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기 전 다녔던 한국 회사는 식당이 있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닌 여러 개가 넓은 캠퍼스에 흩어져 있어서 마음먹기에 따라선 어제 점심을 먹은 식당과 오늘 먹은 식당, 그리고 내일 먹을 식당을 모두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식사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제공이 됐는데 24시간 교대 근무로 돌아가는 반도체 기업인만큼 새벽에 야참도 내줘서 야근하면서 배고플 일은 없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직원들이 출근하면서 식당 들려 아침 먹고, 일하다 낮에 점심 먹고, 야근하다 저녁까지 회사에서 먹게 되니 집에서는 말 그대로 뭔가 식사를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식당에서 나오는 메뉴도 다양했지만 맛도 훌륭한 편이어서 삼시세끼 모두 회사에서 해결한다는 사실에 불만은 없었다. 근무 시간은 좀 길었지만 그땐 다들 그러고 살았으니까 그게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삼시 세끼를 같이 먹고, 하루 12시간씩 같은 공간에 있고, 간혹 같이 회식도 하다 보니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는 끈끈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대소사를 아는 경우도 많았고.
그런데, 물론 그런 게 좋은 점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 최소한 저녁 만이라도 집에서 가족들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마 그때부터 칼퇴하는 사람으로 팀 내에서 포지셔닝이 됐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다 야근하고 있으면 동료들이 와서 "아니, 어쩐 일이세요. 이 시간에 회사에 남아 계시다니!" 하면서 농담을 건네었을 정도니까 칼퇴하는 사람으로의 이미지 메이킹은 성공적이었다. 때마침 부서도 옮겼겠다, 아예 술도 안마시는 사람으로 변신을 했는데 새로운 보스들이 술마시자고 불러내지 않아 이것도 제법 좋았다.
미국에 온 뒤에는 180도 바뀌었다. 나라만 한국에서 미국으로 바뀐 게 아니라 일하는 회사의 크기도 대기업에서 작은 회사로 바뀌었다. 미국도 큰 회사들은 점심을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그 정도 규모가 아닌 우리 회사는 건물에 식당이나 카페테리아가 없어서 점심을 먹으려면 도시락을 먹거나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한국에서는 점심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 시간이 되면 모두 업무를 멈추고 밥을 먹으러 움직였는데 지금 다니는 회사는 정해진 식사 시간이 없다. 암묵적으로 정오 무렵이면 대부분 식사를 하지만 정해진 게 아니다 보니 언제 어떻게 먹을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점심은 도시락을 싸 오는 사람과 나가서 사 먹는 사람, 그리고 굶거나 간식으로 간단히 때우고 넘어가는 세 부류로 나뉜다. 나는 주로 도시락을 싸 오는데 초코바 같은 걸 먹고 가볍게 때우는 경우도 많다. 한국의 탕비실과 휴게실이 합쳐진 듯한 공간이 있어서 여기 있는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 컵라면에 물을 부어서 먹는 사람이 있어서 종종 라면 냄새가 우리 층을 가득 채울 때가 있다. 범인은 독일계 미국인인데 한국 신라면 블랙을 아주 좋아하는 아저씨다. 휴게실 냉동실에 코스트코에서 파는 한국 김밥이 가득 차 있는 날도 많다. 주인으로부터 꺼내 먹으라는 말도 들었는데 선뜻 손이 가진 않는다.
내 경우 도시락이든 간식이든 그냥 내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일하면서 먹는다. 밥 먹으러 움직이면 최소한 한 시간은 써야 하는 걸 생각하면 업무 집중과 효율적인 면에서 보면 오히려 더 좋다. 움직이는게 귀찮다는 마음이 더 커서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어느게 더 큰지는 모르겠다. 나가서 사 먹으면 평균 $16 - $20는 들어가는데 한 달 점심값 부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도시락을 먹으면 사 먹는 것보다 적게 먹을 수 있어서 체중 조절에도 도움이 된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장점.
일하면서 책상에서 혼자 간단히 도시락을 먹다 보니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거나 대화하는 일이 별로 없다. 회의시간 혹은 업무 때문에 1:1 통화하거나 해야 대화를 하다 보니 정말 사무적인 관계다. 그들이 싫다 좋다가 아니라 한국에서처럼 각자의 가정 대소사까지 속속들이 아는 것과 비교된다는 의미. 뭐, 한국에서도 가급적이면 회식 자리 피해 다니며 타인으로 살았는데 미국이라고 다를까.
도시락은 내가 쌀 때도 있고 아이들 도시락을 준비하는 아내가 조금 준비를 더 해서 내 것까지 싸 줄 때도 있다. 재택근무라고는 해도 새벽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은 아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뭔가 준비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일찌감치 출근하는 내가 가족들 식사부터 도시락까지 모두 챙기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정해진 규칙은 없는데, 대부분 함께 나란히 서서 준비를 한다. 오늘 아침엔 아내가 아이들 아침 식사를 챙기는 사이 나는 뒷마당에 나가서 수영장 로봇청소기의 필터를 비우고 수영장 수질 체크 등 몇 가지 아침 루틴을 했고 들어와서 아내가 아이들 도시락을 싸는 동안 옆에서 내 도시락을 만들었다. 작년부터 아침 식사를 거르고 있다. 처음엔 많이 배고팠는데 익숙해지니 오히려 속이 편안해서 계속 아침을 거르는 중. 나이가 들었다는 신호겠지.
여름의 한 복판을 지나고 있고, 어느덧 미국땅을 밟은 지 8년 차에 접어들었다. 적어도 10년은 살아야 미국땅이 그나마 내 터전 같은 느낌이 든다는데 7년을 채우고 8년 차에 접어든 요즘 나를 돌이켜 보면 아직 그런 생각을 하려면 10년이 아니라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다.
그래도 한국에선 해본 적 없는 아침 식사 준비와 내 도시락 싸기가 익숙해진 걸 보면 그래도 바뀌고 있는 부분들이 있기는 있다. 적응한 부분들도 있고. 아무리 봐도 10년은 짧은 것 같고, 15년 정도 살면 그래도 여기가 내 터전이려니 싶지 않을까?
내일은 점심 약속이 있어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된다. 아침이 조금 여유가 있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