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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Jun 21. 2023

미국땅을 밟은지 5년이 됐습니다

며칠전 세탁기를 새로 샀습니다.


지금 집으로 이사올 때 이전 주인이 놓고 갔던 오래된 세탁기가 고장났거든요. 수리 불가 수준으로요. 미국에서 제법 오래 산 분들은 내가 고른 세탁기를, 내가, 내 돈 주고 사서 설치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기분, 어떻게 글로 잘 설명이 안되죠.


세탁기 브랜드는 정말 1도 고민 안했습니다. 홈디포 웹사이트에서 필터를 Samsung / LG 두개만 걸어 놓고 골랐습니다. 당장 세탁기를 쓸 수 없어 빨래가 쌓이기 시작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격보다는 배송이 더 빨리 되는 걸 찾았고 LG가 이틀 더 먼저 도착한다고 되어 있어 LG 세탁기로 구매했습니다. 이왕 돈 쓰는거, 건조기도 세트로 함께 샀고 설치 옵션도 구매했습니다.


설치 당일.


설치 기사들이 건조기 설치를 먼저 끝내고 세탁기를 보더니 배수 구조가 메뉴얼에 나와 있는 구조가 아니라 자기들은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원래는, 당연한 상식이지만, 세탁실에 배수 시설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이전 주인이 집을 확장 하면서 원래 배수 시설이 있던 공간은 수영장 필터 및 water softner 를 놔두는 용도로 변경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는 배수 시설이 전혀 없는 곳으로 옮겨 놓은 뒤에 PVC 파이프로 배관을 따로 했거든요. 문제는, LG 세탁기의 drain 용 고무관의 지름이 이 PVC 파이프의 지름과 거의 같아서 연결이 안된다는, 끼워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전 월풀 세탁기는 고무관이 더 굵어서, 그러니까 PVC 파이프가 딱 맞게 끼워져서 쉽게 연결이 됐던 거구요.


세탁기를 샀는데, 그리고 빨래감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는데, 이용할 수 없다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좋은 생각 없냐고 설치 기사에게 물어보니 그는 plumber 를 부르라는 친절한 조언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한번 부르면 돈이 얼마인데, 무작정 plumber 를 부를 수는 없는 일이죠.


설치 기사가 가고 나서 곧바로 동네 홈디포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Piping 을 위한 부품들을 골랐습니다. PVC와 chemical welding 이 되지 않는 고무관.. 그것도 굵기가 같아서 직접 연결이 안되는 두 지점을 이어야 해서 아이디어도 좀 필요했습니다.


- 고무관은 water sealer 를 바른 금속 파이프를 밀어 넣은 뒤 clamp 를 이용해서 꽉 조이고,

- 금속 파이프 thread 가 있는 쪽에 water sealing tape 를 잘 감은 뒤 같은 규격의 PVC 커넥터를 체결하고,

- PVC 커넥터는 배수관으로 이용하는 PVC pipe 와 chemical welding 으로 연결했습니다.


말은 쉬운데 각 부품들의 호환/규격 여부를 따지느라 골치 좀 아팠고 덕분에 홈디포를 두번 왕복했습니다. 어쨌든 지난달 수영장 필터로 연결되는 PVC 파이프가 깨져서 교체하느라 PVC piping 을 경험해 봤고, 그 때 산 primer 나 cement 같은 PVC welding용 chemical들이 집에 있고, 또 제가 사용해봤다는 경험이 piping idea를 떠올리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걱정하며 동작시킨 세탁기. 배수가 잘 되는걸 확인하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뒤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미국 사람 다 됐네요" 라고 하더군요. 웃으며 답했습니다. "그렇죠?"


메뉴얼에 없어서 자기가 설치하는게 금지되어 있다는 설치 기사의 말에 화가 나지 않고, 웃는 얼굴로 그들을 배웅한 다음, 홈디포에 가서 부품을 사와서 직접 piping 을 할 생각을 하고, 또 실제로 작업해서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걸 보면 정말 아내 말대로 미국 사람 다 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내일은 제가 가족과 함께 미국 땅을 밟은지 꼭 5년째 되는 날 입니다. 말, 5년이 이렇게 시시하게 지나가는 시간이었다니.


영주권을 받고 미국땅에 랜딩한 사람들에게 이 5년이라는 시간은 의미가 남다릅니다. 미국 시민권 신청 자격이 생기기 때문인데, 선천적으로 부여된 국적이 선택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죠. 국적과 맥도널드 햄버거가 같은 카테고리로 묶이는건, 그러니까 선택 가능한 대상으로 취급 받는건 쉽게 하기 힘든 경험입니다. 아무래도 그러다 보니 5년이라는 시간을 기점으로 자신의, 이민자로서의 삶을 돌아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시민권을 받든 받지 않든 말이죠.


5년이 이렇게 시시하게 지나가는 시간이었다니


지난 5년이 원했던 대로 흘러갔느냐 하면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답하겠습니다. 순탄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미국 와서는 술 없이는 불안감에 잠을 잘 수 없었던 날이 많아 엄청나게 주량이 늘었다고 답하겠습니다.


어쨌든 미국 이민을 결정하면서 원했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며 지난 5년을 돌이켜 보면,



원하는 곳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애틀란타 인근에서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거기로 랜딩을 했습니다만,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뉴저지로 올라왔습니다. 뉴저지가 나쁜 동네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민자에게는 이민 가방을 들고 처음 도착한 곳이 고향이 됩니다. 고향의 정의를 항상 그립고, 늘 생각나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곳 이라고 한다면 말이죠. 정말 좋은 동네였고, 좋은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애틀란타를 떠난 이후 늘 고향을 떠난 기분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큰 돈 지출은 여전히 계산기 두드리고 걱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연봉도 그렇고 미국와서 쌓은 자산도 그렇고, 한국에서 살 때 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됐다는 느낌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커리어 래더가 많이 올랐습니다.

한국 회사에서의 마지막 타이틀은 Principal engineer 였으나 미국에서 job을 구하면서 Senior engineer로 등급을 낮췄습니다. 업무 부담에서 벗어나 좀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어서도 있었지만, 일단 job을 구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략 1년 뒤에 개발 director가 되었고 2년 뒤에 VP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회사의 경영진으로서 실무자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심한 스트레스와 사내 정치 속에 살고 있지만 그럭 저럭 견디고 있습니다. 사실 실무자로 은퇴하고 싶어서 미국에 왔기에 이런 승진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지만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피하지 못했습니다. 어쩔수 없이 일하는 시간이 많이 늘었는데, 그래도 늘 4시에 퇴근했다가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9시 이후 집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매일 저녁의 중요한 가족 이벤트, 저녁 식사와 책 읽기는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체력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 하던 시절에는 뭐가 그렇게 여유가 없었는지 운동과 거리가 멀었지만 미국에 온 이후 여유 시간에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전반적인 체력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한시간 빠르게 걷는 것도 힘들어 했었는데 이제는 길면 5~6시간 동안 쉬지 않고 100km를 자전거로 달릴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은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아름다운 트레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매주 새로운 곳들을 찾아 다닐 수 있을 만큼 말이죠. 덕분에 고질병이었던 무릎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아이들과 많이 가까워 졌습니다.

미국에 온지 1년이 되던 때인가, 첫째가 엄마에게 그랬다더군요. 영어도 어렵고 미국온거 다 별로지만 하나 좋은게 아빠와 많이 친해진 것 같아서 좋다구요. 저도 그렇게 느낍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말도 못하게 길어졌고, 훈육법도 이웃들을 보며 많이 고쳐서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습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 보니 아이들에게 직접 요리를 해줄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습니다. 항상 새로운 레시피로 실험하듯 하는 제 음식을 아이들은 '아빠요리' 라는 별칭으로 부릅니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낚시도 가고, 카약도 타고, 캠핑도 합니다. 게임도 같이 하구요. (첫째와는 스타크래프트를, 둘째 셋째와는 마리오카트나 파티를 주로 합니다.) 며칠전 첫째가 제가 주말에 장거리 라이드 나갈때 같이 가서 함께 자전거 타고 싶다고 했는데, 아마 이번 여름부터는 주말에 함께 자전거를 차에 싣고 나가 트레일을 다닐 듯 합니다.



아내는 자기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집에 거의 없는 제 몫까지 아이들 돌보느라 아이들에게 묶여 있는 전업 주부로 살아야 했었습니다만 미국에 와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에선 아이들 셋 라이드를 한다지만 어차피 동네에서 다니는 거고 저도 일찍 퇴근해서 함께 하기 때문에 그렇게 정신없이 바쁘지 않습니다. 아내는 그렇게 생긴 여유를 이용해 커뮤니티 칼리지를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있고 동시에 재택으로 일도 하며 돈 버는데 사용합니다. 또 지난 5년 꾸준히 공부한 덕에 아내의 영어가 많이 늘어서 아이들 학교 친구 엄마들과도 자주 교류를 합니다. 학교 봉사 활동도 자주 다니고 마실도 다니고 하다 보니 친해진 엄마들이 제법 있습니다. 이민 초기에는 학교에 몇 되지도 않는 한국 엄마들과만 어울렸었는데 이제는 더 폭넓게, 인종에 무관하게 교류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듣는 학교 정보, 동네 정보도 폭증하더군요. 어제는 다른 엄마들과 그룹챗으로 수다를 떨다 말고 이제야 이 동네 주민이 된 것 같다는 말을 하더군요. 여튼 그렇게, 세상 즐겁게 그리고 바쁘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삽니다.



이웃들을 자주 초대합니다

한국에선 친구나 이웃 가족 전체를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신혼 때는 그나마 가끔 부부 동반으로 모이던 고향 친구들도 각자 애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는 온가족을 다 데리고 만난 적이 없네요. 그런데 미국에선 정말 자주 초대를 하고 초대를 받습니다. 매달 두세번 정도는 다른 가정을 초대해서(혹은 초대 받아서) 주말 저녁을 함께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끼리도 친구고, 부모들도 친구인 가정들이 늘었습니다. 저는 이게, 가족대 가족으로 어울리는 이 문화가 다른 어떤 미국 문화보다 좋습니다. 나중에 많은 시간이 흘러 제 아이들이 또 아이를 낳아 기르는 때가 되면, "우리는 할아버지때부터 친하게 지낸 가족이야" 같은.. 제가 사는 동네에서 오래산 가정의 아이들이 하는 그런 말을 제 손자/손녀들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크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라는게 아이들이 잘 크는 건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 부부는 항상 애들은 애들 답게 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최소한 여기 미국에서 저희집 아이들은 그렇게 크는 것 같습니다. 딱 그 나이에 맞게 반항하고, 기상 천외한 방법으로 사고를 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고, 숙제와 공부는 언제나 제일 후순위고, 친구 때문에 울고 웃고, 온 힘을 다해 뛰어 놀고... 그렇게 자라고 있습니다. 각자 하고 싶은 운동이나 악기를 골라서 배우고 있어 아이들 라이드 횟수가 많지만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하는데 감당해야죠.  


가족의 결속력이 좋아졌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아내와 언성을 높여 본 적은 없지만 미국에 온 뒤로는 이 관계에 아이들이 추가 됐습니다. 한국에서는 제가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워낙 부족해서 아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화를 내는 경우도 많았는데 여기서는 온 가족이 워낙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제가 '내 멋대로 상상하는, 내 이상적인 기대에 맞는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 아이의 모습' 을 보고 아이를 이해하게 되는 부분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점점 줄고 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재작년 까지는 좀 무섭게 혼내고는 했는데 막내로부터 그러지 말라는 잔소리를 들은 이후 아이들에게 언성을 높인 기억이 없습니다. 한창 사춘기인 첫째와 둘째에게도 나즈막한 목소리로 바라는 바를 전달할 뿐 그 아이들의 반항과 고집에 함께 분노하거나 고함을 친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 청소 내기를 건 마리오카트 경주부터 각종 학교 행사는 물론이고 매달 가족이 함께 다니는 봉사 활동까지 정말 모든걸 온 가족이 함께 하다 보니 저와 아내도 아이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고 아이들도 엄마 아빠를 이해해 주는 부분이 많아졌습니다.





지난 5년 돌이켜 보면, 미국에 오면서 기대했던 그런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90퍼센트 정도는 말이죠. 기본 옵션으로 딸려 있는 좋은 날씨는 제외하고도 그렇습니다. 어제 아내와 그랬습니다. 미국 오길 백번 잘했다고.


미국 오길 백번 잘했다




앞으로의 5년은 또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 글에 적은 것 처럼 좋은 것만 바라보면 한 없이 좋은 세상일테고, 적지 않은.. 그러니까 못마땅한 것만 바라보면 한 없이 나쁜 세상이겠지요.


하지만 큰 차이가 있을까요? 더 험난할 수도, 혹은 순탄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5년전 미국행 비행기에서 읊조렸던 말을 다시 한번 되뇌이면서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게든 또 살아 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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