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최종)

김연경 옮김 민음사

by Andy강성
에필로그


1 미챠 구출 계획


미챠의 공판이 있은 지 닷새째 되는 날, 8시가 막 지난 몹시 이른 아침에 알료샤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찾아왔는데, 둘 모두에게 중대한 어떤 일에 대해 최종적으로 합의를 봐야 했고 덧붙여 그녀에게 전할, 부탁받은 일도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그루셴카를 접견했던 방에 앉아서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바로 옆방에는 이반 표도로비치가 섬망증에 걸려 의식 불명 상태로 누워 있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때 법정에서 그런 소동을 벌인 직후, 앞으로 사교계에서 기필코 흘러나올 온갖 쑥덕거림과 지탄을 싹 무시하고서 이반 표도로비치를, 의식을 잃은 이 환자를 자기 집으로 옮겨 오게 했다.


그의 치료를 맡은 의사는 바르빈스키와 게르첸슈투베였다. 모스크바에서 온 의사는 앞으로 예상되는 병의 추이에 대해 이렇다 할 소견도 내놓지 않고 모스크바로 돌아가 버렸다. 뒤에 남은 의사들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와 알료샤를 격려하긴 했지만, 보아하니 아직 확실한 희망을 줄 순 없는 것 같았다. 알료샤는 하루에 두 번씩 아픈 형에게 들렀다.


하지만 이번엔 특별히 아주 번잡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형한테 그 용건을 꺼내기가 힘들 거라는 예감은 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너무 급했다. 역시나 오늘 아침 중으로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시급한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급히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벌써 십오 분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창백한 얼굴에 몹시 지쳐 있었지만 동시에 굉장히 병적으로 흥분해 있었다. 어떻든 그녀는 알료샤가 지금 왜 자기를 찾아왔는지를 예감했던 것이다.


“그 사람의 결정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가 단호하고 집요하게 알료샤에게 말했다. “이렇든 저렇든 그이는 어차피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탈출하는 길밖에 없어요! 이 불행한 사람, 명예와 양심의 영웅은 저 사람이 아니라 ─ 즉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아니라 이 문 너머에 누워 있는 저 사람, 형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한 저 사람입니다.” 카챠는 눈을 번득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저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나한테 이 탈출 계획을 전부 알려 주었어요. 그러니까 이미 그쪽과 접선을 시작했던 거죠……. 당신한테도 제가 이미 좀 알려 줬고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유형수들과 시베리아로 이송될 때 여기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병참역사(兵站驛舍)에서 일을 성사시킬 모양이에요. 오, 하지만 이건 아직은 먼 일이군요. 이반 표도로비치는 세 번째 병참역사의 사령관을 벌써 만나고 왔어요. 이 계획안은 이반 표도로비치가 공판 전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나에게 남겨 뒀던 거예요……."


그러니까 바로 지난번에 있었던 일인데, 기억나시죠, 그때 저녁에 우리가 다투고 있는데 당신이 왔던 일 말이에요. 저이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이었고, 나는 당신이 온 걸 보고선 저이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했는데, 기억나세요? 우리가 그때 무슨 일로 다퉜는지 알고 계세요?”

“아니요, 모릅니다.” 알료샤가 말했다.


“물론 그러실 테죠, 저이가 그때만 해도 당신한텐 감췄으니까요. 실은 바로 이 탈출 계획 때문이었어요. 물론 나는 그때 계집년, 그 계집년 때문에 발끈했던 거예요, 정확히 그 계집년도 드미트리와 함께 외국으로 도망칠 거라는 말 때문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어찌나 화가 났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갑자기 소리쳤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그때 내가 그 계집년 때문에 발끈하는 걸 보고선 당장, 내가 드미트리 때문에 그 여자한테 질투를 느끼는 거라고, 따라서 내가 아직도 드미트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이렇게 해서 그때 처음으로 말다툼이 시작됐어요. 나는 구태여 해명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딱히 용서를 구할 수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전에, 이미 오래전에 내가 사랑하는 건 드미트리가 아니라 오직 당신 한 사람뿐이라고 그에게 대놓고 말했단 말이에요!

사흘 뒤, 당신이 찾아왔던 바로 그날 저녁, 저이는 나에게 뜯지 않은 봉투를 가져왔는데, 혹시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즉시 나더러 뜯어 보라는 거였어요. 오, 저이는 자신의 병을 예견했던 거예요! 저이는 나에게 봉투 속엔 탈출 계획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고 털어놓았는데, 자기가 죽거나 중병에 걸리면 나 혼자서라도 미챠를 구하라는 거였어요. 그러곤 그 자리에서 나한테 거의 만 루블에 가까운 돈을 남겨 두고 갔어요 ─ 이 돈이 바로 검사가 논고에서 언급했던 그 돈인데, 검사는 누군가를 통해 그가 이 돈을 바꿔 오라고 사람을 보낸 걸 알게 됐나 봐요.

나는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충격을 받았어요! 오, 이건 희생이었어요! 아니, 당신은 이런 자기희생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할 거예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나는 경건함마저 느낀 나머지 저이의 발밑에 몸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갑자기 그랬다간 미챠가 구출되리라는 것에 내가 기뻐하는 거라고 오해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저이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짜증이 났어요. 또다시 얼마나 짜증이 났으면 저이의 발에 입을 맞추는 대신, 또다시 저이에게 한바탕 퍼붓고 말았어요!

오, 모든 게, 정말 모든 게 내가 미쳤기 때문이에요! 전부 다 내 탓이에요, 법정에서 그 저주스러운 장면을 준비한 것도 나잖아요! 저이는 자기가 고결한 사람임을, 내가 자기 형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어쨌거나 자기는 복수심과 질투심 때문에 형을 파멸시키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임을 나한테 증명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저이는 법정에 나왔던 거예요……. 모든 게 내 탓이에요, 잘못한 건 나 하나뿐이라고요!”


알료샤는 고톨스러워하는 이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었다. 그는 다시 미챠 얘기를 꺼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 사람에 대해선 염려 마세요!” 카챠가 다시금 집요하고 매몰찬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어차피 그 사람은 이 모든 게 한순간일 뿐이에요. 나는 그이를 잘 알아요, 분명히, 그이는 탈출하는 데 동의할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할 일이 아니니까, 그이가 결단을 내릴 시간적 여유는 얼마든지 있는 셈이죠. 그 무렵이면 이반 표도로비치도 건강이 회복돼서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할 테니까 나로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내가 오늘 당신을 부른 건 당신이 직접 그를 설득하겠다는 다짐을 받기 위해서예요. 아니면, 당신 생각으론 탈출한다는 것이 역시나 명예롭지도 않고 남자답지도 않은 일이고, 아니면 뭐랄까…… 기독교적이지 못한 일인가요, 예?” 카챠는 한층 더 도전적인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형님에게 전부 다 말하겠습니다…….” 알료샤가 중얼거렸다.


“형님은 오늘 당신이 형님을 찾아 주었으면 합니다.”

“나더러 와 달라니……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녀가 창백해지면서 중얼거렸다.

“형님에겐 당신이 매우 필요합니다, 특히 지금요. 꼭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 얘기를 꺼내서 미리부터 당신을 괴롭히진 않았을 겁니다. 형님은 몸이 안 좋습니다, 꼭 미친 사람 같아요, 형님 입으로 ‘나를 용서할 순 없겠지.’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당신이 문지방에서 얼굴이라도 내비치면…….”


"형님은, 만약 그녀가 찾아오길 거절한다면 ‘이제 평생 동안 불행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듣고 계십니까, 이십 년 형을 선고받은 유형수가 아직도 행복해질 채비를 하고 있는데 ─ 정말 이게 가엾지도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죄 없이 파멸한 사람을 방문하는 겁니다.” 알료샤의 입에서는 도전적인 어조가 담긴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형님의 두 손은 깨끗합니다, 거기엔 피가 묻어 있지 않습니다! 형님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무한한 고통을 위해 지금 형님을 방문해 주십시오! 그냥 가셔서 암흑 속으로 들어가는 형님을 전송해 주십시오……. 문지방까지만 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반드시 이렇게 해 주셔야 합니다, 반드시!” 알료샤는 ‘반드시’라는 말을 대단히 강조하면서 말을 끝맺었다.


“하지만 왜 하필 오늘, 왜 하필 지금이어야 하죠……? 환자를 혼자 남겨 두고 갈 순 없어요…….”

“잠깐이면 됩니다, 당신이 가지 않으면, 형님은 밤쯤이면 열병에 걸릴 겁니다. 제발 좀 불쌍히 여겨 주세요!”

“혹시 내가 누구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이런 말을 조용히 내뱉더니, 또다시 온통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니까 지금 가야지만 거기서 누구와 마주치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완강하게 말을 끝맺은 뒤 방에서 나갔다.


2. 한순간, 거짓이 참이 되다


그는 지금 미챠가 누워 있는 병원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판결이 있은 지 이틀째 되는 날 그는 신경성 열병에 걸려 우리 도시의 시립 병원, 수감자 병동으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알료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호흘라코바, 리자 등)의 청을 받아들여서, 의사 바르빈스키는 미챠를 다른 수감자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따로, 그러니까 전에 스메르쟈코프가 누워 있던 바로 그 병실에 수용했다.


그는 원래가 착하고 동정심이 많은 젊은이이기도 했다. 또, 미챠와 같은 사람이 그야말로 갑자기 살인범과 사기꾼 무리 속으로 들어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따라서 일단은 그것에 차츰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한편, 친척들과 지인들의 면회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최근에 미챠를 방문한 사람은 알료샤와 그루셴카가 다였다. 라키친이 그를 만나려고 설친 적이 두 번이나 있긴 했다. 하지만 미챠는 그를 들여보내지 말라고 바르빈스키에게 완강하게 부탁했다.


알료샤가 들어갔을 때 그는 환자복을 입은 채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열이 좀 있는지 아세트산과 물에 적신 수건을 머리에 감고 있었다. 대체로, 공판 때부터 그는 끔찍할 정도로 생각이 많아졌다. 때론 반 시간씩 입을 다문 채, 눈앞에 있는 사람마저 잊고 뭔가를 고통스럽게 되새김질하며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느닷없이 꼭 정말로 말해야 했던 것이 아닌 엉뚱한 얘기를 꺼내곤 했다.


알료샤는 말없이 침대 위, 그의 곁에 앉았다. 이번에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알료샤를 기다렸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카챠가 선뜻 가겠다고 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오지 않으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알료샤는 그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형, 그러니까” 하고 알료샤가 말했다. “그녀가 올 거야. 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어, 오늘일지, 한 이삼 일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올 거야, 오긴 올 거라고, 이건 틀림없어.”


“이래저래 그녀는 이런 말도 했어. 그러니까 형이 탈출 문제로 양심의 고통을 받지 않게 나더러 잘 다독거리라고. 그때까지 이반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녀가 나서서 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그 얘기라면 벌써 나한테 했잖니.” 미챠가 곰곰 생각에 잠긴 채 이렇게 지적했다.

“그럼, 형은 이미 그루샤한테 전했어?” 알료샤가 지적했다.

“그래.” 하고 미챠가 인정했다. “그루샤는 오늘 아침엔 오지 않을 거야.” 그는 수줍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알료샤, 나는 그루샤를 정말 죽도록 사랑한다.” 눈물이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로 갑자기 그가 말했다.

“그녀를 형이 갈 그곳으로 보내 주진 않을 텐데.” 알료샤가 즉시 말을 받았다.

“너한테 하고 싶었던 얘기가 또 있어.” 미챠가 갑자기 어쩐지 윙윙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나 그곳에서 나한테 매질을 한다면, 나는 잠자코 있지 않을 거야. 난 그놈들을 죽여 버릴 테고, 그러면 나는 총살감이 되겠지. 간수가 네놈이라고 부르는 것도 감당할 수가 없어! 그루샤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다 참겠지만, 모든 걸 말이다…… 그래도 매질만은 안 돼……. 하긴, 그녀를 그곳으로 함께 보내 주지도 않을 테지만.”


“들어 봐, 형, 마지막으로 잘.” 알료샤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은 이래. 형은 준비가 안 돼 있고, 또 그런 십자가는 형을 위한 것이 아니야. 게다가, 준비도 안 된 형한테 그런 위대한 수난의 십자가는 필요치도 않아. 만약 형이 아버지를 죽였다면 나는 형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걸 유감스러워했겠지. 하지만 형은 아무 죄도 없는데 형이 그런 십자가를 진다는 건 너무 가혹해.

내 생각으론, 평생 동안 형이 어디로 도망을 치든 간에 이 다른 사람을 기억한다면 ─ 그래, 그것만으로도 형에겐 충분한 거야. 크나큰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형은 오히려 형의 내부에 그보다 더 큰 의무감을 느낄 것이며 앞으로 이 끊임없는 의무감이 평생 형 자신의 갱생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므로, 어쩌면 이러는 편이 그곳에 가는 것보다 더 나을지도 몰라. 왜냐면 그곳에 가면 형은 참지 못해 원망을 늘어놓을 테고 결국에는 곧장 ‘나는 셈을 다 치렀다.’라고 말할 테니까.

만일 형의 탈출에 대해 장교나 군인과 같은 다른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된다면, 나도 형의 탈출을 ‘허용하지 않겠어.’” 알료샤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요령껏 하면 큰 소란 없이 그냥 시시한 일로 처리될 수 있다고 확실히 말하더군.(해당 병참역사의 사령관이 직접 이반한테 말했대.) 물론, 그렇다고 할지라도 뇌물로 매수를 하는 건 떳떳한 일이 못 되지만 이 일에 관한 한 나는 절대로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을 거고, 솔직히 말해, 만일 예컨대 이반과 카챠가 형을 위해 이 일을 처리해 달라고 맡긴다면 내가 직접 가서 뇌물로 매수할 거야, 틀림없이. 이 점에 관한 한 나는 형한테 진짜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대신 내가 나 스스로를 단죄하겠노라!” 미챠가 소리쳤다. “나는 탈출할 거다. 구태여 네가 나서기 전부터 이미 이렇게 결정되었어. 미치카 카라마조프가 어찌 탈출하지 않을 수 있겠니? 하지만 대신 내가 나 자신을 단죄할 것이고 그곳에서 영원토록 죄를 씻어 달라고 기도하겠다! 한데 이건 예수회 교도들의 말투로구나, 안 그러냐? 지금 내가 너와 말하는 투가 말이다, 안 그러냐?”

“그러네.” 알료샤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자, 이제 나머지 얘기도 들어 보렴, 너한테 내 영혼의 나머지 절반도 펼쳐 보이마. 내가 곰곰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은 이렇단다. 즉, 내가 돈이며 여권을 챙겨서 도망친다면, 심지어 아메리카로 도망친다 해도, 나한테 힘을 북돋아 주는 생각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내가 기쁨이나 행복을 찾아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 못지않게 고약한 다른 징역살이를 떠난다는 거야! 이 못지않게 고약할 거야,

알렉세이, 진정으로 말하는 거다, 못지않게 고약할 거야! 나는 이 아메리카가 벌써부터 증오스러워. 그루샤가 나와 함께 간다고 쳐도, 그녀를 한번 보렴. 그녀가 어디 아메리카 여자냐? 아무래도 러시아 여자야, 뼛속까지 러시아 여자지. 그루샤는 어머니 러시아 땅이 그리워 가슴 아파할 테고 나는 매 시각 그녀가 나를 위해 가슴 아픈 그리움을 감내하고 나를 위해 이런 십자가를 받아 짊어진 모습을 보게 될 텐데, 빌어먹을 놈들, 그놈들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고, 내 영혼과는 맞질 않아! 러시아를 사랑한다, 알렉세이, 러시아의 하느님을 사랑한다, 비록 나 자신은 비열한 놈일지라 도! 그래, 나는 거기서 뒈져 버릴 테다.

나는 그루샤와 함께 그곳에 간 다음, 즉시 그곳 어딘가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을 찾아가 야생 곰들과 어울려 밭을 갈고 일을 할 생각이다. 거기서도 좀 멀리 들어가면 어디든 마땅한 장소가 있을 거 아니냐! 거기엔 아직도 인디언들이 있다고 하더구나, 그곳의 지평선 끝 어디에 말이다. 뭐 그래서 그 끝까지, 최후의 모히칸족들이 있는 곳까지 갈 생각이다. 그리고 나와 그루샤는 당장 문법을 공부하는 거야. 일과 문법을 함께 삼 년 정도. 이 삼 년 동안 영국인 못지않게 영어를 익힐 거야. 다 익히면 그 순간 아메리카는 끝장이다!

그땐 아메리카 시민이 되어서 이곳 러시아로 달려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여기 이 도시엔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북쪽이든 남쪽이든 어디 먼 곳에 숨어 버릴 거야. 그 무렵이면 나도, 그녀도 변해 있겠지. 저기 아메리카에 있는 동안 의사가 내 얼굴에 무슨 사마귀라도 하나 만들어 주면 되거든. 그놈들이 괜히 기술자가 아니라니까. 아니야, 차라리 내 손으로 한쪽 눈을 찔러 버리고 턱수염을 허옇게 1아르신 남짓 기르는 편이 낫겠다. 그럼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볼걸.

설사 알아본들 어떠냐, 그래서 또 유형을 보낸다고 해도 그냥 운수가 텄구나, 하면 되지! 여기 와서도 어디 외진 곳에서 땅이나 파며 살겠지만, 평생 동안 아메리카 사람 행세를 할 거다. 대신 우리는 고향 땅에서 죽을 수 있잖니. 자, 이게 나의 계획이고 이것은 이미 확고해. 찬성해 주는 거냐?"

"찬성이야." 알료샤가 형의 생각에 반대하기 싫어서 말했다.


미챠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갑자기 말했다.

"하지만 법정 놈들은 대체 어떤 수작을 부린 거냐? 정말 어떻게 그런 수작을 부릴 수가 있어!"

"수작을 부리지 않았어도 어쨌거나 형은 유죄 판결을 받았을 거야." 알료샤가 한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곳 사람들도 나한테 신물이 났던 거야! 그들이야 어떻든, 정말 힘겹구나!" 미챠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또다시 둘 사이에는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알료샤, 지금 나를 찔러 죽여도 좋아!" 갑자기 그가 소리쳤다. "그 여자가 지금 올 거냐, 아니냐, 말해라!"

"오겠다고 말했지만, 오늘일지는 모르겠어. 그녀도 힘들잖아!" 알료샤가 조심스럽 게 형을 바라보았다.

"힘들지 않을 리가 있냐! 알료샤, 나는 이것 때문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그루샤는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어. 날 이해해 주는 거지. 맙소사, 주여, 내 마음을 달래 주옵소서. 나는 무엇을 요구하는 걸까? 카챠를 요구한다!

내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체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카라마조프다운 무절제로다, 어찌 이리도 뻔뻔스러운가! 아니, 난 고통받는 능력이 없는 놈이야! 야비 한 놈일 뿐이야, 이게 다야!"


"형, 저기 왔어!" 알료샤가 소리쳤다.

그 순간 문지방으로 갑자기 카챠가 나타난 것이다. 한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채 어쩐지 멍한 시선으로 미챠를 바라보았다. 미챠는 맹렬하게 벌떡 일어섰는데,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엔 경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곧 그는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듯 카챠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이것을 보고서 그녀는 맹렬하게 그에게 돌진했다. 그러곤 그의 두 손을 붙잡고 거의 강제적으로 그를 침대에 앉히더니 그녀도 그 곁에 앉았는데, 여전히 그의 손을 놓지 않고 부들부들 떨면서 꽉 쥐고 있었다. 그렇게 이 분 정도가 지났다.


"용서한 거야, 아닌 거야?" 마침내 미챠가 이렇게 중얼거렸고, 바로 그 순간 알료샤 쪽으로 몸을 돌려서 기쁨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 그에게 소리쳤다. "듣고 있어, 내가 뭘 묻고 있는지 듣고 있냐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 건 이 때문이야, 당신이 마음이 관대하기 때문이야!" 카챠의 입에서 갑자기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내가 당신을 용서해 줄 게 아니라, 당신이 나를 용서해 줘야 돼. 당신이 용서를 하든 말든 어쨌거나 당신은 내 영혼 속에 평생토록 상처로 남을 테고, 나도 당신의 영혼 속에 그렇게 남겠지."


"내가 무엇을 위해 왔겠어?" 미친 듯 흥분하여 그녀가 또다시 다급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발을 껴안고 손을 움켜쥐고, 기억나, 모스크바에서 했듯 그렇게 아플 정도로 움켜쥐고, 또다시 당신에게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고 나의 기쁨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당신을 미칠 듯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서야."

그녀는 고통에 겨워 신음하듯 이렇게 말하곤 갑자기 그의 손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알료샤는 곤혹스러워하며 말없이 서 있었다.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사랑은 지나가 버렸어, 미챠!" 카챠가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지나가 버린 그것이 나에겐 고통스러울 정도로 소중해. 이것만은 영원토록 알아 둬. 하지만 지금 한순 간만이라도 우리 사이에 가능했을 수도 있는 일이 일어나도록 해 보는 거야."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또다시 기쁜 표정으로 눈을 바라 보았다. "당신도 지금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나도 다른 남자를 사랑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 당신도 이건 알고 있었지? 듣고 있어, 나를 사랑해 줘, 당신의 삶이 끝날 때까지 나를 사랑해 줘야 돼!" 이렇게 외치 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거의 어쩐지 위협적인 전율까지 배어 나왔다.


"사랑하고말고……. 그리고 말이야, 카챠."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숨을 몰아 쉬면서 미도 말을 시작했다. "닷새 전, 그날 저녁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쓰러져서 끌려 나가던 그때도……. 한평생! 영원히, 영원히 그럴 거야……."

그렇게 그들 두 사람은 서로서로 거의 무의미하고 미친 듯한, 어쩌면 거짓일 수도 있는 말들을 속삭였지만, 이 순간만은 모든 것이 참이었고 그들 자신도 스스로의 진실을 진정으로 믿고 있었다.


"카챠." 하고 갑자기 미챠가 소리쳤다. "내가 죽였다고 믿는 건가? 지금은 그렇게 믿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그때는…… 법정에서 증언을 했을 때는…… 정말로, 정말로 그렇게 믿었던 거야?"

"그때도 믿지 않았어! 절대로 믿지 않았다고! 당신을 증오했고 그래서 갑자기 스스로에게 그런 확신을 불어넣은 거였어, 하지만 증언을 마치자 곧 그 믿음이 사라졌어. 이 모든 것을 알아 줬으면 해. 깜빡 잊었군, 난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서 온 거야!" 갑자기 그녀는 방금 전의 사랑의 속삭임과는 완전히 다른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얼마나 괴로울까, 여자란 정말!" 미챠의 입에선 갑자기 이런 말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나를 그만 보내 줘." 그녀가 속삭였다. "다시 오겠지만, 지금은 괴로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갑자기 큰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뒤로 뺐다.

방 안으 로 인기척도 내지 않고 느닷없이 그루셴카가 들어온 것이었다. 아무도 그녀가 올 줄은 몰랐던 터였다.


카챠는 맹렬한 기세로 문을 향해 걸어갔지만, 그루셴카와 나란히 서게 되자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온통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거의 속삭이듯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그루셴카는 그녀를 뚫어지게 노려보더니, 증오에 가득 찬, 독기 어리고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봐, 당신도, 나도 못된 년이야! 둘 다 못된 것들이라고! 그런데 당신이나 나나 어디서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거야? 차라리 이 사람을 구해 줘, 그러면 난 평생토록 당신을 위해 기도할 테니까."

"용서하는 건 싫다는 소리구나!" 미가 광기 어린 질책을 담아 그루셴카에게 소리쳤다.

"염려 마, 당신을 위해 저 사람을 꼭 구할 테니까!" 카챠는 다급하게 속삭인 뒤 방에서 뛰쳐나갔다.


"저 여자가 먼저 '용서해 줘.'라고 말했는데, 당신은 용서할 수 없다는 건가?" 미챠가 쓰라린 어조로 소리쳤다.

"미챠, 어떻게 형이 이 사람을 나무랄 수 있어, 형은 그럴 권리가 없어!" 알료샤가 형에게 소리쳤다.

"저 여자는 오만한 입술론 저렇게 말했어도, 마음속으론 완전히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루셴카는 정말 딱 싫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당신을 구해 주면 모든 걸 용서해 주지……."


그러고서 그녀는 입을 다물었지만, 마음속 깊이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억누르는 것 같았다. 아직도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 하면, 그녀는 전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은 채 그냥 무심코 들어왔던 것이다.

"알료샤, 저 여자의 뒤를 쫓아가!" 미챠가 동생에게 맹렬한 어조로 말했다. "저 여자한테 말해 다오……. 하지만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군……. 어쨌든 저대로 그냥 보내지는 마!"


"형, 저녁이 되기 전에 올게!" 알료샤는 이렇게 소리치곤 카챠의 뒤를 쫓아 달려 나갔다. 그가 그녀를 따라잡은 곳은 병원의 울타리 밖이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걷고 있었지만, 알료샤가 자기를 따라잡자마자 재빨리 이렇게 말했다.

"안 돼요, 저 여자 앞에서 나를 벌할 순 없어요! 내가 저 여자한테 '나를 용서해줘.'라고 말한 건 나 자신을 철저하게 벌하고 싶어서였어요. 하지만 저 여잔 용서하지 않았어요. 하긴 그래서 난 저 여자가 좋아요!" 카챠는 일그러진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는데, 그녀의 두 눈은 야성적인 증오로 타올랐다.


“형은 정말 이럴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알료샤가 중얼거리듯 말을 해 보았다.

“형은 그분이 오지 않을 줄로 믿었는데…….”

“물론 그랬을 테죠. 하지만 이 얘긴 그만둡시다.” 그녀가 딱 잘라 말했다. “그나저나, 나는 지금 당신과 함께 저기 장례식엔 갈 수 없겠네요. 관을 장식할 꽃들은 보내 놨어요. 그들에겐 아직은 돈이 있을 것 같군요. 그래도 저들한테 말씀해 주세요,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난 절대로 그들을 그냥 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자, 그럼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고 어서 가 보세요, 늦겠어요, 제발 부탁입니다.”


3 일류세치카의 장례식. 바윗돌 옆에서의 조사


정말로, 그는 늦었다. 그를 기다리다 못해 그 없이, 꽃으로 장식된 좋은 관을 교회로 가져가려던 참이었다. 그것은 가엾은 소년 일류셰치카의 관이었다. 그는 미챠의 판결이 있은 지 이틀 후에 숨을 거두었다. 알료샤가 집 대문에 나타나자 일류샤의 친구인 소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맞이했다. 다들 조바심을 내며 그를 기다렸기 때문에 마침내 그가 온 것을 기뻐했다.


이 자리에 모인 소년들은 모두 열두 명이었는데, 다들 배낭과 책가방을 어깨에 멘 채로 온 것이었다. 죽어 가던 일류샤는 그들에게 ‘아빠가 울 테니까, 너희들 모두 우리 아빠 곁에 있어 줘.’라는 말을 남겼고, 소년들은 그걸 기억했다. 그들의 대장은 콜랴 크라소트킨이었다. “당신이 와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카라마조프 씨!” 그가 알료샤에게 한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여긴 끔찍해요. 사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예요. 스네기료프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어요. 그분이 오늘 술을 한 방울도 입에 안 댔다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꼭 술 취한 사람 같아요……. 저야 뭐 늘 굳세지만, 그래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해요."


"카라마조프 씨, 괜찮다면 들어가기 전에 뭐 한 가지 물어보면 안 될까요?”

“뭐죠, 콜랴?” 알료샤가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 형님은 무죄인가요, 유죄인가요? 그가 아버지를 죽인 건가요, 아니면 하인 짓인가요? 모든 게 당신 말씀대로일 테니까요. 이 생각을 하느라 나는 나흘 밤을 잠도 못 잤어요.”

“하인이 죽였고, 형님은 무죄입니다.” 알료샤가 대답했다.


“그럼, 그는 진리를 위해 무고한 희생양으로서 파멸하겠군요!” 콜랴가 소리쳤다. “파멸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행복합니다! 나는 그를 부러워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무슨 소리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으며, 또 대체 왜요?” 알료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오, 언제든 진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콜랴는 열광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 이와 같은 치욕, 이와 같은 끔찍함으론 안 됩니다!” 알료샤가 말했다.

“물론…… 나는 인류 전체를 위해 죽고 싶고, 치욕이라면 아무렴 어때요. 당신의 형님을 나는 존경합니다!”


알료샤는 방으로 들어갔다. 하얀 레이스 주름으로 장식된 파란 관 속에 일류샤가 작은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바싹 여윈 소년의 얼굴은 그 윤곽이며 이목구비며 거의 전혀 변한 것이 없었으며, 이상하게도 시체에서는 거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얼굴 표정은 마치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진지했다. 특히 십자형으로 모아 쥔 손은 꼭 대리석 조각인 양 아름다웠다.


아이들이 니노치카를 휠체어째로 들어 관 바로 곁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동생 곁에 머리를 바싹 갖다 댄 채 앉아 있었는데, 역시나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네기료프의 얼굴은 활기를 띠고 있었으나 어쩐지 멍한 것도 같고 동시에 필사적인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몸짓이며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을 보면, 어쩐지 반쯤 미친 것 같았다. 그는 일류샤를 바라보면서 연신 “아가, 우리 예쁜 아가!”라고 소리쳤다.


마침내, 소년들은 시간이 다 됐는데도 아버지가 여전히 관을 붙들고 있는 걸 보곤 갑자기 빽빽한 무리를 지어 관을 둘러싼 다음,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울타리 안에는 묻고 싶지 않아!” 스네기료프가 갑자기 울부짖었다. “바윗돌 옆에, 우리 집 바위 옆에 묻겠어! 일류샤가 그렇게 해 달라고 했어. 절대 못 가져간다!” 그는 전에도, 사흘 내내 바윗돌 옆에 묻을 거라고 말해 왔다. 하지만 알료샤, 크라소트킨, 집주인 노파, 노파의 언니, 모든 소년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 사람 생각하는 것 좀 보게, 목 졸려 죽은 사람처럼 더러운 바윗돌 옆에 묻겠다니!” 늙은 여주인이 엄격하게 말했다. “저기 울타리 안쪽 땅에는 십자가도 있어. 그곳에 묻혀 있으면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도를 해 줄 게 아닌가.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도 들릴 테고, 보제(補祭)가 낭랑하게 또박또박 읽어 주는 모든 말씀들이 매번 일류샤한테까지 들릴 테니까, 꼭 그 아이의 무덤 곁에서 읽어 주는 것 같을 걸세.”

2등 대위는 마침내 손을 내저었다. ‘어디든 마음대로 가져가시오!’라는 식이었다.


관을 가져갈 교회는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기껏해야 300보 정도였다. 맑고 한적한 날이었다. 쌀쌀하긴 했지만 심한 추위는 아니었다. 장례 미사를 알리는 종이 아직도 울려 왔다. 스네기료프는 거의 여름용이나 다름없는 짤막하고 낡아 빠진 외투를 걸친 채, 챙이 넓은, 낡고 부드러운 모자는 머리에 쓰지도 않고 두 손에 든 채 얼빠진 사람처럼 허둥지둥 관 뒤를 쫓아 뛰었다.


“빵 껍질을 잊고 왔어, 빵 껍질을!” 갑자기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 경악하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소년들은 대뜸, 빵 껍질은 아까 그가 직접 챙겼다고, 지금 그의 호주머니 안에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는 금방 호주머니에서 빵 껍질을 꺼내 확인을 한 뒤에야 진정했다. 그가 즉시 알료샤에게 설명했다.

“어느 날 밤에 녀석이 누워 있고 내가 그 옆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이러더군요. ‘아빠, 내 무덤에 흙을 뿌릴 때 빵 껍질을 부숴서 뿌려 줘, 그럼 참새들이 날아올 테니까요. 참새들이 날아온 소리가 들리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즐거워질 거야.’”


마침내 교회에 도착하여 그곳 한가운데에 관을 내려놓았다. 모든 소년들이 빙 둘러 관을 에워쌌고 장례 미사가 진행되는 내내 의젓하게 서 있었다. 상당히 가난하고 오래된 교회여서 가지런히 서 있는 성상들 대다수가 숫제 천개(天蓋)도 없었지만, 어쩐지 기도를 하는 데는 이런 교회가 더 좋은 법이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스네기료프는 다소 차분해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간간이 아까처럼 무의식적으로, 거의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둥대며 부산을 떨긴 했다.


마침내 장례 의식이 시작되자 양초를 나누어 주었다. 정신이 나간 아버지는 또다시 허둥지둥 부산을 떨 태세였지만 가슴을 에는 듯한 감동적인 장송곡이 그의 영혼을 일깨워 뒤흔들어 놓았다. 갑자기 그는 왠지 온몸을 움츠리더니 짧은 간격으로 종종 흐느끼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목소리를 죽였지만 끝에 가서는 큰 소리로 훌쩍거렸다. 하지만 작별 인사를 하고 관을 덮기 시작하자 그는 일류셰치카를 덮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듯 관을 두 손으로 거머쥐곤 죽은 아이의 입에 끊임없이, 연거푸 탐욕스럽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장례를 마치고 다들 오솔길을 따라 조용히 걷는데, 갑자기 스무로프가 소리쳤다.

“이게 바로 일류샤의 바윗돌이야, 이 밑에 묻히고 싶어 했어!”

다들 커다란 바위 옆에 말없이 멈추어 섰다. 그걸 보고 있자니, 알료샤는 언젠가 스네기료프가 해 준 일류셰치카 얘기가, 즉 녀석이 아버지를 껴안고 울면서 “아빠, 아빠, 그 사람이 아빠를 얼마나 업신여겼는지 몰라!”라고 외쳤다는 얘기와 그 장면이 일시에 그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여러분, 여기서, 바로 이곳에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소년들은 그를 에워싸고서 곧장 기대에 찬, 주의 깊은 시선을 보냈다.


“여러분, 우리는 곧 헤어질 겁니다. 내가 두 형님들과 함께할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형님은 유형을 떠날 것이고 다른 형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까요. 나도 곧 이 도시를 떠날 것이고,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헤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하지만 여기, 일류샤의 바윗돌 곁에서 첫째는 일류셰치카를, 둘째는 서로서로를 절대로 잊지 않겠노라고 약속합시다.

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것은, 앞으로의 인생을 위하여 뭔가 훌륭한 추억, 특히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 갖게 된 추억보다 더 숭고하고 강렬하고 건강하고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많이들 하지만, 바로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아름답고 성스러운 추억이야말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들을 많이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입니다.

또 아까 콜랴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고통받고 싶다.’라고 외치긴 했지만 ─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한 표독스러운 조롱을 퍼붓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물론 그럴 리도 없겠지만, 여하튼 우리가 아무리 사악해질지라도, 우리가 일류샤를 어떻게 땅에 묻었는지, 우리가 최근에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바로 지금 이 바윗돌 옆에서 다 함께 얼마나 사이좋게 얘기를 나누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 중 가장 잔인하고 가장 냉소적인 사람조차도, 설령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지금 이 순간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점만은 마음속으로 감히 비웃지 못할 겁니다!

어쩌면 바로 이 추억 하나만 있어도 그는 스스로를 거대한 악으로부터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며, 생각을 고쳐먹고 ‘그래, 그 시절엔 나도 선량하고 용감하고 성실한 인간이었지.’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혼자 속으론 코웃음을 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사람이란 종종 선량하고 훌륭한 것을 비웃곤 하니까, 이런 건 문제도 아닙니다. 이건 그저 경솔한 탓이니까요. 하지만 단언하건대, 여러분, 코웃음을 치는 순간 곧 마음속으론 ‘아니야, 고약한 짓을 저질렀어, 코웃음을 치다니, 이런 걸 조롱해서는 안 돼!’라는 말을 하게 될 겁니다.”


“꼭 그렇게 될 거예요, 카라마조프 씨, 나는 당신의 말이 이해돼요, 카라마조프 씨!” 눈을 번득이면서 콜랴가 소리쳤다. 다른 소년들도 흥분에 차서 역시나 뭔가를 외치고 싶었지만 자제력을 발휘하곤 마냥 감동에 젖은 주의 깊은 눈길로 연사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우리가 고약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서입니다.” 알료샤가 계속했다.


“하지만 왜 우리가 고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첫째, 그 무엇보다도 선량하게 살고, 둘째 성실하게 살아갑시다. 그다음으론 절대로 서로서로를 잊지 맙시다. 이 점을 나는 또다시 반복하는 바입니다. 내 이름을 걸고서 약속하건대, 여러분, 여러분 중 단 한 명도 나는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일류셰치카처럼 관대하고 용감한 사람이 됩시다. 콜랴처럼 총명하고 용감하고 관대한 사람이 됩시다.(어쨌든 콜랴도 좀 더 자라면 훨씬 더 총명해질 테죠.) 그리고 카르타쇼프처럼 수줍음은 많지만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됩시다. 한데, 왜 내가 이들 두 사람만을 거론하는 걸까!

여러분 모두 지금부터 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인 만큼 나는 여러분을 모두 내 마음속에 담아 둘 것이며, 여러분 역시도 부디 나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담아 두십시오! 바로 저 훌륭한 소년, 저 사랑스러운 소년, 우리에게 영원토록 소중한 소년 저 일류셰치카가 아닙니까! 그를 영원토록 잊지 말 것이며, 그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우리의 마음속에서 간직합시다!

일류샤의 얼굴, 그 옷, 그 초라한 신발, 그 관, 그 불행하고 죄 많은 아버지를, 일류샤가 아버지를 위해 혼자서 용감하게 온 학급을 상대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음을 기억합시다!”


“카라마조프 씨!” 콜랴가 외쳤다. “정말로, 진짜로 종교에서 말하듯, 우리 모두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생명을 얻고 서로서로를, 모든 사람을, 일류셰치카를 다시 보게 될까요?”

“꼭 되살아나서 꼭 다시 보게 될 것이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즐겁고 기쁘게 서로서로 얘기하게 될 겁니다.”

“아,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원히 이렇게, 평생 이렇게 손에 손을 잡고! 카라마조프 만세!” 콜랴가 다시 한번 환희에 차서 이렇게 외쳤으며, 다른 소년들도 전부 또다시 그의 외침에 화답했다.


<전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