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F 962일차 - 가끔은 아득하지 않게 느껴지는 태권도
절기가 바뀌면서 나는 비염이, 아내는 아토피가 도져서 조금 고생 중이다. 아내는 나보다 훨씬 강한 항히스타민제를 처방받아, 나보다 더 자주 먹는데 보통 그 약이라는게 졸음을 끌어오기 마련이므로, 아내는 더욱 피곤하고 힘들어했다. 그러므로 아내는 그저께 내 늦은 퇴근길에 풀 죽은 목소리로 전화하여 냄비를 두 개나 태웠다고 고백하였다. 안그래도 자발자발 기운이 넘치는 아이 꽁무니 쫓아다니느라 정신없는데 몸까지 졸려서 늘어지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터이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좌우지간 나도 이래저래 힘든 철이라, 말없이 소주에 고량주 섞어 한두 잔 마시고, 술기운에 집 정리 싹 하고, 또 몇 시간 눈 붙였다가 출근 전 일어나 밀린 손빨래를 처리하고 나니 기진맥진, 게다가 밖에는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오는데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어데 놀이터라도 나가야 그나마 기운을 빼서 낮잠이라도 재울텐데, 좁은 집 안을 휘젓고 다닐 아이를 아내 혼자 건사할 수 있을 것 같지 아니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회사에 급하게 이야기하여 하루 연차를 낸 뒤 아내를 조금이라도 쉬게 하고, 아이를 돌보다 나도 기진맥진 까무룩 잠이 좀 들었고, 어중간한 시간에 일어나니 아내는 아이를 낮잠 재우면서 자신은 많이 나았다고, 저녁에는 아이 고모가 퇴근하니 잠시 시댁에서 좀 쉬겠다며 나더러는 도장 가서 몸이라도 좀 풀고 오라고 선선히 허락해주었다.
그러므로 남들 퇴근할 시간에 빗길을 뚫고 도장으로 향하며 나는 '아득함' 에 대해 생각치 않을 수 없었는데, 아이가 주는 아득함이란, 언제 커서 무엇이 되려나 하는 생각도 있으나, 이 건강하고 기운 넘치는 아이가 오늘은 또 무슨 말썽을 피우고 어떤 일을 하려나 싶은 마음부터 하여, 매일매일 쌓이는 설거지, 빨래, 먹을거리 챙기기 등이 있을 터이고, 나의 아득함이란 생업부터 시작해서, 책에서 읽는 문장의 아득함 같은 것도 있다. 요컨대 요즘 읽는 랑씨에르의 에쎄이는, 칼릴 지브란이나 가스똥 바슐라르처럼 강력힌 심상들을 연달아 투사하는데, 형이상학적 문장이란 대저 개념을 확실히 전달할때도 있지만, 애매하게 에둘러 전달하거나 숱한 해석의 여지 또한 있어서 올바른 뜻을 찾기란 역시 아득하다. 태권도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라서, 교본에 적힌대로 훈련하거나 상상 속의 완벽한 기술을 구현하기란 정말 어렵지만, 어제 같은 경우엔 내가 태권도를 하고 있구나, 적어도 오늘 몇 개의 어떤 기술을 했구나 라고 손에 잡힐 듯 느껴져서, 매일매일 아이가 생산해놓은 가사 노동의 가늠할 수 없는 양이라거나, 책이 내게 전하는 광범위한 범주를 휘젓고 다니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누구나 그렇듯 인간의 삶은, 무엇 하나 예상대로 예측되는 일이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