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독서감평)

김훈, 연필로 쓰기, 문학동네, 2019.

by Aner병문

김훈이 읽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 이 것은 밥이 물려 다른 음식을 자연스럽게 찾아먹는 욕망과 닮았다. 반면, 훈련을 할 때, 내가 미처 모르는 영역의 모르는 기술이 날아와, 그에 대항하는 기술을 필히 익혀야겠구나, 하는 요구와는 다르다. 혹은 만리타국에 갑자기 떨어져 이들의 말을 배워야겠구나 하는 필요와도 다르다. 책은 읽는 행위는, 김훈이 지적하듯 그저 취미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구태여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굶어죽거나 말라죽지 않는데도, 나는 책을 읽다가 심지어 기꺼이 다른 책을 찾는다. 김훈은 그 정점에 있다. 읽다가 없으면 능히 그리워 생각나고,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그 내용을 꾸미고 끌어나가는 문장이 언제나 새롭게 읽혀, 소설을 시처럼 곱씹게끔 만든다. 역사소설 이외에는 비교적 약점을 두는 그의 성향상, 김훈의 수필은 산맥처럼 장대한 그 필력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책은 그 동안 그가 출간해왔던 여러 수필들을 뽑고 가리고 묻어서, 그 중 '쓸만한 글' 들을 추려 다시 출간한 것이다. 책을 펴내면서 김훈은, 이 책에 실리지 아니한 나머지 글들은 모두 묻기로 한다, 고 스스로 적었다.



김훈의 글은 그의 말이나 성격처럼 가리는 것이 없다. 그가 이십년 이상 살아왔다는 일산의 풍경, 무짠지 담그는 법, 노인들끼리 시시덕거리는 이야기, 술자리에서의 잡담에서부터 세월호, 남녀 갈등, 라면에 얽힌 한국 근현대의 발전사, 역사가 그동안 지나온 흔적이나 혹은 나아가야할 길까지 아낌없이 혀를 대듯 붓을 댄다. 그는 조정래 선생, 젊은 날의 외수 선생님과 더불어 몇 안되게 육필(育筆) 을 고집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나는 소설과 달리, 쓰는 이로서 그의 삶이 녹아나는 수필을 읽을 때마다 김훈 선생 스스로 자신을 충무공처럼 여기지는 않는가 생각한다. 누가 뭐래도 칼의 노래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충무공과 닮은 점이 있고, 스스로도 글에서 그를 숨기지 않는다. 열두 척의 군선으로 왜적과 맞서야 했던, 맞설 수밖에 없었던 장군처럼, 그는 늙고 헐거워진 몸으로 글에 기대어 세상을 써낸다. 그러므로 그의 글은 늘상 종횡무진하고, 뒷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김훈 선생은 젊어서도 과감히, 차라리 자청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이른바 용비어천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늙어서도 스스로의 편협함과 '꼰대스러움' 을 인정하며 말과 글을 내질러 쓴다.




요즘 유튜브가 참 잘 되어 있어서 옛 영상들을 많이 본다. '대한늬우스' 마냥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여과없이 보여주는가 하면, '향문천' 이라는 이름의 유튜브에서느 고대 중세 국어의 형태와 발음까지 세세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전히 현대의 사투리를 사용해서 웃음을 유발하는 '황산벌' 시리즈는 말 그대로 영화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문제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팩트' 그대로의 영상을 보여주어도, 젊은 세대와 앞선 세대 간의 공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밥 한 그릇, 국도 없는 반찬 하나로 가난을 버텨왔던 옛 노동자들의 점심 식사를 보여줄 때,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댓글과 이제 막 그 모습을 보기 시작한 이들의 댓글은 현저히 다르다. 저렇게 우리는 가난을 버텨왔고, 지금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세대와 '와, 어떻게 저렇게 먹고 하루 버팀? 미친 거 아님?' 하고 혀를 차는 세대 간의 간극은, 영상으로 메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상과 달리 정진권이 쓴 '짜장면' 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지금도 널리 읽히는 불후의 명작이다. 짜장면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감성을 메우고 건너가는, 설명의 언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제 1기능이란, 그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여 전달하는 것- 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은 정말로 옳다.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으려면, 그 시절의 감성을 지닌 언어가 살아 있어야 한다. 단순히 '사실을 보여주고 전달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김훈 선생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혹은 아직도 더 배워야할 많은 언어를 가장 능란하게 쓰는 이들 중 한 분이다. 무림으로 치면, 그는 그야말로 아직까지 짱짱하게 날이 선, 고류 무예의 명인이다. 그러므로 그의 글을 자주 읽는다. 다만 이번에 나온 신간은 정말이지 자주 흩어져서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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