난히도 기분이 좋지만, 이것이 그저 순간일 뿐임을 이미 알고 있답니다. 이제는 제 병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만약 부인 눈에 제가 명랑해 보인다면, 그건 부인의 그러한 말씀이 바로 저를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더 기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행복을 위해서 창조되었기에 전적으로 행복한 자는 자기 자신에게 곧장 ‘나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서약을 이행했노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오, 정말 대단한 말씀이십니다. 그나저나 행복, 행복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스스로에 대해 자기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 만약 장로님께서 오늘 저희가 다시 한번 장로님을 뵐 수 있도록 허락하셨을 만큼 선량하신 분이라면, 제가 장로님께 지난번에는 다 말하지 못한, 감히 말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들어주세요, 오랫동안, 너무도 오랫동안 저를 괴롭히고 있는 모든 것을! 저는 고통스럽습니다."

“무엇이 유달리 그렇습니까?”

“제가 고통스러운 건…… 불신 때문입니다…….”


"저는 눈을 감고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다들 믿고 있다면, 이런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생겨났을까 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처음에는 자연의 위협적인 현상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났고, 고로 이런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평생 동안 믿음을 갖고 살다가 죽었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없다면, 제가 읽은 어느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덤 위에는 그저 잔디만 무성할 뿐'이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끔찍해요! 무엇으로, 무엇으로 믿음을 되돌릴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도대체 무엇으로 이것을 증명할 것인가, 저는 지금 장로님 앞에 엎드려 이것을 여쭙고자 온 거랍니다."


"틀림없이 죽도록 괴로우실 겁니다. 하지만 이 경우엔 증명할 수 있는 건 없지만, 확신을 할 수는 있습니다."

"정말요? 어떻게요?"

"사랑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그럴 수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실천적으로, 끊임없이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사랑을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하느님의 존재도, 영혼의 불멸도 확신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만약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여 완전한 자기희생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때는 틀림없이 믿게 될 것이며 어떤 의심도 부인의 영혼 속에 깃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경험을 거쳐 검증된 것이며, 정확합니다."


"실천적인 사랑이라고요? 그렇다면 다시 질문이 있습니다, 저는 인류를 너무도 사랑하여, 정말로 가끔씩은 모든 걸, 갖고 있는 모든 걸 버리고 리즈마저 홀로 남겨 둔 채 간호사의 길을 떠나는 꿈을 꾸곤 합니다. 눈을 감고 생각하고 꿈을 꿀 때면, 그 순간이면 저는 저의 내부에 극복할 수 없는 힘을 느낍니다. 어떤 상처도, 어떤 고름으로 썩어 가는 독도 저를 놀라게 할 수 없을 테죠. 저는 제 손으로 직접 상처를 싸매 주고 씻어 줄, 이 순례자들 곁을 지키는 간호사가 될 준비가, 그 독에 입을 맞출 준비가 되어 있어요……."


"부인께서 머릿속으로 다름 아닌 그런 것을 꿈꾸신다면, 그것 자체로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쩌다가라도 정말로 선한 일을 하시게 될 테니까요."

"예, 하지만 그런 생활을 제가 오랫동안 견뎌 낼 수 있을까요?" 부인은 거의 미친 듯 흥분하여 열렬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바로 여기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답니다! 눈을 감고서 자문해 본답니다. 만약 네가 어떤 환자의 상처를 씻겨 주는데 그 환자가 너에게 당장 고마움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변덕을 부려 너를 괴롭힌다면, 그땐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저는 보답의 노예인 겁니다. 저는 당장 보답을, 즉 칭찬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건 이미 오래전에 어느 의사가 저에게 해 준 얘기와 똑같군요." 장로가 지적했다. 그는 이미 나이가 꽤 지긋이 든, 이론의 여지가 없이 똑똑한 사람이었지요. 그도 부인처럼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했는데, 인류 전체를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인 사람들, 즉 사람들 개개인은 점점 덜 사랑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몽상 속에서는 어쩌면 정말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행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를 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정작 고작 이틀도 누구와 한방에서 지낼 수가 없다, 이건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하고 말하더군요."


"상대방이 자기 곁에 있을라치면 곧 그라는 사람 자체가 자기의 자존심을 억누르고 자유를 밀어낸답니다. 꼬박 이십사 시간 동안이면 심지어 가장 훌륭한 사람도 증오하게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누구는 너무 오랫동안 식사를 하니까, 다른 누구는 콧물감기에 걸려 끊임없이 코를 푸니까 말이죠. 사람들이 자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곧 그들의 적이 된답니다. 대신, 개별적인 사람들을 더 많이 증오하게 될수록 언제나 인류 전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더욱더 불타오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되냐고요? 이제 절망에 빠져야 하나요?"

"아니요, 부인께서 이 때문에 그토록 상심하신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시면 보답이 돌아올 겁니다. 부인께서 지금 저와 이토록 진실되게 이야기를 나누셨지만, 만약 그것이 저에게서 그저 부인의 의로움에 대한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면, 실천적인 사랑이라는 위업에 있어선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그저 부인의 몽상 속에 머물고 삶은 환영처럼 명멸해 버리겠지요."


"저는 부인께서 진실되고 착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을 믿겠습니다. 설령 행복에까지는 다다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인이 좋은 길로 들어섰음을 늘 기억하시고 거기서 일탈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무엇보다도, 거짓을, 어떤 것이든 거짓을 피하고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을 피하십시오. 자신의 거짓을 관찰하고 매시간, 매 순간 그것을 들여다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이건 자기 자신이건 누군가를 거리껴하지도 마십시오.

부인의 내부에서 어떤 것이 부인께 추잡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인께서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인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정화되는 겁니다. 공포도 역시 피하십시오, 공포란 그저 온갖 거짓의 결과일 따름이지만. 사랑을 성취함에 있어 자신의 옹졸함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이와 관련하여 부인의 어떤 고약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큰 두려움을 갖지는 마십시오.

부인께 이보다 더 즐거운 얘기를 더 이상 들려 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니, 몽상적인 사랑과 비교할 때 실천적인 사랑이란 잔혹하고 무서운 것이니까요. 몽상적인 사랑은 어서 빨리 만족할 만한 위업을 달성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봐 주길 갈망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그렇게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 목숨조차도 내놓을 것이지만, 다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마치 연극 무대에서처럼 어서 빨리 성사된다는 조건으로만 말이죠.

하지만 실천적인 사랑, 그것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말하자면 완전히 학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리 말해 두건대 부인께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멀어졌음을 목도하고 공포감을 느끼게 될 바로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부인께 미리 말씀드리지만, 부인은 갑자기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부인 앞에서 언제나 부인을 사랑했고 언제나 부인을 인도했던 주님의 기적적인 힘을 보게 될 겁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부인과 더 오래 머물 수가 없군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부인은 울고 있었다. "리즈, 리즈, 이 애를 축복해 주세요!" 갑자기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이 아가씨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 아가씨가 줄곧 장난만 치는 걸 보았거든요." 장로가 농담처럼 말했다. “아가씨는 왜 줄곧 알렉세이를 놀렸던 거요?"

리즈는 줄곧 이런 장난질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료샤가 자기를 보자 당혹스러운 나머지 아예 자기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챘는데, 바로 이것이 엄청나게 재미있었던 것이다.


"장난꾸러기 아가씨, 왜 그를 그렇게 부끄럽게 만드는 거요?" 장로가 참고만 있지 않고 말했다. 리즈는 너무 뜻밖에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 눈을 반짝였으며 얼굴 표정은 엄청나게 진지한 빛을 띠게 됐는데, 그러고선 분노에 찬 열렬한 불평을 담아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빨리 말하기 시작했다.

"저분은 왜 모든 걸 잊었다죠? 제가 어렸을 때는 저를 품에 안고 다녔어요, 우리는 함께 놀았다고요. 저분은 이 년 전에 작별 인사를 하면서,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친구라고 말했단 말이에요! 그래 놓고서는 이제 갑자기 저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아니, 제가 자기를 잡아먹기라도 한대요?"


장로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말을 경청한 뒤 상냥하게 그녀를 축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손에 입을 맞추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그 손을 자기 눈에 갖다 대며 울음을 터뜨렸다.

“장로님, 저한테 화내지 말아 주세요, 저는 바보예요, 아무 가치도 없는……. 그러니 아마 알료샤가 옳은지도 몰라요, 정말 옳아요, 이런 우스꽝스런 계집애한테는 오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

“내 그를 꼭 보내 주도록 하지요.” 장로가 이렇게 단언했다.


5 아멘, 아멘!


장로는 약 이십오 분 정도 방을 떠나 있은 셈이었다. 이미 12시 반이 지났건만, 모든 사람들을 모이게 한 장본인인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예 잊어버린 양, 장로가 다시 방으로 들어섰을 때 손님들 사이에서는 몹시 활기찬 공통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대화에 참여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이반 표도로비치와 두 수도사제였다.



장로는 자기 자리에 앉은 뒤 계속하라고 다정하게 부추기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의 표정을 거의 속속들이 꿰고 있는 알료샤는 그가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모임을 해산시키고 싶지 않은 듯했다. 어쩌면 덧붙여 뭔가 자기만의 목적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하지만 도대체 어떤 목적일까? 알료샤는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분의 흥미롭기 이를 데 없는 논문에 대해 논하던 중입니다.” 사서인 수도사제 이오시프가 장로를 향해 이반 표도로비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러 새로운 점이 많지만, 그럼에도 사상 자체는 양날의 칼 같은 데가 있습니다. 이분은 '교회의 사회 재판과 그 권리의 범위 문제'와 관련하여, 바로 이 문제로 꼬박 책 한 권을 쓴 어느 성직자에게 대답하는 차원에서 논문 한 편을 잡지에 실었는데요…….”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논문을 읽지는 못했지만, 얘기는 들었습니다.” 주의 깊은 시선으로 뚫어질 듯 이반 표도로비치를 응시하면서 장로가 말했다.

“이분은 흥미롭기 이를 데 없는 관점을 취하고 계십니다.” 사서 신부가 계속했다. “교회의 사회 재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교회를 국가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듯하거든요.”

“그거 참 흥미로운데,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장로가 이반 표도로비치에게 물었다.


상대방은 마침내 그에게 대답을 했는데, 겸허하고 절제된, 눈에 뜨일 만큼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며 무슨 저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는 두 요소들의 혼합, 즉 교회와 국가의 개별적인 본질들의 혼합이 물론 영원히 계속되라는 입장에서 출발했습니다만, 이 일의 근저에는 기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며 정상적인 상태는 물론이거니와 어느 정도 조화된 상태로 이끌어 가는 것조차도 절대 안 될 겁니다. 예컨대 재판과 같은 종류의 문제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 사이의 절충이란 제 생각으론 순전히 그 본질상 불가능합니다. 제가 반박을 가했던 성직자는 교회가 국가에서 정확하고 일정한 입지를 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게, 반대로, 교회가 국가 내에서 그저 일정한 구석만을 점할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전 국가를 포함해야 하며, 그것이 지금은 여사여사한 이유로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사태의 본질을 볼 때 앞으로 기독교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직접적이고도 가장 주된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반박했습니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박식하면서도 말수가 적은 파이시 신부가 강경하고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순전히 교황지상주의로군!" 초조해하며 다리를 바꿔 꼰 뒤 미우소프가 소리쳤다.

이오시프 신부가 장로를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그나저나 이분의 논적인 성직자가 제시하는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명제는 다음과 같은데, 유념할 만합니다. 첫째, '그 어떤 사회 연합도 사회 구성원의 민간적, 정치적 권리를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둘째, '형사상의 권력과 민법상의 사법적 권력은 교회에 속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교회가 신적인 기관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목적을 위한 사람들의 연합인 이상 교회의 본질과 양립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으로, '교회는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죠."


이반 표도로비치는 공손하고 주의 깊게 그의 말을 경청한 뒤 굉장히 침착한, 하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열의 있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장로를 바라보며 계속했다.


"제 논문의 핵심은 고대, 즉 기독교의 초창기 삼 세기 동안 기독교는 이 지상에서 그저 교회로 존재했으며 그저 교회였을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로마라는 이교도 국가가 기독교 국가가 되길 희망했을 때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은 형국이 되었습니다. 즉 기독교 국가가 된 이후 로마는 교회를 그저 자기 내부로 포함시키기만 했을 뿐, 국가 자체는 여전히 대단히 많은 점에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교도 국가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하지만 국가로서의 로마에는 문명화와 이교적인 지혜의 소산들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었 으니, 바로 국가의 목적과 기초들이 바로 그 예입니다. 한편, 그리스도 교회는 국가 속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틀림없이, 자신의 기초들, 즉 교회의 존립 기반인 초석 중 그 어떤 것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으며 주님에 의해서 일단 견고하게 확립되고 지정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전 세계를, 즉, 모든 고대 이교도 국가를 교회로 바꾸는 것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즉 미래의 목적을 위해서) 교회가 국가 안에서 (제가 논박하고 있는 저자의 표현대로) 온갖 '사회적 연합'이나 '종교적 목적을 위한 사람들의 연합'처럼 일정한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온갖 지상의 국가가 나중에는 완전히 교회로 바뀌어 교회 자체로 거듭나야 하며 이로써 교회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 온갖 자신의 목적들은 이제 물리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절대로 국가를 깎아내리는 것도, 위대한 국가로서의 명예나 영광 및 그 통치자들의 영광을 뺏는 것도 아니고, 그저 국가를 여전히 이교적인 거짓되고 그릇된 길에서 끌어내어 오로지 영원한 목적으로만 이어지는 올바르고 참된 길로 인도하는 것일 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 재판의 근거들'에 관한 책의 저자가 만약 이 근거들을 탐색하고 제안하면서 그것들을 아직은 죄 많고 완결되지 않은 우리 시대를 위해 불가피하되 일시적인 절충안으로 봤더라면, 그의 논의는 타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근거들의 저작자가 감히 지금 자기가 제안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론 지금 이 오시프 신부님께서 열거하신 그 근거들이 근원적인 영구불변의 원칙이라고 공언한다면, 그때는 이미 교회와 성자, 교회의 영구불변한 소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제 논문의 핵심이며 요지의 전부입니다."


"즉,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군요." 파이시 신부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우리 19세기에 와서 너무도 분명해진 어떤 이론에 따르면, 교회는 마치 하등 한 것이 고등한 것으로 변형되듯 국가로 다시 태어나야 하며 그다음엔 과학을 비롯한 시대정신과 문명에 자기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국가 속에서 소멸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원하지 않아 저항한다면, 교회는 국가 내에서 무슨 구석으로 내몰릴 것이며 그나마도 감시를 받는 처지가 될 터인데, 이것은 현재 동시대의 유럽 국가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교회가 마치 하등한 유형이 고등한 유형으로 변형되듯 국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오로지 국가가 다름 아닌 교회로 변모되어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지어다, 아멘!"


"모든 것이 교회가 되어 버린다면, 교회는 범행을 저지른 자나 복종하지 않는 자의 목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파문해 버릴 겁니다." 이반 표도로비치가 계속했다.

"오늘날의 범죄자의 양심은 극히, 극히 자주 자기 자신과의 거래로 돌입합니다. '도둑질을 하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못 갈 건 없다, 그리스도의 적이 된 건 아니지 않은가.'라는 식이죠. 오늘날의 범죄자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국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그때는 지상의 교회를 통째로 부정하지 않는 한 '다들 잘못 알고 있어, 다들 잘못된 길로 빠져든 거야, 전부 다 가짜 교회야, 오직 살인자이자 도둑인 나 하나만이 올바른 기독교 교회야.'라고 말하기는 힘들 겁니다. 정말이지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하긴 매우 힘들 테고, 이건 좀체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상황적 조건들이 있어야만 가능할 겁니다. 이제, 다른 한편으로, 범죄에 대한 교회 자체의 시각을 한번 보십시오. 지금은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흔히들 병균에 감염된 구성원을 기계적으로 잘라 내고 있는데, 현재의 이러한 거의 이교적인 시각은 응당, 인간을 다시금 갱생시키고 부활시키고 구원해야 된다는 이념으로 완전하고도 참되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실은 지금도 정말 그렇습니다." 갑자기 장로가 입을 열었고, 그러자 좌중의 시선이 일시에 그에게로 향했다. "사실 지금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없다면 범죄자의 악행을 제어할 어떤 것도 없을 것이며 나중에 그에 대한 징벌도 가할 수 없을 것인데, 이때의 징벌이란 지금 이분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대부분의 경우 그저 마음의 짜증만을 돋울 뿐인 기계적인 징벌이 아니라 진정한 징벌, 즉 유일하게 효과적이며 유일하게 공포를 주기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주기도 하는, 자기 자신의 양심을 의식함으로써 행해지는 진정한 징벌을 말합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미우소프가 아주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지요." 장로가 시작했다.


"이렇게 유형을 보내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으론, 예전엔 채찍질까지 했지만, 그 누구도 교화시키지 못할뿐더러 무엇보다도 거의 그 어떤 범죄자도 두려움에 떨게 하지 못하므로, 범죄의 수는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더 증가하는 추세가 됩니다. 이 점에는 당신도 응당 동의하시겠지요. 결과적으로, 이런 식으로 해선 사회가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데, 해로운 구성원을 기계 적은 로 잘라 내어 눈에 보이지 않도록 멀리 유형을 보낸다고 해도 그의 자리엔 곧 또 다른 범죄자가, 어쩌면 그것도 둘씩이나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현재에도 이 사회를 보호하고 범죄자마저도 교화해서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다시금 오직, 자신의 양심을 의식함으로써 듣게 되는 그리스도의 율법뿐입니다. 즉 교회의 아들로서 자신의 죄를 의식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이 사회, 즉 교회 앞에 죄를 지었음을 의식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듯, 국가가 아니라 오직 교회 앞에서만 현대의 범죄자는 자신의 죄를 의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재판권이 교회와 같은 사회에 속해 있었더라면, 그 사회는 파문당한 자들 중 누구를 다시 소환하여 자기에게 합류시킬지를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는 어떤 실제적인 재판권도 없이 그저 도덕적인 단죄의 가능성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범죄자에 대한 실제적인 징벌에서 그 스스로 멀어져 있습니다. 즉, 교회는 범죄자를 파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와 같은 훈시를 방기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더욱이, 범죄자가 여전히 기독교 교회와 계속 사귈 수 있도록 노력하지요. 범죄자를 교회 미사나 영성체에 들여보내고 그에게 공물을 주기도 하면서 죄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포로와 같이 다루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기독교 사회가, 즉 교회가, 시민적 권리가 그를 배척하고 내치듯 그렇게 그를 배척했다면, 오 주여! 범죄자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교회마저도 국가의 법에 따라 매번 그를 파문함으로써 징벌을 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큰 절망이란, 적어도 러시아의 범죄자에겐, 있을 수도 없는데, 이는 러시아의 범죄자들에겐 아직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누가 알겠습니까. 어쩌면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면, 즉 범죄자의 절망적인 마음속에서 혹시나 믿음이 상실되어 버린다면, 그때는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교회는 사랑을 베푸는 상냥한 어머니처럼 실제적인 징벌을 스스로 회피하는데, 왜냐면 구태여 교회가 징벌을 가하지 않더라도 죄인은 국가 재판에 의해 너무도 고통스러운 처벌을 받았기에 차라리 그를 동정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도, 교회 재판이 유일하게 진리를 내포한 재판이고, 그 결과 그 어떤 다른 재판과도 일시적인 절충의 형태로라도 정신적으로 결합될 수 없기 때문에 징벌을 회피하는 겁니다.

이런 경우엔 거래를 하는 것이 이미 불가능합니다. 외국의 범죄자들은 뉘우치는 일이 드물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가장 현대적인 학설들조차도 그의 범죄는 범죄가 아니라 그저 부당한 억압적 힘에 대한 반란일 뿐이라는 생각을 그에게 확증해 주기 때문이지요. 사회는 자기 힘으로 범 죄자를 마구 짓밟으면서 기계적으로 내치고 이러한 파문에는 증오가 합세하는데(적어도 유럽인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자기의 형제이기도 한 범죄자를 증오하는 건 물론이고 그의 앞날의 운명을 완전히 무시하고 깡그리 망각하는 것이지요

이렇듯, 모든 것이 교회 측의 일말의 동정도 없이 일어나는데, 왜냐면 많은 경우 그곳에는 이미 교회가 전 혀 없거나 아니면 그저 교회 종사자들과 웅장한 교회 건물들만 남아 있을 뿐, 그곳의 교회 자체는 국가 안에서 완전히 소멸되기 위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라는 하등한 모습에서 국가라는 고등한 모습으로 열심히 이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루터파 국가에서는 그런 듯합니다. 로마에서라면 벌써 천 년째 교회 대신에 국가가 선포되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범죄자는 스스로를 교회의 일원으로 의식하지 못하며, 파문당한 채 절망에 빠지는 겁니다. 사회로 돌아온다고 해도 보통은 너무도 큰 증오를 품은 상태이기 때문에, 사회 자체가 이미 그를 파문하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끝날지는 여러분이 직접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많은 경우 우리나라도 동일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인즉, 우리나라에는 제도로 확립된 재판 말고도 덧붙여 범죄자를 여전히 사랑스럽고 여전히 소중한 자기 아들로 대하는 교회라는 것이 있고, 덧붙여 비록 현재는 실제적인 힘은 없고 그저 생각 속에서만 미래를 위해 존재하지만 어떻든 교회 재판이라는 것이 보존되고 있으며, 이는 비록 몽상 속에서라도 틀림없이 범죄자 자신에 의해, 그의 영혼에 의해 본능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여러분께서 말씀하신 것도 옳은데, 만약 정말로 교회 재판이 시작되어 완전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면, 즉 전 사회가 그저 교회로 변하기만 한다면, 교회의 재판이 지금과 달리 범죄자의 교화에 큰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정말로 범죄의 수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현저한 비율로 줄어들 것입니다. 게다가 더욱이 교회도 미래의 범죄자와 미래의 범죄를 많은 경우 지금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 해할 것이며, 파면된 자를 되돌리고 잠재적 범죄자에게 경종을 울리고 타락한 자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하고 장로가 씩 웃었다.

"지금은 그리스도 사회 자체가 아직 준비가 안 되어, 그저 일곱 명의 의인들 위에 서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영락하지 않는 한, 아직은 거의 이교적인 연합으로서의 사회를 전 세계를 다스리는 단일한 지상의 교회로 완전히 변형시킬 것을 기다림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확고부 동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실현되도록 약속된 것인바, 세기들의 끝에 가서라도 그대로 이루어질지어다, 아멘! 시간과 기한 때문에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는데, 시간과 기한의 비밀은 하느님의 지혜와 선견지명, 사랑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계산에 의할 때는 아직 극히 요원할 수 있는 것이, 하느님의 예정된 뜻에 의하면 그 실현이 전야에, 바로 문턱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질지어다, 아멘."


"이상하군요, 대단히 이상합니다!" 미우소프는 열렬함이 아니라 어떤 숨겨진 격노를 표출하는 듯했다.

"무엇이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십니까?" 이오시프 신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이게 정말로 뭡니까?" 미우소프가 갑자기 마치 폭발이라도 한 듯 소리쳤다. 지상에서 국가가 배척되고 교회가 국가의 지위로 상승된 다니! 이건 교황지상주의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초교황지상주의군 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도 꿈도 못 꾸었을 겁니다!"


"완전히 정반대로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파이시 신부가 엄격하게 말했다. "교회가 국가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유념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로마이고 로마의 꿈이지요. 그야말로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이란 말입니다! 오히려, 국가가 교회로 변하여 교회의 지위로 올라가고 전 지상의 교회가 되는 것인데, 이것은 교황지상주의와도, 로마와도, 당신 의 해석과도 정반대 되는 것으로서 그저 이 땅에서 정교의 위대한 소명일 뿐입니다. 이 별은 동방에서부터 빛나게 될 겁니다."


"작은 일화 하나를 얘기하도록 해 주시지요, 여러분." 갑자기 어쩐지 유난히 더 폼을 잡으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우소프가 입을 열었다.

"파리에서 이미 몇 년 전, (나폴레옹의) 12월 쿠데타 직후인 어느 날, 저는 친분이 있는, 그 당시로 지휘자급이었던 아주, 아주 유력한 어떤 인물을 방문했다가 그분의 집에서 대단히 흥미진진한 한 신사를 만나게 됐습니다. 이 사람은 보통 탐정이 아니라 정치 탐정들 전체를 다루는 인물 같았는데, 나름대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요직에 있었지요.

화제는 마침 그 당시 추종받던 사회주의 혁명가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대화의 주된 본질은 생략하고 이 신사의 입에 서 갑자기 튀어나온 한 가지 아주 흥미로운 지적만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이라면서 그가 말했습니다. '사실 이 모든 사회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 무신론자, 혁명가들은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으며, 그들의 동태를 다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 중에는 비록 소수라고 해도 다소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신을 믿는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자인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치들을 우리는 제일 두려워합니다, 이들은 끔찍한 족속입니다! 기독교도이면서 사회주의자인 자는 무신론자이면서 사회주의자인 자보다 더 끔찍합니다. 이 말은 그 당시에도 제게 충격적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자니, 여러분, 어쩐지 그들이 갑자기 떠오르는군요……."


“즉, 당신은 그들을 우리와 결부시키고 우리를 사회주의자로 보시는 겁니까?” 말을 조금도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파이시 신부가 물었다. 하지만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무슨 대답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문이 열렸고 약속 시간보다 상당히 늦게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들어왔다. 사실 다들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처음엔 다소나마 놀라움마저 불러일으켰다.


6 저런 인간은 도대체 왜 살까!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중키에 호감이 가는 얼굴을 지닌 스물여덟 살의 젊은이였지만, 자기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그는 근육질의 사나이로서 척 봐도 힘이 상당히 셀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그 얼굴에는 뭔가 병적인 기색이 감돌았다. 그의 시선은 그의 내적인 정조에 복종하지 않는 듯했고 이따금씩은 현재의 순간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뭔가 다른 것을 표현하곤 했다. 그와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은 이따금씩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단 말이야.”라고 평하곤 했다.


사실 그는 타고나길 짜증을 잘 내는 편인 데다가, 어느 모임에서 우리 지역 재판관 세묜 이바노비치 카찰니코프가 그를 두고 제대로 표현했듯, ‘정신세계가 돌출적이고 고르지 못한 자’였다. 그는 나무랄 데 없이 멋지게 차려입고서 프록코트의 단추를 채우고 검은 장갑을 낀 손에는 실크해트를 든 채로 들어왔다. 갓 퇴역한 군인 티라도 내듯, 콧수염만 남겨 둔 채 턱수염도 지금은 밀어 버린 상태였다.


그는 군대식으로 큰 보폭을 자랑하며 단호하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한순간 문지방에서 걸음을 멈추고 모든 이들을 한번 둘러본 뒤, 장로가 곧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채곤 곧장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몸을 깊이 숙여 인사를 하면서 축복을 구했다. 장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축복했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그의 손에 공손하게 입을 맞춘 뒤 이례적으로 흥분하여 거의 짜증까지 내면서 말했다.



“이렇게 오래 기다리시게 하다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아버지가 보낸 하인 스메르쟈코프에게 약속 시간을 따져 물었더니 두 번씩이나 아주 단호한 어조로 1시라고 대답했지 뭡니까. 이제 와서 갑자기 알고 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장로가 말을 가로막았다. “괜찮습니다, 좀 늦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워낙 선량하신 분이시니 이러실 줄 알았습니다.” 드미트리가 말했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의 등장으로 인해 소요된 시간은 고작해야 이 분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는 물론 쉽게 재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파이시 신부의 거의 짜증스러울 만큼 집요한 질문에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 주제는 좀 제쳐 놓도록 합시다.” 그는 사교계 모임에서 흔히 보이는 다소 무관심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 이반 카라마조프도 우리를 보고 웃고 있군요. 필경, 이분은 그 문제에 대해서도 뭔가 흥미진진한 생각이 있나 봅니다. 자, 이분에게 물어보시지요.”


“특별한 건 없고 그저 짧게 한마디 하자면요.”라고 이반 표도로비치가 곧장 대답했다. “대체로 유럽의 자유주의, 심지어 우리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딜레탕티슴마저도 오래전부터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결과와 기독교의 그것을 혼동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 기이한 결론은 물론, 눈에 띄는 특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기독교를 혼동하는 것은 알고 보면 자유주의자와 딜레탕트뿐만 아니고, 많은 경우 헌병들, 즉 물론 외국의 헌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파리 일화는 상당히 특이한 구석이 있습니다,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체로 이 주제는 이제 그만 다뤘으면 합니다."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반복했다. "그 대신 다른 일화를, 여러분, 다름 아닌 이반 표도로비치에 대한 아주 흥미진진하고 아주 특이한 일화를 이야기할까 합니다.


"기껏해야 닷새쯤 전에 주로 부인들이 오는 이곳의 어느 모임에서 그는 논쟁 중에 전 세상을 통틀어 사람에게 자기와 비슷한 자들을 사랑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것은 단연코 아무것도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했습니다. 사람에게 인류를 사랑하도록 할 수 있게 하는 자연의 법칙 같은 것, 그런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지상에 사랑이 존재하고 지금까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자연의 법칙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이 자신의 불멸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러고서 이반 표도로비치는 마치 괄호를 치듯, 바로 여기에 자연법칙의 핵심이 들어 있으므로 인류에게서 불멸에 대한 믿음을 없애 버린다면 그 즉시 사랑뿐만 아니라 세상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온갖 생명력이 고갈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뿐입니까. 그렇게 되면 이미 부도덕적인 것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져서 모든 것이, 심지어 식인마저도 허용될 거랍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그는 결론 삼아 주장하길 각각의 개인, 예를 들어 우리처럼 신도, 자신의 불멸도 믿지 않는 인물들에게 있어서 자연의 도덕법칙은 예전의 종교적인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즉각 바뀌어야 하며, 악행에 가까운 이기주의조차도 인간에게 허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런 상태에서는 가장 이성적이고 불가피하면서도 거의 가장 고귀한 귀결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역설을 보면, 우리의 친애하는 기인이자 역설가인 이반 표도로비치가 그 밖에 어떤 것을 주장할 것이며 또 그럴 의향인지를 여러분은 단언할 수 있을 겁니다."


"죄송합니다만." 하고 뜻밖에도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갑자기 소리쳤다.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서요. '악행은 허용되어야만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온갖 무신론자의 처지에서 본다면 가장 불가피하고 현명한 출구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다는 겁니까, 예?"

"바로 그렇습니다." 파이시 신부가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 말을 하고 나자,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느닷없이 대화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역시나 또 느닷없이 입을 다물었다. 다들 호기심을 갖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당신은 사람들에게서 그들 자신의 영혼의 불멸에 대한 믿음이 고갈된다면 그런 결과가 생기리라고 확신하십니까?" 갑자기 장로가 이반 표도로비치에게 물었다.

"예, 저는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불멸이 없다면 선행도 없습니다."

"그렇게 믿으신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미 몹시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 불행한 겁니까?" 이반 표도로비치가 미소를 지었다.

"왜냐면 여러모로 보아 당신은 자신의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을 테니까요, 심지어 당신이 교회와 교회 문제에 대해 쓴 것조차도."



"장로님 말씀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말이 완전히 농담이었던 건 아닙니다……."이반 표도로비치는 갑자기 이런 이상한 고백을 했는데, 그나저나 얼굴이 급속도로 새빨개졌다.

"완전히 농담이었던 건 아니라니, 그건 진실이겠지요. 이 사상은 아직 당신의 마음속에서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신을 괴롭히는 겁니다. 하지만 수난자도 이따금씩 자신의 절망을 놀이 삼아 즐기는 걸 좋아하는데 그 역시도 절망의 소산이지요. 지금은 당신도 잡지에 논문을 싣기도 하 고 사교계 모임에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면서 절망을 놀이 삼아 즐기고 있지만, 자신의 논리를 스스로도 믿지 않으니 마음속에 고통을 안은 채 속으로는 그것을 비웃고 있는 것이겠지요……. 당신의 내부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당신의 크나큰 비애의 원인인데, 왜냐면 그것은 집요하게 해결을 요구할 테니까요……."


"그럼, 그 문제가 저의 내부에서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긍정적인 쪽으로요?"이반 표도로비치는 줄곧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장로를 바라보면서, 이상한 질문을 계속했다.


"긍정적인 쪽으로 해결될 수 없다면, 부정적인 쪽으로도 절대로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마음이 이런 속성을 지녔다는 건 당신 자신이 잘 아실 테지요. 바로 여기에 당신의 고뇌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런 고뇌로 괴로워할 능력을 갖춘 고귀한 마음을 선사하신 것에 대해 조물주께 감사드리십시오, '높은 곳에 뜻을 두고 높은 것을 구하라, 이는 우리의 살 곳이 하늘에 있음이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이 지상에 있는 동안 당신의 마음이 해결책을 찾도록 해 주시길,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길을 축복해 주시길!"


장로는 한 손을 들어 올려 그 자리에서 이반 표도로비치에게 성호를 그어 주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가선 그의 축복을 받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춘 뒤 말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이 행동, 나아가, 앞서 그에게서 좀처럼 예상할 수 없었던 장로와의 대화는 워낙에 수수께끼 같고 어떤 웅장함까지 가미되었기 때문에 모두들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으며 알료샤의 얼굴에는 거의 경악마저 나타났다. 하지만 미우소프는 갑자기 어깨를 으쓱했고, 바로 그 순간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벌떡 일어났다.


"하느님과 다름없이 성스러우신 장로님!" 그는 이반 표도로비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 녀석이 제 아들입니다, 제 육신에서 나온 육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제 혈육입니다! 이 녀석은 존경받아야 마땅한 나의, 말하자면, 카를 모어이며, 바로 여기 지금 들어온 이 아들 녀석, 제가 장로님께 녀석을 혼내 줄 방법을 구하도록 만든 장본인인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이 녀석은 그러니까 존경받지 말아야 마땅한 프란츠 모어입니다. 둘 다 실러의 『군도』에서 가져왔는데,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 경우엔 영주인 폰 모어 백작이 되겠군요! 잘 헤아려 구원해 주십시오! 우리 에겐 장로님의 기도뿐만 아니라 장로님의 예언까지도 필요하거든요."



"어리석은 말씀은 그만두시고 집안사람을 욕보이는 일도 하지 마십시오." 장로가 기진맥진하여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가면 갈수록 더 눈에 뜨이게 기력이 쇠진해 갔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분노에 차서 이렇게 소리치더니 심지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죄송합니다, 신부님. 신부님께서는 속으셨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신부님의 암자에 모이도록 허락해 주시다니 신부님께서 너무 선량하셨던 겁니다. 아버지에게 필요한 건 오직 스캔들뿐인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스캔들이냐, 바로 여기엔 아버지만의 꿍꿍이속이 있는 겁니다. 아버지에게는 늘 자기 만의 꿍꿍이속이 있거든요……."


"다들 나를 모함하고 있어, 저들 모두!" 표도르 파블로비치도 자기 나름대로 소리쳤다. "자, 여기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도 모함하고 있지요. 모함하다마다요,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모함했단 말이오!" 그는 갑자기 미우소프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사실 상대방은 그의 말을 가로막을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들 내가 아이들의 돈을 장화 뒤로 빼 돌려 한 푼의 에누리도 없이 가로챘다고 모함하고 있어요. 하지만 죄송합니다만, 아니, 재판이란 건 존재하지도 않습니까? 거기서 다 따져 줄 거요, 다들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결과적으로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아직도 나한테 빚이 있고 그것도 얼마 나부랭이가 아니라 몇 천이나 됩니다, 이 모든 서류가 다 내 손에 있다고요! 이전에 복무했던 곳에서도 양갓집 규수들을 유혹하느라 1000씩, 2000씩 쓰곤 했다지요. 이런 거라면,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우리는 가장 비밀스러운 속내 얘기들까지 다 알고 있소, 내 증명해 보이리라…….

성스러우신 신부님, 정말입니다. 재산도 적잖이 있는 훌륭한 집안의 귀한 처자를, 즉 공훈을 많이 세워 목에 안나 훈장을 달고 있던 용맹스러운 대령이자 자신의 이전 상관의 딸을 멋지게 후려서 청혼을 함으로써 아가씨의 명예를 욕되게 했고 지금 그 처자, 즉 그의 신붓감이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 여기와 있는데도 이 녀석은 그 아가씨의 눈앞에서 이곳의 어느 요부 집에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요부는 자립심이 강한 성격에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요새, 여하튼 합법적인 아내나 다름없는 여자지요, 정숙하거든요, 암, 그렇고 말고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지금까지 이 요녀에게 쏟아부은 돈만 해도 수천은 족히 된답니다. 이 때문에 끊임없이 돈을 꿔다 쓰는데, 그나저나, 여러분 생각에 누구한테서 꾸겠습니까? 말을 할까, 말까, 미챠?"


“잠자코 계세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소리쳤다. “내가 나갈 때까지는 기다리세요, 그리고 내 앞에서 감히 그 고귀한 아가씨를 욕하지도 마시고……. 아버지가 그녀에 대해 입을 뻥긋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녀에겐 치욕입니다……. 가만두지 않겠어요!” 그는 숨을 헐떡였다.

“철면피, 위선자 같은 인간!”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광폭하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놈이 아비를, 아비를! 이러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곳에 가난하지만 존경할 만한 어느 퇴역 대위가 있습니다. 불행한 일 때문에 퇴직을 당했지만 재판에 회부되어 공개적으로 잘린 것도 아니라서 자신의 명예는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는데, 많은 가족들의 생계가 그의 목에 달려 있지요. 그런데 삼 주 전에 우리의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선 술집에서 그의 턱수염을 거머쥔 뒤 그를 길거리로 끌어내어 길거리의 온 사람들이 보는 데서 죽도록 팼으니, 이게 다, 상대방이 어떤 작은 일로 비밀리에 내 대리인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죄다 거짓말입니다! 겉은 사실이지만 속은 거짓말입니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격노한 나머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 저도 잘한 건 없어요. 인정합니다. 지금은 유감스럽고 또 저 자신이 혐오스럽지만, 아버지의 그 대위는 바로 그 부인에게, 만일 내가 재산 문제로 아버지한테 자꾸 귀찮게 들러붙으면, 아버지가 갖고 있는 내 어음들을 챙겨서 그걸 근거로 나를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제출해 달라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 여자한테 제안했잖아요. 그 여자가 내 앞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더군요, 아버지를 비웃으면서!"


그는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두 눈은 번득였으며 숨도 가쁘게 내쉬었다. 그뿐만 아니라 암자 안의 사람들이 모두 흥분해 있었다. 장로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불안해하면서 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도사제 신부들은 준엄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장로의 뜻을 기다렸다. 장로는 이미 완전히 창백해진 채로 앉아 있었는데, 흥분해서가 아니라 병으로 인해 몸에 힘이 너무 빠진 탓이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갑자기 어쩐지 자신의 목소리 같지 않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결투다!" 숨을 헐떡이며, 말을 할 때마다 침을 튀기면서 다시금 늙은이가 울부짖었다."드미트리 표도로비치, 바로 이 ‘잡년’을 자네의 약혼녀와 맞바꾼 걸 보면, 자네 스스로 자네의 약혼녀도 이 여자의 구두 밑창만도 못하다고 판단했던 거니까 자, 이 잡년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소리지!”

“수치스럽군!” 갑자기 이오시프 신부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저런 인간은 도대체 왜 살까!”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이미 거의 미칠 듯이 화가 나서 밑도 끝도 없이 으르렁거렸는데, 어째 어깨를 지나치게 추켜올린 나머지 곱사등처럼 보였다. “아니, 말씀해 주십시오, 아직도 저 사람이 대지를 더럽히게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한 손으로 노인을 가리키면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말투는 느리고 찬찬했다.


추태에까지 이른 이 장면은 가장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중단되었다. 갑자기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장로와 다른 모든 이들이 걱정되어 완전히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었지만 알료샤는 그래도 제때에 그의 팔을 부축할 수 있었다. 장로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완전히 그의 앞에 다다르자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발을 향해, 심지어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완전히, 또렷하고도 의식적으로 절을 한 것이었다. “용서하십시오! 다들 용서하십시오!” 그는 자신의 손님들 모두에게 절을 하면서 말했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몇 분간 충격을 받은 채로 서 있었다. 그의 발을 향해 절을 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마침내 그는 갑자기 “오 맙소사!”라고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방에서 멀리 뛰어나가 버렸다. 다른 손님들도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주인에게 작별 인사도, 절도 하지 않은 채 모두 그의 뒤를 따라 우르르 나가 버렸다.


그들이 암자의 텃밭에서 나가던 중에, 아까 그들을 수도원장의 점심 식사에 초대했던 그 수도사는 마치 줄곧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양 곧 손님들을 맞이했다.

“부탁입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저의 참으로 진실된 소망에도 불구하고 별안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탓에 그분의 오찬에 참석하는 영광을 도저히 누릴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미우소프를 대신하여 원장님께 사과의 말을 전해주십시오.”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곧바로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말을 받았다. “듣고 계십니까, 신부님, 이건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저와 함께 남아 있기 싫어서 그러는 겁니다, 제가 아니라면 당장 갈 테지요. 자, 가시지요,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수도원장 신부님한테 가서 실컷 잘 드시오!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사양한다는 걸 잘 알아 두시오. 자 그럼, 이 몸은 집으로, 집으로 갑니다."


수도사는 작은 숲을 가로질러 가는 도중에 단 한 번, 수도원장 신부가 오래전부터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반시간 정도 늦었다고 지적했을 뿐이다. 미우소프는 이반 표도로비치를 증오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점심을 먹으러 가는군!’이라고 그는 잠시 생각했다.‘낯가죽은 뭣처럼 두껍고 양심은 영락없이 카라마조프답다니까.’


7 신학도-출세주의자


알료샤는 장로를 침실까지 데려가서 침대에 앉혔다. 그곳은 극히 필요한 가구만을 갖춘 아주 작은 방이었다. 좁은 철제 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이부자리 대신에 두꺼운 펠트만 한 장 깔려 있었다. 장로는 힘없이 침대에 쓰러졌다. 그의 눈은 빛났고 숨결은 거칠었다. 자리에 앉은 뒤 그는 꼭 뭔가를 곰곰 생각하는 듯 알료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보거라, 얘야, 어서, 나는 포르피리면 충분하다, 너는 서둘러 가 보렴. 저곳에는 네가 필요하단다, 어서 수도원장에게 가 봐라, 식사 시중도 들고.”

“제발 여기 있게 해 주십시오.” 간청하는 목소리로 알료샤가 말했다.


“너는 저곳에 더 필요하단다. 저기에는 평화가 없거든. 시중을 들다 보면 도움이 될 거야. 소란이 일어나거든, 기도문을 읊조리렴. 그리고 아들아(장로는 이렇게 부르길 좋아했다.) 앞으로 너의 자리는 이곳이 아니란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아이야. 내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곧바로 수도원을 떠나거라. 아주 가는 거다.”

알료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그러느냐? 지금은 이곳이 너의 자리가 아니라니까. 속세에서 위대한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너를 축복하노라. 너는 아직도 많이 방황해야 된단다. 그리고 결혼도 해야지, 꼭 해야 되고말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모든 걸 참아야 된단다. 일이 아주 많을 것이야. 하지만 나는 너를 의심하지 않는단다, 그렇기에 너를 보내는 거야. 크나큰 고뇌를 보게 될 것이며 그 고뇌 속에서 행복해질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유언이니라."


장로는 축복을 하기 위해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알료샤는 너무나 남아 있고 싶었지만 거역할 수가 없었다. 묻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심지어 ‘이마가 땅에 닿도록 드미트리 형에게 절을 하신 것은 무슨 뜻에서였습니까?’라는 질문이 혀끝에서 튀어나올 지경이었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수도원에서 있을 수도원장의 점심 식사에 늦지 않기 위해(물론 오직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서였지만) 암자의 텃밭을 넘었을 때, 갑자기 길의 첫 모퉁이에서 라키친(*방에 있던 신학생)이 보였다.

“나를 기다리는 건가?” 그와 나란히 서게 되자 알료샤가 물었다.

“맞아, 너를 기다렸어.” 라키친이 웃었다.


"알렉세이, 한 가지만 말해 줘. 이 꿈이 도대체 무슨 뜻이지? 바로 이걸 물어보고 싶었던 거야.”

“조시마 신부님이 너의 형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에게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 것 말이야. 뭐 거의 이마를 마룻바닥에 쾅 찧었잖아!”

“몰라, 미샤(미하일의 애칭), 무슨 뜻인지.”


“내 이럴 줄 알았어, 자네한테 설명을 해 줬을 리가 없지. 물론, 이런 일엔 오묘한 거라곤 전혀 없고, 늘 그렇듯 겉으론 뭔가 있는 체하면서 실은 바보짓을 하는 거니까. 하지만 이런 요술 같은 짓은 일부러 꾸민 걸 거야. 이제 곧 도시와 현의 온갖 위선자들이 ‘이 꿈엔 도대체 무슨 뜻이 담겨 있지?’라며 떠들어 댈 테지. 내 생각으로 노인은 정말로 형안이 있어. 범죄의 냄새를 맡았거든. 너희 집안은 아무래도 썩는 냄새가 난단 말이야.”


“너희 집안에서 그게, 그러니까 범죄가 일어날 거야. 너의 형들과 너의 돈 많은 아버지 사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바로 그래서 조시마 신부가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경우에 대비하여 이마를 땅에 쾅 찧은 거야. (......) 유로지브이들은 늘 이 모양이거든. 술집에 대고 성호를 긋고 사원에는 돌을 던진다니까. 너의 장로가 바로 이래. 의인에게는 지팡이를 휘두르고, 살인자의 발을 향해 절을 하니 말이야.”


“잠깐만, 잠깐만.” 알료샤가 불안스럽게 말을 끊었다. “넌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 우선은, 네가 왜 이 일에 그토록 관심을 갖는 거야?”

“두 가지 질문은 별개지만 자연스럽게 따라 나올 수 있긴 하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오늘 갑자기 너의 형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의 본색을 낱낱이 파악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무런 생각도 못 했을 텐데, 갑자기 단번에 그의 본색을 파악해 버렸어. 하지만 아비란 작자도 술주정뱅이에 도무지 말릴 수 없는 방탕자라서 무슨 일에서건 한계라는 건 모르기 때문에 둘 다 그만 참지 못하고 도랑물에 풍덩 빠져 버리는 거지……."


"그가 정직한 사람이라고 치자, 미첸카 말이야.(멍청하긴 하지만 정직한 사람이지.) 하지만 그는 호색한이거든. 그를 정의하고 그의 내적인 본질을 요약하면 바로 이렇다는 거야. 자 그러니까, 이 세 명의 호색한이 이제 서로서로를 지켜보고 있는 거야…… 장화 속에 칼을 감춘 채로. 세 놈의 이마빡이 서로 맞부딪쳤고, 어쩌면 네가 네 번째가 될지도 모르지.”


“너는 잘못 알고 있어. 드미트리는 그녀를…… 경멸하고 있어.” 어쩐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알료샤가 말했다.

그루셴카 말이야? 천만에, 형제, 경멸은 무슨 경멸. 자기 약혼녀를 진짜로 그녀와 바꿔치기했다면, 경멸하지 않는다는 거야. 여기엔…… 여기엔, 이봐, 네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있어. 사람이 무슨 아름다움에, 여자의 몸이나 혹은 심지어 그저 여자의 몸의 한 부분에라도 반해 버리면(이 점을 호색한은 이해할 수 있지.) 그녀를 위해서 자기 자식까지도 내놓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러시아도, 조국도 파는 법이야."


"그나저나 말이야, 그루셴카가 나한테 부탁하더군. ‘걔를(그러니까 너를) 데려와 봐, 내가 걔의 수도복을 벗겨 버릴 테니까.’ 아주 신신당부를 했어, 데려와, 데려오라고! 잠시 생각을 했더랬지. 무엇 때문에 그녀가 너한테 그렇게 관심을 보일까? 이봐, 그녀도 예사롭지 않은 여자야, 역시나!”

“안부나 전해 줘, 그리고 가지 않겠다고 말해 주고.” 알료샤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럼 너랑 한배에서 나온 네 형 이반은 어떻겠어? 너의 형 이반은 자기도 무신론자이면서 일단은 장난삼아 뭔지 알 수 없지만 극히 멍청한 속셈으로 신학 논문 나부랭이나 발표하고, 이게 저열하다는 건 자기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데, 너희 형 이반은 이런 작자란 말이지. 그것 말고도 미챠 형에게서 약혼녀를 가로채고 있는 중인데, 뭐 이 목적이라면 달성하고야 말겠지."


"더 들어 봐. 지금 미첸카의 길을 가로막는 건 영감쟁이 아버지야. 이 양반은 그루셴카 때문에 갑자기 정신이 나가서는 그 여자를 바라보기만 해도 침을 질질 흘릴 정도야. 사실 지금 장로의 방에서도 그녀 하나 때문에, 그러니까 미우소프가 감히 그녀를 방탕한 잡년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스캔들을 일으킨 거잖아. 발정 난 암고양이보다 더 고약하게 빠져 버렸다니까."


"이 모든 것을 보면 정말로 형사상의 충돌도 일어날 수 있는 거지. 너의 형 이반은 이걸 기다리고 있어, 그야말로 일거양득이거든. 자기의 애간장을 녹이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손에 넣고, 6만 루블이라는 그녀의 지참금도 먹어 치우는 거지. 이반처럼 알거지나 다름없는 변변찮은 인간에겐 이 정도면 시작치고는 아주 구미가 당길걸. 거기다 유념해 둘 게 있는데, 그러면 미챠에게 모욕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죽을 때까지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주는 셈이 된다는 거야."


“너는 어떻게 이 모든 걸 알고 있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거야?” 인상을 팍 쓰면서 알료샤가 갑자기 날카롭게 물었다.

“이반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 이반은 억만금에도 혹하지 않을 거야, 이반이 추구하는 것은 돈이나 안녕 따위가 아니야. 이반은 아마 고뇌를 추구하는지도 몰라.”

“그건 또 무슨 꿈같은 소리냐? 젠장, 너희들…… 귀족 나리들이란!”


“그 정도로 해 두자.” 그는 아까보다 더 삐뚜름하게 웃었다. “왜 웃는 거지? 내가 속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네가 속물이라니, 그런 건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어. 너는 똑똑해, 하지만……. 그만두자, 난 그냥 무심코 웃었을 뿐이야. 네가 열을 올릴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건 나도 알겠어, 미샤. 네가 이렇게 열광하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는 것 같은데, 너 자신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마음이 있는 거야. 이봐,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 왔어, 네가 이반 형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우리 형을 질투하고 있지?”


"어쨌든 너도, 너의 형 이반도 재수 없어! 내가 왜 그를 좋아해야 되지, 그가 먼저 나를 욕하고 있어. 그런데 왜 나라고 그를 욕할 권리가 없다는 거야? 그가 그저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집에서 나에 대해 있는 욕 없는 욕을 마구잡이로 퍼부었다는데, 너의 형이 피력한 생각에 따르면, 가까운 장래에 대수도원장이 되려는 출세의 꿈을 접고 수도사의 길을 버린다면 나는 반드시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두툼한 잡지 발행에 합류할 텐데, 그것도 반드시 비평 분과로 들어가 한 십 년간 기사를 쓴 다음 결국에 가서는 그 잡지를 내 것으로 만들 거라는군."


“아, 미샤, 그건 정말이지 토씨 하나 안 빼고 전부 다 그대로 실현될 거야!”

알료샤가 그만 억누르지 못하고 즐겁게 웃으면서 갑자기 소리쳤다.

“당신도 빈정거리시나 본데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아니, 아냐, 농담이야, 미안해.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어떻든 미안해. 그런데, 누가 너한테 그런 것들까지 시시콜콜하게 알려 줬을까?"


“나는 없었지만 대신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있었고, 나는 그 얘기를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로부터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다시 말해서 그가 나에게 말한 것은 아니고 내가 엿들은 것이고, 물론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그루셴카의 침실에 앉아 있었는데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바로 옆방에 죽치고 있는 동안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거든.”


"드디어 다 왔군. 아니! 저건 뭐야? 아니, 저렇게 빨리 식사를 끝마쳤을 리는 없는데? 아니면 저기서도 카라마조프 놈들이 다시 무슨 난리를 부린 건가? 그런 게 분명해. 저기 네 아버지인데, 이반 표도로비치도 그 뒤를 따라 나오는걸. 저기 이시도르 신부가 현관 층계참에서 저들 등 뒤에 대고 뭐라고 소리치는군. 우아, 저기 미우소프도 마차를 타고 떠났어, 어라, 지주 막시모프도 뛰고 있네. 그래, 저기서 스캔들이 일어난 거야……!”

라키친이 연신 소리를 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여태껏 들어 보지도 못한 뜻밖의 스캔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도 모든 것이 '영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일어난 것이었다.


8 스캔들


미우소프와 이반 표도로비치가 이미 수도원장의 암자로 들어가고 있을 때, 진정으로 점잖고 예민한 사람인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는 나름대로 미묘한 어떤 내적 변화를 급속히 겪었으니, 화를 낸 것이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걸레나 다름없는 표도르 파블로비치 따위는 애초에 깡그리 무시해 버렸어야지, 장로의 암자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기 스스로도 냉정을 잃고 정신없이 굴지는 말았어야 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칼가노프, 이반 표도로비치가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들은 이미 식당에서 수도원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주 막시모프도 한쪽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수도원장 신부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방 한가운데로, 앞으로 나왔다. 그는 키가 컸으며 여위긴 했지만 어떻든 아직은 정정한 노인으로서 검은 머리카락은 희끗희끗 셌고 얼굴은 길고 금욕적이며 근엄해 보였다. 그는 손님들에게 말없이 절을 했는데, 이번에는 손님들이 축복을 받으러 그에게 다가섰다.


자, 그런데 바로 이 순간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최후의 활약을 펼친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 둘 것이 있는데, 그는 정말로 떠날 생각이었고 장로의 암자에서 그렇게 치욕적인 짓을 하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수도원장의 오찬 모임에 가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서 스스로를 탓했기 때문은 아니고 어쨌거나 거기서 밥까지 먹는다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덜커덩거리는 그의 마차를 여관의 현관 앞에 대령하기가 무섭게, 그는 이미 마차에 오르고 있었건만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장로의 암자에서 자기가 했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저는 어딜 가든, 제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야비하고 다들 저를 광대로 취급한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그래, 내 정말로 어릿광대 노릇을 해 주지, 왜냐면 네놈들은 하나에서 열까지 죄다 나보다 더 멍청하고 더 저열하니까, 이런 식이 되죠.” 그는 자신이 저지른 추잡한 짓들에 대해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졌다.


그의 눈은 번득였고, 입술마저 부르르 떨렸다. ‘그래, 시작을 했으면, 끝장을 봐야지.’라고 그는 갑자기 결심했다. 이 순간 그가 겪은 아주 은밀한 느낌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이제 와서 명예를 회복하긴 글렀으니 그래, 저놈들에게 파렴치할 정도로 침이나 뱉어 주자. 네놈들 따윈 부끄럽지도 않아, 그뿐이야!’ 그는 마부에게 좀 기다리고 해 놓고선 빠른 걸음으로 수도원으로 돌아간 뒤 곧장 수도원장의 암자로 갔다.


그가 수도원장의 식당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정확히, 기도가 끝나고 다들 식탁 쪽으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문지방에 멈추어 서서 일동을 둘러본 뒤 그는 오랫동안 뻔뻔스럽고 심술궂게 웃기 시작했다.

“저들은 내가 떠난 줄 알았겠지만, 자, 바로 내가 문제의 그놈이올시다!” 그는 온 방 안이 떠나갈세라 외쳤다.

"원장님,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아니면 말까요? 오찬에 초대받은 이 몸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수도원장이 대답했다. “여러분! 송구스럽지만”이라며 그가 갑자기 덧붙였다. “우리의 이 소박한 만찬을 드시는 동안엔 여러분, 일시적인 불화를 제쳐 두시고 주님께 기도드리며 사랑과 가족적인 화합 속에서 하나가 되어 주십사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니,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마치 제정신이 아닌 양 소리쳤다.


"죄송합니다만, 수도원장 신부님, 저는 어릿광대고 어릿광대인 양 굴고 있지만, 그래도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기사로서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제 아들 알렉세이가 이곳에서 구도 생활을 하고 있거든요. 아비로서 저는 아들의 운명이 걱정되기도 하고, 아니 응당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을 들었고 더욱이 어릿광대 놀음을 해 보이면서도 몰래 조용히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신부님께 공연의 마지막 막을 선사하고 싶군요.

성스러우신 신부님들, 저는 여러분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고백이란 위대하고도 비밀스러운 의식으로 저는 경건함을 느끼고 그 앞에 엎드릴 각오도 되어 있지만, 저기 암자에서는 다들 갑자기 무릎을 꿇은 채로 큰 소리로 고해성사를 하더군요. 아니, 고해성사를 큰 소리로 하는 것이 허용되는 일입니까?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다 있는 데서 나는 예컨대, 이렇고 저런 짓을 했으니 어쩌니…… 뭐 그러니까 아시겠지만, 이런 걸 털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정말이지 스캔들입니다! 신부님들과 여기 함께 있다 보면 편신교도*가 될 거라니까요……. 저는 곧 종무원에 서신을 띄우고, 제 아들 알렉세이는 집으로 데려가겠습니다……."
* 17세기에 발생한 러시아 기독교의 한 종파로서 정교회의 의식을 거부하고, 자기 몸을 채찍질함으로써 ‘부정한 힘’으로부터 인간의 육체를 정화하고자 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교회 종이 울리는 곳엔 귀를 열어 놓고 있었다. 언젠가 악성 유언비어가 퍼졌는데 장로가 너무 지나친 존경을 받는 나머지 수도원장의 위상마저 해칠 정도이고 겸사겸사 장로들이 고해성사의 신성함을 악용하는 듯하다는 등등의 말이었다. 이런 비난은 워낙에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저절로 사라져 버렸지만,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낚아채 그의 신경을 자극하면서 치욕의 심연 어디론가 멀리, 점점 더 멀리 싣고 가는 멍청한 악마가 그에게 이런 옛 시절의 비난을 슬쩍 일러 주었던 것이다.


“정말 야비하군!”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소리쳤다.

“죄송합니다만.”하고 수도원장이 갑자기 말했다. “태곳적 말씀에 ‘사람이 나에게 온갖 말을 다 하고 나중에는 더러운 악담까지 늘어놓도다. 나는 그 말을 전부 듣나니, 이는 곧 예수님의 채찍으로 나의 허영심 많은 영혼을 고치기 위해 보내 주신 것이기 때문이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은 당신께 정중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고귀하신 손님이여!” 그러고서 그는 표도르 파블로비치에게 허리를 굽혀 절했다.


"쳇, 쳇, 쳇! 위선을 떨면서 케케묵은 미사여구에 케케묵은 제스처라니! 케케묵은 거짓말에 이마가 땅에 닿는 형식적인 절이나 하고! 실러의 『군도』에서처럼 ‘입술에는 키스를, 가슴에는 비수를’ 이런 식이죠. 신부님들, 가짜는 싫습니다, 진리를 원합니다! 신부님들, 수도사님들, 뭐 하러 금욕 수행을 하십니까? 뭐 하러 그 대가로 천상의 보상을 기대하시는 겁니까? 성스러운 수도사 양반, 살아 있을 때 착한 일 하고 사회에 이익을 줄 일이지, 남이 만든 빵을 먹으며 수도원에 처박혀 있지도 말고 저기 위의 보상을 기대하지도 말란 말이야, 하긴 이 편이 좀 더 어려울걸.

정말이지 나도 수도원장 신부님, 말이라면 유창하게 잘한단 말씀. 자, 여기 저들이 무엇을 잔뜩 차려 놓았나?” 그는 식탁 쪽으로 다가갔다. “오래 묵은 포트와인 팍토리와 옐리세예프 형제의 풍요로운 벌꿀이라니, 어럽쇼, 신부님들! 꼬치고기와는 생판 다른걸. 아니, 신부님들이 술병도 차려 놨군, 헤헤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이 모든 걸 여기로 가져다줬을까나? 바로 러시아 농부, 그 일꾼이 굳은살 배긴 손으로 죽도록 일해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가족들의 생활비와 나라에 세금 낼 돈에서 떼 내어 여기로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말이야! 정말이지, 성스러운 신부님들, 당신들은 민초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거야!”


“이건 너무 지나치군요.” 이오시프 신부가 말했다. 파이시 신부는 집요하게 침묵을 고수했다. 미우소프는 방을 뛰쳐나갔고, 칼가노프도 그의 뒤를 따랐다.

“뭐, 신부님들, 나도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의 뒤를 따르겠소! 더 이상은 신부님들을 찾지 않겠소, 무릎 꿇고 사정을 한다고 해도 찾지 않겠소. 1000루블을 보내 놨더니 이번에도 아주 눈에 불을 켜더군, 헤헤헤! 천만에, 더 이상 보태진 않겠어. 나의 지나가 버린 청춘과 나의 모든 굴욕에 대해 복수할 테다!”


바로 그 순간, 바퀴를 되돌려 놓을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수도원장은 그의 악의적인 거짓에 고개를 숙였고 다시금 엄중한 훈계조의 말을 내뱉었다.

“또한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에게 가해지는 모욕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 내고,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증오하지 말며,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지어다.’ 바로 그렇게 우리는 행동하겠습니다.”


“쳇, 쳇, 쳇, 그놈의 생각들 하곤! 기타 등등 허튼소리들! 생각들 실컷 하시오, 신부님들, 나는 갑니다요. 내 아들 알렉세이는 아버지의 권한으로 지금 영원히 내가 데려갑니다. 이반 표도로비치, 존경해 마지않는 내 아들아, 자네에게도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바올시다! 폰 존(막시모프를 부르는 말), 자네라고 여기 남을 이유가 어디 있나! 지금 당장 시내의 내 집으로 와. 내 집은 즐겁거든."


바로 이 순간 라키친이 밖으로 나가는 그를 보곤 알료샤에게 가리켰던 것이다.

“알렉세이!” 아버지가 멀리서 그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오늘 당장 이 아비의 집으로 아주 옮겨 와라, 베개와 요도 끌고 와, 이곳에는 네 냄새도 나지 않도록.”

알료샤는 말없이 주의 깊은 시선으로 이 장면을 관찰하면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아버지, 헛소리는 그만 좀 지껄이시고 지금이라도 좀 쉬세요.” 이반 표도로비치가 준엄하게 딱 잘라 말했다.

“그나저나 알료쉬카는 어떻든 수도원에서 데려올까 하는데, 당신에게는 몹시 불쾌한 일이 되겠지만 말이오, 존경해 마지않는 카를 폰 모어.”

이반 표도로비치는 경멸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가 몸을 돌려서 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2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