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의 철학vs철학을.마치며
신필 김용 선생의 사조삼부곡을 관통하는 인물들, 동사 황약사와 서독 구양봉을 중심으로 새롭게 써내려간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은, 일반판과 감독판이 있는데, 관객들이 말하기를 일반판은 마치 시와도 같고, 감독판은 소설과도 같다고 했다. 설명이 많은 쪽도 적은 쪽도 각자의 매력이 있어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구별이 불분명한 명암, 어지럽게 휘둘리는 촬영의 중심, 원작 소설을 보았어도 성큼성큼 건너뛰거나 변주되는 서사들. 동사서독은, 어느 쪽이든, 관객에게 편하게 접근되는 영화는 아니다. 쉽게 다시 볼수 있는 영화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사서독은 많은 무협 애호가들에게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명작이란 그런 것이다.
어머님 살아 생전에 사주셨던 철학VS철학 신판까지 포함하여, 결혼 생활 시작 무렵부터 지금까지 읽어온 세월이, 소은이 나기 전부터 읽었을때부터 얼추 7년쯤 되었다. 구판본만 읽었던 총각 시절까지 합치면, 태권도처럼 십년세월에 가깝다. 철학VS철학 구판이 동사서독의 일반판이라면, 신판은 감독판에 비견할만하다. 신판에는 더 많은 철학자들이 들어갔고, 더 많은 설명이 보태졌다. 신판은 구판보다 좀 더 노골적인 가치 판단과 결론이 많지만, 구판은, 생략된 설명 사이로 은은하게 전해지는 맛이 있다. 물론 저자인 강신주 선생은 기본적으로, 명치께를 찔러오는 앞차부수기나 찌르기처럼 강렬하게 말하고 글을 쓰는 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철학을 전공했고, 오랫동안 읽어왔지만, 전체적으로 철학의 역사를 조망하는 시각을 아직도 기르지 못한 내 스스로가 늘 못내 아쉬웠다. 하기사 전문 연구자에게나 필요한 일이기는 하나, 나는 이상하게도 그렇게 아는 척을 하고 싶었나보다. 성경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고, 결국 전체적인 흐름을 알지 못하면, 개별적인 사건들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끌려간 바빌론으로부터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지으며, 애국심과 신앙심을 고취시키려 할때 왜 에스라는 이미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들을 강제로 이혼시키고 쫓아내기까지 했을까? 현대적인 시각으로 이 사건만 놓고 보자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제 결혼했다고 처자식을 한꺼번에 내쫓은 일과 같다. 왜 갑자기 회음후 한신은 나라의 존망을 건 싸움에서 모든 식량을 다 버리고, 도망도 못 치도록 강을 등지고 싸우는 전략을 택했을까? 왜 방연은 같은 동문의 어린 후배 손빈을 질투하여, 무릎의 슬개골을 다 도려내고 앉은뱅이 꼴로 만들어 죽이지도 않고 비참한 모습을 때때로 들여다보며 만족했을까? 앞뒤 이야기를 알지 못하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들일뿐이다.
단순히 그저 이러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 잘난척하기 위해서, 술자리 그럴듯한 이야기로나 쓰려고, 나는 스무살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잠 줄여가며, 읽고 썼을까? 물론 태권도 훈련과 마찬가지로 나를 가장 나답게, 스스로 만들고 지키고 싶어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올바른 신앙을 갖듯 끊임없이 공부하는 일, 특히 철학함의 목적은, 결국 타인과 함께 어울려 살기 위해서다. 말과 글이 필요한 이유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철학이란, 나와 전혀 다른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와 비록 다를지라도 결코 무의미하거나, 격하시키거나, 배척하지 않고, '우리' 의 범주 안에서, 그러나 전체주의의 독재로 일원화시키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어울려 함께 살기 위해서다. 맞서기 시합에 나갈때, 상대는 나와 전혀 다른 전략으로 움직여 예상할 수 없지만, 그와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 같은 규칙을 공유하기 때문에 비로소 손발을 주고 받아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철학함이란 이처럼, 누군가를 쫓아내지 않고 한 무대에서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태도를 기르는데 그 목적이 있다. 무공 또한 나를 이해하려 들지 않고 위협하는 타인이 없다면, 무엇하러 내 스스로 몸을 괴롭혀가며 끊임없이 훈련하겠는가?
작년 말부터 집에 여러가지 일이 있어, 매해 끝무렵에 읽어오던 철학VS철학을 읽기 시작한 때도 늦었고, 점점 아이는 커가고, 할 일은 많아져, 보통 아무리 늦어도 구정 무렵에는 다 읽게 되는데, 이번에는 제법 오래 걸려 겨우 2월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두 권을 다 읽었다. 성경도 그렇듯이, 철학VS철학도 읽을때만 늘 아, 그랬었지, 할뿐, 돌아서면 또 흐려지고 잊게 되어, 참으로 공부란 쉽지 않다. 단지 두 권 합쳐 거의 삼천여쪽에 육박하는 책의 분량을 그저 매해 반복해 읽는다고 손쉽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거라는건 잘 안다. 그렇게 치자면 난 11년째 태권도의 기술을 반복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수준 이상에 올라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저 사회체육을 하는 아저씨일뿐이다. 나의 학문과 무공은, 나의 말과 글처럼 얕고 가볍다. 다만 겨우 올해에도 다 읽었다는 점에 위안을 삼으려 한다. 태권도의 길처럼, 철학의 길도 끝을 알 수 없다. 애초에 끝이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