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 <나, 이페머러의 수호자>, 현대문학, 2020.
조현 선생이 돌아왔다. '누구에게나 아무 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로 내게 충격을 주고, '새드 엔딩에 안녕을' 을 통해 아, 여전히 건재하시구만- 하고 확신을 준 이방인 같은 작가. '햄버거의 역사' 시절에만 해도 그는 아무런 이력없이 그저 갑작스럽게 SF소설계에 나타난 회사원 출신의 혜성 같은 신인이었기에(사실 08년도에 동아일보를 통해 등단하긴 했었다.) 자칭 클라투 행성의 지구인주재 특파원이라는 여상한 신분조차도 과연 SF작가다운 소개구나 미소를 함박 짓게 만들었던 사내. 대표작으로 독자들의 눈을 흡뜨게 만들고 후속작으로는 독자들에게 반가움과 그리움을 주며, 작품 곳곳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감추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문단 바깥에서 태어난 행복한 재능' 배명훈 선생, '소설쓰는 과학자' 곽재식 선생과 비슷하다. 다만 그들보다는 명백히 과작한다는 점에서 안타깝기 짝이 없다. 내 알기로 그는 대표작으로부터 7년만에 겨우 후속작을 내었다. 가끔 그의 또다른 행보가 궁금하여 열심히 검색해볼라치면, 도발적인 코스프레로 이름높은 동명의 아이돌만 자꾸 나와 좋으면서도(?) 섭섭한 그 기분을 아실는지.
글쓰는 이로서 조현의 강점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 모두가 저 고독한 우주에서 뉜가는 별을 뿌리듯 글을 쓰고, 또 뉜가는 그 별빛에 취하듯 황홀히 읽는데 즐거움을 느낀다. 내가 아는 배명훈은 명백히 설정과 배경으로 승부하는 작가다. 그의 연작소설집 타워에서, 오로지 커다란 고층 건물 하나로만 이루어져 계단과 에스컬레이터, 고속 엘리베이터를 차량과 도로로 삼는 독립도시국가 '빈스토크' 라는 황홀한 설정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양상은 달라진다. 역사학을 깊이 공부한 이답게, 그는 같은 인간이라도 처한 문화와 환경에 따라 마치 개미떼처럼 그 양상이 어찌 달라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반면 곽재식은 같은 설정과 배경을 쓰더라도 그 것을 훨씬 사람의 일상에 녹여서 쓴다. 그가 애정하는 맥주탐정은, 사람을 잘못 믿었다가 억울하게 간을 떼이고 비싼 간 재생 주사를 맞을 돈이 없어서 늘상 아주 약한 맥주를 마셔가며 간에 자극을 주어 조금씩 재생되기를 기다리는 애잔한 사내다. 그런가하면 어느 학교의 젊은 석학들이 머리를 맞대고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난생 처음 짝사랑하는 아가씨와 밤길의 교정을 자전거로 산책하는' 일생일대의 과제를 수행하고자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제아무리 뛰어나 과학기술과 훌륭한 논문이 있어도 수천수만가지의 변수가 있을 사랑에 대해서는 명확히 정의내리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배명훈이 장엄한 가운데 가끔 한갓진 틈을 보인다면, 곽재식은 반대로 한갓진 사이에 촘촘한 구성을 끌어들인다. 어느 쪽이든 독자로서는 눈과 마음이 즐겁다.
오래 전부터 조현은 이 두 작가 사이의 어덴가에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그 어덴가가 어데인지는 구태여 알지 못해도 좋았다. 조현의 서사는 곽재식과는 다르고, 배명훈과도 또 달라서, 거대한 낭만을 가지고 천천히 우리 곁에서 느린 우주선처럼 출발하여 광대한 서사의 은하를 헤쳐나간다. 그 서사에 취하여 정신없이 따라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의 글은 다시 우리 곁에 와 있다. 결국 제아무리 우주를 돈다 한들 그는 사랑하는 인간들의 곁으로 돌아온다. 조현의 글 중 꼭 한 편을 꼽으라 한다면,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 를 주저없이 들고 싶다. 우주의 여러 문명을 관장하는 소울 마스터들 중 우주의 완벽한 조화를 위해, 미생물에 가까운 단순한 문명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이가 지구의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형벌을 받아 아름다움을 통해 진정한 문명의 가치를 깨달아나가는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려내었다. 감히 말하건대,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에 비견할 정도로, 그 비장미와 낭만이 절정에 달하는 수작이다.
그러므로 이번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출간된 그의 신작은, 정말이지 다소 아쉬웠다. 세계사편력의 말미를 앞두고 비문학에 지쳐 잠시 문학으로 쉬고 있는 중에, 김훈 선생의 신작에 이어 조현 선생의 신작까지 이러니 내 팔자가 어찌 이러나 싶다. 한편으로는 교회 전도사님마냥 내가 권한 이영도 선생의 신작이 너에게는 몹시 괴로웠다 하여 어리둥절했었는데, 지금 조현 선생의 신간을 다 읽고 나서야 비슷한 마음인가 싶다. 사실 '마트 이야기 - 시하와 칸타의 장' 을 읽을 때부터, 쓸데없이 화려한 양장에, 책 크기는 작고 얇으며 글씨는 커서 영 어색한 것이 보기 불편해도, 작가에 대한 애정으로 참고 읽었는데, 조현 선생의 글은 결말에 가기 직전까지 '나 정말 이거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그냥 출판사 계약 때문에 덜 익은 글 대충 냈슈~' 하듯이(전적으로 내 상상이다.) 문장이고 서사고 난삽하고 어지럽기 짝이 없으니 이 조현이 정말 그 때 그 조현이 맞단 말인가, 행여나 코스프레 해서 신문 기사로 혼나던 다른 조현은 아닌가, 아니면 혹시 천녀유혼에서 훨훨 날던 농구선수 출신 왕조현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결말은 여전히 조현다운 인간애로 귀결되어서 그나마 나무야 미안해 수준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페머러(ephemera)는 한 번 쓰고 나면 버리는 1회용품이나 출간물 등을 뜻하는 고서적계의 용어란다. 우리식 속어대로 하면 찌라시쯤 될 터이다. 주인공 미스터 조는, 다른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연극배우 출신의 여자친구와 생계적으로 불안한 사랑을 이어나가며 취준생에서 인턴으로, 인턴에서 계약직으로, 계약직에서 다시 정규직으로 되고자 발버둥치는 평범한 젊은이다. 다만 나름대로 인문학에 소양이 있어 대학원 석사 논문까지 쓰고 나온 그의 직업은 범상치 않은데, 그는 CIA와 연계되어 각 나라 수장들의 고풍스러운 취미- 이를테면 흑마술이나 유사과학, 아마추어 고고학 등의 유물을 찾아 탐구하는 - 를 맞춰주는 한 협회의 연구원으로 소속되어있다. 그의 상사이기도 한 한국지부의 임원은 '히틀러가 조금만 더 미술이나 흑마술에 심취했다면 세계2차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테니, 돈 많은 지도자나 왕들이 전쟁에 관심을 가지느니 저런 식의 취미라도 가지게 두는 편이 더 낫다' 고 하지만, 그들이 발굴해낸 역사적 유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이므로 종종 나라 간의 뒷거래에서 암약한다. 이를테면 천안문 광장의 생존자가 써낸 수기를 입수해서 중국과의 무역 전쟁에서 협박용으로 사용하는 식이다. 쓸데없는 거대담론들이 오고 가는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주인공은, 여자친구의 사랑조차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면서 옛 유물들을 발굴하러 전 세계를 누빈다. 과연 오래된 유물, 유적들과 한편으로 주인공들의 일상 중 진짜 이페머러는 어느 쪽일까.
책으로 얻은 상처는 책으로 치유해야 한다. 그래서 너는 내 책을 사는 김에 너의 책도 샀다. 한강의 신작이었다. 너는 한강을 읽으면서 벌써부터 책이 줄어드는게 안타깝다고 울상이었다. 나는 한강은 '희랍어시간' 정도만 겪어낼 수 있다. 한 권의 한강을 읽으면 며칠 동안 꼼짝없이 끙끙 앓는다. 국수 한 가닥도 제대로 넘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일단 다시 이페머러 같은 세계사편력으로 돌아가려 한다. 일단은 전세계를 누비며 나라와 가정을 지키면서도, 딸에 대한 애정을 늘 박학한 역사적 편지로 보내왔던 한 위대한 아버지의 어깨에 실려 잠깐은 쉬어야겠다. 그 다음 책은 또 뭘 읽어야 하나. 어째 요즘 노래 들을 것 없다 한탄하듯, 새로 나오는 소설들도 입맛에 맞는 것이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