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

나가르주나, 바수반두, 니야야학파

by Aner병문

원래 개종하기 전 불교 출신(?)이라 그런지, 어렸을때부터 어머니께 한자를 오래 배우며, 대만의 채지충 화백 고전만화 55권짜리로 동양고전을 오래 접해 그런지, 나는 원래 육조단경이며 금강경, 아함경 등도 꽤 여러번 읽었다. 소은이가 좀 더 크면 내가 부리고픈 욕심은 까짓 술이야 진짜 덜 마셔도 좋고(이미 최근 엄청 줄임) 운동기구도 어떻게든 맨몸으로 대체 하면 되니까, 덜 먹고 덜 사더라도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만화 전집을 들여놓아 가족끼리 함께 읽고 얘기나누는게 꿈이다. 사실 절에 다닐 때도.그렇고, 교회 집사인 지금도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정교한 학문에 가깝게 느껴진다. 스스로 부처가 되길 포기한 보살들이 대승적 차원에서 중생들을 구원한다고는 하나, 불교는 인격신의 지위가 없다. 싯다르타 부처님 스스로도 구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노력을 통해 스스로 해탈하신 선각자일뿐, 초월자나 신이 되신 것은 아니라고 나는 예전부터 조심스럽게 생각해왔었다.



강신주 선생의 지적처럼, 불교는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집착을 제거하여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고, 그래서 모든 것이 공空 하다 는 주장의 근거를 세밀히 만들어나가는데, 내 스스로 먹고 마시고 만지고 느끼고 생각하는 인식이 끊임없이 기억되고 그리운데 이를 어찌 끊어내고, 공하다고 단정지을수 있을까? 그래서 불교의 다양한 학파들은, 왜 인식이 그저 허망한 것인지를, 혹은 왜 모든 것이 공일수밖에 없는지를 철저히 논증코자 했다. 다만 당시 한중일 불교가 좀 더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닐수 있었던건, 그만큼 국가 정비가 타국에 비해 잘 되었기 때문일거다. 인도는 그 악명높은 계급 제도 이외에도 드라비다를 비롯 수십 개의 종족으로 갈라져 통일 왕국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유럽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국경의 의미가 생긴 뒤에도 국운을 건 일전에 만명도 채 안되는 군인들을 계약맺어 내보내는게 전부였다. 임진왜란 이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천하를 평정한 내전에만도 십수만명이 죽었을때니, 산업혁명 이전의 동양국가의 발전이란, 불교를 왕권신수의 장치로 끌어들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집착이 왜 허망하여 해서는 안되는가, 왜 모든 것은 공인가, 를 논증해야한다. 일단 공空 이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든 비어있어, 아무것도 없이 허무한 것인가? 그렇다면 도가의 허虛 나 무 無 는 또 무엇이며 어찌 다른가. 한때는 발구름으로 산을 무너뜨리고, 호흡 한번으로 바다를 마시며, 손바닥에 올린 새가 날지도 못하게 교묘히 장법掌法 을 운용하는 태극권을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전혀 모르겠다.


니야야 학파는 감각의 현량, 추상적인 생각의 비량, 언어적 수사학으로 사고하는 비유량, 성인의 가르침으로 깨닫는 성교량 등, 인지와 사유를 중시하고 이가 곧 존재의 증거가 된다 믿는 현실적 학파였다. 칸트 식으로 치자면 오성이 감각하는 현존재가 곧 존재의 근거라고 믿는다 하겠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모든 것이 공하다는 말은 그 자체로 공할.수밖에 없었다. 그 유명한 에피메니데스의 역설, 즉,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던 에피메니데스조차 크레타 사람일때 갖는 모순처럼, 니야야학파는 모든 것이 공하다면, 너의 주장도 공하다며 비판한다.



나가르주나는 이에 맞선다. 부처님 말씀처럼 모든 것은 연기緣起 인연에 따라 성장하고 사라지므로 부모 없이 자식있을수 없고, 자식없이 부모 있을수 없었다. 따라서 오로지 홀로 존재할수 있는 본질적 존재는 아무도 없으므로, 그는 마땅히 아무 인연이 없다면 애초에 생기지도 않을 존재들을 일컬어 공하다고 했던 것이다. 회자정리 거자필반ㅡ만나면 헤어지고, 가는 이는 돌아오기 마련인데, 왜 그런 인연의 이합집산이 영속할듯 집착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바수반두ㅡ세친世親 스님은, 애초에 내가 이랬었다 저랬었다 라는 무의식적 기억조차 끊어 없애라 한다. 다섯가지 감각이 불러일으키는 세상에 무의식과 의식과 본성이 섞이니 그가 생각하는 여덟가지 의식의 방식이다. 나가르주나ㅡ용수龍樹 스님은, 가는자는 가지 않고, 가지 않는 자는 또한 가는자이니, 고정된 존재란 있을수 없다 하였다. 라이프니츠의 말처럼, 주어에 이미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가는 자가 가지 않는다, 는 말처럼 잘못된 서술어가 붙으니 올바르지 않은 표현이다. 또한 주어에 본질이 없다 한다면 서술어를 붙여 한 상태를 고정시키는 일 또한 부질없다. 상견 常見 과 단견 短見 은 모두 그에게 올바르지 못한 일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