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역에서 산다는 것 - 소아과와 맛집을 중심으로.
나는 지금까지 이사를 딱 두 번 했다. 내가 젊은 아비가 되니 더욱 뼈저리게 느끼거니와, 어느 부모인들 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지 않으랴만, 정말이지 열심히 사신 어머니 아버지 덕에 난 적어도 읽고 싶은 책은 다 읽고 컸고, 또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도 않고 한 동네에 이십 년 이상 살았다. 내가 본격적으로 떠돌아다닌 때는, 군대 제대 후 학교에 복학하지 않고 자퇴하여 노점상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부모님과 갈등을 겪기 시작하던 철없는 청춘 무렵이었다. 십대 시절, 어머니는 아버지의 건강을 고려하시어 한 동네에서 조금 더 산 쪽에 가까운, 정말이지 백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바로 뒷 집으로 이사를 하셨는데, 한 집에 워낙 오래 있다보니 내 책들부터가 한 짐이요, 쌓아놓기만 한 온갖 짐들이 가득하여, 난생 처음 하는 이사인데다, 트럭을 부를만한 거리도 당연히 아니니, 무엇이든 전부 지고 나르던 고등학교 시절 무렵이 생생하다. 심지어 그 때는 내가 무공을 취미로 할거라고는 생각도 안할정도로 운동도 싫어하던 체력장 만년 0점의 소년이었다.
나이 서른넷에 네 살 터울의 아내와 결혼하여 수도권 근처에 호젓한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비로소 나는 새 지역에 산다는 실감을 하였다. 부모님과 갈등을 빚으며, 글 쓰는 사람, 무공을 익히는 사람, 음악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온갖 '한다' 하는 이들을 사귀느라 술 마시며 쏘다니거나, 학교 공부를 다 못하고 농사를 짓는다고 전국을 돌아다닐때에도 이 좁은 나라의 지역 특색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터 잡고 사는 일은 또 달랐다. 어머니께서 고르고 골라 잡아주신 동네는, 세상말로 개발만 안되었다 뿐이지, '있을 건 다 있는 동네' 였다. 집 앞에 바로 큰 종합상가가 있었고, 버스정류장과 역이 가까웠고, 큰 서점과 영화관도 있었으며, 늘 산책할 수 있는 천변과 공원도 가까웠고, 정말이지 애 키우면서 사무치게 감사한 일은 바로 신발 신고 나가 골목만 돌면 소아과가 있었다! 어쩌다 이 소아과가 쉬는 날이면, 우리 부부는 가장 가까운 소아과가 차 타고 이십분 이상 나가야하는 의왕시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겁을 했다. 물론 의왕시의 소아과는 워낙 유명한 곳이고, 연중무휴였으며, 젊은 의사 선생님들이 함께 모여 어린이집 교사마냥 원숭이 선생님, 기린 선생님 별명도 스스로 짓고, 의사 가운도 동물처럼 꾸며가며 정말 전문 소아과구나 싶긴 했지만, 언제 어디서든 코앞에서 위급할때 바로 달려갈 수 있는 우리 동네 소아과처럼 편한 기분은 아니었다. 물론 소아과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고, 첫 마스크 세대이자 아토피가 좀 있는 우리 애도 병원 신세를 상당히 오래 지고 있지만, 내 또래의 의사 선생님은 늘 피곤하고 힘들텐데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셨다. 아마 원래 간호사였던 아내가 선생님의 말씀을 빨리 잘 알아듣기도 해서였을테다.
나도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 아니고, 아내도 음식을 썩 잘하지만, 우리 부부는 피곤하고 힘들 때나, 혹은 무슨 일이 있을때면 가능하면 바깥에서 음식을 한번씩 사먹었다. 일부러 필요한 게 있으면 꼭 동네 상점을 이용했다. 그러므로 김성홍 감독의 명작 '신장개업' 에서 배우 김승우가 열연한 중화루의 왕 사장은, 동네를 주름잡는 맛집이었던 자신의 업장보다 새로 생긴 중국집에서 늘 짜장면을 먹는 단골들에게 주정섞인 항의를 한다. "내가.. 너네 약국 말고 다른 약국에서 약 사먹은 적 있어? 내가..너네 가게 말고 다른 데서 야채 산적 있어?" 즉, 조그마한 동네에서 서로 상부상조해가면서 사먹고 팔아주고 해야 돈이 돌고 동네가 산다. 사실 나보다는 지방에서 생활을 오래 한 아내가 그런 마음을 더 잘 알았다. 아내는 임신했을 때부터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거리 청소를 자주 했고, 분리수거도 꼼꼼하게 했으며(나는 크게 혼난 이후로 분리수거 잘하고 있다ㅠ) , 내가 없을때면 반드시 아이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가며 주변 어른들께 인사를 시켰다. 덕분에 우리 아이는 동네에서 많은 어른들께 귀여움을 받고, 아이 또한 항상 어른들에게 인사를 잘해서 부모로서도 뿌듯하다. 상가에서는 항상 아이에게 선물을 주시고, 심지어 상자 정리해주시는 할머님까지도 제 주머니에서 간식으로 드실 요구르트를 주셔서, 죄송해서 우리는 항상 나중에 큰 두유를 한 상자씩 사서 돌려드리곤 했었다.
중래향 사장님과의 인연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남극 순대국집과도 인연이 오래 되었는데, 아내의 복직 준비 때문에 한동안 바빠 발걸음을 못한 사이 가게가 없어져버렸다. 정말 천하일품의 솜씨를 지닌 분이시었는데, 각자도생의 시대에 자영업이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 또 한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번호를 알고 있었으며 연락을 드렸더니 정말 아쉬워하시며, 자신은 잠시 쉬고 다른 업장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며, 조만간 한 번 먹으러 오라셨다. 지역의 일을 이웃이 챙기지 않으면, 이렇게 떠나시는 줄도 모른다. 남극 셰프님 역시 앞장서 남극을 다녀오신 분이었고, 나라를 위해 음식을 챙기시던 분이셨기에 이 도시의 많은 일을 제 일처럼 돌보시던 분이었다. 항상 푸짐하게 음식을 내어주시며 술 한잔씩 주고 받던 호탕한 성품이 눈에 선하다.
아이는 전체적으로 건강한 편이었으나, 시류가 시류인지라 마스크를 벗고 한꺼번에 덤벼든 감기균과 열심히 싸우는 중이었고, 어미를 닮아 아토피가 조금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잊을만하면 앞서 말한 소아과에 자주 갔다. 소아과는 갈수록 줄고, 대우는 안 좋아지며, 애들이 없다 없다 해도 밀려드는 환자들에 정신이 없는 선생님은 늘 볼이 패고 눈이 퀭하였다. 우리 부부도 그렇거니와 나는 아직까지 상식을 가지고, 이 병원에서 의사 및 간호사 선생님께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본 적이 없다. 이 병원이 없어지면, 우리는 진짜 뭔 일 생기면 매일 차 타고 멀리까지 나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농담조로 '어야, 소은아, 너 나중에 크면, 갈비짝 사가고 선생님 인사 드려라, 이 선생님이 안양 허준이여, 덕분에 너 사는거다잉.' 했더니 아내와 고향이 비슷한 선생님은 '아이고, 아버님, 어예 그럽니까, 소은이 건강해서 별로 속 안 썩입니더.' 하셨다. 늘 바쁘고 힘드신데 이 지역에서 애써주시는게 고마워, 아내와 나는 가끔 박카스 한 상자라도 사서 약국 편에 올려보내곤 한다. 병원 바로 밑에 있는 야국의 약사 선생님도 꼭 대학생처럼 젊고 깜찍해뵈는, 발랄한 선생님이신데, 항상 아버님, 아버님 하면서 소은이를 잘 돌봐주시고, 비타민이며 약 하나도 더 챙겨주셔서, 아내의 허락을 받아 약국 한 상자, 병원 한 상자, 박카스 하나라도 사 드리고 있다, 그래도 한 상자에 오천원, 두 상자에 만원 꼴이다. 아무리 혼자 벌어 셋이 사는, 없는 살림이래도, 내가 고량주 서너 병 안 마시면 그뿐일 돈이다. 남자가 돈이 없을지언정 의리가 없어서야 못쓰는 법이다.
고전 맑스를 꼭 인용하지 않아도, 근세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주된 생산수단은 토지였으며, 농경에 매인 백성들은 자신들이 매인 땅을 함부로 떠나지 못했다. 묵가가 심하게 비판했듯이, 농경을 근본으로 한 유가의 가족주의는 한편으로는 혈연 중심의 노동력 강제의 정책이기도 했으며, 중세 유럽의 농노들은 사실상 토지에 귀속된 부품으로서 그 토지를 활성화시켜주는 인형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각종 병란이 일어났을때, 백성들이 목숨을 살리고자 땅마저 버리고 도망가자, 그들을 다시 불러모으려고 각 고을의 구휼청들이 죽을 끓여 그 향기로 난민들을 유도코자 했는데, 마을이 텅텅 비고 굶주린 개들이 시체를 파먹는 을씨년스러운 빈 마을마다 죽 끓이는 향만이 진동하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냐며 젊은 날의 다산 선생은 수필에 적었다. 맹자께서는 그러므로 일찍이 정전제를 말씀하셨고, 다산 약용 선생께서도 로마의 집단농장과도 같은 공동 농장을 구상하시며 지역을 살릴 방안을 모색하셨던 것이다.
나는 출퇴근하고, 책 읽으며, 태권도하고 술 마시는 범부에 지나지 않으며, 주제도 모르고 큰 꿈을 꾸었으나 이제는 모두 접었다. 남자의 본분은 수신제가에 있다. 나는 내 가정을 잘 꾸리는데도 벅찬 이이다. 다만 우리 가정이 힘들지 않게, 또한 맞벌이하는 우리 부부가 바쁠 때에 혹시나 어느 어르신이라도 우리 아이를 잠시라도 봐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이 지역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지역에서 사는 일은 의외로 쉬우면서도 쉽지 않다. 2년마다 계약에 따라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더욱 벅찬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