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 )

노동자로 사는건 언제 어데서든 쉽지 않다.

by Aner병문

베버는 소명을 말했고, 알뛰쎄는 호명을 말했다. 베버가 들고 나온 청교도적 소명 의식이 근검절약하는 노동자를 생산했다고 말했다면, 알뛰쎄는 애초에 인간은 정해진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 불려나온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맑스는 생산수단의 소유를 노동자에게 돌려주기 위한 무기로 이데올로기를 부르짖었지만, 알뛰쎄에게 이데올로기란 무대에 내려와 다른 배역을 겪어볼 기회ㅡ즉 연극을 망칠지도 모를 마주침의 기회를 박탈하기 위한 압박이라 보았다.


인간은 물론 연극무대에 병풍처럼 서 있어야할 무대 배경 소품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며 부품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희극의 왕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의 그 유명한 장면을 회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하루 8시간 이상, 1주일 중 닷새 40시간 이상을 부품처럼 산다. 평일 출퇴근 시간, 같은 교통수단과 경로를 따라 고층건물로 빨려들듯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의 행렬은, 획일화된 노동자들이 부품처럼, 혈액처럼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언제든 대체될수 있으며 설사 그가 없다 해도 회사는 거인처럼, 기계처럼 민활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러므로 역시 노동자일 중간 관리직들은, 부품처럼 직원을 부리되 감정과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도 대우해줘야하는 난해한 균형점에 빠진다. 그러므로 오나라 수백명의 궁녀들 중 가장 기가 센 여자의 목을 베어 군기를 잡고 하루만에 사열이 가능케 하여 병사로 능히 바꾸어버린 손자병법의 용병술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알뛰쎄는 진정한 유물론자는 떠나는 곳과 머무는 곳에 대해 걱정치 아니하고 여행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라 했다. 루크레티우스의 짧은 논문 한 편으로 마주침과 생성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했던 위대한 철학자답다. 슬라보예 지젝은 알뛰쎄를 깊게 다시 읽으며 찬탄했으며, 이런 이들에게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론이나 유학의 태극설 등은 곰팡내나는 옛 이야기처럼 느껴질 터이다. 그러나 마투라나는 모든 생명체가 리기음양오행의 조화로 나지도 않고, 교회나 플라톤의 가르침처럼 데미우르고스ㅡ전능한 제작자의 의지로.만들어지지도 않으며, 도킨스의 유전자가 설계한대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라 했다. 알뛰쎄가 동경하는 진정한 유물론자처럼, 생명체는 방랑하듯 유구한 역사를 지나 모험하고 도박하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좌절한다. 수없는 시도 속에 성공한 생명체만이 지금까지 살아남으며 그러므로 모든 개체는, 속해있던 계통의 역사를 압축하여 반복한다. 마투라나의 치열한 자연표류설처럼 노동자들은 소속을 바꿔가며 머물 곳을 찾아 표류한다. 자의도 타의도 아니기에 이 표류는 낭만적일수 없고, 알뛰쎄의 진정한 유물론자도 아니고, 들뢰즈의 유목민도 아니다. 그저 살곳을 찾아 헤매이는 망국의 보트피플처럼 떠밀려다닐 뿐이다. 사회가 갈수록 경직되고 보수적으로 바뀌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 한번의 실패조차 용납되기 어렵기 때문에 계급이동은 고사하고 사회 진출조차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후대를 생산하여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싶지 않을 터이다. 이런 시대, 이런 사회에서 처자식을 봉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 노동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국제시장의 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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