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열호아?
요즘 하도 술만 먹었다 하면, 음주운전에 폭행에 시비에 별별 온갖 구설수들이 많이 올라 술 좋아한다는 얘기 하기도 무섭다. 하기사 딸 키우는 아비인데다 교회 집사이기까지 하니 술 못 끊었다는 이야기가 자랑은 아니지만, 적어도 서른 넘어서는 누구 속썩이거나 구설수 나오도록 술 마시지는 아니했다고 자부한다. 술은 본디 미식이고, 풍류이며, 문화이자, 즐거움이다. 탈무드에서는 인간이 처음 술을 만들 때 악마의 힘을 빌어 온갖 짐승들의 피를 잡아다 뿌렸기에 술이 취하면 취할수록 짐승처럼 추태를 부린다고 가르치지만, 동양에서는 술이란 적당히 마시면 사회적으로 낭만 있으며 존경받는 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술도 마시기 나름이고 즐기기 나름이다. 적어도 내 알기로, 선비의 풍류란, 좋은 풍경 아래서 믿을만한 벗들과 적당히 술 기울이며, 시문과 음악과 그림을 논하고, 몸놀림을 겨룬다 한들, 멀리서는 활이요, 가까이서는 각희脚喜 로 기량을 견준다고 했다. 이러한 선비들의 풍류놀음 중 제일이 이른바 뱃놀이인데, 저 대동강 부벽루 같은 절경에 도도히 배를 띄웒고, 그 배에는 이미 온갖 산해진미며 금준미주가 가득하고, 시문과 가무에 두루 능한 예인들을 불러다 노래와 춤을 청해 보고 들으며 아취 있고 술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저 유럽의 살롱 문화에 못지 않을 선비들의 풍류라고 배웠으며, 지금도 담양에는 선비들의 술과 시를 즐기던 정자가 숱하게 남아 있어, 우리 나라에도 풍류남아들의 당당하고 품격 높은 취미공간이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내 비록 고등교육의 말석에 있었고, 지금은 그저 통장잔고 따라 기분이 날고 뛰는 소인배 필부에 지나지 않지만, 어찌 이 나이 먹고도 아비이자 남편이 되어 어렸을때마냥 함부로 술잔을 기울이겠는가. 예전 같은 주량을 여전히 고집하다 오십도짜리 술 세 병에 두어 번 쓰러지고 나서는, 세 번은 다시 없으리라 절치부심하며 조심조심 많아야 두 병까지 마시는 덕을 본 듯하기도 하다. 여하튼 항상 젊을때부터 마음을 헤아려주는 벗들이 있어 이번에는 처음으로 소은이도 옆에 두고 함께 술을 마셔보았는데, 특히 늘상 학생 같은 너는 특유의 그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우와, 이제 소은이 옆에 두고 놀아도 되겠다, 라고 감탄했고, 돌아가는 길에는 언니 좀 더 좀 잘 좀 돌봐줘! 하며 뜨거운 일침을 잊지 않았다. 아내와 이제 곧 주말부부가 되므로, 언제 또 너희들과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밥 잘하는 유진이는 예전부터 소은이를 늘 예뻐했으며, 엄밀하게 따지면 소은이가 도장에 입문한다면 사저가 되기도 하고, 사숙이 되기도 한다. 언니 복직하기 전에 언니랑 소은이 한번 더 봤으면 좋겠다면 노래를 불러서, 아내의 허락을 받아 집으로 불렀다. 밥 잘하는 유진이는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며, 육회며, 내가 좋아하는 생선회까지 온갖 음식을 가득 들고 왔고, 돈도 받지 않았으면서, 소은이 손에 기어이 용돈을 쥐어주었다. 몹시 미안해서 아내가 소은이를 재울 동안 집 밑의 맛있는 맥주집으로 가서 새벽 세 시 가까이 술을 더 마셨는데, 우리는 이미 몹시 취해서 어둑한 생맥주집의 한 구석에서 주거니 받거니 도산 틀의 동작들을 서로 보이면서, 태권도의 실전적인 동작이란 무엇인지를 그렇게 논했다고 했다. 이미 본사가 망해버렸으나 혼자 운영하시는 여사장님의 음식 솜씨로 버텨나가는 오래된 생맥주집에서, 한 무리의 중년 아저씨들이 밀려들어오며, 이렇게 재미없는 호프집 뭐하러 왔냐고, 도우미(!!)도 없고, 여사장님 와서 술이나 따르라며 낄낄대는 그 소리를 들었을때, 남일이 아니었는지 밥 잘하는 유진이는 분기탱천해서, 여자 사장님 혼자 주문받으시고 요리하는 업장에서 이 무슨 일이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나는 밥 잘하는 유진이를 적당히 말리고 적당히 아저씨들을 꾸짖어 상황을 종결시켰다. 나중에 내가 술이 깨고 나서야 다음날 저녁에 사장님은, 어제 그 아가씨가 사모님이셔요? 해서 아니오, 도장 사매요, 했더니 사장님은 당연히 이토록 옛날식 표현을 알 수 없어, 어 응?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애기 엄마는 그 때 애 재우고 있었고, 우리 도장 같이 다니는 옛날 직장 상사 아가씨지요, 했더니 사장님은 나를 위아래로 조금 훑으면서, 너 이 녀석 맨날 네 마누라 딸내미랑 같이 돌아다니고, 장도 보고, 게다가 안주 포장해다가 지 집에서 술 마시면서 애처가인척 굴더니, 무슨 놈의 도장 어쩌고 하면서 여자랑 새벽 늦게까지 술 마시고 다니는 놈 아니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셔서 민망하였다. 하기사 더없이 고마운 너도 그렇거니와, 내 옛 직장상사이자 도장과 인생에서 아내 못지 않게 신뢰할만한 밥 잘하는 유진이 역시 어찌 되었건 성별로 여자이므로, 나는 늘 조심하고 있다. 내게는 벗이지만, 아내에게는 늘 어떨지 모르므로, 아내와 내 벗들은 늘 연락처를 공유하고 있고, 나는 반드시 아내에게 이들과 만날 때 일정을 알려주고, 또한 반드시 전화를 받는다. (아니, 무엇보다 허락 없이는 안 만납니다.)
성별을 떠나 벗은 소중하다. 남녀 간의 우정이 없다고 하는데, 그 위험성을 모르지 않는다. 내게는 벗이지만, 아내에게도 벗이라 강요할 수 없으므로 그 간극을 이해하고, 아내가 늘 우선시되는 마음이 중요하다. 남녀 간의 우정이 없는 이유는, 때때로 여성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 때문에 그럴 터이다. 애초에 그럴 상황이 없는 것이 가장 좋다. 그들을 만날 때 나는 아내와 가능한 동석하며, 그렇지 않다면 곽선생과의 독서모임이나 태권도장의 회식처럼 반드시 여러 사람과 만난다. 꼭 둘이 만나야 한다면, 아내의 허락을 받고 반드시 전화를 받는다. 갑자기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흐르는지 모르겠는데, 원래는 몇 남지 않는 친구들이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백아절현, 지기지우, 문경지우, 금란지교, 하여간 벗 없이 어찌 살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