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철학VS철학, 구판, 그린비, 한국, 2010 / 개정판, 오월의 봄, 한국, 2016.
찬란한 황하 문명을 시작하던 주나라가 약해지고, 이른바 춘추와 전국으로 접어드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중국대륙에 시작되려 하니, 바야흐로 사람들은 권력과 재물을 위해 서로를 죽이기도 예사였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시절에, 조양자가 지백을 죽인 일 또한 그저 그런 권력자들끼리의 다툼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지백의 수하이던 협객 예양은 스스로 재래식 뒷간에 몸을 숨겼고, 숯을 삼켜 목소리를 바꿔가며 억울하게 죽은 제 주인의 복수를 하고자 했다. 지백을 죽인 것도 모자라, 그 해골에 옻칠을 하고, 눈구멍과 콧구멍, 잇몸새를 모두 수은으로 때워 요강으로까지 써가며 모욕을 주었던 조양자는 그러나 끝내 예양의 암살 시도를 막아내는데, 더는 용서할 수없어 예양을 죽이기 전 자신의 겉옷을 내어준다. 겉옷이라도 베어 저승갈 적 옛 주인을 만나 체면이라도 세우라는 옛 사람 식의 여유부리기였을 터이다. 비록 분뇨독에 몸이 상하고, 뜨거운 숯을 삼켜 목소리까지 변한 예양이었으나 공손히 절을 한 뒤 옛 주인을 죽인 원수의 겉옷이나마 베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며 남긴 말이 지금도 뭇 사내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인은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이를 위하여 화장을 하고,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
내 나이도 어느덧 마흔에 가까워오는데, 누가 알아준다고 새벽녘 일어나서 좁디 좁은 5층 방에서 혼자 연습을 하거나, 주먹질, 발길질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서 이제 더이상 누굴 가르친다거나, 알려준다거나, 혹은 토론을 한다거나 하는 학술적인 일을 할 환경도 없지만, 그저 한때 고등교육을 받았던 청춘의 말석을 떠올리는 행위라 해도 좋고, 아니면 그냥 단순히 늙어버린 풋먹물의 치기라고 해도 좋다. 좌우간 나는 이십대 후반까지 끊임없이 강신주 선생의 철학VS철학을 읽어왔고, 결혼한 이후에는 장모님께 개정완전판까지 선물받아 지금까지 계속하여 교차하여 읽어왔다. 나의 태권도가 결국, 어느 정도 깊음에 이르러 내 스스로를 지키고 펼칠 수 있을만한 물리적 범주에 들어선다면, 나의 독서는, 특히 철학VS철학을 매해 읽어온 일은, 마치 강태공 곧은바늘로 낚시하듯, 누가 날 알아줬으면 해서도 아니요, 더 좋은 직장을 얻으려 해서도 아니요, (그치만 기왕이면 책 읽는 직장을 얻었으면 좋겠다.) 다만, 언제 누가 물어봐도 어느 시점의 어떤 사상에 대해 잠깐이나마 단편적으로 말할 수 있는 통사적 흐름을 얻고 싶어서였을 뿐이었다. 나는 청춘의 오랜 시절 동안 유학을 공부해왔고, 그보다 젊은 시절에는 유학을 반론하고 싶어서 대중없이 서양철학만을 읽어왔기에 사실 나의 배움은, 내 태권도의 깊이가 띠에 비해 얕듯이, 경력에 비해 일천하긴 마찬가지였다.
살아 생전 한번도 진적 없다던 불패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 유명한 오륜서에서 천일의 훈련을 단, 만일의 훈련을 련, 이라고 하여 이를 합쳐 단련해야 비로소 무사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창시자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어받아 적어도 하나의 기술을 천번 이상 연습해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학교 다닐 떄의 나는 늘 거만했고, 치기어렸고, 튀고 싶었다. 술을 퍼마시건 사람을 때리건, 진득하게 책을 읽기 시작한 때는, 오히려 모든 것을 거의 다 잃고 하염없이 책만 남았을 때부터 시작하였다. 나는 지금도 혼자 골방에서 술을 마시면서 엉엉 울었던, 새벽녘 무렵의 대학집주와 성경을 기억한다. 그 이전의 독서가 그저 외로움에 못 이겨 도망치듯 읽었다면, 그 이후의 독서는 나를 채우고 세우기 위한 독서였다.
제아무리 훌륭한 움직임이라도 결국 상대와 맞서 나를 지키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듯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상대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철학-인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을 이해해야했고, 마찬가지로 글의 구절을 이해해야 했다. 저 자신만만한 왕양명과 이탁오는 지행합일- 실천하며 비로소 꺠닫는다고 했지만, 삶의 많은 자락에서 실패해온 나로서는, 감히 다시는 실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정말이지 제대로 알고 싶었다. 주자의 말씀처럼, 내가 올바로 알고 있어야 비로소 실천할 각오를 다지는, 선지후행의 길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한 해가 저물거나 시작할때 반드시 철학VS철학을 꼭 읽었다.
강신주 선생의 다소 극단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몇몇 의견만 제외한다면 이 책은 참 훌륭하다. 적어도 국내에서 이렇게 확실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동서양의 철학을 대별하여 망라하는 입문서가 또 있을까 싶다. 몇 해를 반복하여 읽다 보니, 강신주 선생이 대별하고 싶은 주제들이 확실히 눈에 보인다. 그것은 전체주의VS개체주의 이고, 일자론VS다자론 이고, 이론VS경험이고, 보편론VS유명론 이고, 자유VS제도-속박 이다. 동양과 서양의 흐름이 다소 차이는 있으나 결국 이러한 경향이 수도 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한국 고유의 철학은 과연 생산되었는지, 또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빈틈없는 고민을 던진다. 마치 상대를 치고 때려서 제압해야할지, 꺾고 던져서 제압해야할지, 이도 저도 아니면 창칼과 총기로 압도해야할지 등을 고민하며 발전해온 격투의 역사와도 닿는 구석이 있다. 생각해보면 철학이건 무공이건 제 뜻을 상대에게 전달하고 설득코자 한다는 목적 자체는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올해의 철학VS철학도 이렇게 끝났다. 천재라고밖에 부를수없는 위대한 라이프니츠는 여섯살때부터 두꺼운 라틴어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제아무리 천재라고도 해도 여섯살 때부터는 제법 힘들었으나, 일단 모르는 책이라도 건너뛰어가며 한 번 다 읽고 난뒤, 그 다음에 다시 읽으면 분명 처음부터는 이해하기 쉬웠다고 회고했다. 나 역시 태권도처럼 근 십여년을 투자하여 철학VS철학을 부지런히 읽고나니 잊어버리는 것들이 갈수록 적어지고, 기억나는 것이 많아져서 이제 제법 약 팔듯이 이래저래 꿰어맞출 수도 있게 되었다. 다만, 천명관 선생의 고래 에 나오는 약장수 소년처럼 이 무대 저 무대 기웃거리며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옮기면서 한 몫 챙기는 불쌍한 사내나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실 나처럼 경망스레 취하여 떠들기 좋아하는 얕은 사내가 빠져들기 딱 좋은 수렁이다. 그런 아비나 남편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도복 띠를 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