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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학대식 Oct 02. 2019

천년의 질문

작가 조정래가 한국인에게 호소함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늘 여름에는 책을 더 많이 빌리려 욕심을 부린다.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책을 읽는 모습을 기대하지만 실상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하루 이틀 읽는 일을 미뤄 어느새 코 앞까지 밀려든 반납기한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본인의 슬픈 현실이다. 이는 분명 본인의 못된 성질머리에서 기인한 문제이다. 빌린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극히 꺼려함에서 벌어진 자발적(?) 스트레스임이 분명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반납기한 내에 책을 다 읽고 도서관으로 되돌려 주는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다지 쉬운 일만은 아니겠다 짐작해 본다. 게다가 빌린 책이 비교적 최근에 발매되어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녀석이라면 대출기간 연장이라는 꼼수 역시 불가한 경우가 많아 결국 마감에 쫓기어 우걱우걱 머릿속에 구겨 넣어(?)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고백한다.


안 그래도 짧은 (적어도 본인에게는) 2주일이라는 대출기한 안에 소설이라면 모를까 두꺼운 인문서들은 대부분 만족할 만큼(?) 진도를 나가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니 이번 여름 본인이 빌린 이런 종류의 책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표지 정도만이 기억에 남는다'라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겠다. 창피하지만 예전에 빌렸던 책을 다시 빌리고는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생각한 적도 있다. 흔히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혹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다"라는 표현을 쓰는데(본인 역시 윗단에 쓴 그 표현) 정말이지 이런 경우에는 격하게 이 표현에 공감하게 된다. 가끔은 가벼운 말장난처럼 느끼지는 이 오래된 언어의 구성이 오랜 시간 동안 없어지지 않고 사람들에 의해 계속 회자되고 인용되는 것은 생각보다 진한 문장의 여운 때문이 아닐까.



사실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보관의 용이성]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또는 다 마치고 나서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비교적 신선할(?) 때 정리해 기록하는 것은 생각보다 빠르게 시작될 인간의 기억 조작 행위에서 본인을 방어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아닐까 싶어 보관을 결정했고 시간이 지나 예전 그 책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쉽게 예전의 생각을 끄집어 내기에는 글자를 적어 보관하기보다 이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 아닐까 싶은 판단에 브런치를 선택했다. 언젠가 추억에 젖어 지금 이 글을 읽게 될 때 '그때는 그랬었지'라고 희미하게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말도 안 되는 생각이구나', '참 멍청했구나' 하며 스스로에게 일갈해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떤 책을 읽겠다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본인의 몫이다. 순간의 느낌이던 필요에 의해서든 빌린 책에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것 역시 자신의 능력임은 물론이다. 결코 책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 저자의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아니면 저자가 말하는 상식의 수준을 발맞추어 줄 수 있는지에 따라 작가가 글자의 뭉치를 통해 전달하려는 의미를 받아들이는 깊이가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근래에 읽은 책들이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그 책이 별로였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그 정도 밖에는 받아들이지 못한 본인을 탓하는 것이 조금 더 올바른 사리 판단인 것 같다.


근래의 독서 중에 이렇다 할 느낌이나 감정적 임팩트가 큰 책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작가님들께 죄송하지만) 딱히 기록해 놓을 만한 내용들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래 작가의 신간 [천년의 질문]은 조금이나마 그 느낌을 적어놓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시간이 지나 혹 이 책을 다시 만나게 될 때, 본인의 얼마나 늙었는지 혹 젊은 친구들이 말하는 수구꼴통으로 추하게 변하지는 않았는지를 판단해 볼 기준점을 가지게 되는 일이 될 것 같아 그렇다. 현재 본인에게 조정래 작가의 글은 포용할 수 있는 이념의 왼쪽 맨 끝에 위치한 기준점이기에 그리고 그 기준점을 시간이 지나 슬쩍 오른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은 정말이지 피하고 싶기에 본인에게는 큰 의미가 있지 싶다.   



늘 하는 말이지만 누군가의 독서를 방해할 스포일러를 쓰고 싶은 마음은 없다. 독자의 고고한 취미생활이며 저명한 조정래 작가와의 감정적 소통에 쓸 데 없는 참견이나 꼴 같지 않은 가이던스를 하는 일은 진정이지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오지랖도 없고 그럴만한 깜냥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본인이 공감한 부분을 몇 부분 언급함으로 간단히 마무리하려 한다. 그저 바라옵기는 지금의 이런 동감이 훗 날 아주 후진 생각으로 판단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조정래 작가님의 정치적 색깔이야 그분의 책을 하나라도 읽었다면 누구나 짐작 가능한 바, 더 이상의 언급은 필요 없겠다. 기실 본인은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읽으며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너무 다른 (그분이 제시한) 우리의 역사에 매우 놀랐다. 같은 사건을 어쩌면 그리 다르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지 우리네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지만 결코 그것 때문에 본인의 정치적 색깔 자체가 작가님과 비슷해지지는 않았다 말할 수 있다. 진실을 탐구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일이 무릇 제대로 된 인간이 해야 할 일이라 평한다면 본인은 어쩌면 제대로 된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을 게을리했다 말할 수 있겠다. 그저 그간의 교육과 상반되는 책을 읽는 선에서, 그리고 그것을 틀린 것이라 바로 쳐내지 않은 선에서, 바로 거기서 멈췄기에 그렇다. 더 깊은 진실에의 탐구를 하기에는 본인의 그릇이 작았던 것이라 변명할 뿐이다.


지난 장편 [정글만리]도 그렇고 이번 [천년의 질문] 역시 장편이라 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짧은 세 권으로 구성되어있다. 물론 이것만도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지만 [태백산맥]과 [아리랑]에 비하면 단편 수준의 활자량이라 말해도 무리는 없겠다. 물론 이 덕분에 독자들은(본인을 포함한) 좀 더 쉽게 그의 작품에 도전을 결정하기에 이런 작가님의 배려(?)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그의 "마스터피스" 들이 더 많이 읽혔음 하는 바람이다. [정글만리]에서 중국에의 성장과 한중관계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강조했다면 이번 [천년의 질문]은 지극히 우리나라 내부의 문제점을 열거하는데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작가는 책에서 국민의 위에 군림하는 국회위원들을 위시한 정치세력과 돈으로 법 위에 군림하고 더 큰돈을 벌고자 사기행각을 일삼는 재벌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책에서 조정래 작가가 독자들에게 고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들의 정치에의 무관심]이 아닐까 싶다.


조정래 작가는 먹고 사느라 바빠 일신의 안위를 제외한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려 하지 않으려는 현대인들에게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외치며 이것의 소중함을 일깨워 [정치로의 참여]를 이끄는 것이 무릇 작가의 할 일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본인을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에게 정치에의 관심과 민주주의 정신의 분발을 촉구하고자 적어낸 그의 한 글자 한 글자에서 대한민국을 아끼고 사랑하는 노(老) 작가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 소설에는 실로 점쟁이가 미래를 예언하듯 작가가 미래의 상황을 그려본 단락이 있는데 기실 이 부분을 읽으며 소름이 끼친 사람은 본인 하나만은 아니리라. 작가의 폭넓은 지식과 사회 전반을 꿰뚫는 예리한 시선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이 에피소드는 다름 아닌 작금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겪고 있는 한일 간의 무역분쟁의 예고편이나 다름이 없었다. 


작가는 이번 일본과의 무역마찰은 원자재가 부족한 나라, 우리 대한민국의 산업구조에서 언제든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문제라 말하고 있다. 재벌들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원재료나 핵심기술의 개발이나 연구에 투자하지 않고 공생의 마인드가 없는 자세로 일관해 결국 이것들을 독점적으로 소유한 한 나라가 이의 수출을 규제할 때 필연적으로 벌어지게 될 위기 상황을 마치 미래를 내다보듯 그려냈다. 그리고 이번 에피소드는 그가 왜 다른 작가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본인에게 자리하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이라 말하고 싶다. 두런두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독자와 소통하는 작가는 많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생각의 꼭지를 전달해주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을 집필하던 때에는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았던 그저 상상 속의 일이 지금 우리의 삶에 나타나, 마치 선지자의 예언이 현실이 되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는 일은 본인에게 큰 충격이었다. 책을 통해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건들을 만나고 그것에서 배움을 얻는 것이 독서의 근원적인 즐거움이라는 간단하지만 단단한 명제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 이번 경험은 한동안 큰 울림으로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책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동시에 생각해 볼 수 있게 하고자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최선을 다 했을 작가 조정래의 노고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물론 안타까운 부분 역시 존재한다. 책 속에서 만난 40대 후반 형님, 누님들의 대화에는 "짜샤, 에스담, 투쟁, 단결, 했잖수" 등등의 단어들이 나오는데, 기실 본인보다 기껏해야 대여섯 살이 많은 분들과의 대화에서 그런 단어를 들어본 경우가 없어 동감이 어려웠다. 게다가 몇몇 단어는 아직까지도 그 뜻을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저 문맥에 맞추어 뜻을 짐작하고 넘어갈만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본인이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읽으며 느꼈던 [눈앞에서 이야기하듯 느껴진 대화]와는 너무 차이가 나, '아 이제 이 분의 새로운 글을 만나는 일이 힘들어질 수도 있겠구나' 느끼기도 했다. 1943년에 태어났으니 이제 곧 80을 바라보는 그의 작품에서 이 정도쯤이야 눈감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아쉬운 것만은 사실이다. 


지난 주말 서초동 일대에서 벌어진 사법부를 향한 국민들의 외침을 우리 모두는 지켜보았다. 각자의 신념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왔을 이 민주적 의사표현을 보며 작가의 흐뭇한 미소를 상상하는 일은 책을 읽은 사람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겠다. 이유가 어쨌든 이런 식의 시민들의 정치참여는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고 본인 역시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다. 물론 이런 운동 뒤에서 불안을 조장한다는 이른바 프락치의 활동을 모르는 바 아니나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일'은 없어야 하는 법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무책임한 것'이라는 작가의 예문에서 당신은 과연 얼마만큼 동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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