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家族 - 가장 가깝고도 먼, 그래서 더 소중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가족 이라는 단어는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한자로 뜯어보면, 집 가 자는, 지붕 밑에 돼지 등의 가축을 기르는 글씨에서 연원되었다. 그 유명한 보드게임 아그리콜라에서도 집 안에 가축 한 마리는 키울 수 있고, 제주도 흑돼지는 사람 사는 집 화장실 밑에서 키웠다 했으며, 고대 중국의 복희씨는 허리 위는 사람이지만, 그 아래쪽은 뱀의 꼬리였다고 하는데, 여덟 개의 방위를 나누어 사람에게 시공간을 가르쳤고, 그물을 엮어 물고리를 잡는 법을 알려주었으며, 집에다 짐승을 길러 번식하게끔 이끌었다고도 했다. 그러므로 가족이란, 생활 공간 속에서 이러한 노동을 함께 하며 형성된 가까운 무리들일 터이다.
아이가 며칠 아팠다. 아내는 소은이가 나오기 전부터, 내는 아토피가 있고, 여보야는 비염이 심하이께네, 분명히 우리 아는 둘 중 하나는 육십 퍼센트 확률로 뭐 하나 물려받고 나올낍니더, 했다. 아내는 실제로 몸에 받지 않는 음식을 먹거나, 피곤해지면 온 몸을 자주 긁었다. 안그래도 피곤에 지친 눈 주위가 뻘겋게 달라오르는 걸 보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소은이를 몸에 가졌을때, 아내는 면역체계가 엉망으로 헝클어져서 온 몸을 자주 긁으며 괴로워했고, 밤이면 차가운 물수건을 눈에 대고 자곤 했다. 나는 해줄 수 있는게 없어서, 물수건을 자주 갈아 올려주기만 하였다. 소은이는 그런 제 어미의 체질을 받아서 한동안 피부 때문에 고생했고,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지금은 몸의 반점이 다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관지가 튼튼해뵈지도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체질을 물려받아 알러지성 비염이 아주 심하다. 환절기면 과장 약간 보태서 한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재채기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밤새 내내 몸을 긁는 아내보다는 좀 나을 듯도 하지만, 한 시간 가까이 재채기를 하면 머리가 띵하고 정말이지 사람이 기력없이 늘어져버린다. 잠을 잘 자지 못한 날에도 나는 쉴새없이 재채기를 했고, 먼지나 고양이, 강아지 털이 가까이 있어도 벼락같이 재채기가 나왔다. 그나마 체온이 올라가면 재채기가 뜸해졌기에, 나는 수시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고, 도장도 자주 갔으며, 일을 할 때는 솔직히 품 안에 작은 술병을 넣어놓고 자주 마시기도 했다. 절대로 만취하도록 마시지는 않았고, 몸에 살작 열이 도는 정도로 알딸딸해서 기분도 좋아지고, 재채기도 사그라들 정도로만 마셨지만, 아내는 나중에 그 버릇을 알고 정말 정색을 했다. 알코올 중독자 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인사동의 유명한 명물 엿장수 형님이 선물해 주신, 영국 신사들이 쓸법한 작은 술병은 그렇게 우리 집에서 사라졌다. 여하튼 제 아비 따라서 급한대로 술을 마실수야 없는 네살배기 내 딸은, 자주 감기에 걸렸다. 기침과 재채기가 심하고, 열이 오르락내리락 해서, 전직 간호사인 아내는 아는게 병이라고, 한편으로는 여유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분주하게 아이를 챙겼다.
가래가 끓고, 기침 재채기가 심하며, 열이 오르는 아이는, 건강상으로도 좋지 않지만, 당연히 어린이집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아이는 기운만 좀 없을뿐 전체적으로 잘 놀고, 상태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내 편하자고 어린이집으로 무작정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아이를 하루 종일 돌보기 시작하면서 아내도 지쳐깄다. 아내가 지치는데 내가 맘편하게 퇴근하고 도장 갈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퇴근하고 가능한 아내 옆에 붙어 있으면서 아이를 함께 돌보았다. 토요일 유독 황사와 미세먼지가 심했지만, 약을 세 번이나 바꾸고 마침내 상태가 좋아진 아이는, 자전거를 타러 나가자며 성화였다. 어느 정도 말도 트고, 대화도 되기 시작하는 딸은, 이제 고집이 세지면서 싫어요, 싫어요, 아빠 저리가요, 아빠 나가줘요, 를 아주 입에 달고 산다. 아무래도 부드럽게 저를 받아주는 어미보다는 내가 싫을게다. 한동안 나가지도 않기도 했어서, 원래 이케아 한번 구경 가보기로 했던 우리 부부는 결국, 아이의 성화에 자전거를 끌고 근처 공원으로 갔다. 그래도 많은 부모-조부모들이 그 공원에 다 나와 있었다. 다들 어디선가 사온 비누방울을 들고 뛰어다니고 있어서, 나는 속으로 공원에서 비눗방울 장사 하면 진짜 집 두어 채 사겠구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모 교파의 성실한 부인들이 자꾸 기분 나쁜 신문을 나눠주시려 해서 나는 그냥 인상을 쓰고 대답도 안했다. 늘 수다스러운 성격에 비하면 흔치 않는 일이지만, 아내도 그 교파와 말 섞는 것 자체는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그들이 목표하는 신도 숫자를 얼른 채워서,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허망하고 안타까운 것인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다. 우리 동네에 저런 교회가 어딘가 있을 것을 생각하니 무섭고 답답하였다.
그래도 많은 가족들이 함께 있어 위안이 되었고, 아내와 함께 딸을 돌보는 주말 오후는 행복하고 여유로웠다. 아이는 아직 자전거의 페달을 잘 밟지 못했지만, 균형을 잘 잡으려고 노력했고, 밖에서 잘 뛰어 놀았다. 이르게 핀 벚꽃 아래서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찍어주어주기도 했다. 행복이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아껴주는 순간에 있다. 늦은 밤에 아버지가 오셔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동생을 많이 걱정하고 계셨다. 여동생은 나와 성격이 달라서, 어렸을때부터 야무지고 굳세며 당찬 편이라, 나와 달리 운전도 일찍 배우고 매사에 적극적인데, 떄때로 그 선이 심해서, 다혈질이고 흥분을 잘할 때가 있다. 내가 결혼을 해보니, 내가 옳아서만 되지 않는 것이 결혼생활이고, 부모가 되고나니, 누가 더 알려주지 않아도, 그토록 엄격하고 무서웠던 부모님 마음이 어느 정도 헤아려지고 이해가 되었다. 여동생도 만약 제 마음을 잘 헤아려주고, 저 또한 기꺼이 마음을 구부려 평생을 함께 할 이가 있다면, 가정을 꾸리고 잘 살 수 있을 터이다. 여동생은 어린이집 교사로서 전문성을 갖췄고, 좋은 회사에서 직장도 오랫동안 잘 유지했으니, 사실 내가 총각일때보다 세상말로 조건도 훨씬 좋은 셈이다. 다만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요, 말을 물가에 끌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 했으니, 아직 저가 결혼하기 싫다 하므로, 부모님은 가끔 결혼하여 사는 나에게 하소연을 하실때가 있고, 동생 역시 반농반진으로, 아따, 언니 오빠는 싸우도 안허는가, 이 집이 사끄러워야(시끄러워야) 나헌티 결혼하라 소리를 안헐 맹인데, 하곤 한다. 하여간 누가 성화한다 될 일이 아니라서, 그냥 아버지와 소주 몇 잔 나누면서 옛날 이야기 하고 말았다.
눈치빠른 아내는, 오늘 느지막히 함께 교회에 가면서 농을 걸었다. 어떻니껴? 밑도끝도없이 머이가 어떻니껴? 라믄 나가 어찌 아는가? 아니, 어제 서울 아부지 얘기하는거 들어보이께네, 딱 각 나온다 아입니까, 내랑 결혼 안했으모, 지금쯤 그 성화 여보가 다 안 받았겠어예? 말이야 맞는 말이제, 나가 말 안했는가? 나는 여보 만나기 전날까지, 여자 하나 못 만들어 오냐고 저녁 밥상에서까지 혼구녕 났던 사람이여, 여보가 한 사람 살렸네. 아내는 운전대를 잡은채 낄낄거렸다. 사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처남 형님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양 사돈이 만나시면, 어머님도 안 계시는 처지에, 처남 형님과 여동생 결혼 못한 이야기로도 날이 샌다. 결혼은, 때가 되어 하는 것도 아니요, 조건이 맞아서 하는 것도 아니며, 참말로 평생을 함께 하고자 하는 이와 하는 것이요, 한 번 결혼했으면, 때때로 서운하고 힘들지라도, 마땅히 가족이므로 그럴 수 있다 생각하고 품어주고 아껴주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남은 안 보면 그만이지만, 가족은 때때로 힘들고 어렵더라도 서로에게 마음을 비벼넣으며 더 끈적하고 가까워지라고 가족이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