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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Aug 06. 2021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나날

*2021.4.21.


금요일인 어제 아침은 불필요하게 일찍 시작했습니다.


사실 조금 늦잠을 자도 되는 날이었는데 새들이 그렇게 놔두지 않습니다. 보통 동쪽이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부터 집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나무들에 앉아서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대는 새들 덕분에 아침이면 어쩔 수 없이 일찍 눈을 뜹니다만, 어제 아침은 유난히 소란스러웠습니다. 예쁘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자명종 소리보다 훨씬 듣기 좋다는 마음은 이 집에 들어오고나서 반년쯤 유지됐습니다. 익숙해지고 나니 휴일과 평일에 상관없이 원래 맞춰놓은 아침 알람보다 이른 시간에 찾아드는 새들의 지저귐은 아침과 낮에는 듣기 좋고 이른 새벽에는 소음인 그런 존재가 됐습니다. 어쨌든 쫓아낼 방법도 없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괴로워하던 중 문득 쓰레기통을 내놓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금요일 아침이 지나면 다음 주 화요일 아침까지 수거 차량이 오지 않으니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시계도 보지 못하고 일단 허겁지겁 달려 나가 쓰레기통을 끌어다 드라이브웨이 앞에 내놨습니다. 다행히 아직 수거 차량이 오지 않았더군요.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하늘이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아침해가 이렇게 서정적이었다니.


해가 뜨는 하늘과 지는 하늘을 구분하는 건 정말 어렵지요. 과학적으로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제 머리에서는 과학적 사실에 반하는 억지 주장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해넘이는 강렬하게 불타고... 해오름은 차분히 물들어 온다고 말이죠.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서서 한참 동안 동쪽 하늘의 곱게 물든 아침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반팔로 나와 있어도 서 있을만한 걸 보면 봄은 봄이구나.. 싶더군요.




미국 땅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뜨거운 여름이 가로지르는 7월의 한 복판에 미국 남부에 이민자로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봄은 그로부터 가을과 겨울이라는 두 번의 계절이 지나고 난 뒤 맞이했지요. 그럼에도 그때까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한창 미국에 대해 배워가며 시행착오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시간이 흘러 가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남부의 봄은 짧습니다. 마치 계절이 봄! 여~~~어~~~름. 갈결! 같은 느낌이랄까요. 봄이 왔나? 싶었는데 어느새 아파트 수영장이 오픈하고 아이들은 거기서 텀벙거리고 있더군요. 몇 개월이 지나도록 다 풀지도 못한 이삿짐 박스들이 거실에서 쌓여 있었고, 미루고 미루다 큰 마음먹고 아이들 봄 옷을 찾기 위해 박스 속을 여행하고 왔더니 그 사이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었다며 다시 여름옷 찾아오라는 기가 막힌 상황. 그리고 그 와중에 북동부로의 이사가 결정되어 기껏 풀어놓은 일부 박스를 다시 싸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첫 번째 봄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정신없고, 짧게.



두 번째 봄은 Corona virus와 함께 왔습니다.


세상은 난리였고 제가 일하는 회사도 여러 변화를 겪어서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데, 집에서 맞이한 봄 자체는 목가적이고 평온했습니다. 부엌에서 뒷마당으로 바로 나가는 문이 있어서 뒷마당에 있는 피크닉 테이블에 음식을 차리는 건 정말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원하고, 접시 나르는 건 어렵지 않으니 틈만 나면 점심과 저녁은 뒷마당에 나가서 먹었습니다. 토스트에 잼을 발라 먹더라도 나가서 먹었지요. 그렇게 먹고 나서 세 아이들은 땀범벅이 되도록 잔디밭에서 축구공을 차며 뛰어다니고 아내와 전 따뜻한 햇살 아래에 캠핑 체어를 펴놓고 늘어져서 말없이 햇살을 즐기고는 했습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지 않은 한 매일같이 이어진 뒷마당 피크닉은 보통 모닥불에 마시멜로와 소세지를 배불리 구워 먹은 아이들이 만족한 얼굴로 잠든 밤까지 이어지곤 했는데, 아내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가로지르는 봄 밤은 포근했고 진한 레드 와인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그 사이 집에는 불청객이 세 번 다녀갔습니다.


제일 먼저 찾아온 손님은 사슴이었습니다.


배가 불룩한 사슴 한 마리가 이른 봄부터 저희 집 마당을 매일 다녀가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보니 새끼를 낳아서 종종 저희 집 뒷마당을 새끼 보호하는 곳으로 이용하고 있더군요. 그럴리는 없지만 출산을 저희 집 뒷마당에서 한 것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있나요. 새끼가 어느 정도 커서 더 이상 저희 집 뒷마당을 찾지 않을 때까지 뒷마당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조심을 하면 할수록 새끼 사슴이 뒷마당에 머무는 시간도 함께 늘어났지요. 마당 이곳저곳을 탐험하는 새끼 사슴을 창문 뒤에 숨어서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좋았습니다.



두 번째 불청객은, 였습니다.


이른 봄부터 저희 집 뒷마당 나무에서 새 한 마리가 열심히 노래를 부르며 암컷을 찾더니 짝을 지어 둥지를 틀더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새소리가 예쁘다며 좋아했는데 둥지를 짓고 알을 낳고 나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뒷마당에 사람이 나서기만 하면 불안한 어미 새들이 머리 가까이 날아다니며 위협 비행을 하고.. 뒷마당 모퉁이에 있는 텃밭에 앚아 일을 할라치면 가까이에 내려앉아서 시끄럽게 울어대며 위협을 했거든요.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적은 없지만 신경 쓰이기도 하고 사실 불안해할 저 어미 새들에게도 못할 짓이겠구나 싶어서 새끼들이 자라서 날아갈 때까지 역시 뒷마당 잔디밭 가장자리로는 가지 않고 구경만 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새끼들이 알에서 깨어나 자라고, 날갯짓을 시작하고, 가까운 가지로 나는 연습을 하더니, 결국 떠나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 제 텃밭의 상추는 사슴들의 간식이 되었....)


새끼들이 모두 떠난 뒤, 둥지는 제거했습니다. 올해는 예방 차원에 매일 뒷마당 검사 중입니다.


마지막 불청객은, 온지도 모르고 있다가 늦여름에야 발견했는데, 다름 아닌 말벌이었습니다.


집에 꽃이 유난히 많은데, 그래서 말벌집이 가까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벌이 많이 찾아오는구나.. 정도였지요. 벌을 크게 무서워하거나 하지 않아 말벌이 몇 마리 날아다녀도 그냥 무시하고 지냈거든요. 벌도 저희 가족을 무시했구요. 그러다 보니 첫째가 말벌집을 발견했을 땐 이미 농구공만 하게 커진 상태라 벌집 제거 서비스를 불러야 했습니다. 이 때도 벌집 제거하기까지 아쉽게도 이틀간 뒷마당은 출입 금지였습니다.



그 밖에... 여전히 이민자로서 겪는 해프닝이 여전히 많았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했습니다. 잘 알지 못해 손해를 보고, 예상 못한 상황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웃어서 넘길 줄 알게 됐으니까요. 회사에서도 잘릴 뻔 한 위기도 넘겼습니다. Covid-19이 온 직후의 3월은 정말 칼날이 머리 바로 위로 춤추는 기분이었지요.



그리고 세 번째 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 봄은, 롤러코스터 같던 지난 몇 년과 달리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평범한 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마당 어디에 어떤 꽃이 피는지도 알고, 어떤 객들이 밤에 다녀가는지도 알고(대부분은 사슴입니다만, 가끔 토끼나 여우도 다녀갑니다), 아이들도 학교에 익숙해졌고, 동네에 익숙해졌습니다. 이웃들과도 더 가까워졌습니다. 회사에서도 어느 정도 안정된 포지션으로 자리 잡은 듯하고요.


이번 봄도 이렇게 꽃이 피고, 잔디가 다시 초록색으로 물들고, 바람이 포근해지고 있습니다.


모기장 너머로 찍은 뒷마당 사진. 개나리 울타리 너머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입니다. 간혹 리세스 시간에 저희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보이곤 합니다.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일은 정말 많이 줄었습니다. 며칠 전 혼자 낙서를 하다 한 문장을 적었습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나날.


그러게요. 정말,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음 한구석, 생각만 하면 늘 서늘해지는 불안을 안고 사는 이민자로서의 삶은 달라진 게 없는데 적어도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들이 줄어든 것만으로도 갑자기 삶이 나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이런 봄이 앞으로도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렵겠지요?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니까요. 그러니 이 봄을,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두 번째 막을 올리고 살기 시작한 이민자라는 삶을 즐길 수 있을 때 흠뻑 즐겨야겠습니다.  


지금 마음에 어울리는 음악을 찾다가 Bele Nemeth의 피아노 싱글, Second Coming 을 골랐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함께 듣고 편안한 밤을 보냈으면 합니다.


https://youtu.be/3LlyMDKdw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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