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건지 몹시 불안하다.
그러므로 요즘 들어 회사 생활이 유독 힘들었기에, 지난 주말은 정말 천국에 다녀온듯 무척 즐겁고 행복했다. 아내는 내 덕에 동창들 사이에서 체면 좀 세웠다며 웃었지만, 사실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내가 더 좋았어야 되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여덟명쯤 되는 아내의 여고 동창들 중 빠리댁과 수원댁을 제외한, 대구댁과 마산댁이 하루 날잡고 연이어 결혼을 하기에, 그 곳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아내가 예약해준 KTX로 오르락내리락하면 되었고, 마산과 대구 사이도 아내가 운전해주는대로 마음편하게 다녀오면 되었으며, 아내가 당직일 동안 나는 술 한잔 편히 마신 뒤 산을 노닐고 책을 읽으며 까불거렸을뿐 아니라, 온갖 산해진미에 술도 그득그득 마셨다. 나는 지역에 내려가 공장제 소주를 마셔야 한다면, 지역소주를 주로 마시는 편인데, 잎새주나 C1에 비해 좋은데이 는 좀 더 달고, 아직까지는 부드러운 참소주나 30분 늦게 취한다는(진짜?^^;;) 충청 지방의 오투린이 좋다. 게다가 대구댁과 마산댁 덕에 각 도시 최고의 호텔에도 묵어보았으니 이렇게 온갖 호사는 다 누렸는데, 정작 아내는 내 덕에 더 고마웠다니?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아내의 고향에서는 남자는 좀처럼 아내의 행사에 함께 하지 않거나 자기 일만 하기 일쑤라는데, 남의 부부 사이 내가 어찌 함부로 말하겠냐만, 가뜩이나 주말 부부인데 내가 더군다나 아내 명분으로 꽁술(엄밀하게 말하자면 봉투도 비싸게 했으니 꽁술은 아니지만^^;;) 마실 기회를 왜 놓치겠냐고요, 히히히.
그런데 나 정말 이리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소은이가 아직 제 어미 뱃속에 있을 무렵, 나는 아내의 허락을 받아 잠시 어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오랜 인사동 시절을 걷어치우고, 그래도 명색이 외국계 회사를 들어갔는데 녹슬어가는 영어를 조금이라도 더 다잡고 싶었던게다. 그때 2호선 역 앞에 참으로 맑은 눈을 가졌던 어느 노숙자 형님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내가 본 종로3가, 영등포, 여의도, 인사동, 홍대입구, 신도림, 구로, 안양, 심지어 중국, 대만 관광지까지 포함하여 가장 차림새가 깨끗했고, 무엇보다 눈이 맑았다. 내가 스스럼없이 속으로 형님이라 부를 정도로, 그는 나와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보이지 않았는데, 술담배에 절어있지 않은 눈으로, 아침 출근에 바쁜 회사원들을 꼭 비둘기 바라보듯 맘편하게 바라보곤 했다. 벤치에서 그럴듯한 코트를 입고, 팔짱을 낀채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 어찌나 여유로워보이던지, 어학원 새벽 강의를 마치고 서둘러 회사로 갔다가, 혹시나 아내가 허락이라도 해주면 또 퇴근길에 바로 도장으로 가야했던, 그 때 그 늦신혼의 나는, 아주 가끔 그 노숙자 형님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거나, 어데 빵집에서 얻어온듯한 빵 꾸러미를 풀거나, 심지어 어느 단체에서 제공해주었는지 꼭 고급 일식처럼 보이는 도시락의 포장지를 벗기는 모습을 보고는 그 여유롭고 호화로운 모습에 질투나 죽는 줄 알았다. 내가 어찌나 자주 이야기했는지, 아내와 사범님과 목사님은 혀를 차며, 그게 뭐 그렇게 좋겠는가, 하셨으며, 너는 심지어, 아니, 아주 진짜 부러운가봐, 전 선생님, 그렇게 자주 얘기할거면 그렇게 아주 살어, 라고 농담까지 건넸었다.
어느덧 결혼한지도 6년을 바라보고, 이 회삿밥을 먹은지도 3~4년이 되어가는데, 그 노숙자 형님도 예전같지는 않아졌다. 술담배 한번 적셔보지 않은듯한 눈은 많이 탁해졌고, 피부는 꺼칠하게 탔으며, 수염과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자라 엉켰고, 구질구질한 차림새에 여느 노숙자가 그렇듯 많은 짐을 제 신주단지처럼 짊어지며 쓰레기통과 거리에 남은 음식물쓰레기들을 게걸스레 찾았다. 몇 년 전 새벽녘에 보던, 깨끗한 옷차림으로 우리를 맑게 건너다보던 남자는 그 행색에서 찾아볼 수가 없어서, 나는 혹시 이 형님이 그 당시에는 신입 노숙자였나, 그래서 아직 사회 물이 덜 빠졌을까 를 생각했다. 예전에는 낮잠을 주무셔도 비를 피할 수 있게 육교 밑에서 다리를 쭉 뻗거나, 혹은 벤치에서 퍼지듯 앉아 주무시곤 했는데, 이제는 누군가 볼세라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마스크로 얼굴까지 빈틈없이 가린 채 벤치 아래서 온갖 짐더미를 끌어안고 옹송그려 주무신다.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마치 자신은 더이상 없다는듯이 설레설레 손을 저으며, 제 스스로를 지우려는 듯 그렇게 주무신다. 그리고 정신이 들면, 낮이고 밤이고 누군가 먹다 남긴 밥, 커피, 담배, 술 등을 찾아 정처없이 헤매인다. 이 몇 년간, 같은 회사와 도장에 있으며 낮과 밤에 본 기록과 기억들이다.
나도 그럴 수 있었다.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래서 소은이가 아직 제 어미 뱃속에 있던 시절, 아내의 허락을 받아 너와 단둘이 회사 앞에서 술을 마셨을 때, 너는 조심스레 내 눈치를 보며 전 선생님, 나 하나 물어어봐도 돼? 라고 했고, 나는 그러라고 했으며, 그때 전 선생님 왜 그랬어? 라는 말에 나는 차마 명치를 칼로 헤집은듯 말하지 못했고, 연달아 소주만 들이켰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나는 그날 거리에서 지갑을 잃어버렸고, 다행히도 지갑은 며칠 뒤 무사히 몇 정거장 떨어진 경찰서에서 찾았다.
지금도 더 젊고 어려 철이 없을 때, 나는 멋있게 살지도 못했고, 낭만 있게 살지도 못했다. 어느 집에나 있을법한 부모님과의 갈등을 견뎌내기엔, 나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어렵사리 붙은 명문대학교에서의 공부도, 군대 가기 전까지는, 난생 처음 주어진 나만의 시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허송세월을 보냈다. 내가 주체적으로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때는, 놀랍게도 거의 모든 것을 잃고 바닥을 쳤을 때다. 야스퍼스가 그랬듯이, 나 역시 그 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며,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때, 신앙과 가족과 지금 현재의 벗들만큼은 나를 버리지 않고 손을 잡아주었다.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 서울의 모든 정형외과에 다 전화를 걸어 기어이 나를 찾아낸 적이 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올바로 살기로 결심하였다. 아내는 가끔 너나, 곽선생이 파편처럼 흘리는 내 청춘의 이야기를 듣고 반신반의하며, 이 싸람, 참말로, 나쁜 짓 마이도(많이도) 하고 다니뿟네! 놀렸지만, 나는 그때 정말 올바로 나쁘지도 않고, 떠밀려서 살려고 천하고 천박하게 살았다. 겉으로는 비싼 술 사 마시고 온갖 책 다 읽고 배우고픈 무공이며 춤, 악기 등은 다 배우며 세상 멋쟁이인 양 굴었지만, 속으로는 늘 불안했고 조바심이 나 온 마음이 썩는 듯했다. 기초없이 살면 그렇게 허랑방탕하게 살 수밖에 없다. 매일 술 퍼마시고, 보란듯이 책 읽고, 누구 하나 용서하지 못하고 시빗거리 찾아 얕은 무공으로 싸움질이나 해대던, 불나방 같던 밤골목 사이사이에도 애틋한 추억이야 왜 없었으랴만, 그렇다고 해서 예정된 허무와 파락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충분히 어쩌면, 내가 매일 출퇴근마다 마주치는 노숙자 형님처럼 그렇게 삶의 무엇도 잡지 못하고 영영 썩어버리고 잊혀질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참으로 아내에게 감사하다. 늘 무던하고 관대한 아내에게 고맙고, 이런 부족한 사내도 애비라고 믿어주고 따라주는 소은이가 고맙다. 요즘 소은이는 피자 놀이에 폭 빠졌는데, 집에서의 훈련과 독서를 끝내고, 샤워하고 나와 나란히 TV를 보던 도중, 소은이 왈, 아빠, 우리 피자 먹어요? 하기에, 어지간히 딸의 문장과 억양에 익숙해진 나도 응, 소은이, 피자 먹고 싶어? 하자, 마치 그 옛날 인생극장 이휘재 씨, 그래 결심했어! 마냥, 한쪽 팔꿈치를 구부려 기세좋게 내리치더니, 그래, 아빠, 기다려! 하면서 제 몸뚱이 세배는 될 아주 커다란 장난감 상자를 피자 상자랍시고 가져오는 것이었다. 하기사 겉보기에는 길쭉한 직사각형 상자이니 피자 상자라고 할법도 했다. 아마 어데 영상에서 본 모양인데, 기운도 좋지, 그 커다란 상자를 흔들지도 않고 들고 오더니 딩동딩동, 피자 왔쓥미다아~ 하면서 상자를 열면 녹색 트럭은 피클이요, 조립하다 만 분홍색 커다란 멜로디언은 치즈피자란다. 와 맛있겠다! 하면서 냠냠 먹는 시늉은 하노라면, 어머니는 귀여워하시다가 문득 도끼눈을 뜨시며, 근디 야가 어찌 피자를 알꼬? 야, 느그들 혹시 나 없는 새에 애 밥 안 먹이고 피자 먹인거 아니여? 추궁하시곤 한다. 때때로 아토피에 고생하는 손녀 안쓰러워 밀가루 먹이지 말라는 말씀인 줄 나도 이제 헤아릴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 조금 더 여유로웠으면, 조금 더 관대했으며, 나의 청춘은 어쩌면 이보다는 덜 상처를 받았을 터이고, 누군가에게 더 쓸데없이 상처를 줄 일도 적었을 터이며, 흉터처럼 잊지 못할 기억들도 이보다는 적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살아남았고, 어쨌든 지금 몹시 행복하다.
행복하다 하여 힘들지 아니한 것은 아니다. 두 식구 벌이로 애 하나 키우는 일 어렵지 않을 줄 알았지만, 애 키워주시는 부모님 용돈에, 각종 생활유지비에, 경조사라도 겹칠라 치면 돈을 모으기는커녕, 월말에 때때로 허덕이며 돈을 맞추기조차 어려울 떄가 있다. 정말이지 어머니 아버지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부부는 소은이 하나 키우는 것도 감당하지 못할 뻔했다. 어쩌면 아내와 지독하게도 행복할때, 혹은 노숙자 형님의 추레한 행색을 볼 때, 나는 자꾸만 주름처럼 잡힌 옛 기억에 자극받는지도 모른다. 어제 갑작스레 하염없이 바차따를 듣고 싶었고, 느닷없이 춤을 추고 싶어져서 더 그러하였다. 언젠가 내 과거와 충분히 거리 두어 정말이지 타인처럼 여겨진다면, 남의 이야기쓰듯 소설 습작으로 써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 때의 기억이 있어 다시는 어두운 수렁으로 가지 않으리라 늘 다짐하는 내가 만들어진 것임에도, 나는 여전히 내 젊은 시절이 무섭고 두렵다. 도망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