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의 이유를 생각해보다
판교로 이사 온 후 가장 좋은 점은 책을 빌리기 편하다는 것이다.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운중도서관이 위치해 예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도서관으로의 접근이 쉬워졌다.
게다가 버스로 출퇴근을 하는 본인의 귀가 루트에 우연히 도서관이 위치한 것은
어찌 보면 생각지 못한 행운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심지어 도서관을 통과하는 것이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임은,
또 피치 못한 사정으로 화장실이라도 이용해야 하는 경우라도 벌어지면
이 부근에서 최고의 선택은 누가 뭐래도 운중 도서관임은 알게 된 건
잦은 도서관의 출입으로 알게 된 "도서관의 곁다리 가치"가 아닐까.
책이나 책 비슷한 것(?)을 읽거나 들고 다니지 않으면 허(虛)한 느낌을 가지는 못된 성격 탓에
또, 독서라는 제법 고상해 보이는 지적 활동을 취미로 가지고 싶은 야무진 꿈 덕에
스스로를 활자에 둘러싸인 환경으로 자주 노출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가장 빨리, 또 쉽게 이루는 방법은 당연히 운중도서관을 향하는 것이다..
닥치는 대로 읽을 수 있는 열정적인 독서광이지는 못해 나름의 기준으로 책을 선별하는데
자세히 생각해보니 그 기준을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물론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참고하여 아직 누군가에게 대여가 되지 않은 책을
우선으로 대출한다는 기본적인 "선택의 우선순위"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지만,
가끔 책장 사이를 지나다가 표지가 예쁜 책도 좀 빌리고
반납 서가 위에 올려진 제목이 맘에 드는 책도 집어 들고는 하는 것이 사실이다.
(쓰고 보니 제대로 된 기준이 없다는 말로 깔끔히 정리가 되는구나.)
그렇게 빌려 읽은 책 중에 맘에 드는 녀석은 새 책으로 사서 책장에 모셔두게 되는데
안 그래도 빈자리가 그리 넉넉지 않던 책장이 요즘들어 더욱 빽빽해졌다.
딸아이의 성장과 더불어 조금씩 늘어나는 그 녀석의 장난감과 교재에 밀려
응당 책들이 차지했어야 할 책장 내의 물리적 공간마저 얼마 전 반으로 줄어(강제로 줄임을 당해)
앞 뒤로 빽빽이 들여넣고 그것이 모자라 가로로 책 위로 꼽아 놓으니
기본권을 보장 받지 못하여 원하지 않게 다른 것들과 밀착해있는 그들이 불쌍해 보이는 요즘이다.
한 번 정도 읽고는 다시 꺼내보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인데, 아직까지 이들을 남에게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아
쾌적한 주거환경을 제공해 주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책들에게 사과할 본인의 잘못이다.
미성숙한 독서취향은 책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상하리만치 소설이 없다.
대신 다 읽지도 못한 것으로 기억하는 두꺼운 인문학서들이 생각보다 여럿 눈에 뜨인다.
언젠가 고백한 바와 같이, 남들에게 "와~”하는 소리를 들을만한 어려운 인문학서를 훈장처럼
들고 다녔던 못난 자의식의 산물이겠다. 그리고 너무나 창피하지만 이런 미성숙한 독서취향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아 아직도 이 비슷한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 2019년 본인의 모습임을 고백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전혀 다른 성격의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설도 아닌 에세이 형식이 글들이 그 주인공인데 특히나 그 주제가 "나"라는 것에 집중하여
지금의 본인에게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안녕의 말]들과 [충고], [치유]들이 가득한 책들이 시선을 끈다.
아마도 불혹에 이른 나이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본다.(너무 많이 흔들리는 불혹이라 창피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근래에는 혜민 스님의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읽었다.
다른 책을 빌리려다가 반납 서가 위에 있는 것을 우연히 들고 온 경우인데,
근래에 본인이 내린 최고의 선택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빌린 책을 읽다 보면 공통적으로 한 가지 눈에 밟히는 점이 있다.
분명 여러 사람이 함께 보는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밑줄을 친 문장이 많다는 것이다.
솔직히 기분 나쁘다. 적어도 본인은 여태껏 빌려 읽은 책에 밑줄을 긋던
읽은 페이지를 기억하고자 책 귀퉁이를 접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기에 그랬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나의 자욱을 남기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 본인의 기준에서는 납득이 불가한 부분이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엄밀히 말해 본인은 남들보다 특출난 준법정신을 가진 그런 훌륭한(?) 사람이 아니기에
본인의 기준 이하의 행동을 보이는 다른 이용자들이 이해되지 않았고
솔직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은 우연히, 정말로 우연히도 이런 상식 이하의 행동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속 깊은 짜증만을 유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전에는 느끼지 못한, 생각지 못한 신선한 물음들을 본인에게 주는 역할을 했음은 물론
절반만 읽고 반납하고 싶은 마음을 다독여 한 권을 독파하게 해 준 긍정적인 부분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공공재를 사유화하는 수많은 행위들은 무조건 지탄받아야 마땅하지만 말이다.
본인에게는 대단치 않아 보이는 문장에 밑줄을 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사람들이 문장에 밑줄을 긋는 것, 아마도 그 부분이 중요하게 느껴졌기에 그리 했을 텐데 말이다.
본인에게는 분명 그저 그런 문장인데, 어느 누구는 중요하다고 느낀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일단 흥미가 생기고 나니, 다른 사람이 밑줄 친 부분을 좀 더 세심히 읽게 되고,
"도대체 왜 그랬을까"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되니 좀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독서가 가능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부류의 책들, "너 잘 살고 있어, 이미 훌륭해, 많이 아프지"등의 자기 위로와 자기만족을
주제로 하는 [치유의 책]들이 동일한 작가에게서 새롭게 발간될 때마다
"아 이번에도 또 치유야?"라고 생각했다.
한 두 권 읽어보니 표지만 다를 뿐 전작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라 느꼈기에 그랬다.
책은 200페이지의 분량이지만 하고자 하는 얘기는 뻔한 몇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의 신간에 별 의미가 없다고 폄하한 것이 사실이다.
창피하지만 "인세" 때문인가 하는 못된 의문이 들었던 것 역시 고백한다.
그런데 이번에 다른 사람이 밑줄 친 문장을 발견하고 이것을 유심히 읽어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중요하다 느끼며 작가의 생각과 공감했는지를 상상하고 고민하니 그동안의 본인의 생각에 창피함을 느낀다.
본인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밑줄 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와 전혀 다른 곳에서 작가와 공감하고 있었다"라는 신호의 명백한 증거이겠다.
그리고 이 증거를 통해 책을 읽고도 아직 공감하여 동기화되지 못한 독자들이 의외로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니, 이는 본인이 [치유의 책] 들의 가치를 달리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할 수 있다.
"사람은 제각기 모두 다르다"라는 확고한 명제를 아는 척, 고상한 척 살아가지만 정작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곳에서 같은 동기화를 했을 것이라 확신하고 추측한 본인의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또 오만한 판단이었는지를 느끼고 나니 서점의 베스트셀러
서가(書架) 한 구석을 차지하는 수많은 [치유의 책]들의 저자들이 존경스러워졌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해주라"는 주제를 전혀 다른 문장으로 다시 한번 말하며,
아직 공감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많은 독자들의 감정적 동기화를 위해 노력하는 혜민스님 같은 저자들의
선의(善意)가 세상에 얼마나 큰 선물을 선사하는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생각을 세상에 드러내 타인과 공감하고자 함이 바탕에 깔린 인간의 행동이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치유의 책]들을 통해 저자는 힘들어하는 지금의 우리들을 위해
또 지금 보다 더 나은 우리의 모습을 위해 충고와 조언 그리고 치유의 말 한마디를 건네
독자를 자신과 동기화시키고자 오늘도 글자 하나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엄청난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니, 힘들어하는 타인을 향해 따뜻한 손을 내미는 수많은 책들과
앞으로 또 나오게 될 수많은 신간의 저자들에게 열렬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세상의 빠른 속도를 발맞추기에 지친 현대인들이 가장 원하고 바라는 그것 [힐링]
그리고 이 힐링(=치유)을 위해 인간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그 목적을 달성코저 노력한다.
어느 누구는 여행으로 다른 누구는 친구들과의 수다로 또 게임으로 등등
각자의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은 결국 "치유받는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일 이겠다.
그중 독서로 치유를 받고자 기대하는 본인과 같은 부류에게 혜민스님 같은 작가는
[만병통치약]을 선사해 주는 듯하다. 현실의 의사에게서는 결코 처방받을 수 없는 그것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만병통치약은 그 효과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네가 세상에서 이 만병통치약의 약효보다 더욱더 강한 스트레스에 곧바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세상에는 이전보다 더 강하고 효과 좋은 만병통치약을 늘 필요로 한다.
하나 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훨씬 좋다.다다익선
더 새롭고 더 공감되고 더 큰 위안을 주는 새로운 문장들이 가득한 그런 책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