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형태와 무게, 품격에 대하여 - 묵가의 시선에서.
요즘 같은 때에도 이른바 '강성노조' 혹은 '귀족노조' 라는 이름으로 심심찮게 기사에 오르고 있는 노조 측에서 또 한 번 구설수에 오를 일을 만들었다. 안 그래도 노조의 시위에서 구성원들이 만취하여 주정부리며, 고성방가를 하고, 노상방뇨를 하며, 길 가는 행인들에게 행패를 부려 뉴스에도 방영된 바 있다. 스스로가 대단히 무언가를 깨닫고 선도하는 듯 착각하여 무엇이든 폭력을 저질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깨시민' 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어왔다. 그러던 와중에 노조의 회식에서 20대 여성 영양사들을 불러다 술을 따르게 하고, 집에 간 이들마저 기어이 불러다 또 희롱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노동을 통한 평등을 이룩하겠다던 노조원들이 그랬다. 피해 호소인 운운하는 그들의 사과문을 톺아보기 이전에, 노조의 이름으로 사실 불평등을 선도하고 또다른 이득을 챙기던 그들의 위세는 오래 전부터 지적받아왔다.
묵자는, 그의 저서에서, 날짐승이 제 날개로 날고, 길짐승이 제 이빨과 발톱으로 살듯이, 인간은 노동력으로 스스로의 삶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피로써 피를 씻는 춘추전국시대- 묵자가 돌아본 이들은, 오랜 전란에 지쳐 스스로의 삶을 지탱할 논밭 한 뙈기는커녕, 부모자식 형제조차도 찾을 길이 없는 이들이었다. 땅과 가족을 기본으로 하는 유학의 종법적 제도나, 군사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단체를 이루는 병가, 엄정한 형벌과 제도로 사회를 다스리는 법가, 제국의 논리와 자연의 논리를 뒤섞는 도가 는 모두 사회를 이루기 전,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들을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묵자는 스스로 무기를 만들고 병법을 고안하여 그들을 지켰고, 땅이 없어도 상업과 기술을 통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가르쳤으며, 꼭 혈연이 없더라도 서로 사랑하는 겸애의 논리로써 새로운 공동체를 꾸리도록 했다. 자끄 랑씨에르는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 에서, 고대로부터 도시국가를 이룩하고 민주정을 고안한 그리스인들에게 정치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하나의 거대한 배와도 같아서, 숱한 토론와 고민의 항해 끝에 가장 알맞은 항구에 기착하는 듯한 이미지일 거라고 말했다. 나는, 애초에 정치의 형태라든가, 이미지 등을 생각해본 적이 없엇는데, 자끄 랑씨에르는 이미 아주 오래 전- 젊었을때부터 직접 유인물을 뿌리고, 토론을 하고 정치에 뛰어들면서, 자신에게 정치란 어떤 형태였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했다. 현대 정치는 누가 뭐래도 그럴듯한 원탁에서 서로 정장을 빼입고 거대담론을 주고 받는 형태로 바뀌었으나, 과연 그러한 정치의 형태가 노동에 지친 대중들에게 올바로 받아들여질 것인지 또한 물었다. 태권도의 찌르기, 차기 형태를 고민하듯, 정치가 마치 살아 있는 하나의 구조인 것처럼 고민했던 위대한 석학의 문장에 무릎을 탁 쳤던 때가 아직도 선연하다.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드물다. 성경에서는 출산과 더불어 노동이 인간의 원죄를 상기시키는 형벌이라고 했으며, 맑스는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했다. 돈 많은 백수를 꿈꾸는 우리들에게, 노동하지 않는 인간이란, 무위도식하며 사회의 혜택을 체리피커 처럼 빨아먹는 이들이거나, 혹은 노동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사회적 약자이거나, 혹은 노동할 필요조차 없는 막강한 사회적 강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토록 돈이 많다고 여겨지는 이들 중에서도, 그 자본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노동하지 않는 이들은 아직까지 보지 못한 듯하다.
모두가 노동을 하는데, 왜 노동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차별이 생기고 구별이 생길까? 심지어 모든 노동자들의 편익을 보장하며, 나아가 노동자 해방을 통해 노동자 천국을 이루어야할 노조까지 하나의 권력적 형태가 되어버렸다. 맑스는 진정한 노동자 해방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를, 노동자 스스로가 노동자 계급을 벗어나려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고, 이택후는, 애초에 노동자 집단 자체가 사회를 이루지 못할만큼 협소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로지 출퇴근과 전문기술의 숙달만을 반복해온 노동자들은 종법적 제도의 상위층에서 군림해오며 정치와 학술을 배워온 유학의 선비들이나, 법가의 판관들, 병가의 장군들처럼 사회의 종합적인 경험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노동 바깥의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 만든다는 상상은 몹시 크고 막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묵가는, 우두머리 격인 거자 鉅子 를 중심으로 무기를 고안하고, 병법을 훈련하고, 명령에 따라 전쟁을 막는 일들은 기가 막히게 해내었지만, 그 이상의 새로운 사회를 만들거나, 계급적 논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묵자의 수제자들인 거자들조차도, 묵자 사후에는 그 뛰어난 병법과 전투기술, 사상 등을, 묵가의 본분대로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어전에 쓰지 않고 오히려 용병화되어 침략전쟁에 뛰어들며 권력의 가렴주구로 왜곡되었다. 맑스는, 더 높은 권력과 안락을 찾으려는 인간적 본성에서, 이택후는 노동자 계급이 가진 한계에서, 결국 타락할 수밖에 없던 노동의 형태를 보았다.
나 역시 노동자다. 나는 솔직히 말해 내 노동이 부끄럽지 않지만, 자랑스럽지도 않다. 나 역시 돈 많은 백수가 되어 책 읽고 태권도하고 술 마시며 유유자적, 노동과 유리된 삶을 살기를 바란다. 내 자녀들 또한 가능하면 공부를 많이 하고 가능한 편하고 떳떳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더이상 누군가에게 노동자 해방이라든가, 숭고한 노동이라든가 라는 말들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송곳' 으로 유명한 만화가 최규석 씨는, 노동 운동 10년해도 사장 되면 노조 해체할 궁리를 하는 것이 인간 이라는 대사를 썼다. 일찍이 유학은,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도에 맞게 욕망하는 법을 고민했었다. 그러므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맞벌이 주말 부부가 되어 늙으신 어머니 아버지에게까지 육아 노동을 전담시켜야 하는 우리들은, 가능한 우리의 노동이 떳떳하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어서 놓여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