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나도 가끔은 이런 날 있어야지.

by Aner병문

백순대 먹으러 인근까지 왔다더니 새벽녘 옛 영화가 불쑥 단톡방에 올랐다. 장마랍시고 이틀 걸러 몰아치고 마르더니 밤새 비바람 휘모는 소리가 요란한 새벽이었다. 너는 산을 뽑아 하늘을 메울 힘이 있다던 옛 장수의 마지막 전투처럼 다양한 관계에 에워싸여 있었다. 어째서 때때로 사람은 사람을 그냥 둘 수 없는 것일까, 한동안 묻어두었던 불쑥 올라와 잠들기 어려웠다. 물러가는 잠끝에 무릎과 발목의 통증이 되살아나 날뛰었다. 백일 넘긴 아이는 밀려오는 창 밖 소리에 맞춰 또다시 바동거리며 다리를 구르고, 밤새 몸이 가려워 고생하던 아내는 그런 아이를 품에 넣고 잠들어 있었다. 오래 전 설명할 길 없는 열망에 몸을 사르며 바다 맞닿은 남쪽 도시에서 밥과 잠을 얻어살 때, 폭풍우 치던 바다 위에서 서로 엮인 몸을 출렁이던 낡은 배들이 떠올랐다.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아서, 제아무리 뉜가에 엮어놓는다 한들 들끓어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 오래 전 북촌 시절, 나는 너가 좋아하는 감독의 다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관계를 고찰하는 눈이 탁월하여 이 밤에 적합한 영화였었다. 한국무용을 전공했다는 여배우의 목선이 길고, 손끝이 고와 눈에 깊게 남는다.



비는 말랐던 도로 위로 끓듯이 튀었다. 아침 이른 버스는 이런 날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데, 아마 하루를 또 벌어먹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는 이들 때문일 터이다. 창 밖으로 물안개가 호수처럼 번져서 나는 새삼 오랜만에 마음 속으로부터 움트듯 밀려나오는 생각에 어지러워 쪽잠조차 잘 수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나는 점점 무공 훈련을 하기 어려워졌고, 습작을 하긴커녕 책을 읽거나 일기쓰기에도 쫓기게 되었으며, 어쩌다 시간이 남으면 자거나 다른 나라의 말들을 강박처럼 외웠다. 결국 총각시절 마음편히 갈망하던 영역들을, 결혼하며 자연스레 다른 생각들로 메우게 된 것인데, 마땅히 일가를 이루어 꾸리는 자의 책임이라 할 것이다. 다만 무게를 불려 한 푼이라도 더 받고자, 비 내리는 밖에 세워놓은 폐지 수레를 보며 나는 어느 틈에 수레의 외로움보다 수레 주인의 고단한 삶을 먼저 생각하는 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나는 멀리 돌아가는 문장보다 깊게 찔러오는 문장을 골라 읽게 되었으며, 몸 또한 그렇게 단순하고 얕아져갔다. 따라서 흰 여백에 앙상한 문장 몇 마디 끄적이다 기어이 쳐내는 사무실 구석에서, 너무 행복해서 말라버리는 마음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울했었다. 비는 오늘 내내 하염없이 온다. 나는 이런 날 늘 술을 마셨으나 이제는 그러기 어렵다. 가끔은 스스럼없이 너를 보고 돌아오던 길에 수염큰형님과 그늘에 주저앉아 캔맥주 하나씩 따던 오후 무렵 그때 그 북촌이 그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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