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보내며 - 어머님 안 계신 처가를 중심으로.
사실 작년 추석부터 어머님이 편찮으시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거의 반 년 넘게 쭉, 아침 아홉시부터 오후 여섯시, 게다가 주말 특근도 없이 쭉 근무해왔다. 업종의 특성상, 심지어 나랏일을 하는 아내조차도 복직하고 나니 교대로 주말 당직 근무를 하는, 이른바 '로테이션' 근무를 하는데, 나는 집안일을 명분으로 꽤 오랫동안 고정된 시간표를 받았으니 뒷말이 나올 법도 하다. 사실 내 사정을 잘 아는 팀장님이 많이 막아주기도 하셨고, 회사에서 일은 못해도 성실하다는 평은 늘 들어온 터라, 근태 하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고, 나보다 어린 처녀총각들이 어쩌다 결근을 하면, 내 업무는 젖혀두더라도 그들의 급한 업무를 먼저 처리해주었다. 그래도 더 이상은 근무 시간표를 유지할 수 없다며, 형평성 얘기가 나오기 전에 팀장님은 한번쯤 말씀을 미리 해두기도 하신 상황에서, 홀로 계신 아버님께서는, 이번 어린이날-어버이날 낀 주에 어머님 계신 산소도 찾아뵙고, 처가에서 소은이 재롱도 보고 싶다고 하셨다. 사실 그동안 다른 동료들이 나 대신 항상 주말에 돌아가며 나와주고, 야간 근무도 해준 셈인지라 내 입장에서는 그저 감사한 일이었지만, 홀로 되신 아버님의 부탁에 이번 연휴는 부득이하게 다시 애를 데리고 처가 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첫번째 문제는 날씨였다. 모두가 겪었다시피 어린이날-어버이날 주일은 봄 절기가 민망하고 무색할 정도로 비가 내려꽂았다. 날씨가 온화하기로 유명한 경상도 남부였음에도, 어머님을 모신 처가의 집성촌의 큰 어르신꼐서 손수 전화하시어 '야야, 산이 다 무너질라칸다, 이 날씨에 뭔 성묘고, 아는 우찌 데려올라카노. 다음에 해라, 다음에, 사람 떠내리간데이.' 하시어 어머님 뵙는 일은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두번째는 나 혼자 아이를 데리고 KTX를 탄 채 왕복을 하는 일이었다. 5월 3일부로 복직한 아내는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므로, 당직이 아니면 쉬는 날엔 칼 같이 쉬어야 했는데, 복직하는 입장에서 4일부터 쉰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회사에 있다가 KTX에서 중간에 합류하겠다고 했다. 연휴인지라 KTX 역에 사람은 몰려 붐볐고, 아이 고모와 그 지인이 도와주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중에 따로 얘기하겠으나, 나와 소은이가 앉아야할 자리에는 웬 여대생들이 앉아 있었고, 잠시 소은이에게 휴대전화를 보여주고, 그 아가씨들에게 나와달라고 요청하는 동안, 나는 밀리고 밀려 그 열차칸의 끝까지 가버렸다. 내 여동생처럼 KTX를 자주 타지 않는 분들을 위해 부연하자면, KTX산천은 부산과 포항으로 각자 나뉘는 두 종류의 열차를 한데 꿰어 달리다가, 부산과 포항으로 서로 노선이 갈릴때에 중간 부분을 분리하여 각자 갈 길을 간다. 그러므로 포항 갈 사람이 부산쪽 칸에 탄다거나, 부산 갈 사람이 포항쪽 칸에 탄다거나 하면 중간에 열차와 열차 사이를 건널 수 없는, 접합부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므로, KTX 예매 시에는 항시, 자신의 자리를 잘 보도록 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한 무리의 가족들이 그 점을 잘 모르셨는지, 시간이 촉박하여 일단 올라탄 다음 열차 칸을 건너고 건너 자신들의 자리를 찾으려 가실 모양이었는데, 바로 그 칸이 두 대의 서로 다른 방향 열차가 접합되어 건너갈 수 없는 쪽임을 모르셨던 게였다. 우왕좌왕 하는 사이 열차는 출발했고, 가족들은 폭발했으며, 열차 직원분들은 그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지만, 나는 내 등 뒤에 혼자 남겨둔 소은이가 걱정되어 서둘러 그들을 헤치고 달려갔더니, 헐, 우거지죽상을 한 아이 고모의 지인이 민망한듯 겸연쩍게 웃고 있었다. 나 대신 소은이를 돌봐주느라 자신은 내리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그 여대생들이 제 자리만 탔으면, 나와 소은이는 일찍 제때에 앉았을텐데, 괜히 미안하여 차비를 넉넉히 물어주었다. 며칠 뒤 여동생에게 들으니, 그는 차비를 물고 바로 다음역인 천안까지 갔다가, 다행히도 올라오는 차는 넉넉하고 많아서, 간 김에 호두과자 몇 봉지 사가지고 올라왔더라며, 냉장고에 차갑게 식힌 호두과자를 꺼내주었다.
나는 내려가면서 소은이에게 공기계 아이폰으로 유튜브를 보여주었고, 갈라라가 사성님의 책을 보아가며 도장의 서류 작업을 잠시 했다. 나는 도장의 전문 지도인도 아니고, 그저 사범님을 존경하고 오래 태권도를 수련한 나이 많은 아저씨 제자지만, 어쩌다보니 그나마 내 영어가 도장에서 제일 낫고, 고등 교육의 맛이라도 보아서 가끔 사범님의 서류 업무를 도와드리곤 했다. 소은이는 김천구미 역까지는 무사히 버티다가, 내가 귓속말로 '소은아, 이제 엄마 온다잉, 엄마 오는가 잘 봐봐라잉.' 하자마자, 정말 놀랍게도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유튜브용 공기계를 던지더니, '엄마? 엄마 어디? 엄마 어디?' 하며 제 어미를 찾기에 바빴다. 나도 서울에서부터 내려오느라 한 짐이었으나, 아내도 역시 아이 짐을 회사 관사에서부터 챙겨오느라 한 짐이었는데, KTX 객실 복도에서 제 어미를 보자마자 아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때 우리 부녀 때문에 억지로(?) 제 자리를 찾게 된 여대생들은 소은이가 제 어미를 보고 신나서 자꾸 웃고 말을 할때마다 큰소리로 한숨을 쉬고, 창문을 손가락을 두드리고, 등을 돌려 흘겨보는 등, 소은이 때문에 시끄러워죽겠다는 티를 계속 내어, (솔직히 아내는 사정을 잘 몰랐겠지만, 나는 출발할때의 억하심정이 남아 있어 그래도 좀 참았다.) 우리 부부는 부모답게 소은이를 계속 조용히 시켰다. 그러나 오랜만에 어미를 본 아이가 점잖게 있으면, 바로 신학대학 보내야지...(...) 종착인 포항역에서 비로소 내릴 준비를 할때, 그 여대생 중 한명에게 소은이는 예쁜 언니가 내리니 '언니, 잘 가아~' 하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는데, 그 아가씨는 인사도 아니 받고, 픽 웃으면서 '너 딴데가서 그러면 진짜 엄청 혼나' 라고 화답해서 순간 나와 아내가 매우 벙쪘다. 사정을 모르는 아내조차 화가 났을테고, 나는 애초에 출발할때 사람 힘들게 해서 여동생의 지인까지 천안에 내려가게 만든 년들이 누구냐며 순간 욱 해서 막 입을 열려는 찰나에, 아내가 재빨리 내 손을 확 끌엇다. 쉿, 쉿, 그냥 넘깁시데이, 미스miss 라 안 그럽니까, 내도 미스 시절에는 잘 몰랐다 아이가, 저 애기들도 나중에 지 아아들 낳아보면 다를끼라. 얼른 갑시데이, 배고프다, 아빠랑 오빠랑 여보야 온다꼬 횟집 예약했니더.
어머님이 올해 설, 젊은 나이에 그렇게 황망히 가신 뒤로, 나는 술을 마실때처럼 입버릇처럼 '나 이제 누구랑 회 먹지?' 하는 말을 되뇌이곤 했다. 평생 공직에 계시느라 음식할 줄은 잘 모른다며 부끄러우시다던 어머님, 포항 바다에 지천인 회 좋아하는 사위 얻어 세상 편하다며 온갖 회를 늘 사다주셨던 어머님, 점심에도 회에 술 한잔, 저녁에도 술 한잔,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어머님께서 아침을 손수 준비하시면서도 '사위야~ 뭐 물래~' 하실때 내가 벌쭉 웃으면서 '아따, 사위 사랑은 어머님이신디, 여그까지 와신디 또 회먹어야제라.' (회 정말 좋아함, 하루 세 끼 한 달도 먹을 수 있음.) 말씀드리면, '아이고, 야야, 니는 질리도 안 하나, 인자 그만 딴 거 묵자~' 하시면서 아침부터 두툼한 고기를 구워주시던 어머님은 이제 계시지 않는다. 어머님의 빈 자리를 안 느끼게 하시려는지, 아버님은 회를 많이 사주셨고, 처남 형님도 '매제가 항상 잘 지내니 다행입니더, 이래 오마 돈 쓰지 , 언제 또 돈 씁니까?' 하면서 회며 만두, 술을 잔뜩 사주셨다.
처가에 있는 내내 비가 왔기 때문에, 소은이 기운도 뺄 겸, 우리는 키즈까페에 갔다. 포항에 있는 젊은 부부 및 조부모, 아이들은 거기에 다 모인 듯 보였다. 지치고 피곤한 내 또래의 아버지들에 비해, 어머니들은 막내이모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젊어보였다. 나중에서야 아내는 '여기도 상업 도시 아잉교, 보통 여자들은 결혼을 일찍 빨리 하는 기라.' 해서 울산처럼 역시 특색이 있음을 알았다. 주변마다 아버님 또래의 부인들이 손자손녀들을 돌보고 계셨으므로, 아버님은 적적해보이셨고, 내게 넌지시 말씀하셨다. 자네 벌이 대충 알고, 유지이(아내) 벌이도 내 대충 아네, 소은이 동생도 꼭 보고, 네 식구 고 정도 벌이모 괜찮다꼬, 절대 주식이나 이런거 하지 말고, 투 쟙이나 이런것도 하지 말고, 그저 아껴 살면서 가족들끼리 추억 쌓는데 힘쓰라카이, 자네 장모 보게, 퇴직하고 같이 여행 다니고 그러자캤디만은, 그래 갈 줄 뉘 알았노, 내 말 알겠는가? 사람 삶이 참 짧데이. 하시는 아버님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젊었을 적 유도 초단도 따시고, 아내의 큰 키처럼 근골이 듬직하게 좋으셨던 아버님은, 어머님이 가신뒤로 살이 많이 빠지시어 허벅지도 가늘어지시고, 광대뼈가 도드라지시었다. 나는 아버님께서 오래 건강하시기를 바랐다.
듣던대로 경상도 사내들은 의리가 있었다. 어머님 가시는 길에 나와 처남 형님은 맨정신으로 잘 수 없어 매일 경상도식 육개장과 낙지 무침, 스뻬인산 족발에 소주를 마셨다. 난생 처음 형님의 벗들도 그때 항상 같이 했다. 형님의 벗들은 매일 출근 전, 퇴근 후에 찾아왔고, 발인 전에는 함께 자면서 형님을 위로 했고, 입관도 함게 했다. 그 때 나는 말로만 듣던 경상도 사내들의 의리를 보았고, 아내는 나중에 내가 술을 마실 때, '경상도 싸나아들 의리 좋다 아입니까?' 하며 뻐기곤 했다. 비가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소은이가 배가 고프다 하여 우리는 유명한 국밥집으로 갔는데, 한 무리의 거칠어 뵈는 사내들이 함께 엉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사실 악취가 안나는 전자담배입네, 아기가 맡아도 상관없네(!!!) 하면서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이들도 더러 있어 혹시나 그러려나 싶었고, 형님 역시 약간 걱정하시던 눈치엿는데 뜻밖에도 대장 격인듯한 사내가 마치 구령이라도 넣듯, 야, 아 온다, 하면서 자신의 담배를 반대손을 오므려 감싼 뒤 한쪽으로 피해주었고, 다른 사내들도 그 뒤를 우르르 따랐다. 유명한 국밥집의 국밥과 수육은 맛있고, 나는 아내가 눈을 부라려서 낮술을 하진 못했는데, 국과 밥을 날라주던 노부인께서 또 그야말로 '경상도 츤데레' 라서 나는 속으로 웃었다. 저어그.. 아기 숟가락허고, 젓가락 좀 혹시 주시믄.. (말을 뚝 자르시며) 내 미리 챙겼다 아이요! (언성 쨍쨍), 저어그, 혹시 밥 좀 더 주시믄.. (턱짓하시면서) 내 진작 아 더 무라꼬 밥솥 열어놔따 아이요! 혀 안 디게 후후 불어멕이소마! 저.. 잔돈이 천원 모자란디 어쩔쓰께라.. (계산통을 탕 닫으시면서) 그건 아낏다가 나중에 애기 까까 사주소! 내 안 받니더! ...뭐 이런 식이었다. 그러더니 소은이가 '할머니, 안녀엉~ 안녕히 계세요~' 하면서 마치 영부인마냥 품위있게 손을 흔들며 떠나려 하자 갑자기 언성이 착 낮아지시더니 '아이고마~ 니 가나아~ 말도 잘하꼬 이뻐죽겠데이~ 잘 가래이~ 할아버지, 삼춘, 아배, 어메 말 잗듣고 아프지 마래이~~' 하시더니 흑설탕 사탕도 한 봉지 안겨주셨다. 요즘 말로 종잡을 수 없는 온도차였다.
올라오는 길에 아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또 제 어미와 떨어질 것을 미리 알았는지, 안 자고 안 자려 하더니 차 출발하는 오후 여섯시 다 되어서야 곯아떨어졌다. 아내가 자리까지 안아 앉혀주었고, 인형으로 베개를 만들어준 뒤, 내 옷을 이불삼아 감싸주었다. 약 두 시간 동안 세상 모르고 자면서 별 일없이 잘 올라오다, 내릴때가 다 되어 조심스레 깨우자, 제 어미를 찾으면서 '엄마? 엄마? 엄마 어딨어요~~~' 하면서 객실 두 칸을 다 돌았다. 열차 직원 분을 포함하여 어르신 승객들 몇몇이 애 때리는 줄 알고 깜짝 놀라서 뛰어나왔다 할 정도로 소리가 컸다. 아이는 눈물콧물 흘리면서 제 어미를 찾느라고 객실을 다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흥미롭게 지켜보았으며, 몇몇 노부인들께서는 조심스럽게 '아니, 애 엄마는 어디 갔어? 대체 이게 뭔 일이여~ ' 하시기에 '복직이요, 복직, 지방에 직장이 있당게요.' 하자 더는 안 물어보셨다. 사실 내려올 떄의 일도 있거니와 아내도 소은이가 훨씬 어렸을때 하도 소은이가 울어제껴서 어느 승객의 항의를 심하게 받아 상처받은 적 있다하여 걱정했는데, 머리도 벗겨진 왜소한 아비가 혼자 딸을 보며 애쓰는게 안쓰러워 그랬는지 아이가 퍼질러 앉아 우는 입석의 앞뒤 칸에서 젊은 여대생부터 지긋한 노부인까지 다 뛰어나오셔서 인형이며, 초콜릿, 사탕, 과자 등을 주시며 달래주셨는데, 소은이는 엉엉 울면서도, 그 것들을 모두 받아 챙겨서 사람들이 웃게 만들었다. 입석칸 의자에 앉아 있다가 졸지에 소은이의 통곡 쇼를 쌩라이브로 보게 된 어느 여대생은, 자기 애도 아닌데 자신이 괜히 '어머 어떡해, 어머 어떡해.' 하며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제 자리에 앉혀볼까요? 요구르트를 먹여볼까요? 아이고, 어떡하죠, 뽀로로는 안되나?' 하면서 고민을 같이 해주어서 무척 고마웠다.
아이는 어버이날이라고 어린이집에서 영상도 찍었고,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카네이션 화분도 만들어 왔다. 아내에게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었다. 허덕허덕 애를 키우느라 내가 아직 철든 부모라는 자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아내와 주말부부로서 보낸 첫 주말에, 나는 한 숨 푹 자고 옥상도장에서 연습을 마친 뒤 처자식과 함께 공원 산책을 나갔는데, 그때 나는 참말로 감동적인 광경을 보았다. 우리 집 근처의 천변은, 작년 여름 폭우에 한 번 넘친 적이 있어 제방을 다시 쌓고, 물길을 돌리는 공사를 좀 했는데, 그래서 어귀마다 풀숲이 조금 우거져, 천적을 피하기에 좋았는지, 어미 오리 하나가 제 새끼들을 몰고 그 풀숲으로 올라가려 하는 상황이었다. 어미 오리야 덩치가 크니 새로 쌓은 제방을 어렵지 않게 올라갔는데, 작은 새끼 오리들은 그를 따르지 못해 물가에서 맴돌고만 있었다.
여유롭고 기분 좋게 낮술도 한 잔 먹었겠다, 저 어미 오리도 부모인데 같은 부모인 내가 영장류 대표로 못 도와주나 싶어서 아내에게 어찌케 내가 가서 돌이라도 좀 디뎌줘야 되겄는가? 아니면 하나하나 손으로 옮겨주까? 하자 아내는 펄쩍 뛰었다. 난리납데이, 이소할때 사람 손 타거나 냄새 묻으마 끝장인기라, 어미가 바로 버려뿐다 아입니까. 앗따, 뭔 소리여, 새 눈이 그렇게 좋은디, 사람 손 좀 탔다고 제 새끼도 못 알아보고 버린단 말이여? 아내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당연하다 아입니까, 쟈네들은 목숨 걸고 사는 거라, 남은 새끼들 보호할라꼬 단 하나라도 위험한기 있으모 가차없이 버리는게 쟈네들 본성 아니겠니껴? 우리 부부 말고도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오리 무리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엇는데, 결국 어미 오리는 새끼들을 이끌고 다시 하류로 가더니 좀더 야트막한 풀숲을 기어이 찾아내어 한 마리 한 마리 씩 제 새끼를 물어 그 곳에 안전하게 숨겼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그 오리들엑에 가까이 가려하기에, 아내와 내가 막고 오리들이 잘 이소하게 도와주자고 말했다. 그 때 나는 이미 술기운에 훌쩍훌쩍 울고 있어서, 천변의 어린 소년소녀들도 '이 대머리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인가..'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아내 역시 '아이고, 하여간 태권도를 그래 하모 뭐합니까, 사람이 맨날 눈물이 많아가, 그게 그렇게 감동적이었니껴?' 하며 놀렸다. 나는 집에서도 고량주를 더 마셨는데, 그때 좀 더 취해서, 계속해서 한낱 짐승도 그렇게 자기 새끼를 물고 돌본다며,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짐승보다 부끄럽게 살 순 없다며,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해서 아내가 무척 피곤했다고 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보내면서, 나는 철이 덜 들었으나 어린이라기엔 순수하지 못하고, 어버이라고 하기엔 아직도 덜 된 구석이 많다. 다만 제 새끼를 하나하나 입으로 물어 풀숲으로 옮기던 오리의 모습은 정말 오랫동안 잊지 못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