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 - 인류 최초의 살인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역, 카인, 해냄출판사, 2015.
러시아 소설, 일본 문학에 흠뻑 빠지고 나니 라틴 문학이 눈에 들어왔다. 군대 있을 때 이미 라우라 에스끼벨과 마르께스를 통해 맛을 보고도 난 뒤였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이 도시가 영화화되며 제3대 헐크- 마크 러팔로 또한 인기 배우의 반열에 올랐고, 일만 시간의 남미 라는 여행기 또한 인기를 끌던 때였다. 철없던 시절의 나는 마침내 맥켈란과 꾸바 리브레와 남미 사교춤의 세계에까지 푹 빠졌다. 마르께쓰, 네루다, 보르헤스, 아옌데, 세풀베다 등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의 계보를 잇는 책들은 지금도 손맡에 두고 인문학이 힘들때 가끔씩 읽는다. 내가 바닥의 바닥에서 신음하던 시절, 정말로 책이 노랗게 바래어 양장이 풀어지도록 읽은 책이 천명관 선생의 고령화 가족이었다면, 지금 나이를 먹어가며 한번씩은 다시 읽는 책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다. 이제는 지나치게 철이 없어 뜨거웠던 젊은 시절의 열망을 더는 가슴에 품을 수도 없지만, 그래도 적어도 자기가 지킬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은 잊지 않고 지킬 수 있는 사내로 늙고 싶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라마구도 참 오래 읽었고, 찾아서 읽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으며, 나 역시 도시 3부작으로 사라마구를 시작했으나, 사실 아직까지 사라마구 서사의 정점은 돌뗏목에 있다고 생각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해 명확히 사유한 학파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데, 고대에서 전근대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은 인간에게 주어져 인식하는데 지나지 않았고, 현대에 들어서는 과학의 영역으로 완전히 이첩되었기 때문이다. 문학의 세계에서 사라마구는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독자에게 보여주는 방법을 때때로 쓰는데, 그 방법이 돌뗏목 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비하면 아주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지만, 나는 때때로 돌뗏목도 즐겨 읽었다. 거대한 이베리아 반도가 뗏목처럼 흘러간다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잉태되고 흘러간다.
사라마구는 사실 성경을 변주하여 소설화하는 이로도 유명하다. 신약 성서를 재해석했다고 평가받는 예수복음이 있으며(한번 읽었는데 다시 읽어야 한다. 추후 재감평 예정), 도시 3부작 중 연작에 해당하는 눈먼 자/눈뜬 자들의 도시 역시 요한계시록 을 소재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술 못 끊은 교회 집사이긴 하나, 계시록의 내용은 너무 어려워서 목회자의 소명이 있는 이가 아니라면, 평신도가 굳이 깊이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카톨릭에서도 교황께서 이미 평범한 신도들이 굳이 기적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고 천명하셨다. 다만 인류 최초의 살인자, 형제의 피를 손에 묻힌 자, 신에게 대든 자, 여러 금기를 범한 카인의 이야기는 신앙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성경의 많은 내용들, 특히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구약이 당연히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지 않겠지만, 사라마구는 카인을 통해 교회 밖에서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을법한 신앙적 근원을 공격한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해서 만들었다고 해놓고 굳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만들었지?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고 카인의 제물은 거부해서 질투를 유발했지?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죽이라고 시키거나, 욥의 믿음을 구태여 시험했지? 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태어나기만 했을뿐 어린 아이들까지도 통째로 다 말살하셨지? 왜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만 살렸지? 진위를 판별할 수 없는 외경에 해당하는 릴리스의 이야기를 제외하고도 카인의 눈을 빌어서 본 구약에는 이토록 인간의 윤리로 판별할 수 없는 내용들이 가득하다. 소설 속 하나님은 비겁하고 졸렬하며 변명에만 가득 차 있고, 카인이 대들때마다 숨기 바쁘다. 카인은 자신의 욕망에 가장 솔직하고 억울함에 대해 당당한 주체적인 인간으로 보인다. 인간이 신을 해석하지 못하니 카인의 질문은 답변받기 어려운 것이며, 그러므로 소설 역시 명확한 결론없이 끝난다. 신앙이란 한편으로 원래 그런 것이기도 하다.
강신주 선생은,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앞세운 이어령 박사가 교회를 다니게 된 모습에 대해 두고두고 비판했다. 한국을 대표하던 인문학자이자 평론가가, 끝까지 인문학적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신의 위로로 도피했다는 신랄한 표현을 썼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거나 해석한다고 믿는 이가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차마 그에 대해 오만하다고는 하지 않겠다. 신앙은 원래 해석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믿지 않는 이에게는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이라서 인간의 방법으로 세상을 살겠다는데 같은 인간끼리 토를 달 수는 없다. 하물며 신앙을 가진 나조차도 어떤 날에는 입을 딱 벌리고 주여, 이건 뭡니까, 하며 술을 퍼마실때가 있는데 다른 분들이 오죽하랴. 그러므로 나는 분명 다소 불편했지만, 그냥 재미있게 읽었다. 오랜만에 예수복음도 다시 읽고 함께 엮어 재감평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