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가 말했다. 군주민수(君舟民水).
훈련을 게을리하는 몸은 하루하루 약해져가지만, 딸이 용을 쓰다 잠에서 깨어 투정할 때는 꼭 어깨로 온 몸을 받쳐 안아주고, 손으로는 등을 쓸어주며, 마치 택견의 품을 밟거나 런지하듯이 위아래로 굼실굼실하며 한참을 돌아다녀야 하므로, 그것만으로 이미 허벅지가 땡땡 붓고 잔등에 땀이 다 솟는다. 그러므로 핑계삼아 책까지 아니 읽을 수는 없어, 아내가 먼저 잠드는 밤 아홉시부터 자정까지, 수유등 켜놓고 세계사편력 몇 줄이라도 읽는 요즘이다. 요즘 유일하게 만나는 타인들이란, 회사의 형님 누님들 뿐인데, 눈 붙이기도 바쁠텐데 뭔 책을 읽느냐며 야단들이시라, 세계사편력의 연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드렸더니, 또 역시 병문 씨라고, 의미 있는 책이라고 한 마디씩 남기고 가신다. 조영래 변호사도, 바우 황대권 선생도, 이탁오도, 안토니오 그람시도, 자와할랄 네루도, 모두 머리에 세상의 한자락씩 넣어두고 다니신 분들이라, 능히 감옥 속에서도 집필이 가능했겠지만 나야 그런 재주가 없으니 잠이라도 깎아가며 읽는 것이다. 여하튼 아내의 출산 무렵에 읽었던 코스모스와, 아이를 키우며 읽는 세계사편력은, 내 불민한 독서 경력에 그나마 좋은 술안주거리가 되지 싶다.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혁명주의자고, 또한 노동자 중심의 강력한 인민혁명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네루는 어찌 보면 인도의 김구 선생이라고도 할법하다. 혹자는 네루의 독립 운동 역시 그 스스로 인도의 케네디가 되는데 그쳤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중요한건 그가 딸에게 무려 3편의 편지를 할애하며 프랑스 혁명 전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맑스의 유물론적 사관에 대해 강력한 애정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베버나 헤겔이 말하듯이, 그 시대를 좌우하는 시대정신에 의해 역사가 움직인다는 의견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허황된 얘기처럼 들린다. 맹자나 순자가 지적하듯이 '리(利)를 추구하는 소인' 으로 가득한 요즘,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움직인다는, 맑스의 명료한 역사관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폭발적인 혁명의 원동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콜레라 시대보다 더욱 낭만이 없어 메마른 코로나 시대에서, 과연 우린 얼마나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지금 정부에 표를 준 이로서,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만 한정지어 말하겠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사태는 무엇보다 '조국 사건' 이었다. 예전부터 나는 대체 왜 우리 나라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진보/보수 로 나누어 규정짓기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국 사건은 결국 어느 정당의 정치인들이든 그 한계가 명확하며,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굽시니스트 김선웅이 인용하듯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이미 소위 '민주적 좌파' 들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혹사시켜야만 한다는 평이 있었고, '우파 자녀는 당당히 미국 유학 가고, 좌파 자녀는 몰래 미국 유학 간다' 라는 조롱도 있던 때였으나, 조국 사건처럼 이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 사건은 없었을 터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실망했으며, 나 역시 그렇다. 진중권 선생의 배신이네, 혹은 지나치게 옹색하고 졸렬한 수사였네, 하는 것은 스스로의 진영을 지키고자 하는 두번째, 세번째 이야기다.
따라서 코로나는 사실상, 이 희망없는 한계적 상황에 봉착한 이 나라 사람들에게 그저 기폭제가 되었을 뿐이다. 흔히 표류물이나 재난물에서, 더이상 구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군중들은 그 순간 무규범 상태에 빠져 주인공을 괴롭히는 욕망의 좀비가 되듯이, 많은 이들이 그렇게 행동했다. 마스크를 사재기했고, 약을 속여 팔았으며, 절망에 빠져 살려달라고 폭력을 휘둘렀다. 많은 자영업자들이 줄지어 문을 닫았고, 또 어떤 업계는 호황을 이루었으며, 재계에서부터 교육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혼란이 더욱 사람들을 어지럽게 했다. 덧붙여 코로나와는 큰 관련이 없지만, 비인간적인 성적 착취가 드러났고, 비인간적으로 자라난 아이들이 사람을 죽였는데도 반성하지 아니하였다. 김훈이 소설에서 옮겨쓴 난중일기처럼, 세상은 말 그대로 난세였다.
일찍이 이 나라는 이른바 폭설대란으로 교통이 마비되며, 교통 체계가 기후 변화에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낸 적이 있다. 지금은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코로나 방역 및 유지를 잘 해내는 나라가 되었으나 그 역시 메르스 사태의 경험 덕분이라는 평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발 하라리 같은 저명한 역사학자가 두 번 다시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며 '뉴 노멀New normal' 에 적응해야 한다 할 정도로, 코로나는 전세계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미셸 푸꼬가 단언한, 이른바 '감시와 처벌' 로 대두되는 사회적 정비 체계가 무력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N번방 사건과 무면허 중학생 차량 사고에서, 사람들이 공분하며 더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이유는, 흔들리는 배에 탄 사람들의 불안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공부자께서는 이미 오래 전, 논어 위정 편에서 이러한 사태에 대해 말씀을 남기신 적이 있다. '백성을 정치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벌을 피하는데 급급하여 부끄러움도 모르게 된다. 그러나 덕으로 다스리고, 예로써 이끌면, 능히 잘못을 꺠닫고 스스로 부끄러워 삼간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므로 누구나 한두번쯤은 읽고 들음직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력한 통일제국 진나라의 사상적 기틀은 그 유명한 순자의 제자들이 세운 법가였고, 지금도 우리 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서양 근대법을 기초로 한 법가적 체계에 놓여 있다. 즉, 이제 사람들은 무엇보다 법을 우선시한다. 누구나 법을 입에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딨어? 법이 이래서야 되겠나. 이건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거든요. 즉, 스스로의 양심과 판단을 모두 법에게 맡겨버리는 꼴이다. 그러면서 왜 법을 빨리 개정하지 않는지, 왜 더 강력하고 세밀한 법이 나오지 않는지, 분을 끓이며 야단한다.
물론 이상적인 얘기라는 사실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나 역시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더이상 정당 정치라거나, 혹은 인민 모두가 함께 하는 혁명의 꿈 같은 것은 신뢰하지 않은지 오래다. 이제는 더 이상 조지 오웰처럼 한 자루 기관총을 메고 남국의 뜨거운 혁명을 위해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던 시절이 아니다. 사람들은 지치고 잘아져서, 혼자의 삶을 버텨내기에도 바쁘고, 더군다나 굳이 상처를 감수해가며 사람을 상대하고, 어렵게 사랑하기엔, 그저 돈으로 간편히 해결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이른바 인스턴트의 시대에서, 감히 막스 베버가 찬탄한 시대 정신 따위를 말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며,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미디어에 스스로를 맡기는 편이 훨씬 재미있고 편하다.
나는 내가 그렇듯, 내 딸이 좀 촌스럽길 바란다. 컴퓨터나 휴대전화보다는, 아비와 함께 도장에 가서 몸을 직접 쓰고, 산과 강에도 다녀보고, 흙도 좀 만져보고, 영상으로 배우기보다 직접 읽고 쓰고 외워보길 바란다. 눈만 끔뻑하면 굳이 외우지 않아도 무한한 정보의 바다에 접속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일부러 뒤떨어지게끔 하려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범위와 도리를 지녀야, 이 시대에 묻히지 아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인간의 몸을 약하게 할뿐 아니라, 그 정신의 빈한함까지도 드러나게 만들었다. 이제는 법에 따라 누구도 손해보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 한 대 맞으면 열 대 때려줘야 하고, 눈물 나면 상대는 피눈물이 흘러야 한다. 이 것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도리다. 그러므로 공부자께서는 자신의 사상을 이어받은 증삼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사상을 요약하는 단 한 글자를, 인의예지신 이 아니라 오직 하나 서(恕)라고 하셨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용서를 뜻하는 글자다. 용서란, 결국 너와 나의 마음(心)이 같음(如)을 헤아리겠다는 태도다. 너도 나처럼 사람이었구나, 너 이 새끼, 너도 알고보니 좋은 놈이었구나, 하는 그런 마음.
안타깝게도 이런 마음은, 법에는 없다. 그래서 공부자께서도 역시 평생 관직을 얻고자 삼천명의 제자들과 천하주유하며, 사회를 정비하고자 애쓴 관료였지만, 그가 제자들에게도 평생 가르쳤듯, 그가 진정 꿈꾸는 사회 구성원들은, 그 스스로 공부와 단련에 힘쓰는 깨인 자- 즉 선비였다. 공부자께서 마련한 공부의 6가지 과정, 즉 육예(六藝)는, 전차 몰고 활 쏘는 무공을 비롯하여, 글을 쓰고 숫자를 셈하는 행정 실무, 예절과 음악을 주관하는 정치적 역량 등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는 결국 사회적 체제도 좋지만, 개인 스스로가 이렇게 깨이지 아니하면 춘추전국의 종언은 어렵다고 생각하셨을 터이다.
그로부터 천여년이 넘게 흘러, 대의민주주의 체제가 실행되는 요즘, 외식도 공연도 축제도 교육도 다 중단되는 이 마당에 선거는 하겠다고 정치인들은 또 마치 강형욱의 강아지마냥 전국에 마스크를 쓰고 귀엽게 방긋방긋 돌아다니신다. 정치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며 상대를 공박하지만, 국민을 두려워할리가 없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성대인 상 2회 연속 수상에 빛나는 우리 선배님 다 좋으니까 제발 좀 말끝마다 '국민의 지엄한 명령을 받들어' 이런 말 좀 진짜 안하셨으면 좋겠다.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청와대 청원 시스템에 부작용은 많지만, IT강국으로 꼽히는 우리 나라에서 사실 조금만 보완한다면 직접 민주주의도 불가능하지는 않겠다는 생각까지 들곤 한다. 맑스는 일찍이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노동자 스스로가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동자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 노동자 천국을 만들기보다, 출세하여 자본가가 되겠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한나라 시절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과거에 급제한 이들도 역시 한때는 청운의 꿈을 품었으나 입궐하여 관료가 되면서 그들 역시 권력 사회의 주춧돌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이 국민의 대의를 실행치 아니하고, 자신의 욕망에 푹 빠져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실망조차 들지 않는다. 그래도 이 나라 국민들은, 정치는 늘 차악을 선택하는 길이라며, 꾸역꾸역 투표를 하러 나간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아내는 진작부터 아이 잔 뒤에는, 이 동네는 내가 처음 살아보는 곳이라 어떤 후보를 뽑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집으로 배달된 공약 우편물들을 꼼꼼히 훑어보고 계신다. 역시 나랏밥은 아무나 먹는게 아니구나, 아내를 보며 내가 속으로 감탄한 적이 있다. 언제 한번 케빈 코스트너의 스윙 보트, 나 함께 봐야겠다.
공부자 사후, 두 수제자는 미묘하게 노선이 갈라졌다. 맹자는, 인간에게는 선의 단초가 있으니 교육을 통해 그를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순자는, 인간은 본디 욕망이 넘쳐 과해질 수 있으니 늘 교육으로 그를 단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론이 같은만큼, 두 유자(儒子)의 정치관 또한 크게 다르지 아니하였다. 순자는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니, 그 뜨고 가라앉음이 모두 물에 달려 있다고 꼬집었다. 맹자는 양혜왕과의 대담에서도 세 번이나 왕을 비꼰다. 친구 중 가족은 굶기면서 저는 밖에 놀러나가 실컷 배불리 먹고 돌아오는 이가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당연히 절교해야지요, 그렇다면 그런 정승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당연히 파면해야지요. 여기까지 밑밥을 던진 맹자는 왕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렇다면 그러한 왕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한때 그래도 측은지심이 있다고 평가받은 양혜왕이었기 때문인지, 그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아 넌지시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고 하는데, 내가 진짜 무슨 대단한 선생도 아니고, 많이 안 바란다. 한 명의 젊은 아비이자, 어설픈 남편으로서, 진짜 선거를 앞두고, 반만큼만 정치인들이 부끄러움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말이 너무 길었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