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옮김 민음사
제4장 파열들
이른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알료샤는 잠에서 깼다. 장로가 눈을 떴으며, 몸이 극히 허약해졌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침대에서 일어나 안락의자에 앉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의식은 아직 또렷했다. 얼굴은 비록 극도의 피로에 절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맑고 거의 기쁨에 차 있었으며, 시선은 즐겁고 상냥하고 호의적이었다.
"오늘 하루를 못 넘길 것 같구나." 그가 알료샤에게 말했다.
그러고 나선 즉시 고해성사를 하고 성찬을 받고 싶어 했다. 장로의 고해 신부는 언제나 파이시 신부였다. 미사가 끝나자, 장로는 모든 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면서 모두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힘닿는 데까지 설교를 계속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긴 했어도 아직은 상당히 또렷했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상당히 두서가 없었다. 그는 많은 얘기를 했는데, 그것도 그저 가르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기쁨과 황홀을 모든 이들, 모든 것들과 나누면서 살아생전에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서로서로를 사랑하십시오, 신부님들. 하느님의 자식인 민중을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여기로 와서 이 벽 안에 틀어박혔다고 해서 속세 사람들보다 더 성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여기 온 자는 누구든 여기에 왔다는 것만으로 이미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속세의 어떤 사람들, 지상의 어떤 사람들, 어떤 것들보다 더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그가 다른 속세 사람들보다 못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모든 이들과 모든 것들에 대해 사람들의 죄, 세계적인 죄, 각 개인의 개별적인 죄 등 모든 죄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인식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하나 됨이라는 목적은 달성될 것입니다. 왜냐면, 알아 두십시오, 친애하는 이들이여, 우리 개개인이 모두 지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이며, 그것도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차원의 죄에서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 각각의 사람에 대해 개별적으로도 유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식이야말로 수도사의 길은 물론이고 지상의 온갖 사람의 길이 도달해야 할 월계관인 것입니다. 왜냐면 수도사는 뭔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저 속세의 모든 사람들이 응당 되어야 할 그런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포화를 모르는 무한한 우주적인 사랑에 취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각각이 사랑으로써 온 세상을 얻을 수 있고 여러분 자신의 눈물로 세상의 죄를 씻어 버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겁니다…….
다들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고해하십시오. 자신의 죄를 두려워 말 것이며, 죄를 의식한 순간 곧 참회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 앞에 어떤 조건을 내달지는 마십시오. 다시 말하건대, 오만하게 굴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배척하는 자들, 여러분을 비방하는 자들도 증오하지 마십시오. 무신론자들, 악의 교사자들, 유물론자들들도 증오하지 말지어니, 우리 시대에는 그들 중에도 선량한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시오. 아무도 기도해 주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주님, 주님께 기도하길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드리는 것은, 주님, 저 자신이 그 어떤 사람들, 그 어떤 것들보다 더 추잡하기 때문입니다……. 민중에게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해 주십시오……. 민중을 착취하지 마십시오……. 금은보화는 탐하지도, 갖고 있지도 마십시오……. 믿음을 키우면서 깃발을 주십시오. 그것을 높이 들어 올리십시오……."
알료샤가 잠깐 방 밖으로 나올 일이 있었을 때. 그는 방과 방 주위에 무리 지어 있는 형제들이 다들 흥분과 기대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기대는 어떤 이들에게는 거의 불안스러운 것이었으며 또 어떤 이들에겐 숭고한 것이었다. 다들 장로가 서거하면 그 즉시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 주리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대는 어떤 점에서 보자면 거의 경박한 것이었지만 가장 엄격한 장로들조차도 거기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사람은 수도사제인 파이시 장로였다.
알료샤가 잠시 방을 비웠던 것은 그저 시내를 다녀온 라키친이 어느 수도사를 통해서 그를 몰래 불러냈기 때문인데, 라키친은 호흘라코바 부인이 알료샤 앞으로 보낸 이상한 편지를 갖고 왔다. 부인은 지금 상황에 참으로 잘 맞는 흥미진진한 소식 하나를 알료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 어제 장로에게 인사를 드리고 축복을 받으러 왔던 평민 여신도들 중에 시내에서 온 한 노파, 즉 하사관 미망인 프로호로브나가 있었다. 그녀는 장로에게 아들 녀석 바센카가 업무 차 멀리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떠난 뒤 이미 일 년째 감감무소식인데 아들을 아예 고인으로 간주하여 교회에서 명복을 빌어도 되겠느냐, 하고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 장로는 그녀에게 그런 종류의 명복은 푸닥거리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금지시키며 엄격한 대답을 주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선 그녀가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니 용서를 베풀고 '마치 미래의 책이라도 들여다보는 양 (자신의 편지에서 호흘라코바 부인은 이런 표현을 썼다.) '그녀의 아들 바샤는 틀림없이 살아 있으니 곧 그녀를 보러 오거나, 아니면 지금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면, 아들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라는 편지를 보내 올 것이다.'라는 위안을 덧붙였다.
노파가 집에 돌아가 보니,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가 진작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바샤는 이 편지를 여행 중에 예카체린부르크에서 쓴 것인데, 자기가 지금 어느 관리와 함께 어머니가 있는 러시아로 가고 있으니 "어머니가 이 편지를 받고 삼 주쯤 지나면 어머니를 얼싸안을 수 있을 거예요."라고 알려 온 것이었다.
호흘라코바 부인은 새로 실현된 이 '예언의 기적'을 즉각 수도원장과 모든 형제들에게 알려 달라며 알료샤에게 열렬하고 집요하게 간청하고 있었다. "이건 모두, 모두가 다 알아야 해요!" 그녀는 자신의 편지를 끝맺으면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녀의 편지는 다급하게 서둘러 쓰였으며, 편지를 쓴 사람의 흥분이 각 행마다 녹녹히 배어 있었다. 하지만 알료샤가 형제들에게 알리고 자시고 할 것도 전혀 없었으니, 이미 다들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키친은 알료샤를 불러오라며 수도사를 보냈지만 그에게 '파이시 신부님께, 라키친이 용무가 좀 있다고 공손하게 아뢰어라, 그 용무가 너무 중요한 것이므로 단 일 분도 지체하지 말고 알려야 된다, 이런 무례한 청에 대해서는 깊이 고개 숙여 용서를 구하는 바이다.'라고 전하라고 시켰다. 그런데 수도사가 알료샤보다는 파이시 신부에게 먼저 라키친의 말을 전했기 때문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온 알료샤가 할 일은 그저 편지를 다 읽고 파이시 신부에게 곧장 그 내용을 서류 형식으로 보고하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파이시 신부는 남의 말을 좀처럼 믿지 않고 준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건만, 얼굴을 찌푸리고 '기적' 소식을 읽으면서 어떤 내적인 감정의 동요가 이는 것을 완전히 억누르진 못했다. 그의 눈은 번득였으며, 입가에는 갑자기 진중하고도 감격스러운 미소가 일었다. "우리가 볼 것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물론 '기적'은 바로 이 시간에 수도원 전체로 퍼졌고 수도원의 의식에 참석하러 온 많은 속세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기적이 실현되자 그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은 사람은 '성 실베스트르'의 명을 받고 어제 먼 북쪽의 어느 작은 오브도르스크의 수도원에서 온 수도사인 것 같았다. 그는 어제 호흘라코바 부인 곁에서 장로에게 절을 하면서 이 부인의 '치료받은 딸'을 가리키면서 준엄하게 꾸지람을 하듯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을 하십니까?"라고 묻지 않았던가.
어제 저녁 무렵 그는 양봉장 뒤의 수도원의 별채에 사는 페라폰트 신부를 방문했는데, 이 만남은 그에게 굉장히 무섭다는 느낌을 안겨 주면서 큰 충격이 되었다. 이 장로는 대단히 늙은 수도사이자 대단한 금욕주의자에 묵언 수행자로서, 앞서 이미 언급했듯, 조시마 장로를 적대시했으며 무엇보다도 장로제 자체를 유해하고 경박한 혁신 제도로 여겨서 적대시했다. 이 적대자는 굉장히 위험했다. 무엇보다도 다수의 형제들과 수도원을 드나드는 속세 사람들 중에서도 아주 많은 이들이 그를 틀림없는 유로지브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위대한 의인이자 고행자로서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이 페라폰트 신부가 조시마 장로를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암자에 살고 있긴 했지만, 어떻든 영락없는 유로지브이처럼 굴었기 때문에 암자의 규칙을 지키도록 강요받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는 아무리 많아 야 일흔다섯 살 정도의 나이로 암자의 양봉장 뒤, 벽의 구석진 곳에 있는 거의 폐가가 된 낡은 목조 수도실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암자는 지난 세기에 아주 위대한 묵언 수행자로서 백다섯 살 까지 장수한 이오나 신부를 위해 지은 것이었으며, 그 위업을 두고 지금까지도 많은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는 사흘 동안 아무리 많아야 기껏 빵 2 푼트(1푼트는 0.41킬로그램)만을 먹는다고 했다. 바로 그곳에 사는 벌치기가 사흘에 한 번씩 그에게 빵을 갖다 주었지만, 페라폰트 신부는 자기 시중을 드는 그와도 말을 하는 일이 드물었다. 이 4푼트의 빵이 일요일 저녁 미사 후 수도원장이 이 성자에게 꼬박꼬박 보내오는 성병(聖餠)과 더불어 그의 일주일 식량의 전부였던 것이다.
미사를 할 때 그가 나타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를 찾아오는 숭배자들은 그가 때때로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도,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하루 종일 기도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어쩌다 그들과 담소를 나누는 일이라도 있다면, 그때는 말도 짧고 말투도 탁탁 끊어지고 태도도 이상하다 못해 언제나 거의 무례하기까지 했다. 그가 방문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아주 드문 일도 간혹 있긴 했는데, 그저 방문객에겐 늘 커다란 수수께끼나 다름없는 무슨 이상한 말을 한마디 툭 던져 놓고서 아무리 부탁을 해도 통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는 성직자로서의 직위는 갖고 있지 않은, 그저 평범한 수도사에 지나지 않았다. 아주 무지몽매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페라폰트 신부가 하늘의 정령들과 서로 교통하여 오직 그들과만 담소를 나누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과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아주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오브도르스크의 수도사는 양봉장에 도착한 뒤 역시나 극히 말이 없고 무뚝뚝한 벌치기 수도사에게 길을 물어 페라폰트 신부의 방이 있는 구석진 곳으로 갔다.
"외지에서 오신 분이시니 무슨 말을 하실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벌치기는 미리 이렇게 일러 주었다. 이미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페라폰트 신부는 그때 방문 곁에 있는 나지막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오브도르스크의 수도사는 성자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 축복을 해 주십사 부탁했다.
"수도사여, 나도 자네 앞에 그렇게 엎드리길 바라는가?" 페라폰트 신부가 말했다.“일어나게! 자네를 축복하고 나도 또 축복받았으니, 곁에 와서 앉게. 그래, 어디서 왔는고?"
가련한 수도사가 무엇보다도 충격을 받은 것은, 페라폰트 신부가 대단한 금욕 생활을 해 오고 있으며 무척 연로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겉보기엔 건장한 노인으로 보였기, 그러니까 키도 크고 몸의 자세도 올곧고 얼굴도 비록 여위긴 했어도 싱싱하고 건강했기 때문이었다. 힘도 여전히 상당히 셀 듯싶었다. 골격은 운동선수 수준이었다. 머리와 턱에는 아직도 아주 풍성하고 무엇보다도 아주 새까만 머리카락과 수염이 나 있었다.
"오브도르스크의 조그만 수도원에서 성 셀리베스트르의 명을 받아 왔습니 다." 외지에서 온 수도사는 겸손하게 대답하면서, 약간 겁을 집어먹은 듯하지만 호기심 어린 시선을 재빨리 돌려 가며 은자를 관찰했다.
"자네의 셀리베스트르 수도원에 간 적이 있었지. 셀리베스트르는 잘 있나?" 수도사는 머뭇거렸다.
"무식한 놈들 같으니! 재계(齋戒)는 어떻게들 지키고 있냐고?"
"저희의 식사는 암자의 유고한 관례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위대한 아버지, 신부님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요." 기운이 좀 난 수도사가 이렇게 덧붙였다. "신부님의 위대한 절제 생활은 실로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그럼, 그루지는?" 페라폰트 신부는 '그'를 거의 흐에 가까운 기음으로 발음하면서 갑자기 물었다.
"그루지라고요?" 놀란 수도사가 다시 물었다.
"그래, 그래. 나는 이놈들의 빵 따윈 전혀 필요 없으니까 다 버리고 떠날 거야, 설령 숲에 들어가 거기서 버섯이나 딸기로 연명할지언정 말이지, 하지만 여기 이 놈들은 자기 빵을 버리고 떠나지 못할 테고, 그러니까 악마한테 묶여 있는 셈이야. 요즘 더러운 이교도 놈들은 그렇게까지 재계할 필요는 없다는 말까지 하더군. 그 놈들의 이런 생각이야말로 오만방자하고 더러운 거야."
"저놈들한테서 악마들을 보았느냐?" 페라폰트 신부가 물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수도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작년 성스러운 금요일에 수도원장한테 갔다가 그 이후론 안 갔어. 어떤 놈의 가슴팍에 눌러앉아 수도복 밑에 숨어 있는데 낯짝이 보이더군. 어떤 놈의 호주머니에도 들어앉아 바깥을 빠끔히 내다보는데, 눈이 재빨리 움직이는 것이 나를 두려워하는 눈치였어, 어떤 놈한테는 배에, 그놈의 가장 부정한 배 속에 들러붙어 있었고, 또 어떤 놈한테는 목에 매달려 들러붙어 있던데, 그렇게 달고 다니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놈을 못 보는 거야."
"신부님께서는…… 보이십니까?" 수도사가 물었다.
"훤히 보인다네. 수도원장의 암자에서 나와서 보니 한 놈이 나를 피해 얼른 문 뒤로 숨는데 키가 1.5아르신은 족히 넘는 데다가 덩치는 어찌나 큰지, 꼬리는 밤색에다가 뚱뚱하고 기다랬는데 어쩌다 그만 꼬리 끝이 삐죽 나와 있는 거야, 갑자기 문을 쾅 닫아서 그놈의 꼬리를 문틈에 끼게 만들었지. 째질 듯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을 치기 시작하기에, 내 그놈에게 십자가 표식을 세 번이나 해 주고 또 성호를 그어 주었지. 그러자 곧바로 짓눌린 거미처럼 뒈져 버렸어.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 자네한테만 털어놓는 거야."
"무서운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위대하시고 성스러우신 신부님." 수도사가 점점 더 대담해졌다.
"신부님께서 성령과 끊임없이 교통한다는 위대한 명성이 저 먼 땅에도 자자한데, 사실인지요?"
"날아온다네. 이따금씩 말이지."
"어떻게 날아옵니까? 어떤 모습으로요?"
"새의 모습이야."
"비둘기 모습을 한 성령입니까?"
"그런 성령도 오고 신령도 온다네. 신령은 다른 것이라서, 또 다른 새의 모습으로 내려올 수 있지. 때로는 제비처럼, 때로는 방울새처럼, 때로는 박새처럼 내려 와."
"그럼, 박새를 보고 어떻게 성령인 줄 아십니까?"
"말을 하거든."
"어떻게 말을 합니까, 어떤 언어로요?"
"사람의 언어지."
"그럼, 신부님께 무슨 얘기를 합니까?"
"오늘은 어떤 바보가 쓸데없는 질문을 할 거라고 알려 주더군. 자네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구나."
"끔찍한 말씀이십니다. 성스럽기 그지없는 신성하기 그지없는 신부님." 수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브도르스크의 수도사는 이런 대화를 나눈 뒤에 자기에게 지정해 준, 어느 형제의 방으로 돌아왔는데, 상당히 심한 의혹에 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심적으론 틀림없이 조시마 신부보다는 페라폰트 신부 쪽으로 더 끌렸다. 그는 무엇보다도 재계를 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페라폰트 신부처럼 위대한 금욕 수행자가 '기적을 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수도원으로 오기 전부터도 그는 장로제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인 편견이 있었는데, 많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좇아 그것을 단연코 해로운 혁신 제도로 간주했던 것이다. 수도원에서 밤을 보내면서 그사이에 이미 그는 장로제를 못마땅해하는 몇 몇 경박한 형제들의 은밀한 불평도 인지했다. 그런 데다가 그는 타고나길 모든 일에 호기심이 엄청 많은지라, 호들갑을 떨며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다. 바로 이 때문에, 조시마 장로가 새로운 '기적'을 행했다는 어마어마한 소식을 듣자, 굉장한 의혹에 빠졌던 것이다.
조시마 장로가 또 피로를 느껴 다시 자리에 누웠다가 이미 눈을 감으려는 상태에서 갑자기 알료 생각이 났는지 그를 불러 달라고 했던 것이다. 알료샤는 그 즉시 뛰어왔다.
장로는 피로에 전 눈을 뜨고 알료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에게 물었다.
"네 가족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아들아? 오늘 가겠다고 약속을 했을 테지?" 알료샤는 머뭇거렸다.
"약속했습니다……. 아버지한테……. 형들한테……. 또 다른 사람들한테도……."
"거 봐라. 얼른 가 보렴. 슬퍼할 거 없다. 너에게 해 줄 유언이 있는데, 일단은 약속한 그들에게 가 봐라."
알료샤는 그 즉시 장로의 말에 복종했지만, 떠나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알료샤에게 남길 유언을 들려주겠다는 약속이 그의 영혼을 황홀하게 전율시켰다. 그는 어서 빨리 시내의 일을 다 보고 돌아오려고 서두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파이시 신부도 그에게 어떤 서문도 없이 다짜고짜 작별의 말을 해 주었다.
"끊임없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단다, 어린아이야."
"세속의 학문은 큰 세력으로 결합되었고 특히나 현 세기에 이르러서는 성스러운 책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모든 천상의 것들을 분석해 냈는데, 그 무자비한 분석 이후 이 세계의 학자들에겐 예전의 성스러운 것 중 그 어떤 것도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됐단다. 하지만, 그들은 부분적으로만 분석했을 뿐,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했으니, 그 분석이 얼마나 맹목적이었는지 실로 놀라울 정도다.
그래도 그들의 눈앞에 전체가 예전처럼 버젓이 버티고 서 있는 이상, 지옥의 문도 그것을 물리치진 못하는 거란다. 그 전체가 이 19세기를 살아오지 못한 것 같으냐, 지금도 개별적인 영혼들의 움직임과 민족 대중의 움직임 속에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으냐? 그것은 무신론자들, 바로 그들의 영혼의 움직임 속에서도 예전처럼 버젓이 살아 있단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현명하고 열의가 대단해도 오래전 그리스도가 제시한 그 형상에 비할 만한 훌륭한 형상을 인간과 그 가치에 맞게 창조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와 같은 시도들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기형적인 모양이 되고 말았지. 이 점을 특히 명심해야 한다, 어린아이야, 왜냐면 세상을 떠나실 너의 장로님께서 속세로 나가라고 명하셨으니 말이다. 이 위대한 날을 상기할 때면 아마, 진정 어린 마음으로 너를 보내 너에게 해 준 나의 이 말들도 잊지 않고 기억할 테지, 왜냐면 너는 아직 어린데 속세의 유혹은 힘겨운 것이니 네 힘으로 그걸 감당하려면 벅찰 테니까. 자, 이제 가 보거라."
이 말을 하면서 파이시 신부는 그를 축복해 주었다. 수도원에서 나와 이 모든 느닷없는 말을 곰곰 되씹으면서 알료샤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엄격하고 준엄했던 이 수도사가 이제는 뜻하지 않은 새로운 친구가 됐음을, 자기를 열렬하게 사랑해 주는 새로운 인도자가 됐음을 불현듯 깨달았으니, 꼭 조시마 장로가 죽어 가면서 그에게 파이시 신부를 남겨 준 것만 같았다. '두 분들 사이에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알료샤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맨 먼저 알료샤는 아버지 집으로 갔다. 집 근처까지 왔을 때 그는 아버지가 전날 밤에 어떻게든 이반 형 몰래 들어오라고 신신당부한 것이 생각났다.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지금 갑자기 알료샤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나한테 따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더라도, 몰래 들어갈 이유는 없지 않은가? 분명히, 아버지는 어제 흥분한 김에 무슨 말을 더 하시고 싶었지만, 미처 다 못 하신 거야.' 그는 이렇게 단정 지었다.
알료샤는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슬리퍼를 신고 낡은 외투를 걸친 채 식탁 앞에 혼자 앉아서 별다른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그저 심심풀이로 무슨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집 안에는 완전히 그 혼자밖에 없었다.(스메르쟈코프도 점심 식사에 쓸 식료품을 사러 나가 버렸다.) 간밤에 커다랗고 시퍼런 멍이 생겨 버린 그의 이마는 붉은 수건으로 싸매져 있었고, 코도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래 저기 너의 수도원은 어떠냐? 너의 그 장로는?”
“장로님이 아주 안 좋으세요, 아마 오늘을 못 넘기실 거예요.” 알료샤는 이렇게 대답을 했지만, 아버지는 숫제 대답을 듣지도 않았고 자기가 던진 질문마저도 곧장 잊어버렸다.
“이반은 나갔다.” 그가 갑자기 말했다. “그는 미치카의 신붓감을 빼앗으려고 아주 용을 쓰고 있어, 여기 사는 것도 그 때문이지.” 그는 표독스럽게 덧붙인 뒤 입을 씰룩거리면서 알료샤를 쳐다보았다.
“형이 직접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알료샤가 물었다.
“그래, 그것도 오래전에 말했지. 네 생각이 어떻든, 그렇게 말한 지 삼 주는 족히 되었다. 저놈도 나를 몰래 찔러 죽이려고 여기 온 건 아닐 거 아니냐? 여기 온 데는 뭐든 목적이 있을 거 아니냐?”
“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알료샤가 너무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실, 돈을 달라고 하지도 않아, 어떻든 나한테는 땡전 한 푼 못 받을 테니까."
"어제 이반은 여기서 말 한번 그럴듯하게 잘하더구나, 우리 모두 취해 있긴 했지만. 이반은 허풍쟁이야, 그놈한테 무슨 대단한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무슨 특별한 교양이 있는 것도 아니야, 그저 잠자코 있다가 그렇게 잠자코 사람의 얼굴을 보곤 피식 웃어 주는 거지, 그놈의 수법이란 이런 거야.”
알료샤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왜 그 녀석은 나하곤 말을 하지 않는 거냐? 말을 해도 괜히 비꼬기만 한다니까. 너의 형 이반은 야비한 놈이야! 지금 나는 마음만 내키면 당장 그루셴카와 결혼한다. 돈만 있다면야,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원하는 건 다 되는 법이라오. 그러니까 바로 이걸 이반은 두려워해서 내가 결혼하지 못하도록 나를 감시하는 것이고, 또 그걸 위해서 미치카에게 그루셴카와 결혼하도록 부추기는 거야."
“들어 봐라, 그 날강도 미치카를 오늘 당장 감옥에 처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통 모르겠구나. 내가 저놈, 저 야비한 놈을 감옥에 처넣으면, 그 계집은 내가 저놈을 처넣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당장 그리로 달려갈 거야. 그런데 만약 오늘, 저놈이 나를, 이 허약한 노인을 반쯤 죽도록 때렸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놈을 버리고 곧장 나한테 병문안을 올 거야……. 내 그 계집을 훤히 알고 있지!"
"반카(이반의 애칭)는 체르마쉬냐에 안 간단다, 왜? 행여 그루셴카가 오면 내가 그 계집한테 돈을 잔뜩 주지 않을까, 감시를 해야 되거든. 죄다 야비한 놈들 투성이야! 나는 이반이라는 놈을 전혀 인정하지 않아. 우리와는 영혼 자체가 영 다른 놈이야. 유산이라면 아예 안 줄 거다. 어제 너한테 오늘 오라고 했을 땐 내 머릿속에 멍청한 생각이 떠올랐었어. 내가 미치카 놈한테 지금 당장 1000, 아니 뭐 2000 정도를 던져 주면, 추잡한 비렁뱅이 같은 그놈이 얼씨구나 하면서 한 오 년, 아니 삼십오 년 정도 여기서 완전히 꺼져 줄까, 물론 그루쉬카는 그냥 두고, 그러니까 그루쉬카는 완전히 포기하고서 말이야, 엉?”
“나는…… 내가 형한테 물어볼게요…….” 알료샤가 더듬거렸다. “3000이라면 어쩌면 형도…….”
“집어치워라! 이제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생각이 바뀌었거든. 어제는 내 머리가 아주 돌대가리가 됐는지, 그런 멍청한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야. 아무것도 안 주련다, 국물도 없어, 내 돈은 바로 나한테 필요한 거니까.” 노인은 손을 내저었다.
"그나저나, 그 신붓감 말이다, 그놈은 줄곧 나한테 안 보여 주고 꼭꼭 감춰 두기만 하는데, 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라는 여자는 그놈한테 시집을 가는 거냐, 아닌 거냐? 네가 어제 그 여자 집에 갔다 온 것 같은데?”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형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거봐, 원래 이런 얌전한 귀족 아가씨들이 그런 놈들을, 방탕하고 야비한 놈들을 좋아하거든! 하지만, 내 너한테 분명히 말해 두지만, 이런 창백한 귀족 아가씨들이야말로 걸레야. 암 그렇고말고……."
마지막 말을 하면서 그는 다시 미쳐 날뛰었다.
“너도 어서 가 봐, 오늘 너는 여기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가 퉁명스럽게 딱 잘라 말했다.
알료샤는 작별 인사를 하려고 그에게로 다가서더니, 그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이건 또 뭐냐?” 노인은 다소 놀라워했다. “앞으로 또 볼 거잖니. 다시 못 볼 거라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냐?”
“전혀 아니에요, 그냥 무심코 그런 거예요.”
“그래 됐다, 나도, 나도 그냥…….” 노인은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나한테 그루셴카 얘기를 안 물어보시다니, 천만다행이다. 아버지는 신경이 곤두서고 심술이 나서 뭔가를 생각해 내곤 그걸 고집하고 있다. 그럼 드미트리는? 형도 하룻밤 사이에 원기를 회복하여 분명히 역시나 신경이 곤두서고 심술이 나 있을 거고, 역시나 물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아, 오늘 어떻게 해서든 꼭 형을 찾아야 해…….’
하지만 알료샤는 이 생각에 오래 매달려 있을 틈도 없었다. 길을 가는 도중에 갑자기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던 것인데, 겉보기에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에게 심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볼샤야 거리로 나가기 위해 골목길을 돌자마자, 그는 아래쪽 다리 앞에서 초등학생들의 작은 무리를, 나이가 아무리 많아야 아홉 살부터 열두 살 정도 되는 한결같이 어린아이들 무리를 보았다.
알료샤는 모스크바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아이들을 보면 절대 무심하게 지나칠 수가 없었는데, 지금도 걱정거리가 태산같이 쌓여 있었지만 그래도 갑자기 방향을 틀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졌다. 그런데 소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다가 갑자기 모든 소년들의 손에 돌멩이가 한 개씩, 어떤 애들에겐 두 개씩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개천 건너편에는 이 무리로부터 대략 삼십 보쯤 떨어진 곳, 담장 곁에 소년 한 명이 더 서 있었는데 키로 보아 열 살이 될까 말까 싶었으며 파리하고 병적인 기색이 완연한 얼굴에 검은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때마침 이 무리를 향해 돌멩이가 날아왔는데, 저쪽에서 요령껏 힘 있게 던지긴 했지만 왼손잡이 소년을 살짝 스치고 옆으로 빗나가 버렸다. 그것은 개천 건너편의 소년이 그를 겨냥해 던진 것이었다.
“저놈 혼쭐을 내줘라, 한 대 맞혀라, 스무로프!” 다들 소리쳤다. 개천 건너편의 소년은 당장 이 무리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는데, 이번에는 곧장 알료샤에게 명중하여 그의 어깨를 상당히 아프게 때렸다.
“이건 쟤가 아저씨를 겨눈 거예요, 그것도 일부러 아저씨를 겨눈 거라고요. 아저씨, 카라마조프, 카라마조프 집 사람 맞죠?” 소년들이 깔깔 웃으면서 소리쳤다. “자, 저놈을 향해 일제 사격이다, 던져!”
그러자 여섯 개의 돌멩이가 한꺼번에 아이들 무리로부터 날아갔다.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부끄럽지도 않나요, 여러분! 여섯 명이 한 명을 공격하다니, 여러분은 쟤를 죽일 작정이군요!” 알료샤가 고함을 쳤다.
그는 벌떡 뛰어나가 날아오는 돌멩이들을 향해 막아섰는데, 개천 건너편 소년을 자기 몸으로 보호해 주기 위해서였다. 서너 명의 아이들이 잠시 잠잠해졌다.
“쟤가 먼저 시작했어요!” 빨간 남방을 입은 소년이 어린애다운 짜증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쟤는 야비한 놈이에요, 쟤는 아까 교실에서 크라소트킨을 펜나이프로 찔러서 피가 나게 했어요."
“아저씨 저쪽, 미하일로프스키 거리로 가시는 거죠?” 바로 그 소년이 계속했다. “그러면 지금 저놈을 쫓아가서……. 저어기 보이죠, 저놈이 다시 걸음을 멈췄네요. 아저씨를 쳐다보면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놈한테 물어보세요, 저놈이 너덜너덜해진 목욕탕 수세미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듣고 계세요, 그렇게 물어보라고요.” 다들 깔깔대고 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년은 자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알료샤가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아직 아홉 살도 되지 않은 키도 작고 허약한, 파리하고 여윈 갸름한 얼굴을 지닌 어린아이였는데, 그를 쳐다보는 짙고 커다란 두 눈에는 적개심이 이글거렸다. 아이가 입고 있는 외투는 상당히 낡고 오래된 것으로 그에게는 너무 커서 꼭 병신같이 보였다.
“나는 군이 누구인지 몰라요. 하지만 군은 나를 아는 건가요?” 알료샤가 자꾸 캐물었다.
“자꾸 귀찮게 하지 마세요!” 소년은 갑자기 짜증을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그러면서도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꼭 줄곧 뭔가를 기다리는 듯 다시금 적개심에 찬 눈초리를 번득였다.
“좋아요, 그럼 나는 그냥 가도록 하죠.” 알료샤가 말했다. 하지만 세 걸음도 채 못 가서, 소년의 호주머니에 있던 자갈돌 중 제일 큰 놈이 날아와 그의 등을 때렸다.
“정말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내가 군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거예요?” 그가 소리쳤다.
소년은 정말 이번에야말로 알료샤가 틀림없이 자기에게 덤벼들 거라고 생각하곤 잠자코 오직 그것만을 기다리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이번에도 덤벼들지 않은 것을 보자, 완전히 새끼 들짐승처럼 열을 받아 버렸다. 자기가 먼저 제자리를 박차고 알료샤에게 덤벼들었는데, 두 손으로 상대방의 왼손을 거머쥔 뒤 중지를 으스러지게 꽉 깨물었다.
손가락은 바로 손톱 밑으로 뼛속까지 아프도록 심하게 깨물렸다.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알료샤는 손수건을 꺼내 상처 난 손을 싸맸다. 싸매는 데 거의 꼬박 일 분이나 소요됐다. 그러는 동안 소년은 내내 서서 기다렸다. 마침내 알료샤가 그를 향해 조용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자, 좋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를 얼마나 아프게 깨물었는지 보이죠, 자 그럼 됐죠, 그렇죠? 이제 내가 군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줄래요?”
소년은 대답 대신에, 갑자기 큰 소리로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그러면서 갑자기 알료샤한테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알료샤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미하일로프스키 거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멀리서 소년이 걸음을 늦추지도, 사방을 둘러보지도 않고 필경 여전히 엉엉 목 놓아 울면서 뛰어가는 것이 오랫동안 보였다. 그는 시간이 되는 대로 꼭 저 아이를 찾아내어, 굉장한 충격을 안겨 준 이 수수께끼를 해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곧 그는 호흘라코바 부인의 집에 다다랐는데, 부인 소유의 이 집은 우리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축에 들어가는 아름다운 2층짜리 석조 건물이었다. 호흘라코바 부인은 주로 다른 현에 있는 자기 영지나 모스크바에 있는 자기 소유의 집에서 살았지만, 우리 도시에도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자기 집이 있었다. 그녀가 우리 현을 찾아오는 일은 지금까지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알료샤를 맞이하기 위해 현관까지 뛰어나왔다.
“편지 받으셨죠, 새로운 기적 얘기를 쓴 편지 말이에요?”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빠른 속도로 말을 시작했다.
“예, 받았습니다.”
“모두에게 알리셨나요, 보여 주셨어요? 그분께서 아들이 어머니에게 돌아가도록 해 주셨어요!”
“그분께서는 오늘 중으로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알료샤가 말했다.
“들어서 알고 있답니다, 아, 당신과 얘기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에요! 도시 전체가 흥분에 들떠 있고 다들 기대에 부풀어 있어요. 그런데 지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지금 우리 집에 와 있는 거 알고 계세요?”
“아, 정말 다행이군요!” 알료샤가 소리쳤다. “어제 그분이 제게 오늘 꼭 와 달라고 했거든요.”
“다 알고 있어요, 전부 다 알고 있다고요. 어제 그 집에서 있었던 일은 죄다 상세하게 들었고…… 그…… 잡년하고 있었던 끔찍한 일도 전부 다 들었거든요. 얼마나 비극이에요. 아, 맙소사! 내가 또 정신이 없네요, 지금 당신의 다른 형인 이반 표도로비치가 와 있어요, 앉아서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이건 말이죠, 그야말로 파열이라니까요, 둘 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자기 자신들을 망치고 있어요, 저는, 무엇보다도, 이걸 참을 수가 없어요. 지금 당신에게 모든 걸 이야기할게요, 하지만 지금은 다른 거,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부터 ─ 아이, 이런, 가장 중요한 게 뭐였는지 잊어버렸지 뭐예요. 그러니까 말해 주세요, 리즈가 왜 히스테리를 부리는 거죠? 당신이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얘가 당장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다니까요!”
“엄마(Maman), 지금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 내가 아니라 엄마예요.” 갑자기 옆방으로 통하는 문 틈에서 리즈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당연한 일 아니니, 리즈, 당연하고말고…… 네가 어찌나 변덕을 부리는지 이 엄마도 히스테리 발작이 안 일어나고 되겠냐마는, 그나저나 얘가 아프지 뭐예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얼마나 아픈지 밤새도록 열이 펄펄 나고 끙끙 신음을 하지 않겠어요! 간신히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게르첸슈투베를 불렀죠. 그는 무슨 영문인지 통 모르겠으니, 마냥 기다려야 된다고 말했어요."
리즈는 구멍으로 알료샤의 손가락 상처를 보고 당장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율리야, 창고에 가서 얼른 얼음 조각을 가져와, 물도 새 잔에 담아 오고. 자, 이제 쟤도 갔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친애하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내가 어제 당신에게 보냈던 편지를 어서 냉큼 내놓으세요, 정말로 냉큼 내놔요, 지금 엄마가 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싫어요…….”
“지금 나한테는 없는데요, 편지가.”
“거짓말, 지금 당신한테 있어요.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고요. 편지는 당신의 그 호주머니 안에 들어 있어요. 나는 밤새도록 내가 왜 그런 바보짓을 했을까, 줄곧 후회했단 말이에요. 지금 당장 편지를 돌려주세요!”
“그곳에 두고 왔는걸요. 그리고 오늘은 절대 안 되겠는데요, 수도원에 들어가면 이틀, 사흘, 어쩌면 나흘 정도는 당신한테 올 수 없을 테니까요, 왜냐면 조시마 장로님께서…….”
“나흘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들어 보세요, 당신은 나를 두고 무척 비웃었죠?”
“조금도 비웃지 않았는걸요. 모든 걸 전적으로 믿었으니까요”
“나를 모욕하시는군요!”
“전혀 아닙니다. 편지를 읽자마자 곧 모든 것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조시마 장로님께서 돌아가시면 지금 곧 수도원을 떠나야 될 테니까. 그다음엔 공부를 계속해서 시험을 치를 거고, 법적으로 허용된 나이가 되면 그때 우리는 결혼하는 겁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당신보다 더 훌륭한 아내는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로님께서도 나더러 결혼하라는 말씀을…….”
“하지만 난 불구의 몸이잖아요!” 리자는 뺨을 홍당무처럼 붉히면서 웃기 시작했다.
“그럼, 내 손으로 직접 당신을 의자에 앉혀 끌고 다닐 테지만, 그때까지는 완전히 건강해질 거라고 확신해요.”
“하지만 당신은 미쳤군요.” 리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런 바보 같은 농담을 좀 들었다고 갑자기 이런 헛소리를 하시다니……! 아이, 저기 엄마가 왔어요, 어쩌면 시간도 아주 딱 맞춰서 말이죠."
“자, 됐다, 리즈,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당신이 왔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나한테 달려들었어요, 지금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애타게.”
알료샤와 함께 나오면서 호흘라코바 부인은 은밀하고도 준엄하게 재빨리 속삭였다.
“저기 들어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한번 보세요, 이건 끔찍해요, 그녀는 당신의 작은형 이반 표도로비치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건 당신의 큰형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라고 열심히 스스로에게 우겨 대고 있어요! 저는 당신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서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끝까지 남아 있겠어요.”
하지만 거실의 대화는 벌써 끝나 가고 있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단히 흥분해 있었다. 알료샤와 호흘라코바 부인이 안으로 들어간 그 순간, 이반 표도로비치는 마침 자리를 뜨려고 일어서던 참이었다. 그의 얼굴이 다소 창백했기 때문에 알료샤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그의 의혹 하나가, 얼마 전부터 그를 괴롭혀 온 불안한 수수께끼 하나가 풀리는 중이었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어제 갑자기, 그것도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이반 형이 연적이 되어 준 것이 기쁘기까지 하다, 그 덕분에 그, 즉 드미트리는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그에게 알려 주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가 그루셴카와 결혼하는 데에?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일을 알료샤는 절망에서 나온 최후의 발악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 그루셴카와 벌인 한판 소동을 보면서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호흘라코바 부인의 입에서 ‘파열’이란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서 그가 거의 전율했던 것은, 바로 간밤에, 그러니까 동틀 녘에 그가 반쯤 잠에서 깨어 필경 자신의 꿈에 대답이라도 하듯 갑자기 “파열이야, 파열!”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밤새도록 그는 꿈속에서는 어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집에서 있었던 소동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면 이반 형의 처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알료샤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같은 성격을 지닌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해야만 되는데 그녀가 군림할 수 있는 상대란 오직 드미트리 같은 사람이지 절대로 이반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하는 본능적인 느낌 같은 것이 들었다. 왜냐면 드미트리 같으면(비록 시간이야 오래 걸린다고 해도) 결국에 가서는 ‘스스로 행복감을 느끼면서’ 그녀 앞에 굴복할 수 있는 반면(알료샤는 정말로 이랬으면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반은 절대로 그녀 앞에 굴복할 수 없으며, 설사 굴복할 수 있다고 해도 그로 인해 행복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를 들면, 이제 그의 두 형들의 운명에서 이 경쟁이 너무도 중대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많은 것이 이 문제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어제 이반 형도 아버지와 드미트리 형 얘기를 하면서 “한 마리의 독사가 다른 한 마리의 독사를 잡아먹을 거야.”라고 짜증스럽게 내뱉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이반 형의 눈에는 드미트리 형이 독사로 보인단 말인가, 그것도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혹시 이반 형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알게 된 그때부터는 아닐까?
무엇보다도 그, 즉 알료샤는 누구를 동정해야 된단 말인가? 그리고 각각의 형들에게 무엇을 기원해 주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두 형들을 다 좋아하지만, 이래도 저래도 무서운 모순뿐인데 각각의 형들에게 정말 무엇을 기원해 주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어선 아예 이성을 잃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건만, 알료샤의 마음은 이런 식의 애매모호함을 참을 수 없었으니, 왜냐면 그의 사랑은 언제나 활동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일단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 즉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이다.
알료샤를 보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미 자리를 뜨려고 일어난 이반 표도로비치에게 재빨리 반가운 어조로 말했다.
“잠깐만요! 잠깐만 더 계세요. 제가 진심으로 신뢰하는 바로 이분의 견해를 듣고 싶군요. 카체리나 오시포브나, 부인도 가지 마시고요.” 호흘라코바 부인을 향해 덧붙였다. 그녀는 알료샤를 자기 곁에, 호흘라코바를 맞은편, 이반 표도로비치와 나란히 앉혔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당신은 어제 그…… 끔찍한 사건의 증인으로서 제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보셨지요. 이반 표도로비치, 당신은 그것을 못 보셨지만, 이분은 보셨어요. 이분이 어제 저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똑같은 일이 오늘, 지금 당장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저는 어제와 똑같은 감정을 표출하리라는 것만은 알고 있어요 ─ 그러니까 똑같은 감정에 똑같은 말에 똑같은 행동을. 제 행동이 어땠는지 기억하시죠, 저는 그 어떤 것과도 화해할 수 없어요. 들어 보세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저는 심지어 제가 지금 그이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저 그이가 불쌍해지기 시작했어요, 이건 사랑의 증거로는 나쁜 것이죠. 만약 제가 그를 사랑한다면, 계속해서 사랑한다면, 저는 어쩌면 지금 그를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증오해야 할 텐데…….”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그녀의 속눈썹에서는 눈물이 반짝였다. 알료샤는 내심 전율을 금치 못했다. ‘이 아가씨는 의롭고 진실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고 더 이상 드미트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저는 알료샤도(저런,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죄송합니다, 당신을 그냥 알료샤라고 불렀군요.) 그러니까 알렉세이 표도로비치도 저의 두 친구가 있는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 제가 옳은지 아닌지 말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알료샤, 당신이 저의 사랑스러운 동생이라는(당신은 저의 사랑스러운 동생인걸요!) 본능적인 예감이 들어요.” 그녀는 자신의 뜨거운 손으로 그의 차가운 손을 잡고 다시 환희에 들뜬 어조로 말했다.
"어쨌거나, 두 마디로 말해서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어요. 그가 제가 결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그 여자, 그러니까 저…… 잡년과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라며 그녀가 웅장하게 말을 시작했다. “설사 그렇더라도 저는 그이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그 순간부터 저는 절대, 절대로 그이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만약 그이가 저 여자와 있다가 불행해지면, 뭐 지금 당장 그렇게 되겠지만, 그러면 저한테 와도 좋아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흡사 무슨 발작이라도 난 듯 어쩐지 억지로 핏기 없는 황홀감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저는 그이의 신이 될 것이고 그이는 제 앞에서 기도를 하게 될 것이며 ─ 그이는 최소한 자신의 배반에 대한 대가를, 그 배반으로 인해 내가 어제 감수한 수모의 대가를 치러야 해요. 그리고 그이는 자기 눈으로 보게 될 거예요, 그이 자신은 저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배반을 했지만 저는 평생 동안 그저 그이의 행복을 위한 수단(달리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군요.), 도구가 되겠어요, 그이가 이것을 앞으로 평생 동안 보도록 할 거예요! 자, 이것이 바로 저의 결정이에요! 이반 표도로비치는 저의 이 결정에 지극히 큰 격려를 보내 주고 있어요.”
“갑자기 머릿속이 확 밝아진 것 같아요……. 제가 이런 말을 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쨌거나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알료샤가 예의 그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계속했다. “머릿속이 확 밝아졌다는 건 말입니다, 당신은 드미트리 형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게다가 드미트리도 어쩌면 당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고…… 그냥 우러러볼 뿐이라는 겁니다……. 난 정말 이 모든 얘기를 감히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왜냐하면 여기선 아무도 진실을 말하려 들지 않으니까요…….”
“지금 당장 드미트리를 부르십시오 ─ 제가 형을 찾아오겠습니다 ─ 큰형이 이리로 오면 당신의 손을 잡고 그다음엔 이반 형의 손을 잡아서 두 분의 손을 함께 결합시켜 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반을 괴롭히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그저 이반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괴롭히는 것은 또한 무슨 발작이라도 난 듯 드미트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이건 진짜 사랑이 아니고…… 그저 억지로 스스로를 그렇게 확신시켰기 때문에…….” 알료샤는 불쑥 말을 끊고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당신은…… 그야말로 철부지 유로지브이에 불과하군요, 정말 그런 사람이었군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갑자기 이렇게 딱 잘라 말했는데, 분을 삭이지 못한 나머지 그녀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렸고 입술은 실룩대고 있었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모자가 들려 있었다.
“우리 착한 알료샤가 오해를 했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알료샤가 지금까지 결코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것은 젊은이다운 어떤 솔직함과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도 노골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결코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 이분은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걸 항상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를 사랑해 주진 않았지. 역시나 내가 이분의 친구였던 적은 단 하루도 없었어. 오만한 여자한테 나의 우정 따윈 필요하지 않았거든. 나를 자기 곁에 붙잡아 두었던 건 끊임없이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지.
나는 줄곧 형을 향한 이분의 사랑 얘기를 들어준 것 말곤 한 일이 없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당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형뿐이라는 것은 알아 두십시오. 모욕감이 클수록 형을 많이, 더욱더 많이 사랑하게 되실 테죠. 이것이 당신의 파열과 같은 사랑의 실체입니다. 당신은 형을 당신을 모욕한 형의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형이 개과천선한다면, 당신은 당장 형을 내버릴 테고 사랑은 싹 식어 버릴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나한테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당신보다 백배는 더 가혹한 벌을 받았거든요. 당신을 결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혹한 벌을 받은 거죠. 안녕히 계십시오. 나한테 손을 내밀어 줄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너무도 의식적으로 괴롭혔기 때문에 이 순간엔 당신을 용서할 수 없군요. 용서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지금은 손을 내밀어 줄 필요도 없습니다."
이반은 여주인인 호흘라코바 부인에게도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알료샤는 손뼉을 탁 쳤다.
“이반!” 하고 알료샤가 거의 넋이 나간 채로 그에게 소리쳤다.
“이반, 돌아와! 안 돼, 안 돼, 형은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는 다시금 뭔가를 깨달은 듯 괴로워하며 소리쳤다. “이건 나 때문입니다, 내 잘못입니다, 내가 화근이 된 겁니다! 이반은 표독스럽고 곱지 못한 말을 했어요. 부당하고 표독스러운 말을…….” 알료샤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그런데 갑자기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돌아온 것이다. 그녀의 손에는 무지갯빛 수표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좀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일주일 전인 것 같은데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술집에서 한 퇴역 장교를 만났는데, 그 장교는 당신의 아버님께서 어떤 일 때문에 고용했던 사람이죠. 한데,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그의 턱수염을 움켜쥐고 길거리로 끌고 나가서는 길거리에서도 그런 굴욕적인 모습으로 한참을 질질 끌고 다녔고, 때마침 아직 어린애인 소년 하나가, 그러니까 이곳 학교에 다니는, 그 2등 대위의 아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서는 줄곧 그 옆을 뛰어다니며 엉엉 울면서 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 빌고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아버지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다들 비웃었을 따름이랍니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선량하기 그지없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그 사람에게 가서, 그러니까 무슨 구실을 찾아 그의 집, 다시 말해 이 2등 대위의 집으로 가 주십사, 하는 건데 ─ 오 맙소사! 말이 왜 이리 꼬일까 ─ 아주 상냥하고 조심스럽게 ─ 이건 오직 당신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이 말에 알료샤는 갑자기 얼굴을 확 붉혔다.) ─ 그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전해 주시면 고맙겠고, 자, 여기 200루블이 있습니다. 아마 그는 받을 것이고…… 다시 말해 받도록 설득하는 거죠……. 안 받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직접 가고 싶지만, 당신이 저보다 훨씬 더 잘하실 거예요. 그는 오제르나야 거리에 있는 칼므이코바라는 평민 여인의 집에 살고 있어요……. 부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부디 저를 위해 한 번만 힘써 주세요, 하지만 지금은…… 지금 저는 약간…… 피곤하군요. 안녕히 가세요…….”
그러고서 그녀는 너무도 갑자기 몸을 획 돌려 다시금 커튼 뒤로 사라져 버렸고 이 때문에 알료샤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도 미처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없었다. 사실 그는 스스로를 꾸짖고 용서를 빌고 싶었고, 가슴이 터질 듯 갑갑했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고, 이대로 그냥 방을 나가기는 죽기보다 더 싫었다. 하지만 호흘라코바 부인이 그의 손을 붙잡고 문밖으로 그를 끌어냈다.
"친애하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당신은 모르셨겠지만, 정말이지 우리는 모두 ─ 그러니까 나와 그녀의 두 이모 ─ 심지어 리즈까지도 모두 벌써 꼬박 한 달 동안 오직 그녀가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와 헤어지고 이반 표도로비치한테 시집을 가길 바라고 또 기도하고 있는데요, 사실 당신은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를 무척이나 아끼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지도, 또 숫제 사랑하지도 않는 데 반해서 이반 표도로비치는 그녀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교양 있고 훌륭한 젊은이잖아요."
그는 정말로 지금까지 거의 느껴 본 적이 없는 대단한 괴로움에 빠져 있었다. 불쑥 나서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고, 그것도 다름 아닌 사랑의 감정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던가! ‘도대체 내가 이런 문제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는가, 이런 일을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얼굴을 붉혀 가며 백번은 더 속으로 이런 말을 되뇌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서 부탁받은 일은 오제르나야 거리와 관련되어 있었고, 드미트리 형은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에, 오제르나야 거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골목에 살고 있었다. 알료샤는 2등 대위에게 가기 전에 어쨌거나 꼭 형에게 들르기로 마음먹었지만, 형이 집에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나저나 시간은 자꾸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임종을 앞둔 장로에 대한 생각은 수도원에서 나온 그 시각부터 일 분도, 아니 일 초도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부탁 속에는 한 가지 정황이 번득였는데, 그 역시 그의 흥미를 굉장히 자극하는 것이었다. 즉,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어린 소년, 그러니까 그 2등 대위의 아들인 초등학생이 아버지 주위에서 목청껏 울면서 뛰어다닌 얘기를 해 주었을 때부터 이미 갑자기, 알료샤는 이 소년이 분명히 알료샤가 아까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화가 났냐고 캐묻자 그의 손가락을 깨물었던 바로 그 소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오제르나야 거리에 있는 평민 여인 칼므이코바의 집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낡아 빠진 작은 집으로서 비스듬히 기울어졌고 거리로 난 창문은 고작해야 세 개밖에 안 됐으며 지저분한 마당 한가운데는 암소 한 마리가 쓸쓸히 서 있었다. 현관의 왼쪽에는 늙은 여주인이 늙은 딸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둘 다 귀머거리인 것 같았다.
알료샤가 철제문을 두드리자, “누구요?” 누군가가 몹시 화가 난 목소리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 침대 곁 의자에는 귀부인처럼 다듬은 여인이 사라사 천으로 된 원피스를 입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 여위고 누렇게 떠 있었다. 뺨이 심하게 푹 꺼진 것을 보면, 첫눈에 몸이 아픈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알료샤에게 무엇보다도 충격을 안겨 준 것은 이 가엾은 부인의 시선이었는데 ─ 그것은 굉장히 의문에 차 있으면서도 동시에 거만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었다.
이 부인 곁, 왼쪽 창문 곁에는 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는데, 얼굴이 상당히 못생긴 데다가 머리카락이 성기고 불그죽죽하고 옷차림은 극히 단정하긴 하지만 초라했다. 오른쪽, 역시나 침대 곁에는 한 명의 여성이 더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주 불쌍한 존재였는데, 역시나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처녀였지만, 나중에 알료샤가 들은 바에 의하면, 꼽추에다가 다리가 완전히 마비되어 앉은뱅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목발이 바로 곁, 침대와 벽 사이 구석진 곳에 서 있었다.
식탁 앞에선 마흔다섯 살쯤 된 신사가 계란 프라이를 마저 해치우고 있었는데, 그는 그다지 크지 않은 키에 바싹 여위고 체격도 부실하고 머리카락은 불그죽죽했고 역시나 불그죽죽하고 숱이 적은 턱수염은 다 해진 수세미와 너무나 비슷했다.(왠지 첫눈에 알료샤의 머릿속에는 이 비유, 특히 ‘수세미’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그는 훗날 이것을 상기했다.)
“저는…… 알렉세이 카라마조프라고 합니다…….” 알료샤가 대답 삼아 이렇게 말했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요.” 신사는 그 즉시, 그가 말하지 않아도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듯 딱 잘라 말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셨는지는 여전히 알고 싶군요…….”
“예, 그냥 들렀을 뿐입니다. 실은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어서……. 괜찮으실는지…….”
“저는 니콜라이 일리치 스네기료프입니다요, 러시아 보병 2등 대위였습죠, 비록 죄를 저질러 명예에 먹칠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2등 대위입죠. 그런데 무슨 일로 저 같은 사람한테 호기심을 갖게 되셨을까요, 손님 접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인데.”
“제가 온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일 때문에…….”
“그 일이라니요?” 2등 대위가 초조하게 말을 끊었다.
“제 형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와 당신이 만났던 그 일 말입니다.” 알료샤가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혹시 그때 그 만남 말씀이십니까요? 그러니까 수세미, 그 목욕탕 수세미 사건 말씀입니까요?”
“저 사람은 아빠한테 내 일을 일러바치려고 온 거야, 아빠!” 이미 알료샤의 귀에 익숙한 아까 그 소년의 목소리가 한쪽 구석의 커튼 뒤에서 소리쳤다. “내가 아까 저 사람의 손가락을 깨물었거든요!”
커튼이 걷히자, 알료샤는 방구석의 성상 아래, 긴 의자에 작은 의자를 붙여 만든 침대에서 조금 전의 적을 보게 됐다. 소년은 예의 그 코트와 낡은 솜이불을 덮어쓰고 누워 있었다.
“손가락을 깨물었다고?” 2등 대위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저 애가 당신의 손가락을 깨물었다는 겁니까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자 저 애는 갑자기 달려들어 제 손가락을 아프게 깨물었는데, 통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나리, 당신의 손가락은 안 됐지만, 원하신다면, 일류셰치카를 패 주기 전에 지금 당장 당신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정당한 만족을 위하여 제 손가락 네 개를 여기 이 칼로 잘라 버리도록 하죠. 복수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손가락 네 개면 충분할 것 같은데, 다섯 번째 손가락도 필요하신가요……?”
“이제야 모든 걸 알 것 같습니다.” 알료샤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조용하고 슬프게 말했다.
“이 착한 소년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당신을 모욕한 사람의 동생인 제게 달려들었던 거로군요……. 하지만 제 형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형이 여기로 올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아니, 차라리 바로 그 장소에서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형은 모든 사람들이 있는 데서 당신에게 용서를 빌 겁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말이죠.”
“그렇다면 제가 만약 그 사람에게 바로 그 술집이나 ─ 이름이 ‘수도(首都)’입니다 ─ 아니면 광장에서 제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부탁한다면, 과연 그렇게 할까요?”
“예, 형은 무릎도 꿇을 겁니다.”
“가슴을 아리게 하는 말씀이군요.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아려 옵니다. 그 마음은 십분 이해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제 가족 소개를 좀 합시다. 제 두 딸과 제 아들, 모두 한배에서 난 제 자식들이지요. 제가 죽으면 누가 저들을 사랑해 주겠습니까? 저 같은 사람도 누군가한테는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정말 그렇고말고요!” 알료샤가 소리쳤다.
“어릿광대짓은 이젠 그만 좀 하세요. 무슨 바보라도 찾아올라치면, 창피스러운 짓만 한다니까요!” 창가에 서 있던 처녀가 꺼림칙하고 경멸스럽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빠, 아빠! 정말 어떻게 저 사람이랑……. 아빠, 저런 사람 따윈 던져 버려!” 갑자기 소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모자를 쓰시죠,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저도 이렇게 모자를 쓰고 ─ 자, 갑시다. 당신에게 진지하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 다만 이 안에서는 안 되겠군요. 참, 여기 앉아 있는 이 아가씨가 저의 딸 니나 니콜라예브나인데, 소개하는 걸 그만 깜박했군요, 이 애는 하느님의 천사가 인간의 몸을 하고…… 우리 필멸의 존재들에게 내려왔다고나 할까요…… 제 말을 이해하실 수만 있다면…….”
“온몸을 벌벌 떨고 있는 꼬락서니하곤, 영락없이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 같다니까.” 바르바라 니콜라예브나는 여전히 격분해서 이렇게 말했다.
“저 애는 방금 제가 미워 발을 구르면서 저더러 어릿광대라고 했지만, 실은 저 애도 인간의 몸을 한 하느님의 천사랍니다, 어떻든 저를 저렇게 부른 것도 무리는 아닙지요. 갑시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끝을 내야 되지 않겠습니까요…….”
그러고서 2등 대위는 알료샤의 손을 잡고서 방을 나가 그를 곧장 거리로 데려갔다.
“공기가 신선하군요, 저의 누추한 집은 정말로 어떤 의미에서 보나 공기가 신선하지 못하지요. 나리, 이렇게 조금 거닐어 봅시다. 당신의 관심을 끌 만한 얘기를 하고 싶어 죽겠군요.”
“저도 한 가지 중요한 용건이 있습니다만…….” 알료샤가 말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용건이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요? 용건이 없다면, 절대 저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고 숫제 기웃거리지도 않았겠지요. 아니면, 설마 정말로 우리 아이 일을 일러바치러 온 건가요? 저는 그 사건 당시 그 순간 그 애의 얼굴이 어땠는지 눈에 선합니다, 잊을 수가 없고, 또 잊지 못할 겁니다요……!"
“맹세코.”라고 알료샤가 소리쳤다. “형은 정말로 뼈저리게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 그 광장에서 무릎이라도 꿇을 겁니다……. 제가 형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겠습니다, 만일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제 형도 아닙니다!”
“어라, 그러니까 그것은 아직 당신의 계획에 지나지 않는 거로군요. 즉,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저 당신의 그 열렬하고 고귀한 심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얘기였군요. 진작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는 그 일 뒤, 그러니까 제 수세미를 실컷 끌고 다닌 뒤 저를 풀어 주면서 ‘네놈도 장교고 나도 장교다, 결투 입회인이 될 점잖은 사람을 찾으면, 사람을 보내라 ─ 비록 네놈은 추잡하기 짝이 없지만 실컷 만족시켜 주도록 하지!’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무슨 수로 저희가 귀족 노릇을 하겠습니까. 그래, 방금 몸소 저의 집에 가 보셨으니 직접 판단해 보십죠.
세 명의 여성이 앉아 있는데, 한쪽은 다리도 못 쓰는 데다가 정신도 박약하고, 다른 쪽은 다리도 못 쓰는 데다가 꼽추고, 또 다른 쪽은 두 다리도 멀쩡하고 너무나도 똑똑한 데다가 여대생인데 또다시 페테르부르크로 가겠다며 야단입니다, 그곳의 네바 강변에서 러시아 여성의 권리를 찾고 싶다더군요. 일류샤에 대해선 아예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요, 고작해야 아홉 살에 완전 외톨이니까요 ─ 이런데 만약 제가 죽어 버린다면 저의 이 모든 핏줄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고약한 건 아주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불구가 되는 겁니다. 일은 하지도 못하면서 어쨌거나 입은 살아 있다면, 도대체 누가 내 입에 풀칠을 하게 해 주고 또 도대체 누가 그들 전부의 입에 풀칠을 하게 해 주겠습니까요? 아니, 그럼, 일류샤를 매일 학교가 아니라 동냥을 하러 보내야겠습니까? 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겁니다, 아주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입죠.”
"당신의 부친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이 일과는 무관한 어떤 다른 이유로 저를 더 이상 신용하지 않게 됐을뿐더러, 오히려 제 서명이 담긴 영수증들을 손에 넣고서는 저를 고소하고 싶어 하거든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저희 집이 어떤 몰골인지 보셨잖습니까요. 이제 어디 한번 물어봅시다. 우리 애가 아까 당신의 손가락을 아프게 깨물었습니까, 일류샤 말입니다?"
“예, 아주 아프게 깨물더군요, 그 애도 몹시 예민한 상태였거든요. 그 아이는 제가 카라마조프라서 당신의 복수를 했던 겁니다, 이젠 분명히 알겠군요. 하지만 걔가 학교 친구들과 서로 돌팔매질하는 걸 보셨더라면 어땠겠습니까? 몹시 위험했습니다, 아이들은 걔를 죽일 수도 있어요, 돌멩이가 머리를 깰 수도 있는 노릇이고.”
“안 그래도 오늘 한 대 맞았습니다, 머리는 아니지만 심장 위쪽 가슴팍에 돌을 맞은 거죠. 멍이 들어와서는 울면서 징징대다가 저렇게 앓아누웠답니다.”
“충고를 좀 드렸으면 하는데요.”라고 알료샤가 열심히 계속했다. “아이가 좀 진정할 때까지 한동안은 아예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니까 분노가 좀 사그라질 때까지는…….”
“분노라굽쇼!” 2등 대위가 말을 받았다.
“그렇습죠, 분노입니다요. 비록 어린것이지만 거대한 분노가 끓어오른 것이지요. 당신은 이 사건을 다는 모르고 계십니다요. 이 사연을 특별히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러니까 그 사건 이후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그 애를 수세미라고 놀리기 시작했어요. 학교의 아이들은 무자비한 족속입니다. 각각 떼 놓으면 하느님의 천사들이지만, 함께 있으면, 특히 학교에서는 극도로 무자비해지는 일이 자주 있지요. 그 아이들이 우리 아이를 놀려 대기 시작하자 일류샤의 내면에서 고귀한 정신이 고개를 쳐든 겁니다."
"일류샤가 그러더군요, ‘아빠, 아빠, 그 사람한테 결투를 신청해, 학교에선 아빠가 겁쟁이라서 결투를 신청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사람한테서 10루블을 받았다고 놀려 댄단 말이야.’ ‘일류샤, 아빠는 그 사람한테 결투를 신청할 수가 없단다.’ 이렇게 대답하면서 저는 녀석에게 지금 당신에게 설명한 것과 같은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녀석은 열심히 듣더군요. ‘아빠, 아빠, 어쨌거나 화해해선 안 돼. 어른이 되면 내가 직접 그 사람한테 결투를 신청해서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 어린 두 눈이 번득이며 이글이글 타오르더군요."
“아, 당신의 아이와 꼭 화해를 하고 싶군요!” 알료샤가 소리쳤다. “당신이 다리를 놓아주신다면…….”
“예, 그래야 되겠지요.” 2등 대위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 문제가 아닙니다, 전혀 그 문제가 아니고요, 그러니까 들어 보십시오.” 알료샤는 계속하여 외쳐 댔다.
“저는 당신과 관련하여 한 가지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의 형, 그러니까 저 드미트리는 자기 약혼녀마저도 모욕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받은 모욕을 당신에게 털어놓을 권리를, 심지어 그래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분은 당신이 받은 모욕에 대해 알게 되자, 당신이 처한 불행한 처지에 대해 전부 알게 되자 저에게 조금 전에…… 당신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이렇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라고 부탁했습니다만……. 단, 그분을 버린 드미트리가 주는 것도 아니고, 절대로 그게 아니고, 그분이 주는 겁니다, 두 분 모두 동일한 사람에게 모욕을 받았기 때문에……. 그때 비로소 그분은 당신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여동생이 오빠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알료샤는 그에게 무지갯빛 100루블짜리 새 지폐 두 장을 내밀었다. 그때 그들은 둘 다 담장 곁, 바윗돌 옆에 서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표를 보자 2등 대위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몸을 부르르 떨었는데, 이건 일단은 그저 너무 놀라서였으리라. 이런 건 전혀 생각도 못 했고 이런 결말은 아예 기대도 못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로부터의 도움을, 그것도 이렇게 상당한 액수를 받으리라곤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들어 보십시오, 예, 좀 들어 보십시오, 만약 제가 이걸 받는다면 비열한 놈이 되는 건 아닐까요? 당신의 눈앞에서, 제발,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들어 보십시오, 좀 잘 들어 주시라굽쇼.” 두 손으로 연신 알료샤를 건드리면서 그는 호들갑을 떨었다. “‘여동생’이 보내는 것이니 받으라고 지금 저를 설득하고 있지만, 만약 제가 이걸 정말로 받는다면 내심 저한테 경멸감을 느끼진 않으실깝쇼, 예?”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하늘에 맹세코, 절대로! 그리고 우리 말곤 아무도 절대 모를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돈이면 엄마와 저의 꼽추 천사도 치료하고, 저와 일류쉬카는 어쩌면 지금 당장 우리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말 한 필과 포장마차를 살 테고, 그런데 녀석이 신신당부했으니까 말은 꼭 검은색으로 살 테고, 그러고는 그저께 그려 본 대로 떠나는 겁니다. K 현에 제가 아는, 어릴 적 친구였던 변호사가 있는데, 제가 거기로 가면 녀석이 저에게 자기 사무소에 서기 자리를 줄 거라고 믿을 만한 사람을 통해 전해 왔고, 사람 속을 누가 알까마는 그래도 아마 써 줄 겁니다요……."
“아무렴, 그렇고 말고요!” 알료샤가 소리쳤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얼마든지 당신이 원하시는 만큼 보내 줄 테고, 그리고 저에게도 돈이 있으니, 동생이라고, 친구라고 생각하시고 필요한 대로 가져가셨다가 나중에 돌려주시면 됩니다…….(당신은 부자가, 그것도 엄청난 부자가 되실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현으로 이사를 가시겠다니, 이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생각입니다!"
알료샤는 그를 끌어안을 참이었는데, 그 정도로 만족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갑자기 흠칫했다. 상대방은 목을 길게 뽑고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미친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서 있었는데, 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양 뭐라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연신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알료샤는 갑자기 무엇 때문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는…… 당신은 말입니다……. 그나저나,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지금 마술을 한 가지 보여 드립죠!”
"마술이라니요?"
“뭐, 마술이래야 하찮은 것이죠.” 2등 대위는 여전히 속닥대고 있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마술이라니요?” 그는 이제 완전히 경악해서 소리쳤다.
“자, 이런 겁니다, 한번 보시죠!” 2등 대위는 갑자기 째질 듯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줄곧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그 끄트머리를 쥐고 있던 두 장의 무지갯빛 지폐를 그에게 보여 준 뒤, 갑자기 무엇 때문인지 오른쪽 주먹으로 난폭하게 움켜쥐더니 마구 구기고 힘껏 뭉개 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주먹을 위로 치켜들더니 있는 힘껏 구겨진 지폐 두 장을 모래 위로 던졌다.
“보셨습니까요?” 그는 지폐를 가리키면서 째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바로 이것이올시다……!”
“자, 이게 당신네들의 돈입니다요! 당신네들의 돈! 당신네들의 돈이라고요!” 갑자기 그는 껑충 뒤로 물러서더니 몸을 펴고 알료샤 앞에 버티고 섰다. 그의 모습에서는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만함이 넘쳐 났다.
“당신을 보낸 사람들에게 아뢰십시오, 수세미는 자신의 명예는 팔지 않는다고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으며 그가 외쳤다. 그러고는 얼른 몸을 돌려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다섯 걸음도 채 가지 않아 다시 온몸을 돌리더니 갑자기 알료샤에게 손짓을 했다. 그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떨리고 있었다.
“내가 받은 치욕의 대가로 당신네들한테 돈을 받는다면, 우리 아이한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알료샤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면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 사람은 자기가 수표를 짓뭉개서 집어던질 줄은 몰랐으리라. 알료샤는 지폐를 매만진 뒤 접어서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부탁한 일의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2부 제4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