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이야기)

어머님이 떠나셨다.

by Aner병문

중광 스님, 외수 선생님과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하셨던 순진무구 동심의 기인 천상병 시인께서는, 그 유명한 귀천이라는 시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소풍이라고 표현하셨다. 내 나이 어느덧 마흔에 가까운데,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아직도 결심이 서지 않는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처남 형님으로부터의 전화에서 건너오는 소리가 지금도 선연하다. 충청도만큼은 아니어도 말 곳곳이 박자감있게 늘어졌다 빨라지는 전라도식 억양과는 달리, 처가의 억양은 산딸기 터지듯 새콤하게 위로 치솟는 억양이 낯설어 가끔 싸우는듯이 들리기도 하던터라, 때마침 주말 집안 청소를 마치고 막 식사라도 하려던 우리 식구들의 발걸음을 모두 대문 앞 계단참에서 얼어붙게 만들었다. 당시 아버님께서 먼저 큰 수술을 받으신 상태였고, 어머님께서는 아버님의 간병인으로서 함께 자리하고 계시던 터였다. 종종 영상통화로 얼굴 뵙고 말씀 나누면서, 어머님의 안색이 좋지 않고 발음이 새듯이 어눌하셨던 일 모두 그저 잠시 피곤하셔 그렇다고만 생각했는데, 형님은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신 모양이었다. 한때 의료직에 있었던 아내 역시, 형님을 깨우치듯, 오빠야 뭐하노, 엄마 당장 아빠 있는데 응급실이라도 가라캐라! 이미 어머님께서 간병을 하시기엔 애시당초 그른터라 어머니와 아버지는 즉시 딸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주셨고, 아내는 짐을 싸면서 아버님이 계시는 병원에서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터였다. 안타깝게도 응급실 당직의의 소견은 썩 좋지 않았고, 아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서둘러 코로나 검사를 받기 위해 나와 함께 차를 내리밟았다. 천둥에 개 뛰듯이 한다는 말을 꼭 그럴때 쓰는 말일게다. 아내는 문을 닫으려 하는 선별진료소로 뛰어들듯이 들이닥쳐 마지막 검사를 받고 마지막 차로 즉시 부산으로 내려갔고, 나는 혼자 우두커니 남아 외부 일정들을 하나하나 미루거나 취소해가면서 앞으로의 상황을 미처 알 수 없어 무섭기만 했다. 사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그때부터 시간은 정말이지 날듯이 지금까지 왔다.



어머님의 머릿속은 썩 좋지 않으신 상태였는데, 제 2의 수도라던 도시의 제일 큰 병원에서도 뇌를 전문으로 볼 수 있는 의사가 없어 보름에 한 번 정도 다른 병원에서 왕진을 오는 정도라고 했다. 의료 선진국으로 이름난 우리 나라에서도 지역별 의료 격차가 심하다는 말이 실감났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계신 병원에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어 그대로 서울 병원으로 올라오셨고,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그때만 해도 '안사돈은 자기 발로 잘 걸어올라오시고 말씀도 잘하셨다.' 라고 들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이 무색하게 어머님은 서울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시고, 닷새 받아 몸 오른쪽을 쓰지 못하게 되시더니, 그예 자리 보전을 하시게 되었다. 아내는 수술을 받은 직후의 아버님을 간병하고 있었고, 형님은 혼자서 회사를 다니느라 도저히 간병의 짬을 낼 수가 없으므로, 결국 나는 회사 이외의 모든 외부 일정을 중단하고, 어머니와 번갈아가며 어머님을 도왔고, 두 돌이 채 지나지 않은 딸은 아버지와 내 여동생이 맡았다. 갑작스레 집안에 중환자가 둘이 생기니 집안의 모든 여력이 다 소모될 도리밖에 없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육아환경이 바뀌어 거칠고 예민해진 딸의 고집과, 어머니의 피로, 딸과 며느리로서의 아내의 입장이 서로 상충되면서 좀처럼 없었던 사막 같은 시절이 잠시 지나갔더랬다.



어머님의 상태는 위중하셨고, 곧 병원에 입원하실 수 있었다. 그때에야 아버님은 겨우 퇴원하시어 처남 형님과 살림을 합쳤고, 아내는 눈코뜰새없이 바로 어머님의 병원으로 또 향했는데, 그 와중에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새벽에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고, 어머니께서 또 새벽에 불려가시어 어머님을 돌보시다가, 결국엔 간병인을 쓰게 되었다. 연달이 일이 터지니 정신이 없을 무렵이었다. 서로가 남이 아니고 가족이므로 이해하고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애쓸수밖에 없었다. 어머님은 뇌 혈관을 건드리지 않고 부위를 치료하는 광선 시술과, 아주 가느다란 약제를 분무하는 시술 등은 연달아 받으셨고, 수술 경과 자체는 아주 좋다며 요양 병원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때는 날이 아직도 훈훈하여 여름처럼 느껴지던 늦가을 무렵이었다. 어지간히 운신이 좋아지신 아버님도 간병인 대신 어머님을 돌보시겠다며 요양병원에 함께 입원하셨다. 어머님 역시 간병인보다야 아버님이 눈치 안 보고 부탁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다시며, 우리도 아주 잠시 숨을 돌렸다.



코로나가 문제였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 죽음은 결국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사인은 폐렴이 아니면 폐경색으로 진단될 거라고 했었다. 요양병원 전체에 코로나가 돌면서, 아버님은 이겨내셨지만, 어머님은 그러시지 못했다. 어머님은 다시 수술받았던 서울 중심가의 병원으로 옮겨졌고, 수면 치료로 상황을 지켜보자며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때만 해도 상황은 아직 낙관적이었는데, 연말로 가까워질수록 들려오는 소식은 점점 좋지 않아졌다. 아버님은 모든 일을 중단하시고 우리 집에 머물기로 하셨다. 아버님 역시 아직 중환자의 몸이라 식사를 한번에 다 하실 수 없었고, 자극 없는 음식을 하루에 여섯 번 정도 아주 소량으로 나눠가며 잡수셔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나마 딸이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버님은 병원으로 출퇴근하시듯, 의식없는 어머님의 곁을 지키려고, 중환자 대기실에 계시다가 돌아오셨고, 아내는 아버님을 수발드리고, 딸을 챙기느라 정신없었다. 나는 집에서의 훈련까지 모두 중단하고, 오로지 집안일에만 힘썼다. 두어 번 도장 일을 챙기거나 꼭 가야할 외부 일정을 가야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주말마다 한번씩 보호자를 불렀다. 처음 호출은 성탄절에 있었다. 어머님이 계시던 병원은 서울 중심가에 있어서, 온갖 전등과 음악으로 밤이 낮처럼 휘황찬란했다. 휘황찬란은 모두 밝음을 상징하는 한자이며, 이 한자를 네 번 연달아 붙임으로써, 얼마나 밝고 화려한지를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한 거리를 지나 병원으로 들어오면 더욱 우울했다. 어머님이 계시던 곳은 소아암센터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아직 여린 몸에 온갖 주삿바늘을 주렁주렁 꽂고 햄버거 하나 먹겠다고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젊은 부모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아기 환자를 보자면 절로 가슴이 저렸다. 맹자가 멀리 있지 않았다. 나는 어머님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중환자 대기실에서 보르헤스의 불교론을 읽었다. 도저히 이름도 작품도 생경한 남미의 문학가들을 제대로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내가 딸을 낳을 때까지, 나는 의자 하나, 침대 하나 있는 병실에서 삼일 밤낮을 새었다. 중환자 대기실에서 엉덩이 부분이 푹신한 의자 여섯 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밤에는 염치 불구하고, 담요를 그냥 바닥에 던져놓고, 외투를 덮고 누웠다. 상태가 좋지 않아 임종 준비를 해야할지도 모른다며, 주말 전날부터 주로 불려나갔고, 그 간격은 점점 짧아졌다. 형님도 한두번 올라오시다가, 이제 점점 마음을 굳히셨는지,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경주로 내려와야할 것이라며, 경주에서 일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아내는 그때쯤 아버님과 식사를 할때마다, 결혼을 해서 참 다행이라고 했다. 처녀인 상태에서 혼자서 이런 일을 겪었다면 정말 자신이 없었을 거라고, 밥상 밑에서 내 손을 꼭 쥐었다. 굳은살이 물렁해져가는 내 손은 말랑거리고 빈약했다.



어머님은 설 연휴 이틀 전에 가셨다. 아버님께서는 부득이하게 약을 받아오셔야 하여 부산으로 하루 이틀 내려가셔야 했지만, 꼭 그럴때 일이 터지더라며 가시기 싫어하셨다. 아버님이 떠나시고 얼마 안 있어 아내는 급한 호출을 받았는데, 아내는 그때 이미 마음을 정한 듯했다. 아이를 일단 어린이집으로 보내놓고, 시부모께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 일러둔 뒤 어느 정도 준비를 하여 병원으로 갔다. 아내는 간호사 시절, 어머님의 어머님, 즉 자신의 외할머니를 4년 동안 손수 집에서 간병하여 보내드린 경험이 있어, 연명 치료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이미 어머님과 맑은 정신으로 약속해둔 터였다. 강하게 혈압을 올리는 승압제의 투여를 중지하자, 어머님은 평안하게 가셨다고 했다. 나는 그 즈음 회사에서 이상하게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보안 구역이라 전화기를 들여놓을 수 없어 화장실을 가면서 전화기 화면을 살리자, 부재중 전화가 하나 와 있었고, 아내의 카카오톡 알림 3개가 순서대로 쌓여 있었다. 가장 최근의 알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병원으로 빨리 오세요.



아내는 침착했다. 손만 꼭 잡았다. 아내의 처가 교회에서 이미 말씀을 다 마쳐놓아 장례식장과 계약을 맺은 구급차 뒤켠에 어머님을 눕혀 모시고, 나와 아내는 짐짝으로 실리듯이 함께 탔다. 그래도 아내는, 어머님이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아버님 가시자마자 바로 가셨으리라 했고, 또 조금만 더 버티셨으면 설이 되어 오도가도 못했으리라, 마지막까지 우리를 배려해주셨다고 쓸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등골과 엉덩이가 아프도록 내리밟아도 다섯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제서야 어머님의 화장하신 얼굴을 보았다. 아버님은 많이 우셨다. 연애하시면서 지금까지 어머님만 보신 아버님이라고 했다.



음식도 말투도 낯선 곳에서, 경상도식 쇠고기 무국과 스뻬인산 족발만 먹어가며 나흘을 보냈다. 처가 교회에서 항상 자리를 지켜주셨고, 나와 형님은 밤마다 소주 한두 병씩 마시고 쪽잠을 잤다. 말로만 듣던 경상도 사나이들의 의리는 대단했으며, 나 역시 사위로서 체면을 세울만큼은 봉투와 손님과 화환을 받아 다행이었다. 경상도에서는 쇠고기 무국을 마치 육개장처럼 빨갛게 끓이는데, 그렇다고 고사리와 달걀을 넣지는 않아서, 그냥 맑고 빨간 국물이었다. 찾아오는 문상객들은 주로 형님과 아내의 지인들이었으므로, 나는 바쁠때는 로봇처럼 '저는 이 집 사위되는 사람입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분 손님이십니까?' 를 반복하며 인사하고 자리로 안내했다. 어머님은 그리스도인이, 공무원이, 사회인이 어떻게 가셔야 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가셨다. 37년간 한 교회만을 모셨던 어머님은, 살아 생전, 불교를 믿는 시어머니에게 거스르지 않고 교회를 나가지 않으시면서도, 절밥이나 제삿밥을 일체 드시지 않아 마침내 허락을 받으셨고, 퇴직하신지 4년이 넘었는데도 직장 동료들이 많이 찾아오시어 그 인품을 다시 한 번 짐작케했다. 병으로 잠시 날카로워지셨던 때 외에는 소리 한번 높인 적 없이 인자하고 조용하신 분이셨다. 단지 다른 장례식장에서 모신 분들과 비교해도 너무 젊은 연세셔서 안타까움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경상도 지역에 장례식 직원을 가장한 좀도둑들이 들끓는다고 하고, 경찰들도 한두번씩 순찰을 돌며 주의를 주었기에 형님과 나는 바쁘지 않을때 한번씩 봉투를 추려 근처 은행에 입금하였다.



어머님은 가셨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바깥사돈 정신 사납다고 아이를 도로 데려가려던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사돈, 내 소은이라도 없으마 웃을 일이 하나 없습니더, 소은이는 좀 내뚜고 가이소, 사위하고 딸도 이럴때 명절도 쇠고 좀 보다 가면 안되겠습니까, 하시어 두 말않고 우리 부부는 소은이를 데리고 처가로 갔다. 어차피 어머님의 흔적도 모두 정리하고 치워야 했다. 사실 내심 걱정이었는데, 세 돌을 앞둔 소은이는 어느 정도 눈치가 있어 적당히 우울할때도 애교를 부리며 재롱을 피웠고, 정히 우울하면 엄마, 할아부지, 를 부르며 폭 안겨서 감동을 더했다. 어머니도 실은 연이은 입관 예배, 위로 예배, 발인 예배 등에서 상심이 심하시어, 사돈, 이렇게 가시면 안되네요잉, 사돈 하시다가 정신을 놓칠뻔하셨다. 어머니와 어머님은 매일 자주 두어시간씩 통화하셨다고 들었다. 입맛도 말투도 성격도 다르신 두 분이 매일 무슨 내용으로 그리 자주 통화하셨을까,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같은 핏줄로서 어머니가 가졌을 책임감과 정은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동안 담대하게 보였던 아내는, 어머님의 옷장과 냉장고에서 기어이 터지면서 풀썩 쓰러졌다. 여보야, 이거이 보이소, 자기 을매나 살지도 모르고... 아내는 펑펑 울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처남 형님 장가보내신다고 좋은 새 옷도 많이 장만해두셨고, 냉장고에는 온갖 장아찌들이 하얗게 상해가고 있었다. 어매가 작년부터 갑자기 요리에 빠짔그등, 아마 아빠가 수술받는다 칼때부터 정신없어가 대충 뚜껑 덮고 그냥 자리 비우고 그러고 이제 일나는 빠람에 다 상해삤는데, 내 솔직히 엄마가 다시 돌아와서 이거 다 치워줬으모 하는 마음에 내 하나도 안 치워따. 그 동안 배달 음식으로만 끼니를 때워온 처남 형님의 말씀이었다. 장아찌도 김치도 붕어초밥도, 오래 두고 먹으려고 염분을 높여 절이는 방식인데, 정작 그를 만드신 어머님은 이제 자리에 없다. 나조차도 비감해서 자리를 피하는데, 소은이가 엄마 엄마 하면서 제 어미에게 덥썩 뛰어들었다. 아내는 엉엉 울면서, 소은아, 내 삶의 기쁨이데이, 너는, 여보야하고 소은이가 내는 젤로 소중하다, 를 연거푸 외쳤다.



그래서 처가에 나흘동안 있으면서, 매일 낮에는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짐 밖으로 빼고, 술을 마셨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아이는 삼촌과도 잘 놀았고, 우울한 할아버지 앞에서 디스코도 잘 추고, 동요도 잘 불렀다. 아이가 없으면 정말 웃을 일이 없었다. 밤마다 가진 술자리에서 아버님은 나와 형님에게 술잔을 채워주시면서, 형님에게 어서 결혼을 해야할것 아니냐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예전같았으면, 발칵 짜증을 냈을 형님은, 네, 알겠십니더, 하고 더 말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다만 나와 잠시 바깥으로 나갔을때, 형님은, 어매 있을때도 쉽지 않았는데, 어매 없는 지금은 더 어렵지 않겠십니꺼, 그래도 매제가 안 사우고(싸우고), 잘 살아가가 참말 다행 아잉교, 하며 쓸쓸하게 웃었다.



차표가 없어서, 진작에 아내는 연휴 마지막날 새벽 입석 차를 사두었다. 젊은 날의 황석영 선생은, 월남 파병 전날에 이미 자신의 모든 인사기록이 해외의 새 부대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를 누가 건드리랴 하는 마음으로, 보고픈 이들을 보고 귀대하고자 무단으로 외출했다고 했다. 그는 느긋이 흔들리는 완행열차 짐칸에서 문을 열어둔 채 소주를 마셨다고 했다. 나는 그런 황석영 선생처럼, 올라오는 차 안에서 가방을 끌어안고 그냥 우울하게 앉아 있었다. 어머님이 가셨다. 너무 젊은 나이셨다. 처가 교회의 어느 형님 말씀처럼, 아직 장모님 사랑을 더 받아야할 철없는 사위인데, 새삼 목이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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