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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Apr 03. 2023

봄날의 햇살

어느덧 7학년의 두번째 학기를 지나고 있는 첫째는 친구를 사귀는 범위가 초등학생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넓어졌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학교를 오갈 때 날씨가 좋지 않으면 차를 끌고 데리러 가곤 했었는데 요즘은 아이가 친구들과 동네로 걸어 오면서 웃고, 뛰고, 장난치며 오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차를 돌려 다른 길로 오고는 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을 부모가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미국에서 아이들끼리 걸어서 학교를 다니는 일은 없을 거라는 제 편견과 달리 저희 동네는 초등학교 3학년 이상만 되면 아이 혼자 걸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습니다. 저희 집의 경우 2학년인 막내는 5학년인 둘째가 데리고 갑니다. 7학년인 첫째는 말 할 것도 없죠. 그리고 7학년쯤 되면 이제 자기들끼리 몰려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길어진 첫째의 친한 친구 목록에는 제가 살면서 가져보지 못한 친구가 두명 있습니다. 한 친구는 발달 장애를 갖고 있고 다른 친구는 자폐가 있습니다. 네, 장애를 가진 친구들입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그런 친구들이죠.


어른이 된 지금은 압니다. 제가 어린 시절 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사귈 기회를 갖지 못했던 건 그런 친구들이 정말 드물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처음으로 미국에 와 봤던 그 해, 샌디에고 시내에서 미국은 왜 이렇게 장애인들이 많은지 의아해 하다가 문득 찾아온 깨달음에 버스 주차장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버스를 타는 장면을 보면서 멍 해져서 굳어 있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장애인의 비율은 비슷해야 정상이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보다 미국에서 시내를 다니는 장애인들을 많이 보는건 장애를 대하는 두 사회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라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달았으니까요.



장애를 가진 친구를 사귈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저와 달리 첫째는 교실에서 많은 장애인 친구들과 생활을 합니다. 교육청에서 매년 발간하는 리포트를 보면 첫째가 다니는 중학교는 전체 학생의 18.5% 가 어떤 형태로든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중증도 있고 경증도 있겠지만, 20명이 한팀으로 묶여 있는 아이의 수업 친구들중 최소 3~4명은 장애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18.5% 가 유난히 높은 비율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국 공립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장애 비율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한 숫자를 보이고 있으니까요. 노인이 되어, 교통사고로, 혹은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등등 후천적인 장애의 비율이 낮을 수 밖에 없는 어린 청소년들의.. 그러니까 선천적인 장애의 비율이므로 매년 크게 바뀔 수 없는 수치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일반 공립 학교를 함께 다니기에 어느 학교든 장애를 가진 학생의 비율은 비슷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일반 공립 학교를 함께 다니기에 어느 학교든 장애를 가진 학생의 비율은 비슷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학교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은 장애를 가진 친구를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의 대상이 아닌 각자의 개성을 가진 많은 다른 친구들중 한명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첫째 아이를 보면 발음을 정확하게, 빨리 하기 어려워 하는 발달장애를 가진 친구와는 대화를 천천히 합니다. 그 아이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게 서로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이 뒷마당에서 미니 골대를 세워놓고 축구를 할 때 봐주는 법은 없습니다. 서로가 온 힘을 다해 이기려고 애를 씁니다. 자폐를 가진 친구는 더 할 나위 없이 선한 아이지만 자신의 감정과 주위의 반응을 쉽게 연관짓지 못합니다. 뭔가에 집중이 되면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기 일쑤죠. 하지만 저희 첫째는 그 친구의 감정 기복에 함께 춤을 추기 보다 그 친구의 선한 의도만을 받아들입니다. 저희 첫째가 유별나게 착한게 아닙니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자폐를 가진 그 아이가 갑자기 뭔가에 정신이 팔려 먹던 음식을 놔두고 다른 곳으로 가면 그걸 투덜거리기 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손이 가까운 아이가 나서서 대신 정리를 해주니까요. 마치 제가 어렸을 때 물건 챙기는 걸 자주 잊었던 친구의 소지품을 별 불만 없이 챙겨줬듯이 말이요.


지켜보면, 이 아이들에게 장애는 이해의 대상이자 각자의 개성의 영역이지 조건없는 양보와 배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장애는 이해의 대상이자 각자의 개성의 영역이지 조건 없는 양보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처음으로 자폐를 가진 사람과 마주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성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는데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우왕 좌왕 하기만 했던 그 기억을 말이죠. 제가 유별나게 이해심이 모자라서, 사고의 넓이가 협소해서 벌어졌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라면서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에 처음 겪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생겼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미국 공립 학교에서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첫째는 그렇게 말하더군요.


"쟤는 원래 그래요."


그 말에는 당황스러움도, 짜증도, 우월감도, 자신이 배려한다는 뿌듯함도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쟤는 키가 커요." 라는 말과 완전히 동일한, 그저 사실 관계를 설명하는 무심함만 담겨 있습니다. 아마 그 무심함에 아빠가 얼마나 큰 감동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요.



넷플릭스에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폐를 가진 주인공이 변호사로 겪어 내는 많은 일들이 소재인 드라마였습니다.


주인공인 우영우는 친구인 최수연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우영우가 최수연을 그렇게 부른건 항상 자신을 잘 챙겨주고, 지켜주고, 배려해주는 최수연이라는 존재가 자기에게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고마운 존재라는 의미에서입니다. 극중에서 최수연은 마음 한켠으로는 우영우가 미울때도 있고 짜증날때도 있지만 자폐를 가진 그를 놔두지 못하는, 선한 마음에 계속 챙기는 인물로 그려지지요.


'봄날의 햇살' 이라는 그 대사는 극중의 의미와 함께 많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장애인에게 봄날의 햇살과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는건, 그런 존재가 곁에 있는게 의미가 있다는 건 반대로 그들이 겪어내야 하는 일상이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죠.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건 그들을 지나치게 배려하고, 그들에게 과하게 양보하는 봄날의 햇살과 같은 그런 친구들이 아니라 무심하게 "쟤는 원래 그래" 라며 이해는 해주되 과한 양보 없이 툭탁거리며 함께 어울리는, 극중 동그라미와 같은 친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었습니다.


우영우 변호사에게 동그라미가 있듯,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도 “조린 우엉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주는대로 먹어 동그라미 김밥이다!" 라고 외칠 이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장애를 가진 친구와 청소년기를 보내본 적이 없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학교 후배중 한명이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는 했으나 자주 어울리는 후배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적이 있고 동아리 방에서 자주 대화를 하긴 했으나 그 경험으로 제가 많은 장애인을 만났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그런 제가 장애인들이 어떤걸 원하는지 예상한다는건 어쩌면 오만한 생각일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져 보지 못한 중증 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가진 첫째는 제게 그렇게 말합니다.


"쟤는 원래 그래요."


그리고 그 친구들과 함께 공을 차고, 사춘기다운 농담을 주고 받고, 가끔은 서로 짜증을 내고 다투며 그렇게 지냅니다. 분명한건 저보다 제 아이가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을 훨씬 잘 알고 있을것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아이에게 항상 남을 배려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오늘, 배려 하지 않음이 거꾸로 배려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 이 아이가 제게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사롭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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