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

오만한 인간들을 향해 자연이 내던지는 대답

by 박학대식

계절의 시작인 봄 , 혹독했던 겨울을 견뎌낸 생명은 조금씩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파릇파릇한 새순들이 꽁꽁 얼어붙은 토양을 힘겹게 뚫으며 그들이 아직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세상에 알릴 때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공감하며,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 함께 시간을 보낼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 우리가 봄에 마주하게 되는 감정적 해빙이 아닐까? 순백의 눈이 아름다운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 백설을 365일 원하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기에, 도리어 이 순백이 주는 지나친 고결함에 질려 그들을 꿋꿋이 이겨내는 파릇한 생명의 흔적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것은 본인의 감성이 남들보다 몹시도 섬세해 지나치게 감정이 이입된 것은 아니리라.


그리고 이런 인내의 결실이 세상 밖으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보이는 이 봄이라는 매력적인 계절에 작가는 제목에서부터 생기로운 봄의 기운을 깡그리 밟아버린다. 그들이 몸으로 표현하는 격정적인 생명의 대화들을 뒤로한 채 침묵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말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런 격정적인 움직임이 시작되는 새로운 사계절의 처음을 침묵이라 형용하여 이 침묵 뒤에 자연스레 뒤따르게 될 나머지 계절에 "자연이 인간에게 내어놓을 대답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결과를 제대로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잘 조절된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는 작금의 위험한 행태에 대한 경고를 분명히 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이자 전부가 아닌가 싶다.


기실 인간은 환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때로는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환경보호라는 범 지구적 명제를 고려할 여유조차 없이 오직 인간의 편의를 증진코자 발전에만 몰두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에 비해 진일보한 것에는 틀림이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환경을 보호한다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도 그 결과가 온전히 좋았던 경우는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많았다. 인간이 세상 모든 것들을 자신들이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 지구 상의 유일한 종족이기에 벌어진 참극이라 말하고 싶다. 어쨌든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늘 옳은 생각이었고 뒤늦게나마 이것에 대해 공감을 하게 된 우리들의 모습에서 일말의 희망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본인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겠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이라는 공공의 자산을 위해 자신의 삶의 편의를 포기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것에 동참하라 목소리를 높인 덕에 선진국들을 시작으로 이것에의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이 자발적 규제에 동참하는 분위기가 국제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일개 개인을 넘어 국가라는 비교적 규모가 큰 집단이 환경보호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들을 고안하고 서로 합의하여 이를 사회에 적용하고자 노력하는 일은 종국에 국가의 중심인 국민들을 위해 내린 결단이겠다. 그리고 이런 공공의 선을 위한 범세계적 노력에 동참하는 것은 지구를 빌어 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임차인(?)의 기본예절이겠다. 비록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 일컫는 미국과 중국, 이 두 나라가 이 부문에서 만큼은 서로 앞을 내주려 노력하는 모습에서 추한 인간 집단의 본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환경을 보호하겠다 말하며 (설사 뒤로는 전혀 지킬 마음이 없더라도) 스스로를 옥죄는 선진국들과는 달리 아직도 아프리카의 극빈국에서는 환경보호라는 의미를 그다지 절실히 공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결국 내가 불편하지 않아야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의 발현이 환경보호라는 공의를 공감하지 못하게 만든다라고 할 수 있겠다. 하기사 먹을 것이 없어 나의 소중한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환경에 처해있는 그들이 [환경보호]라는 명제에 공감하리라, 그들의 동의 없이 선진국에서 결정한 한없이 높아 보이는 기준을 따르리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일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감정적 동요가 그들의 무자비한 동물 사냥이나 화석연료의 사용 등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석탁을 위시한 화석연료 발전이 인간의 전원(電源)이었을 때에 이것을 태우지 않는 다른 발전 수단을 찾는 것은 환경을 위해 꼭 필요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수력 발전, 풍력 발전 등의 친환경적으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방법이 개발되었고 이 중의 하나가 원자력 발전임은 우리 모두가 아는 내용이다. 원자력 발전이 가진 엄청난 효율 덕분에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이 새로운 친환경적 발전 수단을 국가의 주요 전력원으로 결정하여 2016년 OECD 국가들의 전력량의 19.9%를 담당하며 석탄과 가스발전에 이은 세 번째 자리에 위치하기에 이르렀다. 원전을 이용하며 우리는 그것의 효용만을 바라보았을 뿐 이것을 누리기 위해 감래해야할 노력들과 효용 이면의 폐해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근시안적 발상으로 인해 인류는 체르노빌 원전 사건과 이웃나라 일본의 후쿠시마 사건의 엄청난 재앙을 마주하게 되었다. 끔찍했던 이 사건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국가의 에너지 수급기조를 바꾸겠다] 천명하고 국가 전원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던 원자력 발전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물론 우리의 대통령께서 자국에서는 탈피하려는 원전을 외국에 세일즈 하는 만화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내로남불 인가)


완전히 분해되는 데에 엄청나게 긴 시간이 걸린다는 원전 폐기물로 인한 환경오염도 문제겠지만 혹시나 모를 발전시설의 안전 문제로 인한 피해를 이웃나라 일본의 그것에서 선행 학습했기에 우리는 탈 원전이라는 국민적 합의가 생각보다 쉬웠다 볼 수 있겠다. 문제는 이것을 대체할 다른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이 되겠다. 앞서 말한 풍력이나 수력발전 등의 친환경 에너지 발전방식은 현재 전력발전의 총량에 아주 미미한 수준을 담당하고 있고 짧은 시간에 급격한 효율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여기에 차세대 친환경 에너지원의 중심이 되리라 기대했던 태양광 발전마저 패널 설치를 위해 벌어지는 엄청난 산림파괴로 인해 큰 우려를 보내고 있는 것이 2019년 우리들의 현실이니 말이다. 태양이 비쳐야 제 역할을 하는 태양광 패널을 위해 이를 방해하는 나무를 잘라내고 지지대를 견고히 설치하고자 원래의 토양을 갈아엎는 일련의 과정들은 이 책에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드넓은 목초 지대를 가지고자 제초제를 이용해 인간이 보기에 쓸데없는 잡목들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은 큰 실수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 항상 인간은 이런 식이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 이를 발전시키는데 열중한다. 일이 발전하며 생각지 못한 문제들이 터져 나오지만 일단 무시한다. 분명 크게 후회할 것 같지만 모른 척 그냥 넘어간다. 정도를 걷는 것을 고지식하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짓이라 여긴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망가지게 될 현재와 미래의 환경을 작가는 침묵의 봄이라는 책 제목으로 경고하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화학물의 무차별한 살포로 인한 환경오염과 이것으로 비롯된 자연의 준엄한 심판을 작가는 이미 40년 전 경고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무작정 사용한 위험한 화학 구조물 덕분에(?) 이미 우리의 여름은 더 이상 화끈하지 않고 파랗고 높은 가을 하늘을 기대하는 것 역시 어렵다. 어렸을 때 쉬이 찾을 수 있었던 올챙이를 보는 일이 특별한 경험이 되었고 매년 여름이면 찾아왔던 장마는 이제 변칙적 폭우로 변하여 우리를 괴롭힌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우리 인간들이 자초한 것이 분명하다.


지구라는 행성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은 비단 인간만이 아니다. 고귀한(?) 인간이라는 족속들은 오직 그들만이 언어와 문자를 이용하고 과학이라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일련의 과정을 행하는 지구 상의 유일한 종족이라는 것을 이유로 식물과 토양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쉽게 무시한다. 하지만 태초에 이곳은 이곳을 빌려 쓰는 수많은 개체들이 서로 균형을 맞추어 살아가게끔 디자인되었다. 어느 한 종족이 다른 무엇을 거느리는 것이 아닌 서로가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며 서로를 견제하여 균형을 이루는 방법으로 말이다. 그런 견제와 밸런스가 무너져 결국 어느 한쪽으로 힘이 실리고, 힘을 가진 주체가 힘이 없는 타자를 업신여기는 것이 그리고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인간들의 현재의 모습을 작가 레이첼 카슨은 힘주어 고발한다. 그리고 그녀가 이런 주장을 한 지 40년이 지난 2019년 현재에도 조금도 나아진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렇기에 이 책은 우리들의 폐부를 깊게 찌른다. 담백하고 꾸밈없는 어조로 우리들의 추한 민낯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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