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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Aug 21. 2021

너의 이름은.

*2021.4.29.


글을 시작하면서 생각해 보니 이 글은 제가 예전에 썼던, 아이들 다니는 학교 앞을 지키는 크로싱 가드 미셸에 대한 이야기와 이어지는 내용이 되는 듯합니다.


https://brunch.co.kr/@anecdotist/1


혹시 글에 등장했던 노부인 미셸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이 있을 수도 있어 짧게 근황을 이야기하자면, Covid-19으로 세상이 험한 와중에도 여러 번 집 앞에서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학교 정문의 교차로를 지키는 모두의 크로싱 가드는 아니지만, 귀여운 손녀딸의 손을 잡고 등굣길을 함께 하는 동네 할머니로서 여전히 아침마다 학교 정문을 오가거든요. 재택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에야 만날 수 없었지만 하이브리드 수업을 시작하면서는 종종 마주칩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저희 집 삼 형제의 이름을 여전히 다 기억하고 있어서 만나면 안부 주고받는 것만 한참입니다. 이야기 듣다 보면 동네 모든 소식을 다 알고 계신 듯한데, 작년에 Covid-19으로 어느 집 누가 앓았고, 그중 누가 세상을 떴는지까지 상세하게 다 이야기하시곤 합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저희 동네에서는 희생자가 매우 적었더군요. 미셸이 말하는 '동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구글어스에서 본 저희 동네입니다. 가운데 위치한 건물과 운동장은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구요. 제 기준에는 딱 이 정도가 '동네'입니다.


미셸이 크로싱 가드를 그만둔 뒤 한동안 경찰이 와서 등하교 교통정리를 했습니다. 그 갑작스러운 차이가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미셸이 서 있을 땐 등하교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미셸에게 인사를 했고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짧게 인사를 주고받는.. 뭔가 따뜻하고 분주한 동네 사랑방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는데, 매일 바뀌는 경찰관의 교통정리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나지 않았으니까요. 고맙다고 손짓을 하고 짧게 땡큐라고는 하지만 서로가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지요. 화기애애하고 포근한 분위기였던 등굣길이, 마치 출근시간 지하철 역 마냥 말없이 분주하기만 해 졌습니다.


그러다 Covid-19이 터졌고, 크로싱 가드 자체가 필요 없는 상황이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저희 동네는 치안이 좋은 편이라 다들 걸어서 학교를 오고 갑니다. 고학년은 부모 없이 아이들끼리 등하교를 하는 경우도 있고 수업 끝난 뒤에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끼리 모여서 30분이나 한 시간 정도 노는 경우도 있습니다. 앞선 크로싱 가드였던 미셸은 항상 하교 시간이 지나고도 일정 시간 더 그 자리에 머물며 뒤늦게 오가는 아이들을 위해 교통정리를 해주고는 했지요.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참 든든하고 고마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수업이 끝난 이후에는 항상 동네에 아이들이 무리 지어 돌아다니고 와글거리는 소리가 났었는데,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하루아침에 그 모든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이 사라지니 정말 낯설더군요.


그리고 몇 달 전, 하이브리드 수업을 시작하면서 아이들의 등하교와 함께 드디어 새로운 크로싱 가드가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셸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나이가 있는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동네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보이더군요. 아침에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 자리에서 크로싱 가드를 30년 했다는 미셸 하고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한 두 달 지켜본 바에 따르면 동네 주민이 아니거나 아니면 이사온지 얼마 안 된 분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실 수도 있구요. 반면 엄청 부지런한 성격이신 것 같은 게, 항상 일 시작 20분 전에 도착해서 차 안에서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경찰관도 아닌 정식 크로싱 가드가 왔는데 여전히 데면데면한 그 상황이 참 낯설었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셸을 기억하는 동네 사람들 모두가 그랬겠지요. 한편으로는 오가는 사람 중 아는 이가, 이웃이 없어 보이는 그 할아버지가 조금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Stop 사인을 들고 서 있는 그 자리가, 사람을 만나는 교류의 장소가 아니라 그냥 일터에 불과할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그분의 첫 번째 동네 이웃이 되어 주자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갓 이사 온 저희 가족에게 크로싱 가드인 미셸이 첫 이웃이 되어 줬던 것처럼, 새로 온 크로싱 가드에게는 내가 먼저 인사하고 이웃이 되어 주자고 말이죠.


한 달 전 아침, 출근을 하러 집을 나서면서 캡슐머신에서 커피를 한잔 더 내렸습니다. 미리 사다 놓은 1회용 텀블러에 담은 그 커피를 들고 조금 걸어가 저희 집 앞에 주차해 놓은 그 크로싱 가드 할아버지의 자동차 조수석 유리를 노크했지요. 누가 노크할 거라 생각 못했는지 저를 확인하고는 허둥지둥 유리를 내린 그에게 들고 온 커피를 권하면서 어느 집에 살고 있는 누구인데 아침마다 와서 교통정리해주는 것에 대해 학부모로서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날이 아직 추운데 일 시작하기 전에 갓 내린 따뜻한 커피 한잔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지요.


그렇게 서서 몇 마디 인사와 대화를 서로 나눴습니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대화를 통해 저는 그 할아버지의 이름이 폴이라는 걸 알았고, 폴은 제 이름과 함께 저희 집 세 아이들이 모두 자기가 교통정리하는 초등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마침 제가 아이들 등교 길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폴이 여전히 학교 앞 교차로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더군요.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그 장소에서 손을 번쩍 들어 인사하며 크게 말했습니다.


"Hey, Paul! Good morning!"


폴도 제게 손을 흔들어 답을 했습니다. 제가 그를 폴이라고 부르고 그가 화답함으로써 그의 이름이 폴이라는 걸 근처에 있던 다른 학부모들도 모두 들었지요. 그중 한 명이 지나가면서 "Good morning, Paul."이라고 인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원래부터 이름을 알았는지, 제 인사를 듣고 알았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기분에, 제 덕에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싶더군요. 어쨌든 이후 매일 아침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크로싱 가드 이름이 폴이라는 걸 동네 사람들이 점차 알게 된 것이죠. 지난주에는 정원일을 하던 중 마주친 이웃집 데이브에게 크로싱 가드 이야기를 하며 그의 이름이 폴이라는 걸 알려줬습니다. 새로 온 것만 알고 있고 이름은 몰랐는데 알려줘서 고맙다고 반색하더군요. 이렇게 물감이 한 방울씩 물에 떨어지듯 알려지는 그의 이름은 우리 마을 이웃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이 그의 자리를 만들어 주겠지요. 제 이웃들이 첫 만남에서 제 이름을 제일 먼저 물어봐 준 것처럼 말이죠.




재미있게 본 애니메이션 중,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 이 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의 감독 인터뷰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거나 상대방의 이름을 묻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름을 묻는 것으로부터 관계가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이웃의 이름을 물어보고, 내 이름을 알려주고, 내가 가진 다른 것이 아닌.. 내 이름으로 이웃과 관계를 맺는 미국의 이 문화에 여전히 익숙해지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름으로 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처음에는 이웃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 난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름을 물어보지 않는 실례를 범하기도 합니다. 쉽지 않네요. 저 역시 아직도 이전 직장 동료들로부터 O수석님이라고 불리는 게 현실이니까요. 회사 떠난 지 3년이 됐는데 말이죠.


이제는 더 이상 누구 아빠라고 불리거나 O부장이라고 불리거나 하지 않고 이름으로 불리고, 이름으로 관계를 맺고, 이름으로 친절을 베풀고자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웃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기억하려 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이 나라의 문화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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