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독서감평)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 정치를 규정하기 위한 또다른 시각

by Aner병문

자끄 랑씨에르, 양창렬 역,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길, 2013. 개정판, 한국.



그러므로 태권도는 가라테에서부터 출발하였지만, 가라테와는 다르다. 서양인들은 비슷한 도복에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라테와 태권도를, 심지어 유도와 가라테/태권도도 구분치 못하는 이가 흔하다. 비단 서양인들만의 특색은 아니며, 동서양,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공과 막싸움을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므로 모든 나눔은, 결국 구별짓기다. 태권도는 태권도만의 도복과 규칙과 움직임의 원리가 있고, 가라테와 유도와 검도는 또한 각각의 고유한 개념이 있다. 그러므로 아는 이에게는 가라테와 태권도와 유도와 검도를 모두 구별하고 알맞게 설명할 수 있지만, 때로는 명료하게 구분지어지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 많다. 소설가 심상대 선생은 '나쁜 봄' 이라는 소설을 쓰며 스스로 대명사 '것' 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즉, 모든 단어들을 정확하게 썼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으나, 세상에는 '것' 으로밖에 설명하거나 대치할 수 없는 개념들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끄 랑씨에르 의 '정치' 란, 이것이다 저것이다 규정되는 것이 아닌, 단지 어느 범주에서부터 어느 범주까지 걸쳐지는 내용에 더 가깝다. 거대한 해운도시국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정치란, 이 해안에서 저 해안으로 건너다니는 거대한 배와 같은 개념이기에, 그러한 심상을 공유하는 이들은 아테네의 정치를 좀 더 손쉽게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바다나 항해를 모르는 이에게 아테네의 정치 체제는 훨씬 더 어렵거나 낯설고 생경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자끄 랑씨에르는, 현대에서 정치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듯한 민주주의를 예로 들며, 민(民)에 해당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계급이 있을텐데, 그들의 뜻을 모두 반영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를 되묻는다. 그러므로 다수결은 사실상 거대한 합의의 허상이자 폭력이며, 모든 개인과 계급의 뜻을 온전히 반영할 수 없기에 저자가 젊었을때부터 겪은 정치란, 곧 계쟁- 즉 계급 투쟁의 불화 그 자체였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정치는 마치 내가 그토록 흠모해온 공부자의 통치술처럼, 투명한 이상을 아름답게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불화들을 생활의 공간으로 끌고 들어오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합의는, 저자가 생각하기에 결코 두 계급의 원만한 중도라기보다, 차라리 정치를 소멸하고 제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치는, 두 투쟁이 끊임없이 반복되거나, 두 계급의 이익이 모두 온전하게 반영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저자는, 정치가 이것이다, 라고 규정하지 않고, 단지 10가지 테제Thesse를 규정하여 정치가 가져야할 속성에 대하여 논하였다. 플라톤은 일찍이 정치를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지배할 수 있는 자의 일곱 가지 자격에 대해 논했는데, 자끄 랑씨에르의 테제는 이를 정면으로 논박하기도 하고 혹은 일부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는 정치의 범주를 논하는 것처럼, 문학의 범주나 혹은 다른 철학자의 주장의 범주를 규정짓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도 그는 함부로 타인의 의견을 정의하거나 논파하기보다, 역할의 범위를 정해주거나, 혹은 그 범주의 한계를 정해주는 것에 그친다. 지독히도 조심스러운 철학자다.



그러나 일전에 말했듯, 그의 문장은 선연하며 번역은 유려하다. 비록 어려운 번역체의 말투라도, 어느정도 하고자 하는 말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 그는 정치의 모든 핵심이, 불화와 계쟁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결국 이를 유지코자 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내용이다. 치안은 법에 따라서 타인을 규정짓고 지배, 억압코자 하는 일이며, 문학 또한 어차피 허상의 담론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의 불화나 계쟁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라고 나는 해석했다. 솔직히 문학이야말로 시대를 비판하는 가장 손쉬운 도구중 하나일텐데..?) 옮긴이 양창렬 선생은 박사 과정에 있으면서 자끄 랑씨에르의 많은 글들을 쉼없이 번역해온 이 중 하나인데, 공교롭게도 그는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선거보다 몇 년 앞선 선거를 겪으며 개정판을 내었다. 내가 사실 이 얇지만 어려운 에쎄이를 읽고자 마음 먹은 때는, 옮긴이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동안 내가 '그나마 정의로웠고, 비교적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지금의 야당이 여당으로 집권하는 동안, 더할 나위없는 실망과 한계를 안겨주었으며, 정말이지 정당정치는 내 뜻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구나, 옛 사대부들처럼 과거를 통과해버리면 누구나 변해버리듯이, 의원 나으리들도 마찬가지구나, 어째서 요즘같은 정보화 시대에 내 뜻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안되는 걸까, 라는 고민을 할 무렵, 철학VS철학 개정판에서 강신주 선생이 하도 찬탄을 하기에 읽어보았다. 모든 태권도의 기술이 그렇고, 책이 그렇고, 음식이 그렇듯이 한번 접하여 알 수 없겠으나, 역시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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