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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Aug 05. 2021

버본 위스키 그리고 여름밤

밤 10시. 중국팀과 하는 오늘의 마지막 미팅이 끝났습니다. 미국에서 일한다 하더라도 글로벌 사회에서 밤늦은 업무 미팅은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인터넷 시대가 가져온 폐해입니다. 


그런데 미팅 참석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시간쯤 되면 어지간히 중요한 미팅이 아니고는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지난 몇 년, 퍼런스 콜에서 나한테 필요한 이야기만 골라 듣는 솜씨만 자꾸 늘어 가는 듯하더군요. 그리고 그마저도 이 시간이 되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체력의 한계랄까요.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뇌의 특정 부위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 이겠지요. 


미팅을 마치고 난 뒤 메일을 정리해서 보낼 것들 마지막으로 보내고 베이스먼트에서 올라오다 세탁실에 들려 세탁기를 돌리고 부엌으로 와서 저녁 식사 뒤 쌓인 설거지 거리를 정리해서 식기 세척기에 넣었습니다. 침실에 있는 책상에서 일을 하는 아내는 아직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먼저 잠들었는지 조용합니다. 요즘 피곤하다며 일찍 잠들곤 하는데 괜스레 깨울까 걱정돼 혹시라도 잠들었나 살피러 올라가 보기 애매하네요. 잠시 고민하다 어차피 세탁기가 다 돌고 나면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돌려놓는 것 까지는 해야 해서 그때까지 혼자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크롬북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쌍의 자석처럼, 위스키도 함께.


Image by Sandra Pape from Pixabay

 

버본 위스키를 한잔, 과하지 않게 따라서 불 꺼진 다이닝룸에 앉았습니다.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빛으로도 혼자 앉아서 위스키를 마시는데는 충분하더군요. 


사실 버본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미국에 살고 있으니 캔터키 버본을 마셔주는 게 도리에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예전에 했었는데 버본 특유의 달콤하고 스파이시한 맛은 좋아하기 어렵더군요. 하지만 버본 위스키의 진한 색은 참 매력 있습니다. 이렇게 적당히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라면 바라보는 것 만으로 분위기에 취할 만큼. 어쩌면 그래서 매번 괜히 샀다고 후회하면서도 버본 위스키를 한 병씩 집어 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모금 머금은 지금은 여전히 후회가 되는 중입니다. 괜히 샀다고. 아울러 다음엔 꼭 싱글 몰트 스카치위스키를 들고 와야지 하는 별 의미 없는 다짐을 해봅니다.


오늘 밤부터 시작해서 일요일까지 줄기차게 내린다고 예보되어 있는 비는 조금 전 그 시작을 알렸습니다. 다이닝룸의 창문을 열었더니 훅 들어오는 습하고 더운 공기와 함께 불규칙적인 빗소리가 창문턱을 넘어옵니다. 분명 습하고 더운 공기가 밀려드는데 나쁘지 않네요. 어쨌든, 여름이니까요. 더구나 이렇게 비 오는 걸 듣고 있는 순간이라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모습으로 내리는 눈과 달리 비는 소리로 내립니다. 다른 곳을 바라봐도, 심지어 눈을 감아도 비는 창틀을 넘어옵니다.

 

진한 버본 위스키와 덥고 습한 공기. 그리고 잔잔하게 내리는 빗소리. 여름밤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요?


오늘은 좀 늦게까지 이렇게 음악을 들으며, 버본을 마시며 여름밤을 즐겨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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