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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Jul 30. 2021

BTS

*2020.2.9.


사무실에 항상 한국어로 인사하는 독일계 직원이 한 명 있습니다. 아침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길래 그건 정중한 표현이고 친한 사이에 쓰는 캐주얼한 말은 '안녕'이라고 알려줬더니 그 이후 '안녕' 하고 인사를 합니다. (사실 제가 맨 처음 알려준 아침 인사는 '좋은 아침'이었는데 발음이 어렵다고 포기..)


그 동료가 한국어를 알게 된 건 딸 때문입니다. 딸이 아빠에게 간단한 한국어를 가르치려 애쓴다더군요. 이유는 딱 하나. 본인이 BTS의 열성 팬이라 한국 문화와 언어 자체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팬클럽 멤버 이기도 하다더군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집에서 짐 정리를 하다 한국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딸려온 던킨도넛 증정 텀블러를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발견했습니다. BTS 관련 이벤트 제품이었는데 로고와 멤버 중 한 명의 싸인이 텀블러 표면에 박혀 있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BTS가 누군지도 모르는 관계로 별 관심 없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죠. 그러다 그 동료 딸 생각이 나서 사무실에 가져가 그 동료에게 건네줬습니다. 딸에게 어깨 으쓱할 기회가 생겼다며 엄청 좋아하더군요.


다음날 그 동료가 제 사무실로 찾아오더니 딸이 직접 쓴 손편지를 건네줬습니다. 너무 고맙다면서 한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해 장황하게 감사를 표시한 편지였습니다. 뭐,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걸 기회로 그 동료와도 더 친해졌고요.  


그런데 그리고 몇 달 뒤, 그 독일인 동료가 다시 찾아오더니 어렵게 부탁을 하나 했습니다. 자기 딸이 팀을 짜서 공연 준비를 하는데 BTS 춤과 노래를 연습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런데 BTS 멤버들이 모두 남자라 여자 목소리로 그 노래를 부르면 어떤 톤에 어떤 발음이 나오는지가 같이 연습하고 있는 팀원들 간에 늘 논란이었다는군요. 그러다 그 아이가 아빠가 같이 일한다는 한국인 동료의 가족 중에 여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아빠를 졸라서 'BTS 가사를 또박또박 한국 여성의 목소리로 녹음해서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는 거였죠. 그 동료가 그 말을 하면서 자기가 알기에 한국 문화에서는 이런 식으로 가족에게까지 부탁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면서 딸에게 그 설명을 했는데 너무 간절해서 일단 의견을 구해보겠다고 약속했다며 쑥스러워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뭐라고 답을 못해주고 아내에게 문자로 상황을 전달하고 의사를 물어봤습니다. 아내는 재미있는 이벤트일 것 같다면서 흔쾌히 응하더군요. 그래서 그날 OK 했고, 어떤 곡의 가사가 필요한지 전달받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가사를 놓고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이용해 두 번씩(한 번은 천천히, 한 번은 빠르게) 반복한 음성을 녹음해서 그 동료에게 보내줬습니다. 다음날 만난 그 동료는 정말 고마워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 동료가 감사의 표시로 식사 대접을 한번 하겠다고 해서 두 가족이 만나서 같이 저녁 식사를 즐겼습니다. 두 가족의 집이 서로를 초대하기에는 조금 멀어 중간 지점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만났습니다.(한국 식당에서 만나자는 그 동료의 고집. 사실 별 상관은 없었는데 말이죠) 그렇게 식사를 하면서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그 아이와 메뉴로 나온 한국 음식에 대해 설명도 하고, 어떻게 먹는 건지 알려주기도 하면서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그 동료 부부와도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독일에서 언제 미국에 이민을 왔고, 이민 초반 어떤 해프닝들을 겪었는지.. 그리고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인 틴에이저로 자란 딸을 키우는 게 어떤 건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 동료의 딸은 아직 한참 어린 우리 집 아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좀 더 숫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누나가 쉴 새 없이 보이는 관심에 오히려 쑥스러워하더군요.


인상 깊었던 건, 그 부부는 딸의 그런 행동에 대해 저희 내외에게 민망해하거나 미안해하기보다는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저 조악한 단어들로 뉘앙스 전달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BTS의 열성 팬인지 즐겁게 이야기하고 그러 인해 생기는 여러 가족의 해프닝들을 말하는데 딸도 부모도 모두 즐거워 보였습니다. 만일 제가 같은 입장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부탁을 전달하지도 않았을 것 같았고, 조금은 민망해했을 것 같았거든요. 그 느낌이 이후 며칠간 제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습니다. 어쨌든 그 식사를 기점으로 기존에도 조금씩 가까워지던 그 동료와는 회사에서 있는 일들에 대한 속이야기도 하는 절친이 되었습니다. 이민자로서도 한참 선배고(15년 정도?), 부모로서도 한참 선배라(5년 정도?) 제게는 좋은 멘토가 되어 줬죠.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딸이 준비한 선물이라고.. 독일 전통 방식 연말 선물의 현대식 변형품 이라며 스테인드 글라스를 본떠 만든 조각 초콜릿을 저희 아이들에게 주라고 전해주더군요. 미처 선물 준비를 못했던 저는 그냥 감사의 인사만 전해줬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그 아이를 위해 어떤 선물을, 언제 준비해서 주는 게 좋을지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어쩌면 이번 설이 좋은 기회였을 수 있는데 그만 그냥 지나쳤네요. 대신 한가위 때 초대해서 한국식 추수감사절은 어떤 음식을 먹는지 한번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집이 조금 멀지만, 주말 점심 정도라면 한 번은 왔다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BTS가 참 열일 합니다. 국위 선양도 하고 세계 여러 나라 청소년들에게 즐거움도 주고 있네요. 이민 가정의 십 대 여자 아이들에게 'BTS의 나라' 출신이라는 게 주는 긍정적인 효과도 크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해도 안 하던 한국어 공부도 갑자기 열심히 하고,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 관심을 받는다나요. 그리고 저희 가족에게는 다른 '이웃'을 만들어 줬네요. 아직 BTS 대표곡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는 한번 알아놔 둬야겠습니다.


... 음 '쩔어' 라는 곡이 있군요. 지금 유튜브로 듣고 있는데... 제가 서태지의 '난 알아요' 를 방 안에서 틀어놓고 문 닫아걸고 있을 때 저희 부모님의 머릿속이 지금 제 머릿속과 비슷했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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