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처자식이 처가에 갔다.

by Aner병문

아내는 결혼하고 3년간 생가에, 딸은 한번도 아직 외가에 가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해를 움켜잡을 듯 바다에 우뚝 선 포항이 처가이니 연말연시 명절마다 고속열차 표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코로나가 우리 가족의 발목을 잡았다. 오죽하면 처음으로 태어난 외손녀인데도 장인장모께서는 백일 되던 날에 반나절 당일로 올라오시어 겨우 아이 한번 안아보셨을 뿐, 그 외에는 오로지 IT 강국의 영상통화로 겨우 그리움을 달래시었다. 그러므로 아내는 3년간 열심히 홀로 결혼생활 하고 또 아이를 여덟 달 동안 키우다가 더는 안되겠다 싶었던지 처가행을 결정하였다. 정말 장담하지만, 내가 뭘 잘못해서 가 아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아무 혈연없이 혼자 안양살이를 하는 아내가 안쓰러우셨던지 처자식이 2주간 처가에 머물러 있는 동안 경상도 방방곡곡 산이나 도시겠다며 등산복을 챙겨 함께 하시었다. 결과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이긴 했는데, 아기 하나 움직이면 집 한 채가 움직여야 한다더니 과연 추리고 추려도 2주 살림이 못해도 집 반 채는 거뜬히 될 듯 하였다. 도저히 자동차가 없으면 엄두조차 못 낼 처가행이었다.



이러구러 처자식을 벌여먹어야 남편이자 아비로서 나는 사위 사랑 듬뿍 주시는 처가에서 밥 두 끼 거하게 먹고 나서 당일치기로 다시 올라왔다. 처자식이 없어 휑한 집 안을 혼자 정리하던 2주 전 토요일 밤 씁쓸한 웃음이 났다. 나는 결혼하고 나서 아내와 나의 직장이 서로 달라 딸이 찾아올때까지 1년이 넘게 주말부부 생활을 했다. 그때도 먼저 결혼하신 도장 사형이나 사저들, 혹은 교회 식구들이나 기타 직장 지인들께서는 신혼부터 주말부부라니 이게 대체 웬 복이냐며 놀리기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주말부부 시절이나 처자식의 처가행 시절이나 사실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아니, 오히려 하루 3시간씩 자며 아침 어학원 1시간과 8시간 근무, 그리고 퇴근 후의 도장 생활을 이어나갔다. 쉬는 날에는 앞서 말했듯 여우 기다리는 어린왕자마냥 술 약속에 몸이 달아 벌떡 일어나 또 도장 갔다가 책 읽다가 낮잠도 한 숨 거의 못 자고 술 마시러 나가기 일쑤였다. 물론 그 사이에는 곧 있을 온라인 태권도 대회 준비도 있었다. 여하튼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에 설사 내가 아내 없이 뭘 좀 놀아보자 싶었던들 그런 시간조차 없었을 터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아내도 아이도 내 삶에는 원래 없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있고 나니 다시는 아내가 없는 생활을 생각하고 싶지 아니하였고, 부부가 함께 낳아 기르는 아이로 말하자면 생각이 더하다. 너는 곧 다음주부터 다시 일을 시작한다며 내게 또 한 번 찾아왔는데, 진위는 알 수 없으나 공자의 후손들께서 계속해서 대물림하여 빚는다는 공부가주 2병에 소주로 입가심하던 내가 아내가 보낸 동영상으로 아이를 그리워하자, 아이고, 그렇게 좋아, 대체? 하며 깔깔 웃었다. 대저 남편이자 아비란 그런 것이다. 나는 언제나 적막하고 싸늘한 방에서 혼자 일어나 혼자 아침을 챙겨먹고 빈 그릇을 물에 불려둔 채 어학원과 도장으로 향하고, 바깥 생활의 피로를 흘리며 다시 아침의 흔적이 생생히 새겨진 집으로 돌아온다. 단순히 집을 지키는 가사노동자로서의 아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이 모두에게 동일한 운명이자 죄과라면, 마땅히 가사노동 또한 가정을 꾸리는 모든 일원들의 것이어야 한다. 내 자녀들이 더 성장하게 된다면 마땅히 그들이 겪을 가장 첫번째의 공동체인 가정에서, 앞으로 학교와 도장, 교회에서 역시 짊어져야할 책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몫을 져나가야 될 터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루 3시간의 잠을 기다리며 아침에 놓아둔 살림을 정리하는 늦은 밤의 시간에서, 비로소 그 정체를 알았다. 내 삶의 곳곳에 어지러이 놓아진 그 것은, 역시 외로움과 그리움이었다.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아무리 술을 마셔도, 무엇을 읽거나 쓰거나, 아무리 도복을 입고 땀을 흘려도 늘 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외로움과 그리움이었다. 처자식이 있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그 크기를 비교적 가늠하여 또다시 너였구나 찬탄할 뿐이다.



마치 안양의 최수종인양 몇 자 적었으나 사실은 몸은 편히 잘 있었다. 물론 아내는 자주 연락해왔지만, 그래도 집에 기다리는 이를 생각치 않고 어학원에 있거나 도장에 있거나 벗들과 술을 마실 수 있는 낙은 귀중한 것이었다. 장인장모께서는 일전에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시었다. 참말로, 우리 사위는 남자치곤 영 안 노는 사람인기라, 술 좋아하는 거 빼면은 뭐 늘상 도장 아이모 책이나 읽으이까네 뭐 걱정할게 있겠나. 물론 아내를 포함한 처가 식구들은 내가 삶의 범위를 그만큼 줄여나가 행복을 찾을때까지 얼마나 많은 허세와 상처가 있었는지 미처 알지 못하시지만, 구태여 아실 필요도 없다. 다만, 나는 아주 짧았던 연인 시절, 늘 전화하던 그 밤처럼 아내가 자주 전화할때마다, 생각보다 여보야 없는 처가가 이렇게 적막할 줄 몰랐다고, 여보야가 어느 틈에 내 맘 속에 이래 크게 들어와있었지러, 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에서, 부부가 저 달을 같이 보는 지점 어딘가에 함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괜시리 목이 메었었다. 그때도 나는 술을 마시고 있었던가, 아니 마시고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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