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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

흄과 칸트, 맹자와 순자

by Aner병문

시대에 따라 변치않고.오히려 관통하여 영원한 가치를 진리라 한다. 사람의 목숨이 귀하고,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실은 진리일까? 우리가 알다시피 진리라 믿어야하는 이 시대의 사회에서조차 실질적으로 현실은 아니리라 생각되는 사회도 많다. 불과 이백년전의 우리나라에서도 핏줄에 따라 학교도 다닐수 없었고, 서양은 피부색으로 차별을 받으며, 이제는 금전이 그 기준을 대신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기준으로 한, 시대적 윤리는 타당한가? 강신주 선생은 삼종지도三從之道 를 들어 지적하고, 스피노자는 시대가 규정하는 선악이 반드시 좋고 나쁨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한다. 하기사 타란띠노 감독의 쟝고에서도, 괴력의 온순한 흑인 노예들에게 원치 않는 맨손격투를 시키며 술을 즐기거나, 본디 남의 아내였던 미모의 흑인 부인을 억지로 납치해 노예로 만들어 수청들게 하는 백인 귀족 계급의 윤리는 그 당시로는 당연했고, 그를 질색하는 일부 백인의 고상한척 하는 태도나 혹은 자신의 존엄을 위협받는 흑인 주인공 쟝고의 복수혈전은, 당연히 스스로의 코나투스를 증진케 하기 위한 개인의 윤리였다.



시대가 규정한 윤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춘추전국을 주름잡던 제자백가의 여러 인성론 또한 다르지 않은데, 결국 공부자를 비롯해 인성 자체에 깊이 파고들던 맹자, 순자, 고자(!), 동중서, 육가 등도 결국 정치인으로서, 백성을 어찌 다스려야할지 현실적 고민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인성론을 다루고 있었다. 한정된 재화에서 스스로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순자의 성악설은, 당연히 법으로 강제할수밖에 없는 인간을 보았고, 선한 본성을 길러주어야하는 맹자의 교육론은, 결국 자치적인 권력을 가지고 규제받지 않으려는 지방 호족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기도 했다. 조선 왕가는 심지어 역성혁명까지도 주장하던.맹자를 제한적으로 읽었으며, 맹자를 읽던 어린 정조를 영조대왕께서 나무라고자 하자.눈치빠른 내관들이 맹자를 잘라낸 책을 갖다바쳐 위기를 모면했다는 야사가 있기도 하다.


시대적 윤리의 강요자에서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흄은 동일한 고통의 경험에서 동정심을 떠올리며 윤리적 행동을 하는 감정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발견하고, 반면 칸트는 스스로 보편적 입법자만큼이나 이성적인 윤리 주체가 되는 합리적 개인을 꿈꾸었다. 흄의 경험 기반 감정 공유는 양혜왕이 불쌍하여 제물로 바쳐진 소를 양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생각케 하고, 칸트의 윤리적 자율 주체는 결국 사회로부터 강요당한 내면적 타율일뿐 아니냐는 프로이트의 날선 비판을 받는다.



강신주 선생은 이 모든.윤리학이 결국 주체의 기준만을 따지는, 공부자 식으로 말하면, 나와 너가 좋고 싫음이 같을 것이기에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너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주체적 윤리학의 아집이라며 꼬집었다. 장자 달생 편의 우화에서, 공부자께서는 물에 몸을 던지는 청년이 자살하려는줄 알고 삼천 명의 제자들에게 그를 구하라하지만, 알고보니 그는 수영을 하고 있었고, 물이 밀면 밀려가고, 당기면 끌려가는, 흐름에 따라 순응하고 변화하는 태도로 가라앉지않았으니, 강신주 선생은 이야말로 타자를 생각하는 윤리학이며, 동감하는만큼 사랑한다던 막스 셸러와도 비견된다 한다.


어찌 사람이 그럴수 있냐며 타인에게 못할 짓을 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분노하고 공박하는 사회가 되었다. 나는 우리나라 사회의 흐름이 정의로우며, 그 평균적 수준도 높다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의 구성원들은 가능하면 대치동 뜨내기로라도 들어가 하이어라키의 상승을 꿈꾸며 영어 유치원 못 보내어 안달이다. 쇼펜하우어도 맹목적 삶의 의지가 옅어져야 이기심없이 윤리적일수 있다 했고, 부처님도 집착을 버려 5리 가자는 이에게 10리 함께 가자 해주셨으며, 예수님은 나를 잊고 원수에게 뺨을 대고 일흔번씩 일곱번도 용서하라셨는데, 이 세상에 가능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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