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5-1)

김연경 옮김 민음사

by Andy강성
제5장 Pro와 Contra


1 언약


이번에도 알료샤를 제일 먼저 맞아 준 건 호흘라코바 부인이었다. 그녀는 허둥대고 있었는데,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결국 기절해 버렸고, 그다음에는 “끔찍하고 무서울 정도로 쇠약해져서 자리에 누운 뒤 눈을 감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라는 것이다. 호흘라코바 부인은 정말로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말끝마다 “정말 큰일 났어요, 큰일!”이라고 덧붙였는데, 꼭 이전에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은 전부 다 큰일이 아니었다는 투였다. 알료샤는 그녀의 말을 듣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알료샤는 그녀에게 자기가 겪은 이 모든 일들을 얘기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첫마디부터 그를 가로막았다. 말을 들어줄 겨를이 없다면서 리즈 방에 가서 거기서 자기를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리즈가 말이죠, 친애하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라고 그녀는 거의 귀엣말로 그에게 속삭였다.

“리즈가 방금 나를 이상하게 놀랬지만 한편으론 감동도 주었기 때문에 나는 내심 얘의 모든 잘못을 용서할 참이랍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떠나자마자 얘는 어제 그리고 오늘 당신을 놀려 준 것을 진정으로 뉘우치기 시작했어요. 사실 놀려 준 것이 아니라 장난을 좀 쳤을 뿐이잖아요. 그런데도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진지하게 뉘우쳐서, 나도 놀랐지 뭐예요. 얘는 당신의 견해를 굉장히 존중한답니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그러니 되도록이면 얘에게 화도 내지 마시고 불만도 갖지 말아 주세요. (……)

어떻든, 그만 실례하겠어요,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에요. 아,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나는 평생 동안 두 번이나 미친 적이 있어서 치료를 받았답니다. 어서 리즈에게 가 보세요, 그 애에게 원기를 주세요, 그런 일이라면 당신은 언제든지 멋지게 해내실 수 있잖아요.”


그녀가 리즈의 방문 쪽으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리즈, 네가 그토록 모욕한 알렉세이 표도로비치를 모셔 왔다."

알료샤는 안으로 들어갔다. 리즈는 왠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확 붉혔다.

“엄마가 방금 느닷없이 나한테 얘기해 주었어요, 그 200루블과 당신이 들어주기로 했던, 그 가난한 장교에게 가 달라는 부탁과…… 그리고 그가 얼마나 큰 모욕을 당했는지에 대한 그 무서운 일도 전부 이야기해 주었고, 나는 얘기를 들으면서 울었어요. 그래, 그 돈은 전해 주셨나요, 그리고 그 불행한 사람은 지금 어떤가요?”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전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얘기하자면 길어요.”

알료샤는 탁자에 살짝 걸터앉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일단 말을 꺼내자 당혹스러운 기색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히려 리즈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는 옛날 모스크바에 있을 때, 리즈가 아직 어렸을 때도 그녀를 찾아와 자기가 읽은 것이나 자기가 겪은 어린 시절의 추억 등을 즐겨 이야기해 주곤 했다. 지금 그들은 둘 다 갑자기 이 년쯤 전의 모스크바 시절로 옮겨 간 듯했다. 리즈는 그의 이야기에 굉장히 감동했다.


“이리로 가까이 오세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리즈가 점점 더 새빨개지면서 계속했다.

“당신 손 좀 주세요, 예, 그렇게요. 들어 보세요, 나는 당신한테 커다란 고백을 해야겠어요. 어제 그 편지요,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쓴 거였거든요…….”

그러면서 그녀는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이런 걸 고백하는 것이 그녀로서는 아주 부끄럽다는 것이 훤히 보였다. 갑자기 그녀는 그의 손을 잡더니 세 번에 걸쳐 저돌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아, 리즈, 거봐요, 정말 멋지군요.” 알료샤가 기뻐하면서 소리쳤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당신이 진지한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다는 걸 정말로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확신이라뇨, 어쩜, 정말!” 그녀는 갑자기 그의 손을 자기 손에서 떼냈지만 그래도 완전히 놓지는 않은 채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면서 행복하게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내가 손에 입을 맞추었더니, 그 사람 겨우 한다는 말이 ‘정말 멋지군요.’라니.” 하지만 그녀가 알료샤를 책망한 건 온당치 못했다. 알료샤도 또한 대단히 당혹스러워했으니 말이다.

“나는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지만, 리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렇게 나쁜 건가요?” 그도 역시 얼굴을 붉히면서 간신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이, 알료샤, 그건 너무나도 좋은 일이에요.” 리즈는 행복에 겨운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료샤는 줄곧 자신의 손을 그녀에게 내맡긴 채 서 있다가 갑자기 몸을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건 또 뭐예요? 왜 이래요?” 리즈가 소리쳤다. 알료샤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자, 알료샤, 우리 입맞춤이라면 좀 더 기다려요, 차라리 당신같이 똑똑하고 사려 깊고 형안이 있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나 같은 바보를, 병든 멍청이를 선택한 건지나 말해 주세요. 아, 알료샤, 나 행복해 죽겠어요”


"잠깐만요, 리즈. 나는 조만간 수도원에서 아주 나올 겁니다. 속세로 나오면 결혼을 해야 합니다, 이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분이 나에게 그렇게 명하셨거든요. 그런데 당신보다 더 좋은 사람을 어디서 구하겠으며……. 또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나를 데려가겠습니까?

나는 이미 이 점을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 당신은 나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으며, 둘째, 당신에겐 내가 갖지 못한 능력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더 명랑한 영혼을 지녔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당신이 나보다 더 순수하다는 것인데, 나는 많은 것, 아주 많은 것을 겪었거든요……. 아, 당신은 모르고 있어요, 어쨌거나 나도 카라마조프가 아닙니까! 그리고 당신은 어린 소녀처럼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순교자나 할 수 있을 법한 생각을 하고 있죠……."

“순교자라고요? 무슨 소리예요?”
“그래요, 리즈, 바로 조금 전에 당신은 이 불행한 사람의 영혼을 이렇게 분석하는 와중에 우리가 은근히 이 사람을 경멸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물었죠. 이런 질문은 순교자나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 재간은 없지만,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고통받을 능력이 있는 거죠. 그렇게 안락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필경, 당신은 지금도 많은 것에 대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겠죠…….”


“알료샤.” 그녀가 다시금 속삭였다. “문 곁에서 좀 살펴보세요, 혹시 엄마가 엿듣고 있진 않나요?”

“알았어요, 리즈, 살펴보긴 하겠지만, 다만 보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예? 왜 당신의 어머니가 이런 저열한 짓을 할 거라고 의심해야 합니까?”

“저열한 짓이라뇨? 뭐가 저열하다는 거예요? 엄마가 문 뒤에서 엿듣는 건 말이죠, 그건 저열한 짓이 아니라 엄마의 권리예요. 나는 나중에 반드시 딸의 말을 엿들을 거예요” 리즈가 발끈했다.

“정말로요, 리즈? 그건 좋지 않은 일인데요.”


“알료샤, 나한테 복종할 건가요? 이것도 미리 정해야 해요.”

“아주 기꺼이, 리즈,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하죠, 단, 가장 주된 일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가장 주된 일로 당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어떻든 나는 의무가 명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건 그래야죠. 그뿐인가요, 가장 주된 일에 있어서는 오히려 나도 당신에게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당신에게 양보할 테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지금이라도 당신에게 맹세하겠어요 ─ 모든 일에 있어서, 평생 동안!”이라고 리즈가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그것도 행복을, 행복을 느끼면서 말이죠! 더욱이, 맹세코, 나는 절대로 당신의 말을 엿듣지 않을 것이고, 절대로 단 한 번도, 단 한 통도 당신의 편지를 몰래 읽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옳고 나는 그렇지 못하니까요. 엿듣고 싶어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 이건 안 봐도 뻔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러지 않겠어요, 당신이 이걸 점잖지 못한 일로 생각하시니까요. 이제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니까요……."


"그런데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최근 내내 어제도, 오늘도 왜 이리 슬퍼하시는 거죠? 당신에게 이런저런 번잡하고 괴로운 일들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것 말고도 아마 비밀스러운 일이겠지요, 예?”

“그래요, 리즈, 비밀스러운 겁니다.” 알료샤가 슬프게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요? 말해 줄 수 없나요?” 다소곳하게 애원하듯 리즈가 말했다.

“나중에 말해 드리죠, 리즈…… 나중에 말이죠…….” 알료샤가 곤혹스러워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바로 지금 나의 벗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분이 이 땅을 버리려 하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그분과 정신적으로 얼마나 굳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당신이, 당신이 알아준다면! 자, 이제 나는 혼자 남게 될 겁니다. 당신을 찾아오겠습니다, 리즈……. 앞으로는 함께합시다…….”

“그래요, 함께, 함께요! 지금부터 평생 동안 언제나 함께하는 거예요. 나한테 입을 맞춰 줘요, 허락하겠어요.”

알료샤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자, 이제 가 보세요, 아직 그분이 살아 계실 때, 어서 빨리 가 보세요."


리즈의 방을 나서면서 알료샤는 호흘라코바 부인에겐 들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곧장 집에서 나갈 참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계단으로 나오자마자 어디서인지 호흘라코바 부인이 그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그녀의 첫마디를 듣자 알료샤는 곧 그녀가 여기서 일부러 자기를 기다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이건 끔찍한 일이에요. 이건 철부지 아이들의 말장난 같은 헛소리라고요. 당신이 무슨 허튼 꿈을 꾸지 말았으면 해요……. 어리석고도 허튼 꿈, 허튼 꿈이라고요!” 그녀가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당신이 지금 그 애의 말에 동의한 것은, 그 애가 아픈 몸이라는 것을 동정해서, 그러니까 구태여 반박을 했다가 그 애를 화나게 할까 봐 그랬던 거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전적으로 진지한 마음으로 그녀와 이야기한 겁니다.” 알료샤가 확고한 어조로 단언했다.

“이 경우 진지함이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첫째, 나는 지금부터 당신을 절대 우리 집에 들이지 않을 것이고, 둘째, 나는 그 애를 데리고 떠날 것이니, 이 점 꼭 알아 두세요.”


“아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아주 급한 일도 아니고 일 년 반은 족히 기다려야 될 텐데요.”

“물론 그건 맞는 말씀이시고, 그 일 년 반 동안 당신은 그 애와 천 번은 더 싸우고 더 헤어지고 하겠죠. 하지만 나는 너무 불행해요, 너무 불행하다고요! 딸내미가 사랑에 빠지면, 어미에겐 죽음이 찾아온다더니. 아주 관 속에 들어가야 될 상황이라니까요. 그리고 그 애가 당신에게 쓴 편지란 도대체 뭐예요, 지금, 지금 당장 나한테 보여 주세요! 나는 그 애의 어미잖아요!”


“아니요, 안 됩니다, 보여 드리지 않겠습니다, 먼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나 말씀해 주시지요, 꼭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설사 리즈가 허락한다고 해도 편지는 절대 보여 주지 않겠어요. 저는 내일 오겠습니다, 원하신다면 그때 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하도록 하겠지만, 지금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서 알료샤는 계단을 내려가서 거리로 달려갔다.


2 기타를 든 스메르쟈코프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리즈와 작별 인사를 나눌 때부터 그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이 번득였다. '지금 그를 피하려고 드는 것이 분명한 드미트리 형을 어떻게 하면 가장 교묘하게 붙잡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벌써 오후 2시가 넘었다. 알료샤의 몸과 마음은 수도원의 사경을 헤매고 계신 ‘위대하신 분’에게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드미트리 형을 만나야겠다는 욕구가 모든 것을 압도해 버렸다.


그의 계획은 드미트리 형을 불시에 붙잡는 것이었는데, 바로 이런 식으로였다. 즉, 어제처럼 그 울타리를 넘어서 정원으로 들어가서는 바로 그 정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이 무슨 훼방 없이 잘 되어 갔다. 어제와 거의 같은 장소에서 담장을 넘었고, 몰래 정자로 잠입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말았으면 싶었다. 정자에는 아무도 없었다. 알료샤는 어제 앉았던 자리에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 앉아 있은 지 십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어딘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기타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자리에서 기껏해야 스무 걸음쯤 떨어졌을 법한 곳 어디 덤불숲에 원래 사람들이 앉아 있었거나 지금 막 누군가가 와서 자리를 잡은 듯했다. 남자 목소리 하나가 갑자기 기타로 반주를 넣으면서 달착지근한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억누를 길 없는 힘으로
이 몸은 사랑하는 임을 받드노라.
주님 부디 어여삐 여겨 주소서,
그녀와 나를!
그녀와 나를!
그녀와 나를!


목소리가 멎었다. 테너 소리도 가히 머슴다웠고, 노래의 기교를 부리는 꼴도 머슴다웠다. 그러자 이번엔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꼭 겁을 집어 먹은 듯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새침을 떨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왜 이리 오랫동안 우리 집에 발길이 뜸하신 거죠, 파벨 표도로비치, 우리를 업신여기시는 건가요?”

“전혀 아닙니다.” 남자 목소리는 이렇게 대답했는데, 예의 바르긴 했지만 그 무엇보다도 집요하고 확고한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남자가 우위에 있고 여자가 비위를 맞추어 주는 듯했다.


‘저 남자는 ─ 저건, 스메르쟈코프인 것 같군.’이라고 알료샤는 생각했다.

‘최소한 목소리를 들어 보니 그렇고, 저 여자 쪽은 ─ 이 집의 여주인의 딸이 분명해, 모스크바에서 왔다던 긴 치맛자락을 질질 끌고 다니고 마르파 이그나치예브나를 찾아와 수프를 달라고 한다던…….’

“난 시라면 뭐든 죽도록 좋아요, 제대로 지어진 것이라면요.” 여자의 목소리가 말을 계속했다.


“시란 그냥 시일 뿐이고, 그야말로 헛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직접 생각을 좀 해 보시죠. 아니, 세상에 누가 운율을 넣어서 말합니까? 그리고 만약에 하다못해 당국의 명령이라도 있어서 우리가 모두 운율을 넣어 말하게 된다면, 우리가 뭘 제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시라는 건 영 쓸모가 없는 겁니다,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


“어쩌면 당신은 모든 것에 대해 이렇게 똑똑하시고, 만물박사세요?” 여자는 점점 더 아양을 떨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팔자가 이렇지만 않았더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을 테고, 또 이보다 더한 것도 알았을 겁니다. 아비도 없이 스메르쟈쉬야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를 야비한 놈이라고 말하는 작자에겐 당장 결투 신청을 해서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모스크바에서도 내 눈에다 대고 버젓이 이런 소리를 하는 놈들이 있더군요.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덕분에 이곳 소문이 거기까지 퍼져 나간 탓이죠.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는 내가 나 자신의 출생을 저주한다고 야단치면서 ‘네 놈은 네 어미의 자궁을 찢은 놈이야.’라고 합니다. 자궁이고 뭐고 간에, 나는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도록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농사꾼이 교육받은 양반네들한테 무슨 나쁜 감정을 품을 수나 있습니까? 일자무식인 놈은 무슨 감정도 품을 수 없는 거지요. 나는 러시아 전체를 증오합니다."


“당신이 군대에서 사관후보생이나 젊은 경기병이었다면, 장검을 빼 들고 러시아 전체를 지키려 했을 거예요.”

“나는 경기병이 될 마음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든 병사들을 없애 버리고 싶군요.”

“그럼 적이 쳐들어오면 도대체 누가 우리를 지켜 주죠?”

“지켜 주고 할 필요가 전혀 없다니까요. 12년, 현재 프랑스 황제의 아버지 되는 나폴레옹 1세가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왔는데, 그때 그 프랑스인들이 우리를 정복했더라면 좋았을 뻔했어요."


“아니, 그 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낫단 말인가요? 나는 우리 멋쟁이를 영국 청년 세 명과도 절대 바꾸지 않을 거예요.”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가 상냥하게 말했는데, 이 순간, 이런 말을 하면서 필경 피로에 겨운 듯 나른한 눈길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숭배하느냐는 자기 마음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꼭 가장 귀족적인 외국인 같아요, 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말을 당신한테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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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말 한번 제대로 했듯, 러시아 놈들은 쥐어 패야 돼요, 비록 그 사람이나 그 자식들이나 죄다 미친 작자들이지만.”

“이반 표도로비치라면 당신도 존경한다고 말할 땐 언제고.”

“그분은 나를 두고 악취 나는 머슴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내가 무슨 반역이라도 서슴지 않을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건 그분의 착각입니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그 행실이나 머리, 또 그 빈털터리 신세로 보아 어느 머슴보다도 나을 게 없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위인이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아요."


바로 이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알료샤가 갑자기 재채기를 한 것이다. 벤치는 금세 잠잠해졌다. 알료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 쪽으로 갔다. 과연 스메르쟈코프가 맞았는데, 옷을 잔뜩 빼입은 데다가 머리는 포마드를 너무 많이 발라 거의 떡이 되다시피 했고 구두는 윤이 반짝반짝 났다. 기타는 벤치 위에 놓여 있었다. 부인은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 여주인의 딸이 맞았다.


“드미트리 형님이 곧 돌아오실까요?” 알료샤가 가능한 한 침착하게 말했다.

스메르쟈코프는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섰다.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도 일어섰다.

“제가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의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그분을 지키는 사람이라도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스메르쟈코프는 또박또박, 조용하면서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 형님을 급하게 찾고 있어서요, 형님을 직접 만나거나 아니면 당신을 통해서 형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를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정말입니다, 형님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어서 이러는 겁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거나 하지 않으세요.”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분은 여기서도 주인 나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 공세를 퍼부으면서 저를 무자비하게 몰아세웠습니다. 그쪽 사정은 어떠냐, 누가 왔다 갔느냐? 하고요. 심지어 두 번이나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겁니다.” 스메르쟈코프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라도 굳힌 듯했다.

"이반 표도로비치께서 오늘 날이 새자마자 저를 오제르나야 거리에 있는 그분의 집으로 보내셨는데, 그저 함께 식사를 하고 싶으니 이곳 광장에 있는 술집으로 꼭 와 달라는 말을 전하라는 것이었습죠. 하지만, 제발 부탁이니, 그분께 저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제가 알려 줬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 주십시오"

“광장에 있는 거라면 ‘수도’ 말이에요?”

“그렇습니다요. 제발 비밀은 지켜 주십시오.”

“여부가 있나, 우연히 술집에 나타난 것처럼 할 테니 안심해요.”


그는 곧장 술집으로 내달렸다. 알료샤가 술집으로 다가가기가 무섭게 갑자기 창문이 하나 열리더니 다름 아닌 이반 형이 창문 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에게 소리쳤다.

“알료샤, 지금 여기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와 줄 수 없겠니, 응? 그래 주면 정말 고맙겠구나. 마침 별실을 빌렸으니까, 현관으로 들어오면 내가 마중하러 뛰어 내려가마…….”

일 분 뒤 알료샤는 형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반은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3 형제들, 가까워지다


하지만 이반이 있던 곳은 별실은 아니었다. 그곳은 창가의 자리를 병풍으로 막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알료샤는 이반이 이 술집에는 거의 오지 않는다는 걸, 아니, 술집이라는 것 자체를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은 오직 드미트리 형을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있지도 않았다.


"여기 산 지도 벌써 그럭저럭 넉 달째로 접어드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단 한마디도 주고받지 못했어. 내일이면 나는 떠나는데, 지금 여기 앉아서 어떻게 하면 이 녀석을 좀 만나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가 이 곁으로 지나가는 거야.”

“그럼 형은 나를 무척이나 만나고 싶었던 거구나?”


“그래, 무척이나 만나고 싶었어, 나는 이번에 마지막으로 너와 가까워지고 또 너에게 나란 인간을 소개하고 싶어. 바로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하는 거지. 네 눈에는 뭔가 나에 대한 끊임없는 기대가 어려 있더구나, 바로 이걸 나는 참을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너한테 다가가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결국에는 너를 존경하는 법을 배웠지. 어린 녀석이 제법 확고하더라고. 너도 왠지 나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알료샤?”


“좋아하고말고, 이반. 드미트리 형은 '이반이 무덤'이라고 말하는 거야. 나는 이반은 수수께끼라고 말하겠어. 나한테 형은 지금도 수수께끼지만 이미 형의 뭔가를 이해했어, 고작해야 오늘 아침부터이긴 하지만!”

“그게 뭐라는 거지?” 이반이 웃기 시작했다.

“형도 스물세 살짜리 다른 젊은 녀석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런 젊은 녀석이라는 거, 그렇게 젊다 못해 어리고 풋풋하고 멋진 소년, 그러니까 뭐 주둥이가 샛노란 어린애라는 거야! 어때, 많이 삐친 건 아닐 테지?”


“전혀, 오히려 너무 잘 들어맞아서 충격인걸! 실은 말이야, 아까 우리가 그녀의 집에서 만난 이후,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오직 이것만을, 그러니까 내가 주둥이가 샛노란 스물세 살짜리라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네가 갑자기 꼭 이걸 알아맞히기라도 한 듯 이 말을 꺼낸 거야.

내가 지금 여기 앉아서 스스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니? 내가 삶을 믿지 않을지라도, 소중한 여인에게 환멸을 느끼고 또 사물의 질서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낄지라도, 심지어 반대로 모든 것이 무질서하고 저주받은, 어쩌면 악마의 혼돈이라는 확신이 생겨날지라도, 그리고 인류의 환멸이 제아무리 무섭게 나를 내리칠지라도 ─ 나는 어쨌거나 살고 싶고, 일단 이 잔에 입을 댄 이상, 그것을 완전히 물리치기 전까지는 절대로 입을 떼지 않을 거야! 그래 봤자, 서른 살쯤 되면 아마 다 마시지 않았더라도 잔을 내던지고 떠날 테지만……

어디로 떠날지는 몰라도 말이야. 하지만 내 나이가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는, 이건 분명히 알고 있지만, 나의 젊음이 모든 것을 ─ 온갖 환멸과 삶에 대한 온갖 혐오를 압도해 버릴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내부의 이 광적이고 어쩌면 점잖지 못한 삶의 욕망을 압도할 만큼 강한 절망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하는 질문을 수도 없이 던져 보았지만, 그런 건 없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어. 물론 이번에도 서른 살 전까지에 국한된 얘기이긴 한데, 서른 살이 넘으면 나 스스로가 그러기 싫어질 것 같아.

알료샤. 난 살고 싶어, 논리를 거역해서라도 살고 싶어. 내가 비록 사물의 질서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봄이면 싹을 틔우는 끈적끈적한 이파리들이 내게는 소중하고, 푸른 하늘도 소중하고, 가끔씩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정이 가는 어떤 사람들도 소중하고, 오래전부터 더 이상 신뢰를 상실해 버렸지만 그럼에도 오래 묵은 기억 때문에 마음으론 존중하고 있는 인류의 어떤 위업도 소중해.

난 유럽에 다녀왔으면 싶어, 여기서 출발할 거야. 그래 봤자 내가 가는 곳이 묘지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장 소중한 묘지다, 이 말씀이지! 그곳에는 소중한 고인들이 잠들어 있고, 그들 위에 서 있는 비석들은 모두가 그토록 열렬하게 지나간 삶을, 자신의 위업과 자신의 진리와 자신의 투쟁과 자신의 학문에 대한 그토록 열정적인 믿음을 말해 주고 있어, 나는 땅에 엎드려 이 비석들에 입을 맞추면서 울 것이며 ─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진작부터 묘지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 니라는 것을 내 온 마음으로 확신하고 있을 테지.

내가 우는 것도 절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눈물을 흘림으로써 행복감에 젖었기 때문일거야. 자기 자신의 감동에 흠뻑 젖어드는 것이라고나 할까. 봄날의 끈적끈적한 잎사귀 그리고 파란 하늘이 나는 좋아. 정말로! 이건 머리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마음속으로, 배 속으로 사랑하는 거야, 자신의 최초의 젊은 힘들을 사랑하는 거지…….


"내가 이렇게 허튼소리를 잔뜩 늘어놓았는데, 그중 뭐라도 좀 이해하겠니?” 이반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이해하다뿐이겠어, 이반. 마음속으로, 배 속으로 사랑하고 싶다니, 이건 정말 멋진 말이야, 형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다니 나도 기뻐 죽겠는걸.” 알료샤가 소리쳤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

“삶을 그것의 의미보다도 더 많이 사랑해야 된다?” 이반이 되물었다.


“반드시 그래, 형 말대로 논리에 앞서, 반드시 논리에 앞서 삶을 사랑해야 하고, 그때야 비로소 나는 삶의 의미도 이해하게 될 거야. 형의 일도 이제 절반은 된 거야, 살고 싶어 하니까 말이야. 이제 형은 형의 나머지 절반을 두고 노력하면 돼, 그러면 형은 구원받은 거야.”

"그러니까 네가 나를 구원하겠다는 건데, 하지만 나는 아직 제대로 파멸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그나저나, 그거, 너의 나머지 절반이라는 건 뭐지?”

“어쩌면 결코 죽은 적이 없을 수도 있는, 형의 그 고인들을 부활시키는 거지."


“보니까 너는 꼭 무슨 영감에라도 차 있는 것 같아. 난 이런 식의 신앙 고백이라면 미칠 정도로 좋아, 그러니까 바로 이런 견습 수도사들의 신앙 고백 말이야. 너는 확고한 놈이야, 수도원에서 나오고 싶다는 건 정말이니?”

“정말이야. 나의 장로님께서 나를 속세로 보내시는 거니까.”

“그럼, 또 보게 되겠구나, 그러니까 속세에서 말이지, 내가 슬슬 잔에서 입을 떼기 시작할 서른 살 무렵, 그전에 만나자꾸나. 그런데 오늘 드미트리 못 봤니?”


“아니, 못 봤어, 하지만 스메르쟈코프는 봤어.” 알료샤는 상세하게 스메르쟈코프와 만났던 얘기를 해 주었다.

“단, 그는 자기가 드미트리 형 얘기를 한 건 당사자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어.”

알료샤가 덧붙였다. 이반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형, 스메르쟈코프 때문에 지금 인상을 쓰는 거야?” 알료샤가 물었다.

“그래, 빌어먹을 놈, 드미트리라면 정말 보고 싶었지만, 이젠 됐어…….” 이반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정말로 이렇게 빨리 떠나는 거야? 그럼, 드미트리와 아버지는 어쩌라고?” 알료샤가 불안하다는 듯 말했다.

“너는 또 그 지긋지긋한 얘기냐? 그럼, 나는 여기서 또 뭐냐? 내가 드미트리 형을 지키는 사람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이반은 짜증스럽다는 듯 이렇게 딱 잘라 말했지만, 갑자기 어쩐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느님이 살해된 동생에 대해 묻자 카인이 내놓은 답이군, 너도 이 순간에 이 생각을 하고 있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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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체리나 이바노브나


"하지만, 나는 볼일을 다 봤으니 가는 거야. 내가 드미트리를 질투하고 있다느니, 그의 아리따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가로채려 했다느니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닐 테지. 그 볼일은 아까 끝냈고. 네가 증인이었지"

"아까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와 있었던 일 말이야?"


"그래, 그녀와의 일 말이야, 단칼에 끝장을 봤지. 드미트리는 이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나는 그에게 뭘 부탁한 적도 전혀 없는데, 그가 나서서 나한테 웅장하게 그녀를 넘겨주고 축복해 준 거야. 이건 죄다 웃긴 일이지. 천만에, 알료샤, 지금 내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네가 알기만 한다면! 쳇, 거의 반년이나 매달려 있다가 갑자기 한 방에, 모든 것을 한 방에 벗어던진 거야."


"지금 형의 사랑 얘기를 하는 거야, 이반?"

"네가 원한다면 사랑이라고 해 두지, 그래 나는 이 아가씨한테, 이 여대생한테 정말로 홀딱 반해 버렸었어. 그녀와 더불어 괴로워했고, 그녀는 나를 괴롭혔지. 완전히 그녀에게 매달려 있다가…… 갑자기 모두 다 날아가 버린 거야. 아까 나는 영감에 가득 차서 말을 늘어놓았지만, 밖에 나간 뒤에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어, 정말이라니까. 진짜 액면 그대로 말하는 거야."


"아,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녀가 사랑한 사람도 드미트리가 아니라 나였지." 이반은 즐겁게 자기주장을 펴 나갔다. "드미트리는 그저 파열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드미트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괴롭히는 나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깨닫기까지 십오 년, 아니면 이십 년 은 걸릴지도 모른다는 점이지."

"하지만 아까 형은 그녀에게 그녀가 절대로 형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했잖아?"

"일부러 그런 거야. 알료쉬카, 샴페인을 시킬 테니, 나의 자유를 위해 한잔 들자!"


"실은 말이야, 내가 오늘 여기서 식사를 한 것도 오로지 영감과 같이 밥을 먹기 싫어서였어, 영감 하나 때문에라도 진작 떠났을 거야. 그런데 내가 떠난다고 왜 너까지 걱정을 하고 그러니. 떠나기 전까지 너와 나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인데 말이야. 그야말로 영원한 시간, 불멸이!"

"내일 떠난다면서 영원은 무슨?"


신은 있는가, 불멸은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여기에 온 거냐? 다른 사람들이야 그들 나름의 문제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영원의 물음들을 해결해야 돼, 너는 무엇 때문에 석 달 내내 그렇게 기대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던 거니? 나에게 '어떤 믿음이 있느냐, 아니면 아예 믿지 않는 것이냐?'를 캐묻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알료샤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나를 비웃는 건 아니겠지, 형?"


"내가 너를 비웃는다고? 알료샤, 똑바로 바라보렴. 나란 놈도 너와 꼭 마찬가지로 어린애에 불과해, 도대체 러시아의 아이들이 지금까지 어떤 활동을 해 왔을까? 그들은 무엇에 대해 논할까? 다름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들을 논하는 거야. '신은 있는가, 불멸은 있는가?' 이런 것들 말이야. 신을 믿지 않는 자들, 뭐 그런 자들은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니 인류 전체를 새로운 체제에 따라 개조할 것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늘어놓겠지만, 그래 봤자 그놈이 그놈이고, 죄다 같은 문제들인데, 그저 다른 쪽에서 시작했을 뿐이지. 그렇지 않니?"


"맞아, 진정한 러시아인들에게 있어 문제란 '신은 있는가, 불멸은 있는가', 하는 물음들, 혹은 지금 형의 말대로 다른 쪽에서 시작됐으나 결국은 동일한 물음들인 거지 - 물론 첫 번째 질문들이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고, 또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지만." 알료샤는 이렇게 말하면서, 계속 예의 그 조용하고 상대방을 살피는 듯 한 미소를 띠며 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알료샤, 러시아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이따금씩은 절대로 똑똑한 일이 못 되긴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러시아의 아이들이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문제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아예 상상도 할 수 없을 지경이야. 하지만 나는 알료쉬카라는 단 한 명의 러시아 아이만은 미칠 정도로 좋아해."

"형,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수법이 제법인걸." 알료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 형은 아버지 집에서 신은 없다고 선언했잖아." 알료샤가 탐구를 하는 듯한 눈길로 형을 바라보았다.

"어제 아버지 집에서 식사할 땐 너를 놀려 주려고 일부러 그랬던 건데, 지금은 너랑 말싸움을 할 마음은 전혀 없어, 아주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야. 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어, 자, 한번 생각해 봐, 어쩌면 나도 신을 받아들이는지 모르잖아." 이반이 웃기 시작했다. "너한텐 너무 뜻밖의 말인가, 엉?"

"그야 물론이지, 단, 형이 지금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면."


"'농담'이라. 어제는 장로의 암자에서 나보고 농담을 한다고 말하더니만. 그나저나, 얘야, 18세기에 어느 늙은 죄인이 있었는데, 신이 없다면 그것을 발명해 내야 한다는 말, 그러니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발명해 내야 한다.(s’il n’existait pas Dieu il faudrait l’inventer.)라는 말을 했다지(*볼테르의 말). 그래서 인간은 정말로 신을 발명해 냈지. 그러니까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건 이상할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얘기이고, 오히려 정말 놀라운 것은 그런 생각이 ─ 그러니까 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 인간과 같이 야만스럽고 사악한 동물의 머릿속에 떠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인데, 이 생각은 그 정도로 성스럽고 그 정도로 감동적이고 그 정도로 현명하고 그 정도로 인간의 위신을 살려 준다는 거야.

지금 너와 나 사이에 놓인 과제는 뭐지? 그 과제란 가능한 한 빨리 너에게 나의 본질을,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믿고 무엇을 희망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니? 그렇기 때문에 나는 솔직 담백하게 신을 받아들이노라고 선언하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적해 둬야 할 것은 있어. 즉,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정말로 신이 이 땅을 창조했다면, 우리가 완벽하게 알고 있듯 신은 그 땅을 유클리드 기하학에 따라 창조했을 것이며 또한 인간의 머리는 오직 3차원적 공간에 대한 개념만을 지닌 것으로 창조했겠지. 그런데 전 우주 ─ 더 광범위하게 말해서 모든 존재가 그저 유클리드 기하학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걸 의심하면서, 유클리드에 따르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땅에서는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평행선이 무한대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몽상에 젖은 기하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있었고 심지어 지금도 있단 말이야, 그것도 가장 탁월한 자들 중에서도 말이야.

그래서 나는 심지어 이것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결론을 내려 버렸지. 결과적으로 나는 신의 이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 비록 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점을 잘 알아 둬, 그가 창조한 세계를, 신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야.

자, 이게 나의 본질이야, 알료샤, 바로 이게 나의 테제란 말이다. 우리의 대화를 나는 일부러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하게' 시작했지만, 결국 내가 고백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는데, 너한테 필요한 건 사실 오직 이것뿐이니까. 너한테 필요한 건 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오직 네가 사랑하는 형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을테지.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했던 거야."


“무엇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하게’ 시작한 거지?” 알료샤가 생각에 잠긴 듯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첫째, 러시아인들은 이런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한 방식을 취하거든. 둘째, 또, 멍청하면 멍청할수록 본론에는 더 가까워지는 법이야. 멍청하면 멍청할수록 더욱더 분명해지는 거고. 똑똑함은 비열하기 십상이지만, 멍청함은 솔직 담백하고 정직하거든. 나는 사태를 내가 절망하는 것에까지 이르게 했고, 그 때문에 내가 그것을 멍청하게 제시하면 할수록 나에게는 그만큼 더 유리한 거야”


“무엇 때문에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건지 설명해 줄래?” 알료샤가 말했다.

“물론, 설명해 주지, 무슨 비밀도 아니고 결국 그 얘기를 하자는 거니까. 네가 내 동생인데, 너를 타락시키거나 너의 발판에서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턱은 없고, 어쩌면 너를 통해서 나 자신을 치유하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이반은 갑자기 알료샤가 결코 본 적 없는, 아주 온순한 어린아이처럼 방긋 미소를 지었다.


4 반역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너한테 고백할 것이 하나 있는데” 하고 이반이 말을 시작했다. “어떻게 자기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지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 생각으론 멀리 있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모를까, 이렇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어디선가 ‘자비로운 요한’(어느 성자겠지.) 얘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얼어 죽을 지경이 된 굶주린 나그네가 그를 찾아와서 몸을 좀 덥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워 그를 껴안고 무슨 끔찍한 병 때문에 썩어 문드러져 고약한 냄새가 나는 그의 입에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는 거야. 나는 그가 이런 일을 한 것이 사랑의 의무를 명령받고 또 스스로에게 고행의 징벌을 부과했기 때문이었다고 확신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모습이 감추어져야 돼, 조금이라도 얼굴을 보이면 사랑은 사라져 버리거든.”


“조시마 장로님도 그런 얘기를 몇 번이나 하셨어.” 알료샤가 지적했다.

“장로님도 인간의 얼굴이 사랑에 서툰 많은 이들에게 있어 사람을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는 거의 그리스도의 사랑과 유사한 사랑이 많이 있고, 나 자신도 이걸 알고 있어…….”


“뭐 나는 아직 그런 건 잘 모르고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무한한 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똑같을걸. 문제는 '사람들의 고약한 성질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니면 그들의 본성이 원래 그렇게 돼 먹었기 때문인가' 하는 것이지. 내 생각에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식 사랑은 이 지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종의 기적이야. 사실 그는 신이었잖니. 하지만 우리는 신이 아니라고. (……)


가령, 내가 심하게 고통을 받을 수 있다고 치더라도, 타인은 절대로 내가 어느 정도로까지 고통받는지 알 수가 없는데, 왜냐면 그는 내가 아니라 타인인 데다가 더욱이 사람이라는 것은 타인을 기꺼이 고통받는 자로 인정하는 일이 극히 드물거든. 그 이유인즉, 너한테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거나 내 얼굴이 멍청하게 생겼다거나 내가 언젠가 그의 발을 밟은 적이 있다거나 하기 때문일 거야.

게다가 고통도 고통 나름이야. 내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굴욕적인 고통, 가령, 배고픔과 같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면 나의 은인도 인정해 주겠지만, 좀 더 드높은 고통, 가령 이념으로 인한 고통이라면, 그래, 인정해 주는 일이 극히 드물 텐데, 왜냐면 그는 가령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내 얼굴이, 자신의 환상 속에서 그려 본, 가령 이러저러한 이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의 얼굴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

자, 그러면 그는 바로 그 즉시 자기가 나한테 베풀었던 선행을 철회할 텐데, 이건 절대로 그가 나쁜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야. 거지들, 특히 고상한 거지들은 절대로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말 것이며, 구걸을 해도 신문을 통해서 해야 돼. 추상적으로라면, 그러니까 이따금씩 멀리 떨어져서라면 그래도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가까이 있을 때는 절대로 불가능하지."


"하지만 이런 얘긴 그만하자. 나한테 필요했던 건 그저 너에게 나의 관점을 제시하는 일이거든. 그러니까 나는 인류 전반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차라리 어린아이들의 고통만을 다루는 편이 낫겠어. 이렇게 하면 내 논의의 규모가 열 배 정도는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아이들 하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다는 거야. 물론 이러면 나한테는 좀 불리하긴 하지.


아이들을 좋아하니, 알료샤? 너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아이들 하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이해될 거야. 만약 그들마저도 이 지상에서 끔찍할 정도로 고통받고 있다면, 그건 물론, 그들의 아버지들, 선악과를 먹어 치운 그 아버지들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셈인데 ─ 하지만 이런 논의는 다른 세계에 속한 것이라 여기 이 지상의 인간의 마음으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 죄 없는 자가, 그것도 아이들처럼 그렇게 죄 없는 자가 다른 사람 때문에 고통받아서야 되겠어?"


터키인들의 악행


얼마 전에 한 불가리아 사람이 모스크바에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어. 자기 나라 불가리아에서는 터키인들과 체르케스인들이 슬라브인들의 집단 폭동이 무서워서 가는 곳마다 악행을 저지르고 다닌다더군 ─ 그러니까 불을 지르고 사람을 찔러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을 폭행하고, 포로들의 귀를 울타리에 못 박아 놓고서 아침까지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가 아침이 되면 목매달아 죽이는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일투성이라는 거야. 이 터키인들은 음탕한 쾌감을 느끼면서 아이들을 괴롭혔다는데, 어머니의 배를 칼로 갈라 태아를 꺼내는가 하면 심지어 어머니의 눈앞에서 젖먹이를 위로 집어던진 뒤 총검으로 받아 내는 짓까지 한다는 거야. 어머니들의 눈앞에서 이런 짓을 한다는 데 쾌감의 핵심이 있는 거지.

그런데 나의 흥미를 아주 자극하는 명장면이 하나 있어. 한번 상상을 해 봐, 젖먹이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고, 그 주위를 여기로 들어온 터키인들이 에워싸고 있는 거야. 그 녀석들은 즐거운 장난거리 하나를 생각해 냈어. 그 녀석들은 갓난애를 웃기려고 얼러 보기도 하고 웃어 보기도 하는데, 결국 성공해서 갓난애가 깔깔 웃게 됐어. 이 순간, 터키 녀석 하나가 갓난애의 얼굴에서 불과 4베르쇼크(약 18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갓난애를 향해 권총을 겨누는 거야. 아이는 즐겁게 깔깔거리면서 권총을 잡기 위해 고사리손을 내뻗는데, 갑자기 이 예술가는 아이의 얼굴 정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서 작은 머리를 박살 내는 거지……. 정말 예술적이라니까, 안 그러니? 내 생각으론, 악마가 존재하지 않아서 인간이 악마를 창조해 냈다면,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형상과 모습에 따라 창조했을 거야.


“형, 뭣 하러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알료샤가 물었다.

“내 생각으론, 악마가 존재하지 않아서 인간이 악마를 창조해 냈다면,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형상과 모습에 따라 창조했을 거야.”

“그렇다면, 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창조했겠군.”

“말을 둘러치는 솜씨가 놀라울 정도로 일품인걸, 꼭 『햄릿』의 폴로니어스 같아.” 이반이 웃기 시작했다.


리샤르 이야기


너는 지금 내가 뭣 하러 이런 얘기를 하는지 물었다만, 실은 내가 몇몇 사실들을 수집하는 애호가여서 신문이건 소설이건 무슨 일화건 닥치는 대로 모아 그중에서 메모를 해 두는데, 나한테는 이미 멋진 컬렉션이 생겼지. 터키 녀석들도 물론 컬렉션에 들어가 있지만, 이건 어떻든 외국인 얘기잖아.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구타도 더 심하고 매질과 채찍질도 더 심한데, 이건 민족적인 특성이야.


외국에서는 풍습이 정화됐기 때문이라든가, 아니면 인간이 인간을 때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법률이 이미 제정되었기 때문이라든가 해서 지금은 매질을 아예 안 한다지만, 대신 그들은 순수하게 민족적인 다른 방식으로 그 공백을 메우게 됐는데, 얼마나 민족적인지 우리나라에서라면 불가능할 법한 다른 방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것이 특히나 상류 사회에서 종교 운동이 시작된 시점부터 확산되고 있긴 하지.


얼마 전, 그러니까 고작해야 오 년쯤 전에 제네바에서 악당이자 살인자 한 명을 처형한 얘기를 담은, 불어에서 번역한 멋진 팸플릿이 나한테 하나 있는데, 스물세 살쯤 된 이 리샤르라는 젊은이는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에 회개하여 기독교로 개종했대. 이 리샤르는 원래 누군가의 사생아였는데, 아이가 여섯 살쯤 됐을 때 부모들이 무슨 스위스 산의 양치기들에게 아이를 선사했고, 이들은 부려 먹으려고 아이를 키웠어. 리샤르 자신이 증언하길, 그 무렵 그는 복음서의 탕자처럼, 팔려고 키우는 돼지에게 주는 사료라도 좀 먹어 봤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나마도 주지 않았으며 그가 돼지 먹이를 훔쳤을 땐 매만 맞았고, 그런 식으로 그는 자신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어른이 되어 힘이 세지자 몸소 도둑질을 하러 나선 거야.

이 야만인은 제네바에서 날품팔이로 돈을 벌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술을 퍼마시며 불한당처럼 살다가 결국엔 어떤 노인을 죽이고 강도 짓을 하고야 말았지. 그는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어. 그쪽 사람들은 감정에 휘둘리거나 하진 않으니까. 자, 그런데 감옥에 들어가자 그 즉시 목사들, 이런저런 기독교 승단의 회원들, 자선가를 자처한 귀부인들이 그를 에워싸는 거야. 그들은 감옥에서 그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복음서를 해석해 주면서 훈계를 늘어놓고 설득을 시키고 우르르 몰려들어 잔소리를 늘어놓고 압력을 가한 결과, 결국엔 그가 거국적으로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기에 이르렀어.

그는 개종했고, 재판정 앞으로 자신은 불한당이었지만 결국엔 주님이 자기를 눈뜨게 해 주셨고 자신에게 은총을 보내 주셨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지. 제네바는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어, 온통 자선적이고 경건한 제네바가 말이야. 제법 상류 사회, 제법 교양 있다는 족속들이 죄다 감옥에 있는 리샤르에게로 밀려와서는 '너는 우리의 형제야, 너는 은총을 받은 몸이야.'라며 그에게 입을 맞추고 포옹을 했지. 그러면 당사자인 리샤르는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릴 뿐이었지. '그렇습니다, 저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전엔, 그러니까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에는 돼지 먹이만 있어도 기뻤지만 지금은 은총을 받았으니, 이렇게 주님의 품 안에서 죽어 갑니다!'

'그래, 그래, 리샤르, 주님의 품 안에서 죽어라, 너는 남의 피를 흘리게 했으니 주님의 품 안에서 죽어 마땅하지. 설사 네가 돼지 먹이를 탐내고 그것을 훔친 죄로 매를 맞았을 때는 주님을 전혀 몰랐던 것이니 무고하다고 할 수 있지만, 자, 그렇게 마지막 날이 오는 거야. 기진맥진한 리샤르는 울면서 그저 '이건 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나는 주님께로 간다!'를 시시각각 되풀이할 분이지. 그리하여 리샤르는 형제들의 키스 세례를 받으며 단두대로 끌려가 기요틴에 얹어졌고, 은총을 받았다는 그 이유로 참으로 형제답게 그의 목을 잘라 버린 거지. 정말이지, 이건 아주 특징적인 얘기야. 이 팸플릿은 상류층의 루터파 자선가들에 의해 러시아어로 번역돼서 러시아 민중을 계몽하기 위하여 신문이나 다른 출판물의 부록으로 공짜로 배포되었어.

이 농담 같은 리샤르 얘기가 훌륭한 건 여기에 민족적인 특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야.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이 우리의 형제가 됐고 그가 은총을 받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의 목을 베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반복하건대 우리나라에도 이보다 거의 더 나쁘지 않은 우리만의 것이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채찍질의 고통을 아주 가까이서 직접적으로 즐겨 왔어. 네크라소프의 시 중에는 농사꾼이 말의 눈을, ‘온순한 눈을’ 채찍질하는 장면이 나오지. 누가 이런 걸 본 적이 없겠니, 이거야말로 러시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에 대한 가혹행위


사람에게도 역시 매질을 할 수 있는 법이란다. 그러니까, 교육도 잘 받은 지식인 신사와 그의 부인이 친딸을, 그것도 일곱 살 난 어린 딸을 회초리로 때린 일이 있었는데, 아빠란 작자는 회초리에 옹이가 박혀 있다고 기뻐하면서 '이쪽이 더 따끔하겠는걸.'이라고 말하더니, 그렇게 친딸을 '손봐 주기' 시작하는 거야.


아이는 소리를 지르고 지르다가 마침내는 소리조차 지를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아빠, 아빠, 아빠, 아빠'라고 헐떡이는 거야. 이 일은 뭔가 악마적일 정도로 추잡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재판으로까지 넘어가게 됐어. 변호사가 고용되지. 변호사는 자신의 의뢰인을 변호하느라 고함을 질러 댔어. '이 사건은 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가정사에 지나지 않건만, 아버지가 딸을 때렸다고 재판으로까지 넘어왔으니, 이거야말로 우리 시대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라는 거야.


배심원들은 이 말에 설득당한 채로 물러났다가, 무죄를 선고했어. 청중은 가해자가 무죄를 선고받았다고 행복감에 젖어 울부짖었지. 에잇, 내가 그 자리에 없었기에 망정이지, 나라면 그 고문자의 이름을 기리는 차원에서 장학 재단이라도 설립하자고 제안했을 텐데……! 정말로 멋진 장면들이 아니냐.


더 훌륭한 예도 있는데, 다섯 살 난 조그만 계집아이가 '존경할 만하고 관직도 꽤 괜찮은 사람들, 교육도 받고 교양도 있는 자들'인 부모의 증오를 받게 되었어. 이 가해자들을 유혹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어린 창조물들의 무방비 상태, 즉, 아이들이란 그 어디에도 몸을 숨길 수 없고 그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처지라서 흡사 천사처럼 사람을 쉽게 믿어 버린다는 점인데, 바로 이것이 고문자들의 더러운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거야.


이 가련한 다섯 살짜리 계집아이를 이 교양 있는 부모들이 온갖 방법으로 고문했던 거야.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그들 자신도 모르면서……. 급기야는 춥다 못해 혹한인 날씨에 아이를 밤새도록 뒷간에 가두어 뒀는데, 아이가 밤에 뒷간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고, 그 벌로 아이의 온 얼굴에 아이의 대변을 처 바르고 아이에게 그 대변을 먹으라고 강요했어, 친어머니가, 친어머니가 그런 강요를 했다고! 그러고서도 이 어머니는 한밤중에 더러운 곳에 갇힌 가엾은 아이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데도 잠을 잘 수 있었다는 거야!


너는 이게 이해가 되니, 아직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제대로 짐작할 수 없는 어린 존재가 어둡고 추운 더러운 곳에서 조막만 한 주먹으로 자신의 찢어진 가슴을 치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자기를 보호해 달라며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온순한 피눈물을 흘린다면, 도대체 이해하겠느냐는 말이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은 잠시도 이 세상에 머물 수 없다고 하더군, 왜냐면 선악을 몰랐을 테니까.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저 악마와 같은 선악을 인식해야 한단 말이야?


행랑채 소년 이야기


“하나만, 풍경 하나만 더 보자, 이것도 그저 호기심에서이긴 하지만 아주 특징적인 얘기거든, 무엇보다도 우리의 고대 풍습 모음집 중 하나에서 막 읽었는데, 《고문서》던가 《고사집》이던가, 알아봐야겠군, 어디서 읽었는지도 잊어 먹다니…….


이것은 농노제가 맹위를 떨치던 음울한 시기인 19세기 초엽의 일인데, 인맥도 튼튼하고 대단히 부유한 지주인 장군이 있었는데, 장군은 농노가 2000명이나 되는 영지에서 떵떵거리고 살았기 때문에 주위의 소지주들은 자신의 식객이나 어릿광대인 양 취급했던 모양이야. 개집에는 사냥개가 수백 마리 있었고, 거의 백 명에 이르는 사냥개지기는 모두 제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어.

바로 그때 행랑채의 소년이, 고작해야 여덟 살 된 어린 소년이 돌을 갖고 놀다가 어쩌다가 그만 잘못 던져서 장군이 애지중지하는 사냥개의 다리에 상처를 냈어. ‘내가 애지중지하는 사냥개가 왜 다리를 절게 됐나?’ 자, 그리하여, 이 소년이 개에게 돌을 던져서 다리에 상처를 냈노라고 그에게 보고를 했지. ‘아, 바로 네놈 소행이로구나.’라면서 장군은 소년을 훑어보았어. ‘저놈을 잡아라!’ 아이는 잡혔는데, 그러니까 어머니한테서 잡아 와서 아이를 밤새도록 유치장에 가둬 놓았고, 날이 밝자마자 장군은 사냥 나갈 채비를 완전히 갖추고 나와서 말에 올랐으며 따끔한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 행랑채 사람들을 전부 모아 놓았고, 그 맨 앞에는 죄를 지은 소년의 어머니가 서 있었어.

소년이 유치장에서 끌려 나왔어. 안개가 낀 을씨년스럽고 추운 가을날, 장군이 소년의 옷을 벗기라고 명령하자, 소년은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어 공포에 떨다가 거의 실성하다시피 됐기 때문에 찍소리도 못 내고 있었지……. ‘저놈을 내몰아라!’ 장군이 명령해. ‘뛰어, 뛰어라!’ 소년에게 사냥개지기들이 이렇게 소리치고, 소년은 뛰는 거야. 그러자 장군은 ‘달려들어!’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소년을 향해 사냥개 무리를 전부 풀어 버렸어. 어머니의 눈앞에서 수캐들이 아이를 물어 죽인 거야, 아주 갈기갈기 찢어 버렸지……! 그 장군은 보호관찰 형을 받았다는 것 같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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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래…… 이런 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총살? 도덕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총살시켜야 할까? 말해 봐, 알료쉬카!”

“총살시켜야 해!” 알료샤가 어쩐지 창백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띠며 형을 향해 시선을 든 뒤 조용히 말했다.

“브라보!” 이반은 어쩐지 환희에 넘쳐 고함을 질렀다. “너 그런 말을 하다니, 참 대단한 고행 수도사일세! 자, 그러니까 네 마음속에 얼마나 대단한 악마 녀석이 들어앉아 있다는 소리지, 알료쉬카 카라마조프!”


“내가 그만 허튼소리를 해 버렸지만, 하지만…….”

“그 하지만이 바로 문제인 거야…….” 이반이 소리쳤다. “잘 알아 둬, 수도사 양반, 이 세상에서는 허튼소리들이 너무 많이 필요해. 세상은 바로 이 허튼소리들을 발판으로 해서 서 있고, 그것이 없다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알 뿐이니까!”


“형이 알고 있는 건 뭔데?”

“내가 이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반은 꼭 미망에 들뜬 듯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아. 나는 사실에만 머물고 싶어. 나는 오래전에 이해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만약 내가 뭔가를 이해하고 싶어 하면, 그 즉시 사실을 배반하게 될 테니까, 나는 사실에만 머물기로 결심한 거야…….”


입장권 반납


“나는 보다 더 명확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서 어린아이들만을 예로 들었던 거야. 지표면부터 중심부까지 이 땅을 흠뻑 적시고 있는 인류의 나머지 눈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아, 일부러 내 주제를 축소한 거야. 그러니까 죄가 있는 건 사람들 자신이라는 거지. 원래 그들에겐 천국이 주어졌지만, 그들은 불행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유를 원했기 때문에 천상의 불을 훔쳤고, 따라서 그들을 동정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는 거야.


오, 나의 이 애처로운 지상의 유클리드적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고통은 있으되 죄인은 없다는 것, 또한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직접적이고도 단순하게 낳아서 연신 흐르고 또 흘러 결국엔 평형을 유지한다는 것뿐이야 그런데 그게 나한테 무슨 소용이란 말이니 ─ 나한테 필요한 건 보복이야, 이게 안 된다면 나는 스스로를 박멸할 거야. 그리고 그 보복은 무한대 속의 언제, 어디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서, 내 눈으로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도록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해. 나는 이렇게 믿어 왔고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내가 고통을 받아 온 건 나 자신을, 그러니까 나 자신의 악행과 고통을 희생하여 누군가가 미래의 조화를 누릴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야. 나는 사슴이 사자 곁에 눕는 것을, 죽임을 당한 자가 벌떡 일어나 자기를 찔러 죽인 자와 얼싸안는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싶어.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이 이렇게 됐는지를 모두가 갑자기 알게 될 그때, 나는 그 현장에 있고 싶어.


지상의 모든 종교들은 바로 이 소망 위에 창조되는 것이고, 나는 믿음이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그때도 아이들은 어쩌라고, 이들에 대해서는 무엇을 해야 되겠니? 이것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 골백번이나 반복하건대 ─ 문제는 수도 없이 많지만, 내가 그저 아이들만을 예로 들었던 것은 이로써 내가 말해야 할 것이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해지기 때문이지.


한번 들어 봐. 만약 고통이란 대가를 치르고서 영원한 조화를 얻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고통받아야 한다면, 여기에 아이들은 도대체 왜 필요한 거니, 도대체 왜 이들마저도 고통이란 대가를 바쳐 조화를 얻어야 하는 거니? 사람들 사이의 죄에 있어서의 연대 관계라면 나도 이해해, 복수에 있어서의 연대 관계도 이해하지만, 죄에 있어서 아이들이 무슨 연대 관계가 있다는 거냐,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의 온갖 악행에 있어서 그 아버지들과 연대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니만큼 나란 놈이 이해할 도리는 없는 거야.


알료샤, 아니, 어쩌면 나는 오래오래 살아서 그 아이의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박해했던 자와 얼싸안는 그 순간을 정말로 보게 될지도, 어쩌면 그것을 보기 위해 부활할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주님, 주님이 옳았습니다!’라고 외칠 수도 있겠지만, 그때조차도 나는 그렇게 외치고 싶지 않아. 아직 시간이 있는 만큼 서둘러서 나 자신을 위한 방어벽을 만드는 것이고, 따라서 드높은 조화 따위는 완전히 거부한다.


그따위 조화라면, 악취 나는 변소에서 작은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고 보상받을 길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느님 아버지’에게 기도했던 저 기진맥진한 아이 한 명의 눈물만 한 가치도 없어! 아이의 눈물이 보상받지 못한 채로 남게 됐기 때문에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거야. 그 눈물은 보상받아야 해, 그렇지 않다면 조화 따위는 있을 수도 없어. 하지만, 무엇, 무엇으로 너는 그 눈물을 보상해 줄 거니?


복수를 통해 그 눈물을 보상받게 한다고? 하지만 나한테 그런 복수가 무슨 소용이야, 가해자들에게 지옥을 선사한들 또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저들이 이미 고통으로 녹초가 되었건만 이 상황에서 지옥이 있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어? 그리고 지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도대체 조화는 또 무슨 놈의 조화냔 말이다. 나는 용서하고 싶고 부둥켜안고 싶어, 더 이상 사람들이 고통받는 건 원치 않아.


궁극적으로 나는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그 박해자와 얼싸안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원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것만을, 즉 그녀가 어머니로서 받았던 그 한없는 고통에 대해서만 박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갈기갈기 찢어진 아이의 고통에 대해서라면 그녀는 감히 용서를 할 권리가 없고, 설령 아이 자신이 그놈을 용서해 준다고 할지라도 그 어머니는 감히 그 박해자 놈을 용서해서는 안 돼!


그래, 조화의 값을 너무 높게 매겨 놓아서 우리의 주머니 사정으론 도대체 그 비싼 입장료를 감당할 수 없거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서 입장권을 반납하려는 거야. 더욱이 내가 정말로 정직한 사람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을 반납할 의무가 있는 거지. 그래서 정말로 실행에 옮기는 거야. 나는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료샤, 난 그저 신에게 그 입장권을 극히 정중하게 반납하는 거야.”


“그건 반역이야.” 알료샤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말했다.

“형은 지금, 이 세계를 통틀어서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존재가 과연 있는가 하고 말했지. 하지만 그런 존재는 있어, 그 존재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 존재 자체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위해서 자신의 무고한 피를 바쳤기 때문이야. 형은 그분을 잊었어, 바로 그분 위에 이 건물이 건설되는 것이고, 바로 그분을 향해 ‘주님, 주님은 옳았습니다, 이는 주님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라고 외치는 거야.”



“아, 지금 ‘유일하게 죄 없는 분’과 그분의 피를 말하는 거로구나! 천만에, 그분을 잊은 건 아니야, 오히려, 네가 오랫동안 줄곧 그분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이 의아스러웠어, 그런데 알료샤, 비웃지 말아 줘, 내가 언젠가 일 년쯤 전에 서사시를 한 편 지어 봤거든. 나를 위해 십 분 정도만 더 할애해 줄 수 있다면, 너한테 얘기해 주었으면 싶은데, 어때?”


“형이 서사시를 썼다고?”

“나는 평생 동안 시라곤 단 두 줄도 지어 본 적이 없는 몸이야. 하지만 이 서사시는 머릿속으로 구상해서 기억해 두고 있는 거야. 아주 열렬하게 구상에 몰두했지. 너는 나의 첫 번째 독자, 그러니까 청자가 되는 셈이야. 정말로 작가의 입장에선 단 한 명의 청자라도 놓칠 이유가 없거든.” 이반이 웃었다.

“내 서사시의 제목은 ‘대심문관’이고, 어처구니없는 작품이긴 하지만 너한테 꼭 들려주고 싶어.”


<제5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