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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r병문 Aug 21. 2024

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

시끌시끌한 태권도계를 앞에 두고 ㅡ 태권도에 대하여

서른살에 ITF에 입문하기 전까지, 태권도에 대해 그리 깊이 고민해본적이 없었다. 십대 때 태권도란, 내게 전혀 필요없는 격투의 대표 격이었고, 이십대 때 태권도는,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지만 “.실전“과는 거리가 먼, 유아ㅡ육아용 사회, 입시체육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했으니, 태권도를 직접 배우고 겪고 나서야 비로서 삼십대 들어 태권도, 그리고 그동안 뒤늦게나마 이십대 초반부터 익혀온 무공의 전반적인 의미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북경체대를 졸업하고, 소림사에서도 절예를 익혔던 일세의 명배우 이연걸은, 더이상 무술 그 자체만으로 생계를 잇기 어렵기 때문에 영화나 무용 등을 통해 변화를 꾀해야하는 이 시대에 대해 발언한 적이 있다. 확실히 누군가를 치고 차고 꺾고 던지고 베고 찌르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는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누군가는 다시 영화배우가 되거나, 무관을 열거나, 군대에 가서 무술을 사용할 환경을 찾아야 하며 무술은 여기서 다시 변화하고 적응한다. 비단 이른바 우슈武術 의 역사만은 아닐 터이다.



내게 있어 무공은 여러 번 말해온만큼, 여리고 소심한 나를 지켜주고 가려주는 방패막이였다. 이십대부터 십년간, 재주없이 무턱대고 몸을 망가뜨릴 정도로 나는 오로지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에 골몰했었다. 나는 술에 취해서 싸웠고, 내게 취해서 싸웠다. 오늘 배운 기술을 언제든 써보려고 눈을 희번득거리며 거만하게 책을 읽고, 술이 덜 깨어 어데든 시빗거리 찾아 싸우려던 짐승 같은 소인배였었다.



그렇다면, 무.武는 원래 그처럼 작은 것인가??



돌아가신 태식 형님이 열연한 독립영화 거칠마루에서, 형님은 씩 웃으며, 난 도장에서 봉고차 모는게 좋아, 라고 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수묵화처럼 그려낸 미야모토 무사시의 일대기 배가본드에서, 병법의 대가이자 훗날 그 유명한 신음류新陰流 의 창시자인,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고령의 노검객임에도 칼 한 자루 없이 천하를 주름잡던 보장원의 창과 야규 가문의 검을 모두 맨손으로 받아넘긴다. 시대와 매체는 달라도 그들의 무공은 결코 사람 사이의 드잡이질에 매여있지 않았다. 내가 성장하고 크지 않아서, 나는 여러 명가 名家 들의 좋은 기술들을 익힐 기회가 있었지만, 내 얕은 공부처럼 허랑방탕하게 놓쳐버렸다. 내게 택견과 권투와 킥복싱과 주짓수와 중국무공을 알려주신 이들은, 지금도 이름만 대면 유튜브에도 유명한 천하고수들이신데도 나는 그분들의 뛰어남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서른 살에 마침내 조우한 ITF는 정말로 내 일생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나는 누구나 입문하면,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어느 정도 수준에 오를수 있도록 철저하게 짜여진, 태권도의 체계에 일단 놀랐다. 태권도는 근대 무공이었고, 그만큼 정형화되어, 누구든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쉬웠다. 나는 태권도의 띠를 허리에 매면서, 힘을 뿜어내는 허리를 묶어 정돈시키는 태권도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고, 그제서야 이 기술 저 기술 낱개로만 배워 상대를 쓰러뜨리는 일만 고민하던 나의 이십대가 아까웠다. 태권도에 입문해서야 올바로 숨쉬고 서고 걷고 뛰는 자세의 중요성을 알았고, 틀을 통해 그 무공의 정체성을 관통하는 움직임의 원리를 깨닫는 일이 중요한줄 알았다. 사람 간의 승패는 그 다음이었다.



이십대 때의 나는, 나의 기술을 갈고 닦아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데만 골몰했었다. 상대가 나보다 타격을 잘하면, 허리 아래로 태클을 걸어 넘어뜨렸고, 나보다 관절기를 잘하면 위아래로 치고 쳐서 쓰러뜨렸으며, 두 분야 나보다 뛰어난듯하면 관자놀이나 턱, 갈빗대, 발목을 노리는 위험한 수를 쓰기도 서슴치 않았다. 지금까지 별 사고가 없었던건, 내 기술이 얕았고, 근력이 그에 준하지 못했기 때문일터다. 이제서야 나는 나를 우선 굳세게 다지는 일을 돌아보게 되었으니, 이가 곧 유학의 수기 修已와 비로소 닿는다고 나는 여기게 되었다. 진짜 뛰어난 고수는 함부로 손을 쓰지 않으니, 나는 괜시리 정의로우면서도 맘껏 힘을 쓰고 싶어, 촛불시위로 한창이던 2010년대의 광화문과 홍대, 서울시청 앞, 부천 밤거리를 쉼없이 돌아다녔고, 술과 춤과 책과 싸움질로 밤을 지샜다. 그나마 오래 쓰던 권투와 스탠드 레슬링 등의 유술기는 그 허랑방탕한 밤거리에서 익히고 닦았다. 지금도 단 한 번, 기억나는 이는 조계사 앞에서 꼭 청학동의 그 유명한 한풀선사마냥 개량한복을 입고 덥수룩한 수염에 뿔테 안경을 낀 이인異人이 계셨는데, 그는 누가봐도 선풍도골 仙風道骨 의 비범한 이셨다. 그는 그 유명한 대동류를 깊이 익힌 이였고, 나는 쥐콩만한 솜씨로 한 수 배워보자며 대련을 청했는데, 드잡이질로 낱기술만 대충 익힌 내 잔손발질이 통하는 이가 아니었다. 나는 하얀색 후드티셔츠 등짝이 흙투성이가 될 정도로 몇번이나 나뒹굴었는데, 지금도 그 분은 꼭 한번 뵙고 싶다.



여하튼 지금의 나는 돈을 받고 일하는 전업 사범도 아니고, 박진감 넘치게 이겨야할 프로 선수도 아니다. 십년간 온갖 격투의 기술을 익혔고, 다시 십년간 태권의 기술을 쌓았으나 여전히 얕아서 어려운 발차기를 차지 못하고, 주먹 기술을 칠때도 중심이 떠서 가볍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띠를 매고 연습한다. 내가 나를 다스려 쌓아나가는 일 또한 태권도의 길이기 때문이다. 단체는 달라도 다른 사범들이 나보다 출중한 무공들이 어린 제자들을 핍박하는 일로부터 나는 비켜서야 하기 때문이다. 감히 잘하지 못했어도 평생 책읽듯 태권도를 연습했던 이로 기억된다면 바랄게 없겠다. 비록 실력은 뛰어날수 없지만, 즐겁게 태권도를 오래 하는 이로 도장의 가족들과 행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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