줏대 ㅡ 자신의 중심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심지.
춘추전국 말기에 널리 명성을 떨치던 네 명의 명문귀족 정치가들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F4...가 아니고, 일명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라 불리던 이들이다. 명문상 황제의 나라던 주나라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패자로서 왕초 노릇을 하던 제나라 및 기타 나라들이 걷잡을수없이 서로 싸우고 동맹하며 대혼란이 벌어지는 사이, 통일을 노리던 진나라가 급부상을 하니, 한치 앞을 알아볼수 없는 당시 중국에서, 각자의 제후국을 지키기 위한 실력자들의 노력 또한 대단하였다. 전근대사회에는 동양이 서양보다 훨씬 발전이 빨랐다지만, 그래도 중앙집권층에 각종 기예를 지닌 이들을 시험을 통해 등용하게 된 일은, 적어도 수나라 문제 때부터의 일이다. 그래서 부와 명예를 지닌 귀족가의 야심 있는 자제들은 식객- 이른바, 뛰어난 재주를 지닌 방랑자들을 아낌없이 수하에 들였고, 그들은 지금의 취업난처럼 이름 있는 귀족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각자의 학식, 무공, 예술적 소양까지 아낌없이 바쳤다. 도둑질 하는 사람과 닭 울음 소리 잘내는 사람까지 기꺼이 거둬 먹이고 재웠다가 훗날 큰 덕을 보았다는 맹상군의 계명구도(鷄鳴狗盜)의 일화는 이미 유명하며, 서양 중세의 귀족들이 기사 생도들을 후원한다거나 살롱에서 시 짓고 노래하고 악기 연주하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일 또한 이와 비슷하다 하겠다.
그증 제일로 꼽히는 맹상군은 그 식객의 수가 삼천명이 훨씬 넘었다고 하며, 그만큼 굵직한 여러 일화도 많이 남겼는데, 말 잘하기로 소문난 풍훤과의 일화도 들어줄만하다. 식객 풍훤은 보기에도 인물이 대단치 않고, 큰 재주는 없으나 말주변이 좋아서, 맹상군의 식객으로 들어앉아 그럭저럭 먹고 살고 있었는데, 맹상군이 지나갈때마다 칼을 두드리며 '장검아, 돌아가자꾸나! 식사에 고기반찬도 없구나, 타고다닐 마차도 없구나, 아무리 잘해줘도 내 집만은 못하구나!' 따위의 노래나 불러제껴서, 가장 좋은 숙소에서 지냈어도 큰 재주가 없어 맹상군의 빈축을 사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왕보다도 인기가 좋았던 맹상군이 한때 질투를 받아 백수로 지낼 때, 풍훤은 바로 그 화려한 언변을 펼쳐서 결국 맹상군을 더 높은 벼슬에 올려주기도 했고, 빚 받아 오라 보냈더니, 오히려 빚을 탕감해주고 잔치를 벌여서 맹상군의 인덕을 더 높이는 일을 해주기도 했다. 그냥 말만 번지르르한 위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맹상군이 백수로 지내다 풍훤의 도움으로 복직하고 더 높은 벼슬을 받게 되자, 뿔뿔이 흩어진 식객들은 다시 그 휘하로 모여들게 되었는데, 맹상군이 어지간히 속이 상했던지 볼멘 소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내가 이토록 힘들고 어려울때 저들은 제일 먼저 도망가놓고, 한 것없이 오로지 풍 선생의 구변으로 일이 잘 풀렸는데, 저들이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와 밥과 잘 곳을 구걸한단 말이오? 내 저들의 얼굴에 일일이 침을 뱉고 모욕을 주겠소.' 그러자 풍훤은 허리를 크게 굽혀 그에게 예를 표했는데, 이상하게 여긴 맹상군이 물었다. '어째서 선생이 내게 예를 표하십니까? 그들을 대신하여 비시는 것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나으리의 잘못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시장을 낮에 찾으면 파는 물건이 많고, 손님도 많아 활기가 있으니, 자연 사람이 많게 찾게 되나, 해가 다 진 밤에 시장을 찾는 이는 없습니다. 상인도 물건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으리께서 부와 권력을 갖고 계시니 식객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지사요, 그가 없을때 흩어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니, 나으리께서 그를 모르시고 화를 내시니 그에 대한 충언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옛 식객들을 옛날처럼 대해주십시오.' 염량세태(炎涼世態) 라는 말이 있다. 더웠다 추웠다 할때마다 달라지는게 세상 인심이라는 뜻이다. 혓바닥 하나로 천하를 주유하며 살아오던 논객 풍훤은, 세상 인심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기사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인데, 눈치 없으면 끝장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다. 권력은 십 년을 가지 못하고,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이다. 요식업계를 주무르며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던 유명 요식업계 사장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데, 똑같은 인물, 똑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꿔 이제는 그가 잘못했다고 한다. 불과 몇 달전만 해도 뭐든지 그가 하는 말, 그가 만드는 맛이 옳다며 찬양일색이던 대중들이었다. 젊은 연기파 배우로 각광받던 소녀가 비참하게 죽기까지,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었고, 다시 그녀의 사생활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엮인 남자 배우가 또 눈물을 쏟게 되었다. 잘잘못을 떠나서, 제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사랑을 받는 직업이라 한들, 자본과 대중의 비위를 맞추며 먹고 사는 직업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 눈 밖에 나면 순식간에 몰락하고, 입방아에 오르내리다, 잊히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이제 정치권도 마찬가지인지, 우리 나라는 이제 탄핵도 두번이나 되어, 세계 명실상부한 (탄)핵보유국이 되었다. 안 그래도 오늘 출근 전, 서로 신나게 치고받고 맞서기 잘한 칠레 가비가, 나더러 제 전화기의 잇따른 알림을 보여주었다. '푸사폼님, 이거 뭐라는 거예요? 왜 이러케 말 많아요?' '어..이건 화재 조심. Watch your fire and dried air. 이건, 어 음. 대통령 파면.. Today President is fired. So, many people will be going to big strike. 그래서 사람 조심.' '아..그러쿠나. 대통령, 오늘 ..짤렸어요?' '어, 그래, 짤렸다.' 나는 픽 웃고 말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이 무슨 의도를 가졌건, 어떤 정치적 성향이건 간에, 계엄을 함부로 내린 일은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나라는 대졸자가 많고, 높은 교육수준을 지닌 나라다. 설사 겪지 않았어도 계엄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지, 우리는 사회적 교육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제아무리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들(있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계엄을 통해 이를 이뤄도 된다는 사회적 선례가 있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해결을 위해 어떤 수단을 써버려도 나중에는 용서받는, 기묘한 관용의 사회에서 살게 될 터이다. 나는 지금의 탄핵 허용이 결국 그런 뜻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다음 혼란스러운 대선이 썩 달갑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기를 쓰고 자신들이 정의라고 날뛸, 오로지 그러한 감성적 자극 이외에는 지금까지 어떠한 대안이나 방향도 제시하지 못한 현재의 야당도 솔직히 꼴보기 싫어 배알이 꼴린다.
결국 모두 이득을 위해 움직인다. 자신이 배운 모든 무공과 학식과 전략을, 오로지 대륙의 평화를 위해 아낌없이 바쳤던 묵자 역시, 정작 목숨 바쳐 지켰던 송나라 어느 아낙에게 우산 하나 빌리지 못해 표표히 산으로 떠나가 사라져버렸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근데 그 기록은 누가 남겼을까? 우산 안 빌려준 여사님이 남기진 않았을 거고, 옆에 누가 있었나??) 세상에서 멀찍이 떨어져서야 얼마든지, 의로움이 중요하고, 명예가 더 필요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속세에서 하루 벌어먹고 살기만 해도, 무엇보다 돈이 좋고 편하다는 말이 절로 입 밖에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돈을 벌려고 기를 쓰다보면, 가끔 가지 말아야할 방향으로도 가고, 팔지 말아야할 것도 팔아버리는 지경까지도 이르게 된다.
그저 평온하고 행복하게만 살다 갈것 같으면, 공부도 하지 않고, 교류도 없이, 그냥 복지 제도 잘된 어느 사회에서,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혀, 배달음식이나 시켜먹고, 유튜브 보고, 게임이나 하며, 일생을 그렇게 살다 가도 누가 뭐라하지는 않을 터이다. 그렇게 살다간 사람이 있었는지 알지도, 기억도 못할텐데, 뭐라할 사람이 있을지나 의문이다. 우리가 그런 삶을 지양하는 이유는, 인간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먹고, 자고, 유행을 소비하다 사는 삶은, 짐승의 삶이자, 자본이 소비자를 길들이는 방식이다. 외적인 대상을 가장 흡사하게 구현하는 중세 예술을 지나,사진과 영상의 시대를 거쳐, 현대 예술은 이제, 현실의 재현보다, 얼마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의미를 담는지를 중요하게 본다. 현실을 되돌아보려면, 일단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탈자본주의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이야기들이 다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현대 예술은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기행도 손쉽게 저지른다. 평온한 틀에서 안주하여 소비하고 다시 노동하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으로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회사 다니고, 처자식 돌보며, 남는 시간 태권도하고 책 읽는, 평범함에도 약간 못 미치는, 초라한 아저씨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삶을 온전히 쏟을 주춧돌을 어느 정도 찾아냈다 생각한다. 일찍이 그 유명한 이지 탁오는, 마흔 전의 스스로는 물에 비친 달을 보고 짖는 개와 같았다 했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치 않고, 남들 하라는대로 여기 휩쓸려 욕하고, 저기 휩쓸려 짖고 다녔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신의 뜻을 지니고 사는 생물이다. 동물도 제 본위를 위해서는 본능을 억누를 줄 안다. 만물의 영장이 자꾸 제 생계를 위한 인기를 얻고자 스스로 짐승의 삶으로 전락하려 하는 시대다. 우리는, 두 발로 걷는 개의 시대에 산다. 그러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버둥친다. 내가 예전에 그렇게 살아서, 지금도 그렇게 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