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F 번외편 ㅡ 주먹의 기억
요즘은 일찍 퇴근할때 붐비는 버스정류장이 싫어서 일부러 몇 정거장 정도 더 걸어서 버스를 타곤 한다. 많이 걷는다고 땀이 나는 날씨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걸어서 간들 밀리고 막히는 버스와 놀랍게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간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어느 날은 성악이나 클래식을 들으며, 어느 날은 지나간 옛 노래나 적벽가를 들으며, 또 어느 날은 영어나 중국어, 일본어를 들으며 언덕배기 두엇을 넘어 돌아오다 옛날 내게 권투를 가르쳐주신 관장님을 뵈었다. 그 유명한 4전5기의 전설 홍수환 선생님이나 총각시절 살던 동네의 문신많은 김 관장님처럼 유튜브를 활발히 하시지는 않으나 미들급 세계챔피언으로 일세를 풍미하셨고, 당시 영화도 많이 찍으셨으며, 일요권투 를 즐겨보시던 아버지 세대에선 모를수가 없는 당대의 명 선수시다. 뒤늦게 무공을 시작하며 짧은 다리와 둔한 감각으로 발차기를 포기할 무렵, 약 이십년전의 선생님께서는 내게 권투의 기초를 엄격하고 충실히 알려주셨고, 븨잉문아, 너처럼 키가 작으믄 빠짝 붙어서 아앗빠(?!)를 치란 말이여, 열심히 해서 “뿌로 “도 되야봐, 격려해주시기도 했다. 워낙 파란만장 사서 고생하던 이십대 시절, 나는 어설프게 주워배운 여러 종합격투의 기술로 교만하게 밤거리를 누볐고, 그 중 선생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모든 주먹의 기초 기술들은 지금까지도 반복하며 연습하고 있다. 결국 어느 날 나는 선생님께 체육관에서 맵게 혼나기도 했으며, 관심사 또한 관절기로 넘어가면서 더는 사사하지 못했으나, 선생님께 주먹의 기초를 배웠다는 사실에 자랑스럽고, 사내가 주먹을 뽑기까지 어떤 마음가짐이어야하는지 몸소 지도해주셔서 감사하다. 물론 지금의 도장에서도 띠를 맨 자의 몸가짐에 대해 늘 잔소리를 하는 아저씨가 되었으나, 가장 본능적으로 쓰기 쉬운 주먹질에 대해 다듬어주신 어른이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설익은 기술로 나보다 약한 이만 후려패며 거들먹대는 하잘것없는 수컷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근 이십년만에 길거리에서 잠시 마주친 선생님은 미들급에서 세계 정점에 오르셨던 분답게 살집은 줄었을망정 골격은 건재하셨다. 정중히 인사드리고 손을 맞잡을때 선생님의 생기 있는 눈은 어렴풋이 옛 기억을 그리고 계셨다. 내 주먹 굳은살을 쓰다듬으시면서, 뭘 아직도 하는 모양이구먼, 할때 나는 부끄럽고 열쩍어서 웃고 말았다. 그러므로 오늘도 잠시 시간 내어 그 때의 그 기술들을 한 시간 정도 연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