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마을 Jul 30. 2021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2020.1.30.


미국 학교에는 crossing guard라 불리는 교통 안내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돈을 받기는 하지만 사실상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준도 아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에 관계없이 교차로에 서서 등하교 시간에 차량을 통제하고 아이들이 길을 건너는 것을 지켜줘야 하는 힘든 일이기 때문에 봉사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Crossing guard 가 없을 땐 경찰이 나와서 합니다. 한국의 녹색 어머니회 같은 역할이라고 하면 쉽게 상상이 되는 그런 일입니다.




아내에게서 아이들 학교 정문의 crossing guard인 미셸이 이번 주를 끝으로 은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노부인인데 아무래도 날씨 험한 날에도 우산조차 쓰지 못하고 도로에 서서 일을 한다는 게 어려워 보였는데 결국 그만두기로 하셨나 보더군요.


오늘 출근하려 집을 나왔는데 마침 미셸이 도착하는 것을 봤습니다. 근처 교통 여건상 항상 저희 집 드라이브웨이에서 차를 돌려 집 앞에 주차해 놓고 교차로로 나가 일을 하기 때문에 자주 인사하는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재활용품을 잘못 내놓으면 친절하게 바로잡아 주기도 하고, 타운십에 전화해서 따질 일 있으면 어디에 전화하면 되는지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이 동네 이사 와서 악수하고 이름을 주고받은 첫 이웃이기도 합니다.


차를 타려다 다시 문을 닫고 교통 안내 점퍼를 꺼내 입는 미셸에게 다가가 은퇴한다는 이야기 들었는데 많이 아쉽다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좀 더 했는데, 듣고 보니 무려 30년간 지금 위치에 서서 crossing guard로 일을 했다더군요. 심지어 아이들 손을 잡고 오가는 부모들 중 몇은 자기가 crossing guard 일을 시작했을 무렵 학교 다니던 아이들이었다고. 어쩐지 등하교 시간에 몇몇 부모들이 반갑게 인사하며 small talk을 나누더라니 한두해 인연이 아니었던 겁니다.


여러 인상 깊은 모습을 자주 보였던 노부인인데, 그중 한 번은 지금도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날따라 일찍 퇴근해서 집에서 잔디를 깎고 있던 중 아이들 하교 시간이 됐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고 난 뒤 얼마 안돼서 고학년으로 보이는 한 여자 아이가 동생이 집에 왔어야 하는 시간이 지났는데 안 왔다고, 자기가 챙겼어야 하는데 깜빡했다고 펑펑 울면서 미셸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미셸이 그 아이를 다독 거리면서 동생의 이름을 정확히 대며 동생이 평소와 달리 누나가 아니라 친구하고 길을 건너길래 어디 가는지 물어봤는데 그 친구 집에 놀러 간다고 했다면서 마침 지나가던 다른 아이 부모를 불러서 이 아이를 누구네 집에 데려가서 동생이 거기 있는지 같이 확인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거였습니다. 어떻게 일이 진행될까 잠깐 마당에 서서 지켜봤는데 잠시 후 그 여자 아이가 (한국식 표현으로 하자면) 동생 머리를 쥐어박으며 나타나더군요. 오가는 아이들의 이름을 아는 것도, 그 아이들이 평소와 어떻게 다른지 캐치하는 것도, 누구네 아이이며 집은 어디인지 아는 것도 그리고 지나가던 다른 부모의 이름을 부르며 동네 꼬마에게 심부름시키듯 부탁을 하는 것까지 그 모든 모습이 제게는 마법처럼 보였습니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하루 두 번씩 교차로에 서서 교통정리하는 게 힘들어 은퇴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동네에 계속 살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오가며 제 아내와 아이들은 계속 마주치겠지만 일찍 출근하는 저는 얼굴 볼 일 있을지 모르겠다고 농담을 하며 크게 웃는 미셸을 보며 저도 같이 소리 내서 웃었습니다. 미국 와서 웃는 횟수가 많이 늘었지만 그럼에도 동네 주민과 대화하다 그렇게 웃어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인사하며 악수하려 손을 내밀었는데 제 손을 보고 미셸이 잠시 미소를 짓더니 한걸음 다가와 저를 크게 포옹했습니다. 당황해서 잠시 멈칫했던 저도 곧 손을 올려 같이 마주 포옹을 했습니다. 그 후 차를 몰고 나와서 출근하는데 손바닥에 알 수 없는 따뜻함이 계속 남아 있더군요.


예전에 세이브 더 칠드런의 김희경 님이 칼럼을 통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그 최전선은 마을 이라고요. 미셸은 우리가 사는 마을을 더 낫게 바꾸는, 그래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 있는 그런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나이가 있으신 만큼 앞으로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래 미셸과 마주치고 인사하며 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급적 자주 만나기를, 그리고 오래 같은 마을 주민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전 21화 봄 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