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독서감평)

라우라 에스끼벨, 권미선 역,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2004

by Aner병문

어머니께서 나도 좀 쉬셔야겠다며, 정말이지 이런 애는 처음 본다지만, 그래도 니 애비보다는 낫다며, 낮이고 밤이고 울어젖히는 손녀에게 잠시 손을 떼신 4월 1일 만우절의 날, 아내는 어머니 손이 덜어진만큼 몸은 피곤해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어 마음은 더욱 편해보였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양이, 언제나 사자처럼 보이고 싶은 강박에 시달리듯, 어머니께서도 손녀와 며느리에게 부족하지 않은 시어머니로 보이고 싶은 욕심에, 식사, 빨래, 청소, 육아를 한 번에 도와주시는데다가, 하필 아랫층 한 식구가 이사 가고, 또 이사 들어오는 일까지 겸하시느라 집안은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기질상으로는, 일이 밀리는 꼴을 못 보는 나 역시도 어머니께 마음이 기울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아이고, 어머니도 참, 이건 꼭 오늘 안 하셔도 되는 긴데... 하면서 서로 일의 박자가 맞지 않아 힘겨워하는 아내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내를 위해 모처럼 케이크 하나를 사고, 아내가 케이크를 드시고 잠시 쉬는 동안, 딸에게 밥을 먹이고, 얼르고, 함께 TV를 보았다. 한달하고도 3일째의 딸은, 정말이지 책에서 알려준 그대로, 흑백이지만 세상을 구별할 수 있었고, 눈과 귀가 열려 내 손짓하는 곳을 함께 집중하여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이 못내 신기하여, 나는 픽사 단편 애니메이션을 틀어놓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니 아이의 귀에 하나하나 속삭여주었다. 아이고, 구름이 뭘 만들어주네, 황새가 그걸 물고간다, 아이고 이번엔 고슴도치네, 얼마나 아플꼬잉. 아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말할때마다 끙끙거리며 꼭 답변을 하려는듯이 보였다.




아내가 잠시 쪽잠을 잔 뒤에는, 아이를 목욕시키고, 산더미 같은 옷과 수건을, 아이용 세탁비누로 손빨래하여 널고, 다 마른 거즈와 우주복과 긴 수건들을 개켜넣고, 과일들을 씻어 아내가 언제나 수유하며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밥과 반찬을 준비하고, 쓰레기통을 비워 내놓고, 지난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벌써 시간이 10시가 넘었다. 하나 위안이 된다면, 하루가 다르게 아이가 밤잠 시간이 비교적 길어졌다는 점이다. 아내는 아이고, 여보야, 힘들지요, 얼마나 피곤할꼬, 항상 감사합니데이, 라고 하셨지만, 사실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니까 힘들어도 당연하겠거니 하는 터였다. 아이에 온전히 묶여 있는 아내 역시 마찬가지인데, 키는 작아도 명색이 장정인 내가 짜증내고 우는 소리 할 수야 없었다. 책을 읽거나 훈련을 할 수 있는 짬조차 없는 것은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때 이미 아내가 혼자서도 언제든 손쉽게 상을 차릴 수 있도록, 카레와 미역국을 한 솥 가득 끓여놓고, 내일부터는 또 이틀 쉬니까, 돼지고기 끊어다가 고추장 불고기라도 해줘야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마치 옛 어머니들처럼 퇴근하고 나면, 다시 집에 온전히 묶였다. 그 유명한 유발 하라리가 지적하듯, 이른바 농업 혁명으로 인해 남자들이 땅에 묶였다면, 여자는 자연스럽게 토굴 속 부엌에 묶이고 말았을 터이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이른바 남녀 간 격차도 이로부터 시작된 비극일 터이다. 내가 군대에서, 청춘을 통틀어 처음으로 읽은 남미 소설인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의 띠따 역시 평생을 어머니의 삶에 묶였어야 했다.



멕시코 명문가의 자손 중 막내딸은, 결혼할 수 없다. 정말 그런지 모르지만 소설 속 배경은 그렇다. 용모도 아름답고, 음식도 잘 만들어 인기가 많은 띠따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사랑은커녕 결혼조차 할 수 없이, 평생 모셔야 한다. 결국 띠따의 존재는, 자신을 낳아주신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비로소 용인된다. 한때의 우리 나라 못지 않게 가부장적이며, 또한 제국주의의 수탈에 오랫동안 신음했던 남미의 서사들은, 이처럼 묶여서 억압받는 이들의 이야기가 많다. 그러므로 띠따는 자신이 제일로 잘하고 좋아하는 요리를 통해, 설움과 슬픔과 분노를 풀어내려고 한다. 그녀의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렬한 감정의 혼란에 빠진다. 어떤 이는 잊은 줄 알았던 옛 사랑의 추억에 몸부림치고, 어떤 이는 폭발적으로 자유를 갈망하여 천둥벌거숭이가 되기도 한다.




이야기가 어찌 흘러갈지는, 책이나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남겨두자. 실은 나 역시 인사동 시절까지만 해도 종종 다시 되짚어 읽던 책이었으나 요즘은 통 펼칠 여유조차 없었고, 그나마 영화는 아직도 못 구하여 구경도 못해보았다. 다만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또한 귀한 딸아이와 찾아와 어설픈 아비와 남편으로 살면서, 결국 정착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족쇄와도 같은 책임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구나 독백하는 순간, 나는 문득 이 책을 다시 떠올렸던 터이다. 생각해보면, 러시아-일본-남미로 옮아가는 이십대의 대단치도 않은 독서 편력의 시작이기도 했었다.



박흥용 화백이 그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에서 맹인 황정학 처사의 검을 이어받은 견자는 자신을 연모하여 쫓는 오위부장의 이름모를 딸에게 묻는다. 저기, 냇물에 빠질까봐 나무둥치에 묶여있는 갓난 아이를 봐, 빨래하는 엄마에게 가려고 저토록 버둥거리고 있지만, 아이는 엄마에게 갈 수 없지, 하지만 저 묶여 있는 상태가 아이의 생명을 건지고 있어, 그렇다면 저 묶여 있음은, 아이를 속박하는 것일까, 자유케 하는 것일까. 이영도 작가가 빚어낸 남해의 해적이자 제국의 공적 1호 키 드레이번 또한 폴라리스 랩소디의 초반에 율리우나 공주에게 묻는 자유의 의미도 맥락은 같다. 모든 소유는 결국 속박과 책임을 부른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노예인 오스발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한 이다. 모든 법을 무시하며 바람처럼 자유로울 듯한 자유호의 대해적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이 오히려 가장 막중한 책임을 지닌 이로서, 오스발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자꾸 책임을 지워주려 하는 동료(라지만 사실상의 부하인) 선장들을 떨쳐내려는 키 선장의 배에 악마 벌쳐가 찾아왔을 때, 그가 이를 드러낸 것 또한 당연할 것이다. 내 배에 냄새나는 악마가 탈 자리 따윈 없으니 꺼져. 그렇다. 우리 가정에도, 불민하고 잡스러운 상념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언제나 집 문을 열기 전에, 혹시 내가 바깥의 세균처럼 위험하고 피곤한 감정들을 묻혀 들어오는지는 않는지 늘 생각한다. 나는 내 딸이 스스로의 결심 없이 그저 집에서 묶여 살기를 원치 않는다. 언젠가 나는 아내와 딸과 함께 이사벨 아옌데를 다시 읽고 싶다. 딸이 앞으로 자신의 나이 많은 사자가 될 밥 잘하는 유진이처럼 요리의 세계에 흠뻑 빠져도 좋고, 타오 치엔이나 엘리사 소머스, 혹은 손녀 알바처럼 저를 찾아 방랑해도 좋으며, 혹은 이 아비가 다 이루지 못했던 공부나 무공의 세계에 몰두해도 좋을 터이다. 무엇이 되었든, 내 딸이 혹시나 오로지 쌉싸름한 인생만을 살아야 하는 띠따처럼 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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