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독서감평)

고원정, 지사의 거울, 1989년 발표. 계몽사 문학전집에서 읽음.

by Aner병문

노래하는 풀뿌리, 민중가수의 상징, 한국의 밥 딜런으로 불리는 안치환 선생이 쉰네살의 나이에 새 노래를 발표하셨다. 그러므로 벌써부터 검색어 순위가 들뜬다. 그나마 오아시스 등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내가 만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의 서정적인 가수로 더 많이 기억할 터이고, 열린음악회에서도 '사노라면' 정도의 선을 지키며 노래하는 모습을 한동안 더 많이 보여주셨었다. 녹아내릴 듯한 시멘트 위에서, 귀가 떨어져나갈 칼바람 앞에서 맹렬히 들리던 그의 목소리는, '소금인형' 을 부를 때 외로운 내 마음과 함께 울어주는 듯하여 좋았다.



군대를 비롯하여 모든 운동과 투쟁은 언젠가는 근원적으로 자기 소멸을 지향한다. 더이상 권리를 찾고자 투쟁할 필요가 없을 때 비로소 대동사회(大同社會)가 온다. 과연 안치환 선생은 사회가 진보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잠시 '대중가요로 외도' 한 것일까? 신곡을 들어보니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사회에 그가 해야할 몫이 남아 있는 듯 보인다. 좌우지간 김지하 시인의 몸만이 남아 있을뿐 그 넋은 이미 사라져간 이 세상에서, 나는 어린 시절 안치환 선생이 그 특유의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김지하 시인의 자유를 노래할 때, 정말이지 몸서리쳤었다. 땀흘려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내가 자유다 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여기도 한 지사(志士)가 있다. 젊을 적에는 독립무장투쟁에 몸을 바쳤으며, 중년에는 민족의 당당한 광복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으며, 말년에는 숱한 권력의 부름을 거절하고 한 그루 소나무처럼,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게 청렴하게 독야청청 은거하는 재야의 거물이다. 주인공 청년은 그런 늙은 지사가 불러주는 입말을 원고로 써서 자서전으로 출간하는 비서 일을 담당하고 있다. 그 청년의 아버지가 지사가 한평생 나라를 위해 힘써 싸울 수 있도록 몸바쳤던, '이름없는 사나이' 라는 사실은 심지어 지사조차 모르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지사의 위대함을 쉼없이 들어 알고 있는 청년이지만, 지사는 이미 노둔하여 비만해진 몸으로, 오로지 젊을 적처럼 거울만을 바라보며 옷 매무새를 다듬는다. 그는 젊을 적처럼 더이상 날렵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정치적 헌금을 위한 연회장에서도 함부로 호의호식할 수 없다며 물만 마시고 버티던 외고집도 사라졌다. 심지어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여지껏의 태도와 다르게, '내각의 은밀한 전화' 를 기다리고 있기까지 하다. 그는 이제 더이상 숨길 수도 없고, 숨길 필요도 없는 정치적 야심이 넘치듯이 몸 또한 늘어지고 불어났는데, 여전히 그 것을 모르는 듯, 자신의 몸매를 날씬하게 보이는 깜짝 거울 앞에서 몸매무새를 다듬는데만 열중한다. 주인공 청년은 '이 나라에 마지막 남은 양심' 이라는 늙은 지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씹어뱉듯 혐오스럽게 중얼거린다. 어쩜 저렇게 모를 수 있을까? 정말 모르시는 걸까?




요즘 들어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어서 한참 찾았다. 오래 전 어렸을 때, 계몽사의 역작으로 내놓은 70권짜리 한국-세계문학 전집에서 읽은 단편이다. 이제서야 얘기지만 계몽사 전집에는 '지사의 겨울' 로 오타가 나 있어서 이 소설 제목의 끝단어가 '거울' 인지 '겨울' 인지 한참 헷갈렸었다. 내용이야 당연히 어느 애국지사의 거울에 관한 얘기지만, 또 막상 위선을 떠는 늙은 지사의 말년이 겨울로 읽힌다고 하면 그 또한 틀린 해석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설피 읽고 알면 참 무섭다. 이 소설은, 다른 문학전집들과 더불어서 본가 지하의 서재에 곱게 싸여 있었고, 조만간 아내가 책장을 들여놓아주면 내 서재를 꾸며야지 벼르고만 있다가, 최근 지방선거 당일에 어느 애국지사 같은 분이 한국 정치를 지탄하며 술을 잔뜩 잡숫고 지하실 물을 역류시키는 바람에 모두 수장되었다(쓰고나니 또 짜증난다). 다행히 정말이지 한국 근현대 소설을 총망라한 역작인지라 중고판본이 많이 돌아다니는 전집이긴 하지만, 나는 그 날 동네에서 다른 건 모르겠고 내 딸한테도 물려줄 소중한 책 물어내라고 을러대었고, 덕분에 아내는 내 서슬퍼런 모습을 처음 보고, '아이고 그러이까네 술이 문제다 아이가~' 라는 식의 농담을 하지 못했었다. (물론 다음 날 바로 하더라.)




안치환 선생은 이 노래를 발표하시자마자 결국 '다 똑같은 놈들의 오류' 를 범하는 진보 권력을 비판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송곳' 의 구고신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며 누구나 올라가면 똑같은 사람이 된다고 자탄한다. 지사의 거울은 결국 똑같이 녹슬고 허물어져가는 인간의 권력욕과 허망한 욕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제 아내와 술을 마시면서, 왕년의 핸드볼 영웅은, 개구리 올챙이 적을 잊었는지, 혹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이 오로지 자신의 국회의원 지위를 내세우는 언행만 하여 사람들의 빈축과 공분을 샀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인지 정말 알 수 없다. 어째서 동서고금 수많은 인재들이 저 정치의 장으로만 들어가면 커다란 잠룡에서 비루한 이무기가 되어 죽고나서도 편치 못한가. 일개 서생도 못 되는 나는 알 수 없어서 술과 안주만 잔뜩 먹었다. 이 정부에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하는 이들도 참말 많을 터이다. 어찌하여 세상은 좀처럼 시원하게 트이질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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