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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r병문 Feb 14. 2024

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술 마시며 설날을 설레게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전성기는 짧았으되 지금까지도 그 막강한 위엄을 유지하고 있는 마이크 타이슨은 일찍이 말했다. '누구나 처맞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라는 말로 강렬하게 의역되긴 했으나, 그가 취재에 응했을 무렵의 원문장은 "Everyone has a plan 'til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 - 제 입에 주먹 꽂히기 전에는 누구나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는 잠도 푹 자고, 책도 좀 더 읽고, 천자문-영어도 더 많이 쓰고, 신체 훈련도 좀 더 해야지 싶었지만, 웬걸, 설 전날부터 당일 점심떄까지야 설날 차롓상 차리느라 그랬다손 치더라도, 설 당일 오후부터는 그 다음날 있는 약속 대비하여 몸 푼답시고, 마크 위스키에 커피 타서 홀짝거리며 공부 하는 흉내 좀 내고, 저녁부터는 본격적으로 어머니와 아내가 함께 만든 밑반찬에 밥 잔뜩 비벼서 고량주 한 병 뚝딱 하고, 오늘이 Korean Traditional new year's 1st day 아니냐던 스뻬인의 미스 마리아 에스떼반이 메시지 보냈길래 취중에 몇 마디 보내주고, 다음날 술 잘 깨어 예배 보고 나서는, 내가 결혼식 사회 봐준 형님-누님네가 미국-멕시코 신혼여행에서 돌아와서 중래향에서 고량주 3병을 연달아 마시고 나니 저녁 시간이 훅 날아가고, 정신 차려보니 벌써 설 연휴 마지막 날, 아내와 겨우 주방 정리 좀 하고, 따뜻한 햇볕 맞으며 놀이터에서 좀 놀다보니 그러게 4일이 4초처럼 녹아 없어져버렸다. 결국 계획했던 일들 중에 그나마 흉내라도 낸 건, 달리기 조금, 천자문-영어 몇 자 끄적이기, 주방 정리 정도였다. 그래도 부부가 합심해서 어머니 가르침대로 설 차롓상도 잘 차렸고, 무엇보다 아내와 4일동안 붙어 있으면서 술은 많이 마셨으되, 처자식 잘 돌보았으니 가정 생활상 미련은 없었다. 너는 '언니 불쌍해, 힘들게 일하고 올라오면 늘 취해 있는(늘 취해 있진 않다!) 남편 있어ㅠㅠ' 라며 놀렸지만, 술을 마셨어도 적당한 선에서 처자식 잘 보았다. 



아이는 날이 갈수록 제 어미가 올라오는 날에는 기가 바짝 살았다. 하기사 주 5일 동안 제 어미 없는 날에는, 엄격한 할머니와 뭐든지 '안돼!' 부터 달고 사는 아비 밑에서 캡틴 아메리카마냥 바짝 말 듣다가, 그나마 뭐든지 다 들어주시는 할아버지 밑에서 숨통 좀 트고 나면, 또 아비가 같이 글공부하자, 태권도하자 귀찮게 하니, 딸내미 입장에서는 어미가 보고 싶을만도 하다. 어린이집에서는 조금 혼낼라차면,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엄마가 보고 찌퍼요...' 하며 연민을 자아내려는 모습이 제법 영악스럽기도 하고, 영리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며 몇 차례 소식을 전해온 바 있다. 사실 조부모와 아비 밑에서 양육자가 하루에도 두세번씩 바뀌어가며 눈치를 봐야 하는 아이 입장도 내가 모르지 않거니와, 아내는 올라올 때마다 '아이고, 인자 다섯살짜리 머 안다꼬 이렇게들 야단쳐쌓능교, 그러니까 아라(아이라고) 안합니까아.' 라며 웬만하면 역성을 들어주려 하니, 아이는 제 어미만 오면 심지어 가장 좋아하는 먹을 것도, TV도 내팽개치며, 엄마다아~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봐요! 엄마가 오셨어요! 라며, 제 어미 품에 폭 안겨 춤을 추었고, 그 다음에는 아주 제법 보무도 당당하게 양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는 코를 쳐든 채 '할머니, 올라가! 할머니는 이제 올라가서 자요, 빨리! 할아버지도 얼른 가!' 라며 두 분 허리를 밀어 5층으로 올려보내기 일쑤였다.   



어디 그뿐인가. 설 차롓상을 차리느라 노곤해진 아내가, 어머니 아버지 본가에 돌아가시고 난 뒤 한숨 푹 잘 때, 아이는 어디에서 제 어미가 집에서 편히 입는 치마저고리를 가져오더니 난데없이 밀가루라며 아비 공부하는 상에 펼쳐놓고 주물럭대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발부터 제법 굵은 허벅지까지 힘이 빡빡 주며 주물러대는 꼴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소은이 뭐하는거야? 했더니 응, 소은이 밀가루 반죽이야, 기다려, 아빠, 소은이가 짜장면 해줄게! 해서 큰소리로 웃었다. 그때 이미 나는 커피를 손수 내린 뒤 정 선생님이 보내주신 미국 버번 위스키를 타서 마시며 천자문과 영어를 번갈아가며 쓰느라 기분이 은근히 좋아져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소은이는 제법 열심히 치마저고리를 한참 동안 주물럭대더니, 냉면 그릇으로 쓰는 커다란 대접에다 올려놓고는 젓가락까지 그럴듯학 구색을 맞추어 자, 다 됏습니다~ 하고는 상에 덜컥 내려놓았다. 자, 아빠, 먹어봐! 하면서 소은이는 젓가락으로 옷끝을 꿰어다가 내 입에 넣어주려고까지 했다. 살살 올라오는 술기운과 행복감에 장난기가 돌아서, 아이쿠, 너무 뜨겁잖아요! 했더니, 앗, 죄송합니다, 후우, 후우, 하면서 면을 부는 시늉까지 했다. 내 새끼가 아니어도 귀여울 판에 내 새끼가 이러니 이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다. 어데서 본 건 있는지 어서 제자로 들이라며 밥 잘하는 유진이며 주변 벗, 지인들에게 자랑은 다했고, 내 웃음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결국 오후 늦게서야 아내는 일어나서, 뭐가 그렇게 재밌니껴? 하였다. 물론 한 백번은 넘게 소은이의 짜장면을 먹은 듯 하다. 소은이는 놀이터에서도 잘 놀앗고, 제 의사 표현도 분명히 했으며, 무엇보다 말을 잘 주고받을 수 있어서, 너가 드디어 더욱 많이 컸구나, 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나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술에 취해 있을 때, 나는 사실 무척 노래방을 가고 싶었지만(취하면 꼭 냉면이나 아이스크림 먹어야 하고, 노래도 불러야 하는 버릇이 있음.) 양심상 그럴 수가 없어서 아내와 같이 TV를 보면서 소은이를 돌봤다. 그 때 나는 그토록 잘생긴 배우에 대해 볼 시간이 있었다. 그는 아주 귀공자처럼 생겼고, 연기력도 평균 이상이었지만, 동생이 젊은 나이에 일찍 타국에서 죽고, 최근에는 이혼까지 하여 딸까지 홀로 키우는 홀아비 신세가 되었다. 그는 그토록 잘생겼지만, 10년째 거의 하루도 아니 거르고 술을 마시고 있다고 했고, 상표를 가렸어도 조니 워커가 분명햇을 위스키 뚜껑을 딸 때 떨리는 손도 분명히 보았다. 내가 어찌 모를까. 나 역시 한때는 손을 무참하게도 떨었고, 보여서는 안될것도 본 채로 헷갈리던 때가 있었다. 굿모닝이 생각나지 않아 급하게 술을 마셔야 했던 시절도 있었고, 내 손으로 글러브를 끼우지 못해서 소주에 스누피 우유를 섞어마신 뒤 글러브 끝의 '찍찍이(중앙일보는 hook and loop fastener 나 touch fastener 대신 찍찍이 도 충분히 표준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를 붙이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인듯하지만, 그래도 사실 만취하여 옛날 가슴 아픈 일들을 떠올릴때면 아주 가끔 손이 떨릴때도 있다. 취기가 마르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마음이 아직도 심약해서 손끝이 떠는 것이다. 여하튼 저토록 고생 한번 해본 적 없을듯한 귀공자 풍의 미남도, 이별도 하고, 이혼도 하고, 마음을 다잡지 못해서 제 몸을 망가뜨릴 정도로 술을 마시는구나, 나는 지금 몸도 마음도 찍찍이마냥 온전히 붙여둘 데가 있으니 참으로 행복한 사내로구나, 다시 한번 사무치게 느끼게 된 것이었다.



아내는 내가 좀처럼 그 배우에게 눈을 떼지 못하자,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이고 마, 남자 얼굴 아무 소용 없니더, 저래 잘 생기모 뭐하노, 결국엔 헤어지뿌고, 저래 술만 묵지 않아예? 남자는 성실하고 딴딴헌게 제일이라, 얼굴 소용없니더. 혹시나 그 배우를 좋아하는 분들이 아내에게 오해가 생길까 이만 줄이겠다. 다만 내가 채널을 돌리자 남편과 아내가 서로 오랫동안 불화하여 살얼음판인 가정에서,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들 둘은 모두 초고도 비만이 되었는데, 그 중 작은 아들은, 윽박지르는 아버지가 무섭고, 눈물로 호소하는 어머니도 버거워 함구증에 걸려버리었다. 씨름 선수처럼 덩치가 크다 못해 살이 넘쳐흐르는 작은 아들은, 제 손으로 바지도 입지 않고, 제대로 씻지도 않으며, 등교도 운동도 아니 하고 컴퓨터 게임만 주로 한다. 오은영 선생이 처방을 내려주어도, 술 좋아하고 다혈질은 아버지는 화를 내고,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는 그 화를 못 견뎌 또 날카롭게 받아치니, 집안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말을 잃어버린 둘째 아들은 그래도 가족이 함께 살고 싶은데, 자신 때문에 다 망칠것 같다며 자책하고 있었다. 



견딜수가 없어서 채널을 돌리니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자녀들 열심히 입시 공부 준비시키는 프로그램이 나왔다. 사실 아내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입시 공부를 떠나서 국내 제일의 영어, 수학 명강사가 요점을 쏙쏙 짚어주기도 하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그러한 학생대로, 또 명문 학생은 그 학생들대로 장단점을 볼 수가 있어서 무척 좋아한다. 다만 방금 전까지 허름한 집에서 서로 악다구니 쓰는 가족을 보았는데, 이번 가족은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명문대를 나왔고, 아들 딸도 그에 따라 명문대 의대를 준비 중인데, 큰딸은 커다란 첨단 스마트 칠판과 아이패드 를 가지고 수학 공부를 하고 있었고, 으리으리한 집안에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냉장고에도 영양 만점의 간식이며 반찬들이 한눈에도 가득 햇다. 미국조차 급식법 때문에 신선한 채소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과자 나부랭이로 급식을 때우는 학생들이 많은 판에, 저 부잣집 도령 아씨들은 또 사는 세계가 다르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 아내는 또 입술을 삐죽였다. 기왕 도와줄끼면, 공부 열심히 하는데 좀 환경 안되고 몬하는 그런 아들을 도와주야지, 쟈네들은 솔직히 부모들이 투자할거 다 하고, 누가 안해줘도 다 할 수 있는 아들 아잉교? 머 저런 아들까지 방송에 다 도아주뿌모 우짜노. 아따, 이 사람이 아까부터 어찌 그럴까잉, 공부 잘 시키고 싶은 마음이 어디 뭐 가난헌 집에만 있는가, 잘난 부모도 제 자식 잘 키우고픈 마음은 다 똑같은 거여, 공부는 평등한 것인디, 배우는데 잘허는 놈, 못허는 놈이 어딨는가? 똑같이 잘 배워가지고 평등하게 한 판 붙어야 공부고 운동이고 씨언허게(시원하게) 결판이 나제. 치, 하지만 보이소, 저게 어째 똑같이 펭등한 거라 할수 있능교? 아까 금쪽이네캉(금쪽이네랑) 여 부잣집 아들하고(애들하고) 삼이(싸움이) 되겠능교? 어림도 없지, 여보랑 키 큰 러시아 사람이랑 태권도로 붙는거랑 머가 다릉교? 안그래도 여보야 작살나게 맞고 올떄마다 맘 아파 죽겠고만은.  ..아, 평소에 내 맞서기 시합을 그런 관점에서 보셨습니까..^^;; 



아내와 내가 어느 정도 다른 교육관에서 논의를 하는 일은 무척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나는 무조건적으로 아내가 내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바라지도 않는다. 나 역시 아내의 말을 존중하고 경청하지만, 무조건적으로 맹신할 수는 없다. 적어도 종교와 교육에 있어서는 특히 그러한데, 일단 교회에 대해서는 절대로 타협이 없는 아내인지라, 혹시나 아이가 앞으로 커서 만에 하나 다른 종교에 관심을 가질 때를 대비해서 여유를 가져야 된다고 여기고 있고, 아내가 학군이나 생활 환경을 따지는데에 비해 막상 아이 자체의 노력은 그렇게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이 다소 낯설기는 하였다. 즉, 아내는 공부는 원래 힘들고 어려운 것이므로, 아이에게 무조건적으로 우등생이길 바랄 필요도 없고, 다만 자연스럽게 공부를 할 수있고 따돌림이나 집단 폭력에 연루되지 않도록 가능한 좋은 학군으로 가는게 좋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른데, 물론 좋은 학군이 좋은 환경을 조성해주긴 하겠지만, 거기서도 어떤 방향으로든 폭력은 분명히 존재할 터이고, 그래서 아이가 최고는 당연히 될수 없더라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심신을 수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는게 내 생각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할때마다 아내는 반농반진으로 픽 웃으면서, 아이고, 하여간 여보야는 조선 가서 살아야 되니더, 술 묵고 여보야 좋아하는 한자 이야기하고, 시 쓰고, 태권도 하고 그래 살아야 할 양반이 여 서울에는 와 있노. 사실 아내가 훨씬 현실적인 사람임을 알아서 나도 그냥 씩 웃고 만다. 어차피 마음이란 건 평생 사람이 스스로 살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의 삶이 없었다면 그나마 이 정도의 마음도 갖지 못했을 터이다. 



오늘도 잡말이 길었는데, 하여간 술은 오래 마셨지만, 행복하였다. 이룰 것을 제떄 이루지 못했고, 괜시리 쓸데없는 상처도 많이 주고받은 세월이었지만, 지금이 행복하였다. 아내에게도 늘 고맙고, 아이는 사랑스럽다. 햇볕 아래서 땀 흘리며 건강히 잘 뛰노는 아이를 볼때마다, 그 아이가 배고파서 무엇이든 잘 먹고 잘 마시고 저도 모르게 끄르륵 트림을 게워올리고는, 저도 놀라 양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엄마, 아빠, 나 트럭했어요!' (꼭 트림을 트럭이라고 한다.) 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술이 절로 꿀떡꿀떡 넘어간다. 무슨 안주가 더 필요있으랴. 금준미주에 옥반가효도 이보다 더 중하지 않다. 다만, 고작해야 평균 47도짜리 4병을 이틀에 걸쳐 마셨는데 그 이틀하고도 반나절 동안 책도 읽을 수 없고, 훈련도 할 수 없다. 도수를 낮출 수 없다면, 술을 더 줄여야겠다. 고작 나이 마흔에 자꾸만 심신이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남편이자 아비로서 해야할 일이 산더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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