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er병문 Mar 19. 2024

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  )

정말로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열호아 다.

내가 백수시절 씨즌 2를 겪었을 때 나는 참말 막막했다. 백수시절 씨즌.1이야, 그래, 천하에 다시 없을 불효도 많이 했지만, 내 가게 차려 학비걱정없이 석박사 공부 마치고, 철학과 무공을 아우르는 사내가 되고싶어.허세 부리다 망해서 그랬다 치자. 고용노동부가 소개시켜준 첫 직장인 농업 NGO에서, 갓 서른의 나는 참말 철없고 우울해 답없는 신규 직장인이었다. 눈치를 많이 봤어도 눈치가 없었고, 면허도 없고, 자격증도 없고 그냥 타고나서 기른 언변과 성실함으로.어찌어찌 농사도 배우고, 기획서 쓰는 법도.배우고, 행사 치르는 법도 배우고 그랬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NGO 직원은 무엇이든 다 할 줄 알아야 된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나는 아팠다. 몸이 아픈게 아니고 마음이 아팠다. 백수시절 씨즌 1처럼 없는 돈에 늘 술을 마셨고, 업무가 밀렸고, 아무 일도 흥미가 없어 술과 약을 섞어먹고 잠만 자다 어머니 아버지께 혼나기 일쑤였다. 의사 선생님은 책이 독이라며, 시집이건 소설이건 인문학이건 아무 것도 읽지 말고 쉬라고 했고, 구청의 상담 선생님은 약을 끊고 취미생활을 해보라 했다. 그때 태권도는 내 삶의 중심이 되어주었다. 사범님은 믿어주셨고, 나는 잠이 오건 안 오건 어지러워 쓰러지건 도장에 늘 있다 왔다. 내 몸에 두터운 옹이를 박아넣듯, 무엇이든 연습하고 왔다.



붉은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유기농업계의 젊은 처녀였다. 그녀의 본명은 비슷한 돌림자인 자매들과 더불어 유명하고, 어렸을때부터 지금까지 농사를 꾸준히 지어왔기에 학생 때부터 신문이며 방송에 자주 나왔다. 유기농업계의 요정(?!)이며, 소년 농부 한 군의 선배이기도 할.터이다. 그녀는 동료단체인 종교 농민회에 있었으며, 해박한 농사기술과 나이를 넘는 연륜, 여유, 추진력 등은 항상 나를 놀라게 했다. 비록 그녀에겐 어림도 없었지만, 나는 역시 내가 몇 개의 격투기술을 제외하곤 주둥이만 갖고 사는 사내였구나 싶어 그녀를 따라 농사도 지어보고, 관련 책과 영화도 읽고, 강의 준비도 해보고, 이후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였지만, 정책 분야, 판매 분야, 생산 분야를 돌고돌며 가능한 유기농업의 큰 틀이나마 돌 수 있었다. 너와의 북촌, 그리고 털보 큰형님과 밥 잘하는 유진이와의 인사동 시절을 끝으로 나는 유기농업계를 나와 속세로 돌아갔다. 유기농업은, 다른 분야도 그렇겠지만, 결코 아무나 업으로 삼기 어렵다고 지금도 느끼고 있다. 그나마의 생협 원칙까지 무뎌진채 자본 경쟁을 해야하는 생산자들, 유기농의 가치보다도 비싼 돈 주고 건강한 먹거리를 먹겠다는 소비자 사이에서 유통은 소비자의 심리를 부채질한다. 적어도 십여년 전 내가 느낀 유기농의 정책, 생산, 유통, 판매, 소비의 맥락은 모두 그랬다.



일을 그만둔 뒤로 붉은들과는 별로 만날 일이 없었다. 다만 새 직장을 구하려고, 전 직장의 배려로 실업급여를 탈 수 있게 되어 가끔씩 취업의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강의 들으러 나와야했는데, 그때 우연찮게 마주쳤었다. 나도 잊은 옛 기억을 붉은들은 아직 갖고 있었다. 그녀가 사준 커피를 술 마시듯 마시면서, 목에 패찰 걸고 바쁘게 움직이는 직장인들을 보며 난 언제 저렇게 살지 하고 중얼거리던 내 모습이 안쓰러웠다고 했다.



홍성 토박이인 붉은들은, 서울내기지만 어머니 영향으로 전라도 말씨를 강하게 쓰는 나보다 훨씬 조용하고 얌전한 편인데, 농업에 대해 잘 몰라도 항상 동년배 젊은 활동가들이나 귀농귀촌한 청년처녀들, 생산자들에게 인사하며 말 섞는 내가 보기 좋았다고 했다. 붉은들은 우연찮게 인사가 닿아서, 아내가 소은이를 품고 있을때 순산을 기원하는 농산물을 두번이나 보냈고, 보자보자 하다가 마침내 올라오는 길에 보았다. 여전히 젊었고, 여전히 이국적이었다. 누가 내 아내와 동갑내기인 어린 처녀가 어렸을때부터 발효된 퇴비를 손수 만져가며 농사짓고 떡빚어파는 이라 생각할 터인가. 힘든 일도 많았지만, 좋은 인연도 많았고, 하여간 전국의 온갖 좋은 술과 안주는 다 먹고 돌아다녔었다.


아내는 오랜만에 내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듣느라 눈이 반짝반짝하였다. 여러 단체에 있던 젊은이들은 대부분 제각기 눈 맞아 시집장가가거나, 여러 지역으로 퍼져 각 지역의 기둥이 되어 있었다. 경주 토박이로서 산을 돌보는 아내와 붉은들은 서로 쿵짝이 잘 맞았다. 다만, 푸른들이 오랜만에, 술은 역시 빈 속이지, 라며 34도짜리 장송을,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채워줄때 나는 십년 전 철없던 내가 오랜만에 마음속에 일렁여 놀랐다. 하여간 매일 술마시던 시절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