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독립기념일 연휴.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일어나 분주했습니다. 오늘 첫째, 둘째와 함께 자전거 라이딩을 다녀오기로 했거든요. 아이들과 함께 가는 라이딩인 만큼 쉬운 코스를 선택해야 해서 D&R canel 중에서 Blackwells Mills부터 Griggstown을 왕복하는 11km 강변 코스를 달리기로 했습니다. 이곳의 주차장은 아침해가 뜨면서 빠르게 찰게 뻔해서 아이들과 일찍 일어나서 가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6시 반에 아이들을 깨우고 아침을 먹이고 옷 갈아 입고 이런저런 준비를 마친 뒤 아내와 막내의 배웅을 받으며 집에서 7시 반에 출발. Blackwells Mills 주차장에 도착하니 8시 반이 다 되어 갑니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만차.... 가 아니라 spot이 하나 남았습니다. 다행히 간발의 차로 편하게 주차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라리탄 강변을 따라 느긋하게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잘 닦인 포장도로 혹은 학교나 공원의 아스팔트 공터 위에서만 자전거를 타던 아이들에게 오늘과 같은 비포장에 울퉁불퉁한 길은 처음입니다. 강변도로인 만큼 언덕은 없이 평이한 길이었지만 자전거 바퀴 아래로 모래에서 흙이 밟히며 내는 소리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지요. 좌우로는 수로와 라리탄 강이 흐르고 머리 위로는 높다랗게 자란 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안에서 아침이라고 부산스러운 새들의 지저귐은 집에서 듣는 것과는 또 다릅니다. 아직 높게 떠오르지 않은 해는 자전거를 타며 지나치는 동안 나무 사이사이로 반짝거리고 강변의 시원한 바람은 지금 운동을 하고 있는 건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건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중간중간 아이들이 지치지 않게 쉬어가면서 물도 마시고, 쿠키도 먹어 가면서 그렇게 한 시간 반을 흙길 위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D&R canal은 산책로도 유명하지만, 수로를 오가며 낚시를 하고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이들과 잠깐 서서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하는데 한 척의 카약이 물 흐름과 함께 천천히 떠밀려 내려오는 걸 봤습니다. 카약 위에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할아버지 한분이 앉아 있었는데 세상 태평한 표정으로 낚싯줄을 카약 밖으로 드리워 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멈춰 서서 쉬고 있는 저희 일행과 그 할아버지가 불과 몇 미터 사이를 두고 그렇게 천천히 교차하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눈이 마주쳤는데 먼저 그 할아버지가 커다랗게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먼저 건네시더군요.
"Good morning. How are you?"
"I'm good. Thank you. How are you?"
"I'm terrific."
반짝이는 물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길게 드리워진 낚싯줄. 그리고 모든 걸 초탈한 듯한 노인의 느긋함.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What a beautiful day."
"It is."
"Enjoy and good luck."
"Oh, thank you so much."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스쳐서 서로의 길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라이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카약을 타고 물과 함께 흐르며 낚싯줄을 드리우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한 편의 영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20년도 더 전에 나온, 아직 앳된 브래드 피트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이라는 훨씬 낭만적인 제목으로 번역되어 한국에도 개봉했던 A river runs through it 입니다. 40대 분들이라면.. 아마 본인 방에 또는 대학 동아리방에 이 포스터 한 장씩은 있었을 거라 생각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그런 영화가 있습니다. 문득 떠올라 몇 날 며칠을 머릿속을 맴도는 그런 영화 말이죠. 이유가 음악 때문일 수도 있고 배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영화 자체가 매력적인.. 잊혀지지 않는 그런 영화도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은 제게 있어 그런 영화입니다. 1920년대 몬타나 주의 블랙풋 강을 끼고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잔잔하게 흐르는 영화 음악도 아름답지만 마치 수채화로 막 그려낸 듯한 색감의 영상은 몇 번을 다시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또 보고 싶다며 항상 머리속으로 생각만 하다 얼마전 유료 결재를 하고 집에서 혼자 앉아 20년만에 다시 봤습니다. 디지털화 되어 너무나 선명하고 강열한 채도를 보이는 요즘 영화와 달리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빛이 바랜듯한 블랙풋 강과 숲의 영상은 보는 내내 몇번이나 장식장에 놓여 있는 내 필름 카메라를 힐끗 거리며 바라보게 만들더군요. 영화의 마지막에 마지막 주름진 손으로 플라이 피시 미끼를 매다는 그 모습 너머로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흐르고 있는 블랙풋 강의 영상을 보면서 이 영화 감독은 가족에 대한 영화가 아닌 어떤 종교와 신앙에 대한 영화를 찍고 싶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목사라는 것과 별개로 영화는 내내 어딘가 경건하고 숙연했으며 내 마음속의 흐름을 멈칫거리게 만들었으니까요. 흔한 말로 '돌이켜 보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마치 군시절 평일 저녁 혼자 찾아가서 한시간씩 조용히 묵상을 했던 그 성당에서 받았던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귓가에 블랙풋 강의 물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
영화의 배경인 1920년대의 미국은 정말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이런 격변의 시기를 가장 잘 그려낸 소설이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위대한 개츠비입니다. 화려한 뉴욕의 부유층의 삶부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렇지 못한 이들까지, 그리고 그 사이에 오가는 욕망과 갈등을 정말 잘 담아낸 소설입니다. 미국인들의 필독서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의 원작 소설인 A river runs through it 은 미국인에게 정말 많은 사랑을 받은 소설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만큼이나 말이죠. 그런데 이 두 소설이 모두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잠시 시선의 중심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만큼 혼란스러워지기도 합니다.
햇살이 수면에서 부서진다는 표현이 마치 이 영화를 위해 생겼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잔잔한 첼로 선율을 깔아놓고 펼쳐지는 강과, 숲과, 이곳을 살아가는 순박한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지만 이 시기가 과연 Roaring twenties라고 불리던 격변의 시대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허공으로 던져진 달러 지폐를 움켜잡으며 술에 잔뜩 취해 수영장으로 다이빙을 하는 것도 이 시기의 미국인들이었고, 식사 전 기도를 엄격하게 지키며 강과 낚싯대를 손에 쥐고 자연 앞에 경건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던 이들도 미국인들이었습니다.
동시대에 존재했던 두 개의 미국.
제가 미국을 넘어오면서 꿈꿨던 미국은 허드슨강을 끼고 있는 뉴욕의 화려함이 아니라 몬타나 주의 빅 블랙풋 강과 함께 흘러가며 살아가는 흐르는 강물처럼에 등장하는 이들이 사는..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허드슨강 근처에 와서 살고 있군요. 아이들이 독립하고 은퇴하는 나이가 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생각이 많은 밤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독백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이해는 못 했지만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난 아직도 그들과 교감하고 있다. 어슴푸레한 계곡에 홀로 있을 때면 모든 존재가 내 영혼과 기억, 그리고 빅 블랙풋 강의 소리, 낚싯대를 던지는 4박자 리듬, 리듬, 고기가 물리길 바라는 희망과 함께 모두 하나의 존재로 어렴풋해지는 것 같다. 그러다 결국 하나로 녹아든다. 그리고 강이 그것을 통해 흐른다.
세월도 우리의 삶도 그저 강물처럼 흘러만 간다. 흘러가는 것은 다 하나가 된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과 같고,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사랑만큼은 완벽하게 할 수 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대사 중 발췌>
ps
오늘 저녁 몇 시간째 듣고 있는 흐르는 강물처럼 OST를 유튜브에서 찾아 링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