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읽기로 잠겨드는 밤.
원래 어렸을 때 내가 생각하던 내 어른의 모습은, 마치 책 읽다 눈 멀었다는 어느 도서관장 보르헤스나, 코르크 마개 가득한 방에서 스스로 두문불출 글 썼다는 프루스트나, 혹은 철문 걸어잠그고 그 좋아하는 술도 마다한 채 언 밥 씹어먹으며 원고지 채웠다는 젊은 외수 선생님처럼 글에 절여져, 시 읊고 소설 쓰고 노래하는,.마치 백현진, 김창완 선생이나 미스타 레너드.코헨 같은 그런 이였다. 물론 내 호구하는 생업은 비록 제조나 생산, 가공 등에 직접 관여치는 아니하나 그 나고 자람과 원리를 깨닫고, 중간 과정을 점검하며 때로는 누군가를 옛 훈장질 했던 때처럼 가르치기도 하고, 또 구매자들에게 직접.알려주기도 하는데, 서류 쓰고 전자우편 주고받는 이 모든 업무의 씨줄 날줄에 언어가 얽혀 있으니, 결국.내 삶은 어찌 되었든, 내가 예상한 방향은 아니라도, 언어 자체를 실제로 다루는 범위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처럼 내가 쓰는 말과 글이, 실제 지시적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여, 서류 건너편 생면부지의 국내외인이나, 또 이미 잘 아는 누군가의 이해를 돕고 있는지 실감할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글을 책의 형태로 출판하는 일보다도 더 생동감있게 언어를 포착하는 일이리라는 생각도 든다. 이는 마치 때때로 주말마다 만나는 아내와 급하게 전화통화한 내용을 비로소 찬찬히 서로의 이해도를 확인하는 일처럼 낭만적이기도 하고, 틀 연무나 헤비백을 치며 대략 용도를 예측하던 타격의 기술이 실제 상대와의 맞서기나 불의의 상황에서 어떻게 위력을 발휘하는지 체감하듯 현실적이기도 하다.
하여간 아버지의 사랑받던 막내 아들에서 노예, 불륜.누명, 죄수를.거쳐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이나,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때 세 번이나 스승을 부정했음에도 초대 교황으로까지 추앙받는 반석 베드로, 꼭 성경이 아니더라도 무릎속 연골을 도려낸 앉은뱅이 신세에서도 명전략을 펼친 손빈이나, 시장 깡패 다리 사이 기어서라도 출세했던 한신,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까지 몸에 품어 데우고 변소 청소, 바늘 장사도 자처했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제가 꿈꾸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 사내들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밤새 읊어댈수도 있거니와 학창 시절 팔굽혀펴기, 철봉은 고사하고 축구공 차려다 되려 공 밟고 자빠져 꼬리뼈나 깨지던 내가 이십년 넘어 마흔 되도록 피땀나게 치고받는 무공의 취미로 내 존재감의 한 축을 입증하게 되는 삶의 흐름이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고 오묘하다.
그러나 내 본질은 꼭 하나 고르라면 역시 말과 글에 있다. 검은 띠를 매었으니 설사 곰배팔이 앉은뱅이 되어 손끝발끝 까딱만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기술 하나라도 집중할 각오다. 그러나 끝내 몸이 무르고 무너져 무공을 더이상 할수 없어도 읽고 쓰기만은, 마지막까지 유지할 각오가 더 먼저고, 훨씬 오래되었고, 깊은 뿌리로 박히었다. 그러므로 정신이 맑게 돌아오고 몸에 아직 힘이 남으니 책을 읽다 잔다. 바깥 밤은 때때로 번개가 소리없이 번쩍여 낮을 연상케 한다. 비는 아직 오지 않는다. 아니, 실은 이미 아침부터 내 발목, 무릎에는 계속 머물러 있었다. 아니, 어느 틈에 천둥 뒤잇너니 달군 판 위로 깨 튀듯 밤빗소리 그새 요란하다. 책 속 세계만이 천연덕스레 젖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